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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는 지중해와 대서양의 영향을 받은 온화한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겨울은 춥고 흐리며 습하고, 여름은 그리 덥지 않은 편이다. 5, 6월과 11월은 우기로 동부보다 서부의 강우량이 많다. 1년 가운데서 7월이 가장 덥고, 1월이 가장 추우며, 연평균 기온은 10℃이다. II. 역사 1. 국가의 성립, 중세 시대, 터키의 지배 유럽 여러 나라의 역사에서 헝가리만큼 그 시작이 분명한 나라는 드물다. 헝가리의 역사는 895년께 유목 생활을 하던 마자르인이 유라시아의 스텝을 떠나 서쪽으로 이동하여 다뉴브 강 유역에 정착함으로써 시작된다. 거의 반세기 동안 널리 흩어져 약탈 생활을 하던 그들은 955년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대제에게 레흐펠드 전투에서 패하자 정착하여 경작을 시작하였다. 1000년에 즉위한 스테판 1세는 종족들을 통합하고 카톨릭을 받아들임으로써 국가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이후 헝가리는 약 2세기 동안 중세 유럽 문화권에 흡수되어 비교적 안정된 국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헝가리는 1241년 징기스칸이 이끄는 몽고족의 침입을 받아 도시가 파괴되고 인구가 절반으로 감소하는 수난을 겪었다. 마자르족이 세운 아르파드(Khan 淵p ) 왕조가 막을 내린 1301년부터 1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하는 1918년까지 헝가리는 줄곧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된다. 중세 헝가리 문화는 마티아스 왕의 통치기에 절정에 올랐다. 그러나 농민 소요 등 내부 혼란으로 국력이 쇠하면서 1326년 모하치 전투를 고비로 오스만 터키에 합병되어 1세기 반 동안 터키의 지배를 받게 된다. 대평야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은둔처가 없었고, 강한 카톨릭 신앙으로 이슬람교와 타협하지 못했기 때문에 헝가리는 터키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았다. 2. 합스부르크가의 지배 이후 터키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주도권 쟁탈에서 터키가 패배하자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왕조 치하로 들어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페렌츠 라코치(Ference L o zi)의 독립 항쟁과 러요스 코수트(Lagos Kossuth)의 사회 개혁 운동 등 끈질긴 저항 운동을 벌인 헝가리는 합스부르크의 절대적 통치를 완화시켰고, 1867년 오스트리아 지도층과 맺은 화해 협정을 통해 두 개의 수도를 가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기타 다른 분야에서는 광범위한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이 때가 모하치 전투 이래로 헝가리가 가장 유리한 입장을 가진 때였지만 완전한 독립 국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3. 양차 세계 대전기 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독일편에 선 헝가리는 전쟁에서 독일이 패하자 국토의 3분의 2를 상실하여 루테니아와 슬로바키아는 체코에, 부르겐트는 오스트리아에 각각 편입되었다. 1918년 3월, 부르주아 혁명이 발생하여 국왕 제도가 폐지되었고, 같은 해 11월 16일 헝가리는 공식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분리를 선언하고 공화국임을 선포하였다. 1920년 3월에는 명목상의 왕정이 부할되었으며 호르티(Mikl Horthy) 제독이 섭정 체제로 실권을 장악하여 25년(1920~1945) 동안 헝가리를 통치하였다. 반혁명 정권을 수립한 호르티는 수천 명의 혁명주의자들을 투옥시켰다. 국토의 7.5%에 해당하는 토지를 대지주로부터 몰수하여 재분배하는 토지 개혁을 실시하였다. 헝가리는 정치·사회적 안정이 경제와 재정 재건에 달려 있다고 판단하고 외화를 끌어 오기 위해 1922년 2월, 국제 연맹에 가입하였다. 1927년 통화 개혁으로 전후의 악화된 물가 상승이 수습되었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안정적인 재정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농산물의 생산이 감소하고 도시의 실업 노동자가 급증하자 베틀렌이 사임하고 겜베슈 내각이 구성되었는데, 이 내각은 파시스트 이탈리아, 나치 독일이 추축국으로 형성될 것을 내다보고 이탈리아와 독일에 접근했다. 그러나 겜베슈가 갑자기 죽자 헝가리의 국내 정치가 독일에 좌우되었고, 국론이 분열되었다. 이후 집권한 임레디 내각은 독일측에 가담하여 독일로부터 슬로바키아, 루테니아 남부 등을 할양받았다. 이어서 등장한 텔레키 내각은 세계 대전의 발발시 독일편에 설 것을 약속하였다. 따라서 독일과 전쟁 협력 관계에 있게 된 헝가리는 차차 독일의 전쟁 체계 속으로 편성되어 갔으며 군수품과 농산물을 공급하는 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헝가리인 60만 명이 희생당했고, 1944년 12월 독일군이 철수하자 소련군이 헝가리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1945년 1월에 이르러 연합군과 휴전 조약을 체결하고 1946년 1월 신헌법을 제정하면서 다시 1946년 2월 1일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4. 공산 정권하의 헝가리 1948년에 공산당과 사회당이 제휴하여 결성한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1949년 총선에서 압승하여 인민 공화국을 선언하고, 신헌법을 제정하였다. 스탈린 사후, 1956년 10월 부다페스트(Budapest)에서 반소, 반공 봉기가 일어나자 헝가리 공산당은 권력을 개편하고 나지(Imre Nagy)를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바르샤바 조약 기구 탈퇴 및 중립을 선언하고 급진적인 개혁 및 강제적 중공업 발전 계획을 중단하는 정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의 개입으로 나지 정권은 무너지고 1956년 카다르(Jan K ) 당 제1서기를 수반으로 하는 친소 정부가 수립되었다. 카다르 정부는 친소 노선을 유지하며 국민에 대한 유화책으로 정치·경제적으로 자유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결과 헝가리는 1960년대 말 동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로 변모하였다. 경제적으로는 1966년 5월에 경제 개혁안이 공표되고, 1년 이상의 준비 기간을 거쳐 1968년 1월 1일부터 `신경제 메카니즘'이라 불리는 경제 개혁이 실시되었다. 신경제 메카니즘의 주요 골자는 중앙 통제 경제의 기능을 종합 지표의 제시에 한정하고, 투자, 고용, 임금, 가격의 결정, 외국 무역 등에 있어서 기업의 자율권을 대폭 확대하여 경제 성장에 일익을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경제 메카니즘이 사회주의 경제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5. 개혁 1985년 고르바초프의 등장 이후 페레스트로이카의 영향을 받아 헝가리도 시장 경제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1987년 공산당 특별 당대회에서 카다르 당서기가 해임되고 개혁파인 그로스(K oly Gr z)가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988년 5월, 그로스는 당서기장으로 선출되었고 이를 계기로 개혁파인 니에르시(Rezs Nyers), 포주가이(Imre Pozsgay) 등이 정치 국원으로 선출되어 공산당 내에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1990년 3월의 1차 투표, 4월의 2차 투표 결과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헝가리 민주 포럼'이 전체 의석의 41%를 획득하여 원내 제1당으로 부상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한 `자유 민주 동맹'이 92석를 획득하여 제2당이 되었다. 반면 집권당이었던 `헝가리 사회당'은 전체 의석 수의 8.6%에 해당하는 33석을 얻는 데 그쳐 43석을 획득한 `소지주당'에 이어 의회 내 제4당으로 전락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함에 따라 헝가리는 공산 정치의 막을 내리고 본격적인 자유 시장 경제에 기반을 둔 새로운 체제를 맞게 되었다. III. 정치 헝가리는 1989년 개정된 헌법에 따라 대통령제를 가미한 의원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회(국민 의회)에서 비밀 선거에 의해 간접 선출된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며 1회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다. 현재 1990년 8월에 선출된 자유 민주 연맹 소속의 아르파드 곤츠(Arpad Goncz) 대통령이 1995년 6월의 대선에서 야당 후보인 페레츠머들 후보를 압도적인 표 차이로 누르고 재선되었다. 입법 기관으로서 실질적인 국가 최고 권력 기관인 의회는 386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임기 4년의 단원제로 1년에 2회 개원된다. 총리와 각 부처 장관들로 구성되는 행정부의 실질적인 최고 기관은 13개 부처 장관과 6개의 무임소 장관으로 구성되는 공화국 각료 평의회이며 총리가 의장을 맡는다. 총리는 대통령의 추천에 의해 국회 의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선출되며 의회의 불신임에 의해서만 해임된다. 현 헝가리 행정부는 자유 민주 동맹(AFD)과 헝가리 사회당(HSDP)의 연립 정부로 헝가리 사회당 소속의 줄러 호른(Gyula Horn)이 총리직을 맡고 있다. 호른 총리는 1995년 12월 14일에 우리 나라를 방문하여 정상 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한편, 지방 행정 구역으로 수도 부다페스트와 19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주에는 5개의 직할시를 포함한 120개의 시가 있으며 97개의 군, 2933개의 읍이 있다. 지방 행정 단위의 최고 기관은 평의회로 주민 선거로 선출된다. 법원은 일반 법원과 특별 법원으로 구성되며, 2심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아울러 헌법 재판소를 설치하여 법적 권리가 침해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다. 1. 정당 헝가리 민주 포럼(HDF:Hungarian Democratic Forum) 정당 활동이 금지되던 공산 시절인 1987년 9월에 비공식 단체로 설립되어 주로 노동, 환경, 임금 문제 등을 다루어 왔다. 스스로를 헝가리 전통과 인간의 존엄성에 충실한 민주적 중도 우파로 규정하는 헝가리 민주 포럼은 정치적으로는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는 시장 경제 체제를 지향하고 있다. 현 당수는 라요스 퓌르(Lajos F )이다. 자유 민주 연합(AFD:Alliance of Free Democrats) 재야 인사를 주축으로 1988년 11월에 결성되었다. 급진적인 시장 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표방한 서구 지향적이며 우익 성향의 정당이다. 당수는 이반 페퇴(Iv Pet 이다. 헝가리 사회당(HSP:Hungarian Socialist Party) 현재 제1당으로서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공산당)의 내부 개혁 그룹에 의해 1988년 3월 30일에 결성되어 사회 민주주의 색채가 강한 서구식 좌파 정당으로 자리잡았다. 급격한 개혁에 반대하여 사회주의 혼합 경제의 창출을 위한 점진적 경제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당수는 줄러 호른 현총리이다. 이 외에 소지주당(ISPP) 등 14개의 정당이 활동하고 있다. 2. 외교 헝가리는 개혁 이후 서구의 일원으로 복귀하고, 선진국과 관계를 강화하여 협력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2000년대 이전 EU(유럽 연합) 가입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미 1991년 12월에 EU 준회원 지위를 획득하였다. 한편 바르샤바 조약 기구 체제의 해체 이후 힘의 공백에 따른 안보 위기 위식에 따라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 가입을 추진하고 있으며 1993년 3월 발효된 CEFTA(중부 유럽 자유 무역 협정)를 체결, 지역 협력체를 통한 경제 개발을 도모하고 있다. 3. 우리 나라와의 관계 우리 나라와는 1988년 8월 26일 상주 대표부 개설 협정을 체결한 후 1989년 2월 1일 공식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1990년 11월에 헝가리의 곤츠 그리고 1995년 11월에는 호른 총리가 방한하였고, 1989년 11월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헝가리를 방문하였다. 경제 분야에서는 국내의 종합 상사들이 진출해 있으며 현대 자동차는 1996년부터 헝가리 셀 모터스와 합작으로 상용차 조립 공장을 설립했고, 한화 그룹도 유통 사업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진출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우리 나라는 헝가리 두나페르 제철소의 현대화를 위해 약 2500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키로 하는 대외 EDCF(경제 협력 기금) 차관 협정을 호른 총리의 방한시 체결하였다. 1991년 3월부터 헝가리와는 사증(Visa) 면제 협정이 체결되어 있다. IV. 경제 헝가리는 동구 국가 가운데서 가장 성공적으로 시장 경제로 전환하고 있다. 이미 1980년대부터 카다르는 `신경제 메카니즘'을 도입하여 계획 경제와 시장 경제를 경험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개혁 이후에 본격적으로 경제 구조를 개편함에 따라 여러 가지 부작용들이 발생하였고, COMECON(동유럽 경제 상호 원조 회의)이 해체되자 역내 무역이 감소하였다. 이에 따라 GDP(국내 총생산)가 감소되고 인플레이션과 실업, 외채 등의 부담이 가중되어 왔다. 1991년 초에는 4개년 신경제 계획을 수립하여 사유화를 가속화하고 물가 안정과 포린트화의 태환화, 그리고 경제 성장을 통한 유럽에의 적응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실제 헝가리는 1991년 마이너스 8% 성장에서 1994년 2%의 경제 성장률을 보이며 본격 성장 국면을 맞이하였다. 1994년 중반을 기준으로 볼 때 약 70억 달러에 이르는 외국인 투자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 규모는 나머지 동구권 국가의 투자액을 합한 것보다 많은 수준이다. 이 가운데서 약 40%를 미국이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투자 호조에도 불구하고 13%에 이르는 실업률과 20% 수준의 민영화, 240억 달러에 이르는 외채와 1993년 기준 23%에 이르는 인플레이션 등은 헝가리 경제의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한편 헝가리는 한 해 4000만 명 이상이 다녀가는 세계 5위의 관광국이기도 하다. 헝가리의 1인당 국민 소득은 1993년 기준으로 볼 때 3330달러이며 월평균 급여는 350달러 수준으로 이는 동구권에서 슬로베니아 다음의 수준이다. 우리 나라는 1993년 기준 7개 기업체에서 4300만 달러의 투자를 하고 있고, 헝가리와의 교역은 수출 8300만 달러, 수입 2000만 달러로 비교적 적은 수준이다. 의류와 전자 제품 등이 주요 수출품이며 플라스틱 제품, 강철 등을 주로 수입하고 있다. 그러나 1995년 12월 호른 헝가리 총리의 방한과 현대, 쌍용 등 자동차 업계의 투자 진출로 양국간의 경제 교류는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V. 문화와 생활상 1. 인종 슬라브족도 게르만족도 아닌 피노우그리아(마자르)족인 헝가리인은 민족 대이동기에 유럽에 마지막으로 정착한 주요 종족이다. 약 1030만 명이 헝가리 본토에 거주하고 있고, 약 500만 명이 해외에 흩어져 있다. 특히 170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 트란실바니아 지역은 루마니아와 민족 문제를 겪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헝가리의 소수 민족으로 독일인(1.6%), 슬로바키아인(1.1%), 남슬라브인(0.3%), 루마니아인(0.2%) 등이 있으며 헝가리 집시 25만 명이 북동부에 집단 거주하고 있다. 2. 종교 전체 인구의 67.5%가 카톨릭 신자이며 캘빈교 20%, 루터교 신자가 5% 있다. 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약 70만 명의 유태인이 있었으나 지금은 8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는 동유럽에서 가장 많은 숫자이다. 헝가리 인구의 3분의 2가 도시에 거주하며 수도 부다페스트에 200만 명, 다음으로 데브레첸(Debrecen)에 21만 5000명, 미스콜츠(Ml-skolc)에 19만 5000명, 세게드(Szeged)에 18만 명 등이 거주하고 있다. 3. 예술 문학 15세기에 잠시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았지만 15세기 중엽에 터키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유럽 문화 발전의 조류와는 격리되었다. 뿐만 아니라 1918년까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지배와 나치와 소련의 개입으로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배경하에 헝가리는 많은 민족적인 작가들을 배출하였다. 헝가리 최고의 시인인 산도르 페퇴피(S dor P i:1823∼1949)는 귀족의 특권과 평민의 빈곤을 함께 비판했다. 그의 시 ‘일어서라, 헝가리인이여 (Talpra magyar)'는 그가 참여한 1848년 혁명에서 혁명가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는 섬세한 감정과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헝가리 민요의 단순한 형태를 작품에 주로 이용했다. 가장 알려진 헝가리의 현대 작가로는 소설가인 죄르지 콘라드(Gy gy Konr )를 꼽을 수 있는데, 유태계인 그는 `정원의 축제 (A Feast in the Garden)'(1985)라는 작품에서 그가 성장한 헝가리 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겪은 유태인 집단의 절망을 자전적으로 그려냈다. 헝가리는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시인들이 있으며 문맹률은 1%이다. 음악 헝가리의 민속 악기에는 백파이프, 허디거디(현악기의 일종), 봄바르드(bombard), 류트와 비슷한 탐부르(tambur) 등이 있다. 과거에는 마을에서 오르간을 사기에는 너무 가난하였기 때문에 예배중에 백파이프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민속 악기인 심발룸(Cymbalum)은 피아노의 기원이 되기도 하였고, 타타고트(Tatagot)는 헝가리 기원의 오보에와 비슷한 것으로 소프라노 색소폰의 음색을 낸다. 헝가리 음악의 특징은 집시 음악에서 찾을 수 있다. 비록 헝가리와 동족은 아니지만 그들의 민속 음악은 통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본래 집시 음악의 전통은 손가락을 튕기고 주전자 뚜껑이나 물병, 스푼 등을 두드리며 부르는 느린 서정적인 노래였다. 그러나 1960년대 말에 들어 젊은 집시 그룹 사이에서 기타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유명한 현대의 집시 그룹으로 칼리 야그(Kalyi Jag:검은 불덩이)가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을 집시어(인도어 계통)로 노래하고 가재 도구를 더블베이스, 기타, 퍼커션 등과 함께 악기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집시 음악은 리스트, 브람스 등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헝가리 광시곡 등에 잘 집약되어 있다. 4. 생활상 물가 수준 환율은 1994년 말 기준으로 달러당 108포린트(ft)로 1포린트는 100필레르(fill )이다. 하루 평균 25달러 정도면 1인실에 묵으며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고, 기차의 2등칸으로 여행을 할 수 있다. 헝가리는 해외 여행객에게 차별 가격을 적용하지 않는다. 모든 가격에는 25%의 부가 가치세(VAT)가 포함되어 있다. 팁은 일반화되어 있는데 가격의 10% 정도면 족하다. 헝가리의 상점들은 잘 정돈되어 있으며 질도 우수하다. 민속 자수품을 비롯하여 자기류, 울 카펫, 목각 인형 등이 유명하다. 또한 헝가리 전역에 렌지엘 피어츠(Lengyel Piac)라 불리는 폴란드 시장이 서는데 일종의 벼룩 시장이다. 원칙적으로 여행객은 50달러 미만의 물품을 영수증 없이 반출할 수 있는데 실제로 국경에서 조사받는 일은 거의 없다. 때때로 작은 상점이나 행상으로부터는 현금 구매시 25% 정도의 할인을 받기도 한다. 업무 시간과 공휴일 식료품점은 평일에는 대부분의 박물관은 매주 월요일과 공휴일에 휴관하며, 입장료는 1달러 미만으로 저렴하고 학생은 반액 할인된다. 특이한 것은 주중 하루를 무료 입장할 수 있는데 무료 입장일은 해마다, 장소마다 변경된다. 공휴일은 신정(1월 1일), 1848년 혁명 기념일(3월 15일), 부활절(3월이나 4월중), 노동절(5월 1일), 성신 강림 대축일 후 월요일(Whit monday:5월이나 6월중), 성 스테판 기념일(8월 20일), 공화국 선포 기념일(10월 23일), 크리스마스(12월 25, 26일) 등이다. 5. 언론 매체 방송 헝가리의 라디오 방송국으로는 마자르 라디오(Magyar R i 가 1924년 설립되어 현재 3개의 채널과 6개의 지역 방송국을 가지고 있고, 라디오 다누비우스(Radio Danubius)는 1986년에 설립되어 상업 방송을 하고 있다. 뉴스, 음악, 생활 정보 등을 하루 21시간 내보내고 있다. 텔레비전 방송으로는 마자르 텔레비지오(Magyar Telev i 가 1957년에 설립되었고, 제1방송은 주당 98시간을, 제2방송은 주당 83시간을 방송한다. 신문 1988년에 검열 제도가 완화되었고, 1989년에는 출판의 사적 소유권이 인정되었다. 1990년까지만 해도 정당이나 사회 단체 소유였던 출판권이 개인 소유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대부분 일간지는 외국 자본과의 합작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언론의 자유와 함께 헝가리는 바야흐로 출판의 천국이 되었는데, 1993년 현재 41개의 일간지가 발행되고 있고, 발행 부수만 해도 221만 5000부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는 20여 개의 지역 일간지도 포함된다. 부다페스트의 일간지는 전국적으로 구독되는데 가장 대중적인 것으로 『넵서버디사그 Nepszabadsag』, 『넴제티 스포츠 Nemzeti Sport』, 『넵서버 Nepszava』 등이 있다. 이 가운데서 『넵서버디사그』는 가장 유력한 일간지로서 지금은 독립했지만 과거에는 헝가리 사회 노동자당의 핵심 기구 역할을 했다. 또 소위 정론지로 『마쟈르 넴제트 Magyer Nemzet』가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수도 부다페스트에서는 몇 개의 영자 주간지가 발행된다. 『데일리 뉴스The Daily News』는 1967년에 창간되어 공산주의 시절에도 공정한 기사로 명성을 얻었다. 『부다페스트 위크Budapest Week』는 `About Town'이라는 섹션을 두어 각종 문화 행사 및 영화 프로 안내까지 상세한 부다페스트의 정보를 다룬다. 『부다페스트 선Budapest Sun』도 `스타일Style'이라는 섹션을 두어 여행 안내 및 레스토랑, 클럽 정보 등을 다루고 있다. 위 두 주간지는 지역 뉴스까지 폭넓게 다루어 특히 여행자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부다페스트 비즈니스 저널The Budapest Business Journal』은 경제 뉴스를 전문적으로 다루며, 이 밖에 잡지 형태로 The Hungarian Quarterly와 『헝가리 다이제스트Hungarian Digest』 등이 있다. 6. 음식 헝가리의 많은 음식들이 파프리카(paprik )로 맛을 내는데 파프리카는 우리 나라의 고추와 비슷한 조미료로 식당마다 소금, 후추와 함께 놓여 있다. 파프리카는 중앙 아메리카가 원산지로 18세기 초 세게드의 한 농부가 재배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헝가리 요리에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중요한 조미료로 자리잡았다. 굴라쉬(guly )는 양파와 토마토를 가미한 쇠고기 수프로 헝가리의 대표적 수프이다. 돼지고기는 가장 흔한 고기 요리의 재료이고 양배추는 매우 자주 쓰이는 야채인데 터키의 영향을 받아 걸죽한 야채 수프의 원료로 사용된다. 몸에 좋은 흑빵은 여섯 가지의 다른 곡물을 혼합하여 만드는데 그 위에 참깨, 해바라기 씨, 눌린 귀리 등이 뿌려져 있다. 이 밖에 거위간이 들어간 샌드위치와 경단과 곁들여진 파프리카 치킨(일종의 양념 통닭) 등이 있다. 헝가리에는 두 개의 대형 슈퍼마켓 체인이 있는데 `ABC'와 `체메게 율리우스 메이늘(CJM:Csemege Julius Meinl)'이 그것이다. CJM이 다소 고급스러우며 그 곳에서는 플라스틱 용기에 담은 포장 샐러드도 구할 수 있다. 7. 관광지 개방 이후 헝가리의 관광 산업은 급속한 성장을 거듭하여, 1993년 기준 총 4060만 명의 관광객이 헝가리를 다녀갔고 이들에게서 벌어들인 수입만 해도 연간 12억 달러를 넘는다. 헝가리에는 약 154개의 온천이 있으며 대부분 개방되어 있다. 로마인들이 처음 부다페스트에 개발을 했고, 터키와 합스부르크가가 이어 개발하였다. 헤비즈(Heviz)에 있는 온천 호수가 가장 유명하다. 한편 헝가리에는 다뉴브 강과 발라톤 호수를 중심으로 카누와 카약, 세일보드 등이 널리 행해지고, 사이클링과 숲을 이용한 하이킹, 그리고 승마가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며 관광 자원으로도 한몫을 하고 있다. 특히 헝가리인들의 말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헝가리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도시로 에게르(Eger), 죄르(Gy ), 소프란(Sopran), 세케슈페헤르바르(Sz esfeh var)와 베스프렘(Veszpr ) 등이 있다. 이들 도시는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된 것이다. 쾨세그(K zeg)는 중세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고, 다뉴브 강 유역의 센텐드레(Szentendre)는 발칸풍의 도시이다. 페치(P s)에서는 터키 지배하의 헝가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헝가리의 성들은 터키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세워졌고, 비셰그라드(Visegr ) 성은 중세 헝가리의 번영을 상징하듯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 밖에 페르퇴드(Fert )에 위치한 에스테르하지(Esterh y) 궁이 좋은 볼거리이다. 한편 헝가리는 문화 행사의 천국이다. 부다페스트만 해도 하루 저녁에 몇 개의 음악회가 열리고, 입장료도 저렴하여 10달러를 넘지 않는 돈으로 오페라도 볼 수 있다. 공산주의 시절에 문화 부문은 정부로부터의 보조금 혜택을 대폭 받았고 아직도 국가적인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공연장은 여름 휴가 시즌인 6월 중순부터 문을 닫아 9월 말이나 10월에 공연을 재개한다. 이 기간 동안에는 주로 관광객을 위해 마련된 특별 프로그램이 진행되며 많은 오페라와 음악회가 열린다. 이 때의 입장료는 통상 공연의 두 배에 이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