+ 첫눈 오는 날 우리 만나자
첫눈 첫사랑 첫 키스 첫 경험
처음만큼 설레는 것도 없다
눈 내리는 고요한 이 밤
첫눈 올 때 우리 만나자는
희미한 옛날의 약속 떠올리고
첫사랑의 그녀를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보고
첫 키스의 달콤하고 황홀한 솜사탕을
다시 핥아 본다
첫눈 오는 날 우리 만나자는 그 약속
아직도 유효한지
달려가고만 싶은 소년의 마음
설레는 첫사랑의 추억.
(이문조·시인)
+ 첫눈
첫눈을 맞으며
마냥 좋아 날뛰던
그 시절 추억도
이제는 희미한 그림자로
황혼이 내려앉아
찬바람에 뼈가 시린
수척한 나그네는
눈이 와도 감격이 없다.
가로등 언저리에
벌떼처럼 나는
순백의 눈발을 볼 때
그녀를 떠올리며
가슴 설레던
심장의 고동소리 대신
이제는 눈길을 걸으며
숨이 찰 뿐이다.
(박인걸·목사 시인)
첫눈 / 정연복
언제인지는 몰라도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이니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새끼손가락 걸어 약속했던
첫사랑은
눈물겹게 아름다웠다.
세월이 가면
이윽고 꽃이 필 것을 믿듯이
손꼽아 기다리다 보면
마침내 그 날이 올 줄 믿으며
첫눈 내리기를 소망했던
첫사랑은 티없이 순수했다.
어서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어도
목마른 그리움
차곡차곡 가슴에 쌓으며
첫눈을 간절히 기대했던
첫사랑은 힘들어도 행복했다.
(정연복·시인, 1957-)
+ 첫눈 생각
입김만으로도 따뜻할 수 있다면 좋겠다.
기다리는 눈은 안 오고 손가락만 시린 밤
네 가슴속으로 내려가
너를 깨울 수만 있다면 나는
더 깊은 곳 어디라도 내려갈 수 있다.
종소리에 놀란 네가 잠에서 깨고
잠옷바람으로 언뜻 창 밖을 내다볼 때
첫눈 되어 내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반색하며 기뻐하는 너를 위해
이 세상 어디라도 쌓일 수만 있다면 좋겠다.
햇빛에 녹지 않는 응달이 되어
오래도록 네 눈길 끌었으면 좋겠다.
(김재진·시인, 1955-)
첫눈 / 이정하
아무도 없는 뒤를 자꾸만 쳐다보는 것은
혹시나 네가 거기 서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그러나 너는 아무데도 없었다
낙엽이 질 때쯤 나는 너를 잊고 있었다
색 바랜 사진처럼 까맣게 너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첫눈이 내리는 지금,
소복소복 내리는 눈처럼
너의 생각이 싸아하니 떠오르는 것은
어쩐 일일까
그토록 못 잊어 하다가
거짓말처럼 너를 잊고 있었는데
첫눈이 내린 지금,
자꾸만 휑하니 비어 오는 내 마음에
함박눈이 쌓이듯 네가 쌓이고 있었다.
+ 첫눈
오늘 온 눈은
첫눈
반가운 함박눈
마당에 두 줄
표주박 무늬
친구 부르러 나간
아기 발자국
우물가에 흐트러진
은행잎 무늬
뜨물 마시고 들어간
오리 발자국
(이문구·시인, 1941-2003)
+ 첫눈 온 날이면
첫눈이 오고
해맑은 순이의 눈처럼
아침이 밝아
뽀득뽀득 뽀드득
사박 뽀드득
수줍음으로 내딛는 백두대간의 첫 발자국
파르르 가슴 떨리는
열여덟 순이가
처음 밟아 보는
그리움의 소리
(권경업·산악인 시인, 경북 안동 출생)
+ 첫눈 내리는 날
낙원동 국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밥알 같은 흰 눈이 유리창에 달라붙는다.
흰 눈 같은 밥알이 허기 속으로 사라진다.
아가, 배고프자. 사르르 추억의 문을 열고
어머니가 고봉밥 한 상 가득 내오신다.
(이재봉·시인, 1945-)
+ 첫눈 오는 날
남한테 비굴하게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첫눈이 내릴 때
첫눈한테는 무릎을 꿇어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
첫눈 오는 날
길 잃어 쓰러진 강아지를 품에 안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정호승·시인, 1950-)
첫눈 / 김경미
마침내 그대편지가 오고 천천히 밖으로 나선다
하늘이 낮고 흐리고 어둑하니 자꾸 뒤돌아본다
무엇을 하고 싶은대로 다했고 무엇을 못했을까
뱀의 머리위를 지나듯 살라 했건만
낙엽밟듯 살아왔을까
선한 눈빛이 가장 깊은 것인줄 이제야 알겠거니
너무 많이 화를 내거나 울어왔던가
생각할수록 시간이여 미안하다 미안하다는데
창밖으로 문득 첫눈 쏟아지네
희디 흰 형광가루들 순간 점등되는 지상
낮고 흐린 하늘이 떨어지면서 저리 환한 눈송이
되는 이치를 아무래도 그대와 걸으며 생각하노라면
첫눈 밟듯 살다보면
삶은 거저 내준 게 처음부터
너무 많았다고 따뜻한 눈물 글썽여지리라
귀로 듣는 눈 / 문성해
눈이 온다
시장 좌판 위 오래된 천막처럼 축 내려 앉은 하늘
허드레 눈이 시장 사람들처럼 왁자하게 온다
쳐내도 쳐내도 달려드는 무리들에 섞여
질긴 몸뚱이 하나 혀처럼
옷에 달라붙는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실밥을 따라 떨어진다
그것은 눈송이 하나가 내게 하고 싶은 말
길바닥에 하고 싶은 말들이 흥건하다
행인 하나 쿵, 하고 미끄러진다
일어선 그가 다시 귀 기울이는
자세로 걸어간다
소나무 위에 얹혀 있던 커다란 말씀 하나가
철퍼덕, 길바닥에 떨어진다
뒤돌아보는 개의 눈빛이
무언가 읽었다는 듯 한참 깊어 있다
개털 위에도 나무에도 지붕에도
하얀 이야기들이 쌓여있다
까만 머리통의 사람들만 그것을
털어내느라 분주하다
길바닥에 흥건하게 버려진 말들이
시커멓게 뭉개져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그것이 다시 오기까지 우리는
얼마를 더 그리워해야 하나
눈 내린 날의 첫 줄 / 문인수
비쩍 마른 검둥개 한 마리가 잰걸음으로 지나간다.
네 발바닥,
뜨고 닿는 동작이 순서대로 다닥다닥 바쁘다.
꽃 자국 나는 바닥과 병뚜껑 따는 것
같은 허공이 지금
일직선으로 길게 달라붙는 중이다.
브라더미싱.
어머니 재봉틀 소리 멀어져가는 것 같다.
저 개, 방향을 꺾어 이번엔 또
가로로 자를 댄 듯
내 눈썹 위를 오래 긋는다.
지평선에도 박음질 자국이 만져질까,
나는 자꾸
멀쩡한 데를 공연히 스스로
봉하는 것 아니냐. 하긴,
상처 아닌 행로가 어디 있을까.
날지 못하는 흰 날개, 양쪽 경치는
그저 차디차다. 어딜 가나
벗어재낄 수 없는 틈바구니,
이것이 길이다. 나는 무심코
저 개를 한참 밀고 있구나.
이쪽저쪽 끌어다 붙여 마음이 모처럼
광활한 아침이다. 무수히 꿰맨 흉터,
여기서는 안 보이는 곳으로
환하게 빠져나갈 것이다.
사랑한다사랑한다사랑한다는 말,
개 한 마리가 첫 줄 타자처럼 새까맣게 지나간다.
눈 내리는 날 / 정진규
눈 내리는 날, 거기가 어디였지?
밖에서 그에게 전화를 거네
이 한마디만으로도
우리들의 대화는 통하네
길이 열리네 나는 알면서도
다시 묻네 거기가 어디였지?
내 털실 목도리를 뜨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만 코가 빠졌다고 다시
풀어야겠다고 그는 말하고
나는 너무 아름답고 깊어서
다시 감탄사를 쓰고 싶었다고 그래서였다고
그걸로 털실 코를 다시 꿰어보라고 말하네
눈 내리는 날, 운악산 조공마을 외길,
시오리 숲길 거길 지금 가보자고
지금 떠나자고 나는 다시 말하네
들키고 싶지 않은 길,
누가 먼저 발자국을 내면
어쩌겠느냐고 나는 말하네
그는 또 코가 빠졌다고
다시 풀어야겠다고 말하고
나는 당신을 위해 사둔 속옷과 향수를
오늘 드리겠다고 그
걸로 코를 다시 꿰어보라고 말하네
눈 내리는 날, 거기가 어디였지?
밖에서 그에게 전화를
첫눈 / 김수목
깨어진 얼음덩이가
풍덩거리는 저수지 위를
얼음조각만 밟고
통통 뛰어 건너편 산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고라니를 보았다
순간처럼,
빠르게 물수제비를 뜨듯,
가볍게 몸을 날려
저수지를 건넜던 것이다
저렇듯 가벼운 몸짓으로
내 마음속에 첫눈이 내린다
하늘의 공기방울을 밟으며
내 마음을 통통 가로질러 온다
첫눈 오는 날 / 양전형
초등학교 운동장
여자아이 여럿
발을 동동거리며 손가락에
입김을 불어내고 있다
아이들 입에서 나오는 하얀 나비들이
이리저리 날아 다닌다
세상이 하얘지도록
아이들이 집에 갈 생각이 없으니
나비들도 멈추지 못한다
그만하면
나비가 없어질 만도 한데
쉬지 않고 나오는 아이들의 하얀 입김
너희들은 참,
나비가 많은 아이들이로구나
첫눈 / 장석주
첫눈이 온다 그대
첫사랑이 이루어졌거든
뒤뜰 오동나무에 목매고 죽어버려라
사랑할 수 있는 이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첫눈이 온다 그대
첫사랑이 실패했거든
아무도 걸어가지 않는 눈길을
맨발로 걸어가라
맨발로
그대를 버린 애인의 집까지 가라
사랑할 수 없는 이를 끝내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다.
첫눈이 온다 그대
쓰던 편지마저 다 쓰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들에 나가라
온몸 얼어 저 첫눈이 빈 들에서
그대가 버린 사랑의 이름으로
울어 보아라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한
그대의 순결한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빌라
*
첫눈 / 김용택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이름 하나가
시린 허공을 건너와
메마른 내 손등을 적신다
+ 첫눈
첫눈이 온다 그대
첫사랑이 이루어졌거든
뒤뜰 오동나무에 목매고 죽어버려라
사랑할 수 있는 이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첫눈이 온다 그대
첫사랑이 실패했거든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눈길을
맨발로 걸어가라
맨발로
그대를 버린 애인의 집까지 가라
사랑할 수 없는 이를 끝내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다.
첫눈이 온다 그대
쓰던 편지마저 다 쓰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들에 나가라
온몸 얼어 저 첫눈의 빈들에서
그대가 버린 사랑의 이름으로
울어 보아라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한
그대의 순결한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빌라
(장석주·시인, 1954-)
* 첫눈!!
그냥 눈이 아닙니다.
첫눈은 추억입니다.
낭만입니다.
그리움과 사랑, 보고픔과 고독, 기쁨과 슬픔,
꿈과 희망이 겨울의 벗은 나무 위에, 땅 위에,
내 머리와 어깨 위에, 그리고
내 빈 가슴 속에 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눈은 차갑지가 않습니다.
포근하고 따뜻합니다.
('고도원의 아침 편지'에서)
- 첫눈 내린 한국의 산야 -
첫눈이 온다구요 / 이정석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