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의 10대손이고, 윤순거의 11대손 윤석영님의 부부께서
금몽암의 조선시대금몽암을 중수했던 영월군수 윤순거의 자손으로서
새로운 당시의 자료를 가지고 방문하신것
조선시대 윤순거의 초영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는 초영
현재있는 중수기를 가져온 분은 윤순거의 13대손 윤홍식님이 당시 기증한것이 첫번째이다
그때당시의 중창때 통문으로 돌린 부속자료가 명재유고 실려있었는데
그자료를 가지고 오신것
글씨가 흐려서 다시정리했는데 내용은 이렇다
명재유고 제31권
잡저(雜著)
노릉암(魯陵庵) 중건(重建)에 대한 통문(通文)
아아, 이곳은 이곳은 바로 노산군(魯山君)의 분암(墳庵)입니다.
처음에 노산군을 임시로 매장한 곳이 여기인데 ,
잡초로 뒤덮여 알아봀수 없게 된지가 60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정덕(正德) 병자년 (1516,중종11)에 이르러 개축(改築)하고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으며 ,만력(萬曆) 경진년 (1580년, 선조13)이 이르러
다시 묘를 봉축(封築)하고 표석(表石)을 세우도록 명함으로서 영령을 봉안할 사당이
있게되고 무덤을 호위할 사람을 두게 된 것입니다.
그뒤로 여러 왕대에서 이를 인습하여 의물(儀物)이 대략 갖추어지게 되었으니, 매우
성대한 일이라 할수 있습니다.
다만 무덤이 위치한곳이 첩첩산중에 숲이 우거진 곳이라 산록에 에워싸여 있고
무성한 초목으로 사려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겨울과 봄철사이에 산불이 사방에서 일어날 때 바람을 타고
불이 번져 올수있는 것입니다. 해마다 그런 걱정이 있는데다가 또 읍내에서 5리 밖에
안 떨어져 있어서 땔나무를 하거나 꼴을 베는 사람들이 날마다 이곳을 찿아오니
이는 실로 6호(戶)밖에 안되는 수호하는 사람들이 산불을 끄고 벌채를
막을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더구나 고을이 피폐하고 백성들이 쇠잔하여 그 6호조차 수를 다 채울수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덤의 옆에 암자를 지어 승려들로 하여금 그곳에 머물며 무덤을 수호하면서
산불을 끄고 벌채를 막게 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노릉암이란 이 암자가 지어지게 된 까닭입니다.
이 암자는 금몽암(禁夢庵)이란 이름의 고찰이었는데 ,경술년 (1610,광해군2)에 영월군수
아무개가 다시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하고 새로 중창하였습니다.
이렇게 됨으로서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무덤을 보호하는데에 도움을 주게 되었을뿐만아니라
다음과 같은 이익도 있게 되엇습니다.
과거에는 궁궐에서 향을 내려 근시(近侍)가 있는 재실(濟室)이 작아서 사람들을
수용할수가 없엇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에 가서 거처하게 됨으로서 비좁거나 고생할 염려가 없게 되었으니,
그 이익이 더욱 커졌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로인해 사유를 갖추어 조정에 보고하엿고, 조정에서는 특별히 지시를 내려 오대산(五臺山)에 잇는
사고(史庫)를 지키는 승려의 전례에 따라 이곳 승려들의 제반 부역을 일체 면제시켜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무덤도 영구히 보전하고 폐단도 없게끔 제도적 틀이 마련되엇습니다.
그러나 시일이 점점 오래 되고 인심도 점점 해이해지면서 이들을 제대로 돌보아 주지 않고 침학이
계속 이어지게 되엇습니다. 그 결과 승려들도 버틸수가 없었고암자도 자연히 버려지게 되었으니
참으로 탄식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삼가 생각건데 노릉(魯陵)은 수호하지 않아서는 안되니
이 암자도 끝내 방치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이 암자를 실로 복구해야 한다면 부역도 구차스럽게 지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어찌 한 사람이나 한 집안의 사사로운 일이 겠습니까.
이는 실로 우리도(道) 전체의 상하모든 사람이 함께 걱정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승려 아무개가 노릉암 중건을 자기의 송임으로 삼고 권연소(勸緣疏)를 써서 돌리면서
중건하는 일에 애를 쓰고는 있습니다만, 본읍은 재력이 약한데다 물력도 거의 없어 기둥과
들보만 겨우 올리고는 재정이 이미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이일은 재물은 부족한데 공사는 크고
물력은 적은데 사안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시일이 늦어지면서 완공할 기약이 없게 되었을 뿐만아니라
해를 넘겨 여름이 되자 풀이 기와를 대신할지경이 되엇습니다.
이제 비바람이 몰아치면 무너지거나 썩게 되는것은 불을보듯 뻔한 일입니다.
이에 부득이 다시 일의 전말을 열거하여 함께 이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 것입니다.
똑같이 이런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필시 포(布)한필,곡식 한되의 비용이라도
내기를 꺼리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도리로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들은 단연히 더욱 신경을 써서
앞장서야 할것이며, 자기 소관의 일이 아니라고 강건너 불보듯이 해서는 안될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의연금(義捐金)은 며칠 치의 봉급을 내는 데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이암자를
짖는데에는 크나큰 도움이 되니, 더욱더 이 일에 난색을 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 이는 지어도 그만이고 안지어도 그만인 범상한 집을 짖는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여러군자들은 각각 마음을 다하고 힘을 내어서 이일에 비중을 두고 이공사가
마무리 될수 있도록 해야 할것입니다.
선인들이 이 무덤을 존숭하고 도리를 생각했던 지극한 뜻을 잊지말고 여러 왕대에서 돌보아 주고
수호했던 성대한 마음을 체득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묘지(墓地)가까이에 세운 제각(濟閣)을 말한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4 단종조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에는 군수가 김택룡(金澤龍)
으로 되어 있다.
불사(佛事)에 정재(淨財)를 시주하도록 권하는 내용의 글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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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료가 명재유고에 실린것임
금몽암의 중창모금을 독려하는 내용이 주요내용이다.
당시에 모든 서문들은 따로 한부씩 복사하여 집안에서 보관하는것이
정례로 되어 있었다는데 그후에 그의자손
명재 윤증이 이런것들을 모아 정리하여
명재유고가 탄생한다.
이책의 저자인 명재 윤증(尹拯)은 우계학파이다.
1629(인조 7)∼1714(숙종 40).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윤증의
저서로 〈명재유고〉·〈명재의례문답 明齋疑禮問答〉·〈명재유서〉 등이 있다.
홍주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 노강서원(魯岡書院), 영광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자>자인(子仁), <호>명재(明齋), 유봉(酉峰), <시호>문성(文成)
명재유고
51권 26책(본집 46권 23책, 별집 4권 2책, 부록 1권 1책). 목활자본. 저자는 유계(兪棨)에게서 배우다가 송시열의 문하에 출입했다.
예론에 정통했으며 병자호란 때 어머니 이씨가 순절하자 평생 과거에 나가지 않고 벼슬도 하지 않았다.
이산(尼山 : 지금의 충남 논산군)의 서쪽 봉우리에 옮겨 살면서 후진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후 송시열과의 관계가 점차 사림의 논쟁으로 발전하여 송시열을 따르는 자가 노론이 되고 윤증에 가담한 자는 소론(少論)이 되었다.
따라서 그의 문집에는 예론과 관련된 서한과 소장이 많다.
서계(書啓)와 소차(疏箚)는 대개 사직에 관한 소와 조정에서 의논한 것에 대해 다시 계(啓)를 올린 것이다.
서한이 문집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주로 박세채·나양좌(羅良佐)·박태보 등 당시 절친했던 인사들과의 왕복서한이다.
잡저에는 학문에 관한 것과 예에 관한 글 4편이 실려 있다.
이중 〈초학획일지도 初學劃一之圖〉는 주희(朱熹)의 〈백록동서원게시 白鹿洞書院揭示〉와 이이의 〈격몽요결 擊蒙要訣〉을
인용하여 만들었다. 발문 중의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 磻溪隨錄〉 발문은 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별집의 4권 2책에는 이른바 회니관계의 자료가 되는 것으로 신유년 이후 송시열과 주고받은 의서(疑書)와 왕복서한,
나양좌·박세채·박태보·조사위(趙士威) 등과 왕복한 서한, 이유태(李惟泰)의 예설(禮說)에 관해 변론한 서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저자의 학문과 업적을 살필 수 있으며 상소문이나 서계 중에는 당시의 정치사상 연구에
참고가 될 자료들이 많으며, 서한·묘지명·행장 등 당쟁과 예송문제를 연구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인터넷 발췌)
이분들은 명재의 10대손이고, 윤순거의 11대손 윤석영님의 부부, 이제 정년퇴직하고 명재유고의 연구에 매진중이시라는데
대사간을 지낸 윤황(尹煌)은 8분의 아들을 두셨습니다.
윤순거는 윤황의 둘째 아들인데 큰 집(長子)이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여
둘째아들인 윤순거(尹舜擧)께서 큰 집으로 출계(出系)를 하셨습니다.
다섯째 아들인 윤선거(尹宣擧)의 중형(仲兄)이 바로 윤순거이십니다.
윤선거는 충청의 다섯분의 현인(賢人)의 한 분으로
특영의정을 제수받으신 어른으로, 저는 이 분의 11대 직손입니다.
윤선거의 맏아들 윤증(尹拯)은 숙종조 임금이 얼굴도 보지 못한 학자를
삼정승인 우의정에 제수하였는데, 윤증께서 숙종 임금께 18번이나 상소를 올려
그 우의정 벼슬을 사양하셨습니다. 그래서 백의정승(白衣政丞)으로 불립니다.
그러므로 저는 윤선거의 11대 직손이며 또한 윤증의 10대 직손입니다. (자신들을 소개한 내용)
명재유고를 설명하심
윤순거의 중수기를 바라보시는 중
이 중수기는 논산 명재고택에 남아있던 사본을 근거로해서 복원한것이라함
윤순거의 13대손 윤홍식님이 당시 기증한 현판 모습
금몽암은 이런분들께 많은 은혜를 입엇군요,, 감사
윤순거(尹舜擧, 1596년 - 1668년) 호 동토(童土)
1596(선조 29)∼1668(현종 9).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노직(魯直), 호는 동토(童土). 아버지는 대사간 윤황(尹煌)이며,
어머니는 당대의 명유인 성혼(成渾)의 딸이다.
죽산부사를 지낸 큰아버지 윤수(尹燧)에게 입양되었으며 외삼촌인 성문준(成文濬)에게서 학문을,
강항(姜沆)에게서 시를,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예를 배웠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직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가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 아버지가 척화죄로 귀양 가고,
작은아버지 윤전(尹烇)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자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645년 대군사부(大君師傅)가 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 상의원주부·형조좌랑·안음현감·의령현감 등을 지냈다.
의령현감으로 재직시 이황(李滉)과 남효온(南孝溫)의 사(祠)를 건립하였다.
1655년(효종 6) 종부시주부·공조정랑을 거쳐 금구현령으로 나갔다.
1660년(현종 1) 영월군수가 되어 『노릉지(魯陵誌)』를 편찬하고, 단종의 사묘인 지덕암(旨德庵)을 중건하였다.
1665년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으나 오르지 않았다.
그 뒤 사직서령·세자익위사익위·군자감정·예빈시정·상의원정 등을 지냈다.
대군사부, 형조좌랑, 의령현감, 공조정랑, 영월군수, 사직서령, 세자익위사익위, 군자감정, 예빈시정, 상의원정
을 지냄
주요 작품,저서는
강감회요서, 수은강공행장, 동토집, 노릉지, 심원사취운당대사비 를 남겼다.
*당시 1660년에 영월 군수로 임영되어와서 1665년까지 군수를 역임했는데
1662년에 금몽암의 중창 공사를 시작하여 63년까지 했다한다.
그리곤 1668년에 사망한다.
또한 그는 당시 초서의 대가였는데
윤순거 초서 무이구곡가 (尹舜擧 草書 武夷九曲歌)
보물1671호 (윤순거 초서 무이구곡가 )
아래는 충남 논산에 있는 윤증고택의 모습
첫댓글 그날 직접 뵈서 참 좋았습니다.^^
마야님 사진도 스포팅 했었으야했는디..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