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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섭 作 ‘난죽석도’, 지본수묵, 240.3×120cm, 상해박물관 소장, 18세기(왼쪽). 이케노타이가 作 ‘裴迪의 ‘竹籬館’시’, 지본수묵, 130.9x57.5cm, 개인소장, 18세기. © |
추사의 난과 영향관계를 따질 때 꼭 짚어야 할 인물은 중국의 정섭(1693~1765)이다. 그는 시·서·화 삼절에다 난죽과 隸·楷·行의 破體인 ‘六分半書’로 이름을 날렸는데, 이 중 파체의 기괴나 고졸의 미학으로 寫蘭에 잠심하는 모습은 추사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특히 ‘불이선란도’의 ①②와 같이 좌에서 우로가는 題畵방식이나 파체는 정섭에게 먼저 보인다.
또한 ‘불이선란도’와 ‘난죽석도’의 화제를 비교해 봐도 두 작품 모두가 파체서가 역력한데, 결구상 전반적으로 어깨가 올라간 정방형에 행서기미의 예서필법을 지극히 정적인 글씨로 구사하고 있는 정섭이나, ‘作’·‘花’·‘千’,‘是’,‘之’,‘達’,‘客’ 등과 같이 행서를 중심으로 예서와 초서의 필법과 결구를 혼융해 쓰는 추사는 동일한 방법론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난죽석도’는 전대 작가들과는 달리 정섭에 이르러 ‘난의 형상과 화제글씨의 필획을 대등하게 통합시킨다’는 평가를 감안하고 보더라도 여전히 그림 글씨가 구도나 필법상 따로 배치되고 있을 따름이지, 추사의 ‘불이선란도’처럼 구도와 필법에서 그림과 글씨가 경계없이 하나로 넘나드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더구나 여기에는 난잎의 분방한 動勢를 다분히 인위적이고 정적인 정방형구도의 예서 필의의 화제가 억누르고 있어 부자연스러움이 노출돼 있다. 그림의 필법 또한 글씨에서 체득한 예서의 금석기운이 그대로 녹아들어가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불이선란도’에서는 더 이상 난잎이 아니라 글자의 획이기도 하고, ‘不’·‘花’·‘天’·‘閉’·‘之’·‘爲’·‘達’·‘俊’·‘放’·‘有’ 등은 글자나 획이 아니라 난잎이자 꽃인 것이다. 나아가 화면을 크게 나선형 대각으로 가로지르며 바람을 맞서는 난잎의 역동성을 행초와 초서기운의 예서 화제가 뒷받침함으로써 화면의 생기를 배가시키고 있다. 여기가 바로 추사가 문을 닫고 찾고 또 찾은 ‘불이선’의 세계이고, 추사가 정섭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경지인 것이다.
사실 정섭 시대는 古隸는 물론 팔분예서조차 본격적으로 소화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림에서 고졸한 재미는 없다. 그러나 추사는 팔분과 고예는 물론 전서, 해서, 행서를 녹여낸 파체의 필획으로 사란에 임함으로써 그 그림의 맛이나 경지 또한 기괴·고졸 등 이전의 어느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데 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일본의 경우 같은 한자문화권이지만 문인사대부 층이 아닌 무사계급이 정치·문화를 주도해갔다. 따라서 글과 그림에서도 禪僧들이 주도가 돼 선필이나 선묵을 구사해, 한·중과 비교할 때 문인화는 취약한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문인화가가 없었던 건 아니다. 에도시대에 들어서 유학이념에 의한 정치는 새로운 문예를 부흥시켰다. 특히 중기에 활동한 이케노타이가(1723~1776)를 꼽을 수 있는데, 명청대 문인품격의 서풍을 견지한 서예가로서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중국적 문인화를 일본적으로 소화시킨 인물이다. 그는 讀萬卷書하고 行千里하는 문인교양을 몸소 실천하기위해 일본 여러 지방을 주유하며 자연을 깊이 관조해 풍부한 조형으로 정신을 담아내는 제작태도를 견지했다. 일본적인 문인화를 구축한 이로서 그를 추사나 정섭에 견주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케노타이가의 경우 당시 일본의 보편적인 서풍에서 보듯 여전히 王法에 머물러 있어 그 이전의 전예를 비첩으로 종합해낸 추사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겠다. / 이동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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