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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성대군(密城大君) 1 世
① 휘(諱)․자(字)․호(號) : 휘(諱)는 언침(彦忱)이다. 다른 이름은 원생 (元生)이라고도 한다.
②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생몰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880년 ∼ 940년 사이에 생존 하신 것으로 추정 한다. ※ 고려초의 대군으로 부터 고려말 까지 계보의 생몰 연대를 알 수 없어 이하 대군으로 부터 16대까지를 1대에 25년내지 45년으로 하여 생존 년대를 추정하였다.
ㅇ신라 제54대 경명왕이 9왕자를 두셨는데 그 중 첫 왕자이며 밀성군(密城 君)에 봉(封)하였음으로 밀성대군(密城大君)이라 칭한다.
<밀성(密城) 박씨의 본관 사용 유래> 신라35대 경덕왕(서기742-765) 16년(757년)에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군현(郡縣)의 명칭을 고칠때에 추화군을 밀성군(密城郡)이라 하고 밀주의 관내에 소속시키면서 5개의 속현을 두었다. 신라 54대 경명왕의 첫왕자 박언침께서 밀성군에 봉해지셨다. 우리의 본관조 밀성대군 후손은 지명을 따라 본을 밀성박씨로 정하였다. 그후 밀성군의 명칭은 밀주군→밀성현→밀성군으로 변천했고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 2년(1390) ‘밀양부’로 승격되었다. 그때부터 지명이 밀성에서 밀양으로 변경됨에 따라 신지명인 밀양으로 쓰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표기이다. 밀성박씨로 호칭해야 옳다고 본다.
ㅇ신라 선원세계(璿源世系)는 경주 숭덕전(崇德殿 : 시조왕의 사당)에서 편찬 한 보첩(譜牒)에 의거하며 경명왕이 대군을 봉한 밀성고을은 지금의 밀양 (密陽)이다. 밀양에 있는 영남루(嶺南樓)가 대군의 유적지라고 전해지며 그곳에 이궁대 (離宮臺) 풍류현(風流峴) 세루정(洗陋亭)이 있었다는데 이궁(離宮)에서는 신라왕들이 거동하여 놀던 곳으로 신라의 문화행사가 행하여 졌다고 한다. 이궁대(離宮臺), 풍류현(風流峴), 세루정(洗陋亭)의 이름은 당시의 풍속과 민요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신라 전성기의 태평성대를 엿보게 한다. 이 기록은 양촌집(陽村集)에 보이는데 이 책은 조선시대 권근(權近)이 1672년(현종 13년 壬子)에 우리나라 유사를 모아 간행한 책이며 양촌(陽村) 은 권근(權近)의 호(號)다. ㅇ대군은 경명왕의 왕자로서 왕위를 이어가지 않고 밀성 고을 하나를 받아 유유자적하며 산수를 즐겼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그때 국내외 정세를 살펴보면 수긍 가는 면이 있 다. 중국은 당나라가 멸망한 후 혼란상태에 있었으며 한반도는 후삼국이 정립하여 치열한 쟁패전으로 인해 장래를 예측하기 어려웠고 쇠퇴해진 신 라의 국운은 되살리기 어려웠으며 대군께서는 천명이 이미 신라를 떠나 있 음을 간파 하셨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경주 포석정에서 경애왕이 진훤으로 부터 당한 재앙 같은 것을 피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대군은 시류를 냉철히 잘 내다보시고 난세의 영 웅이나 제왕보다는 차라리 은둔의 길을 택하신 것으로 사료된다.
③ 배위(配位)및 묘소(墓所) ㅇ배위와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 밀성대군단(密城大君壇) 사실 경상남도 밀양시 봉무산 아래 능파강 위의 영남루 북쪽 언덕에 있으니 곧 대군이 수봉한 궁성(宮城)의 유지(遺址)다(☞밀성군이 거처하고 정무를 살피던 장소인데 사실이 여지승람과 권근의 본조유사에 실려 있음) 구보(舊譜)를 고찰하니 서기1634년(숭정7년 인조12 甲戌)에 현령(縣令) 희(暿:호 四吾堂-恭簡公 휘 健의 후손)와 수춘(壽春 호 菊潭-杏山公 휘 世均의 후손) 등 37인이 외예손(外裔孫)인 밀양부사 이유달(李惟達)과 이곳에 사당을 세워 밀성대군을 향사(享祀)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3백여 년이 흐르는 동안 후손들은 한마음으로 선배들이 이루지 못한 이 일을 이루고자 노력하였으나 일자체가 심히 중대한 사안이어서 합의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가 신라기원 1981년(서기1924년 甲子)에 밀양박씨 종인의 주최로 8도에 통고하여 종회를 영남루에서 크게 개최하고 설단하여 향사할 것을 건의하니 이해 五월 三일이였다. 원근에서 회의에 온 사람들이 千명을 넘었는데 모두가 한마음으로 설단할 것을 합의하고 돌을 다듬어 비를 세우니 약 4개월이 걸렸다. 삼가 고찰하니 단기 四二五五년(서기 1922년 壬戌) 윤五월 十三일에 큰 비가 쏟아지자 영남루 북쪽뜰이 빗물에 흙이 무너지면서 하나의 큰 묘자리 흔적이 있는지라 누 아래 있던 사람이 보고서 달려가 부근에 사는 박씨에게 말하여 여러 사람이 와서 보니 과연 오래된 묘자리라 이에 전 군수 박상일(朴尙鎰) 교리 박해철(朴海徹) 주사 박태진(朴泰鎭) (카페지기 주: 경주 손곡문중 출신)박장억(朴章億) 등이 들은 즉시 살펴보았다. 밀양의 부로(父老)들이 자고로 전해오는 말이 밀성대군의 묘소가 영남루 부근에 있다는 것이 과연 헛되고 허망한 소리가 아님을 이로써 믿음직하다. 그러나 이미 지석이나 증명할 만한 고증이 없는 즉 그 신중하여야 할 도리에 의심이 없을 수 없고 또한 등한이 보아 넘길 일도 아니어서 이에 설단을 하고 비를 세워 별도로 제각을 세우고 향사를 하면 마음에 미안할 바 없고 의리에도 당연히 행하여야 할 일이므로 밀양과 청도의 두 고을의 종인과 협의를 하여 단지 대부할 것을 관에 신청하니 익년 계해년(1923년) 겨울 허가가 나왔다. 이로 인하여 8도에 종회를 소집하여 결의를 거쳐 드디어 그 자리에 돌을 깔고 단을 모으고 단상에 비를 세우니 단지(壇地)가 무릇 12평이었다. 면에 다듬은 돌을 깔고 상하양방에 대(臺)를 쌓고 대위에 돌아가며 돌난간을 둘렸는데 석주가 모두 20개요 높이는 모두 한길이 넘었다. 또 이 난간 기둥에 구멍을 내고 쇠줄로 꿰어 쳐서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한가운데의 축단한 비면에 ‘밀성대군의 단’이라 쓰고 전면에 향로를 두고 향로 양쪽에 아래로 무장한 관대석을 세우고 문주(門柱)위에 두개의 둥근 유리 장명등을 설치하고 철문을 달아 사람들이 난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문밖 양쪽 석대위에 각각 사자석을 놓았다. 1925년(乙丑) 10월19일(음 9월 초 2일)은 300여년의 성손들의 숙원이 성취되어 영작만세유전(永作萬世遺傳)의 역사를 새롭게 장을 여는 날이라 원근 종원 및 전 향사림(鄕士林) 기타 회집(會集)한 관중(觀衆)이 오천여인(五千餘人) 이라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오전 12시(午時) 정각에 본손과 사림일동이 단비(壇碑)를 봉립하고 일제히 신고식을 장엄하고 성대히 거행하였다. 제향일(祭享日) 춘사(春祀) 陰 三月 初三日 巳時(오전10시) 추사(秋祀) 陰 九月 初九日 巳時(오전10시)
☞ 영남루(嶺南樓) 경북 월성에서 발원하여 경주 →청도 →밀양 →낙동강으로 흐르는 96km의 강이 있는데 이 강을 '밀양강' 이라고 한다. 이 강가의 절벽에 장엄한 누각이 있어 보물 제147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데 바로 유명한 밀양영남루(密陽嶺南樓)이며 밀성대군의 사적이 있었던 곳이라고 전한다. 영남루는 정면 5간, 측면 4간의 팔작지붕건물이고 기둥이 높으면서 사이가 넓은 것이 특징이며 좌우 부속건물과 연결되어 웅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또한 밀양군 객사(客舍)였던 밀양관의 부속건물 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후기의 대표적 건축물이기에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영남루 전경
☞ 밀양의 역사문화 다음은 대군이 봉해진 밀성고을이 역사 문화적으로 어떠한 곳인지 간단히 알아본다. -밀양군(밀양시) : 경남 동북부에 있는 군으로서 원래 삼한 시대에는 변한(弁韓)의 일 부로 가락국(駕洛國)에 속했다. 신라 법흥왕때 병합된 후 밀성군으로 개칭되고 1390 년(고려 공양왕 때) 밀양부가 되었으며 조선말 1896년 갑오경장으로 13도를 실시 할 때 밀양군이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모직공업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며 1989년 1월1일 밀양읍이 시로 승격되었고 현재는 2읍 9면 5동에 면적은 799.3㎢요 인구는 131,000 여명이다.
《밀양시 연혁 》
삼한시대 ◦ 변진 24개국 중 “미리미동국”이라는 작은 부족국가로 추정되고 변한의 땅으로 가락국에 속하였다.
신라시대 ◦ 지증왕 6년(505)에 “미리미동국”을 신라에 병합하여 “추화군”을 두었다. ◦ 경덕왕 16년(757)에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군현의 명칭을 고칠 때 “밀성군”이라 하고 밀주의 관내에 소속시키면서 5개의 속현을 두었다.
고려시대 ◦ 성종14년(995)에 전국을 4도호부 10도로 구분할 때 경주와 함께 영동도(嶺東道)에 속했으며, 밀성군의 격을 높여 “밀주군”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2군(창녕군, 청도군) 4현(현풍현, 계성현, 영산현, 풍각현)을 관하에 두었다. ◦ 현종9년(1018) “밀성군사”로 칭하였다. ◦ 충렬왕 원년(1275) 조천의 반란으로 계림부에 속하다가 후에 “밀성현”으로 승격되었다. ◦ 충렬왕11년(1285) “밀성군”으로 승격되었다. ◦ 공양왕2년(1390) “밀양부”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 ㅇ 태조 원년(1392) “밀성군”으로 칭하다 태조 3년(1394) “밀성부”로 다시 환원되었다. ◦ 태종 원년(1401) “밀성군”으로 되었다가 태종 15년(1415) 주민의 호수를 기준하여 천호 이상의 고을을 모두 도호부로 만들게 되었는데 이때 “밀양 도호부”로 되었다. ◦ 고종 32년(1895) 칙령 제98호에 의거 23부제 실시로 소지역주의를 채택함에 따라 도이하의 부 · 목 · 군 · 현도 폐지되고 전국이 36군으로 개편될 때 “대구부 밀양군(시지역은 부내면)”으로 되었다. ㅇ 고종 33년(1896) 칙령 제36호로 경상남도 밀양군으로 개칭되었다.
근대 ◦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 관제의 공포와 동시에 조선총독부 지방관 관제가 공포되고 면제의 실시에 따라 1910년 10월 1일부로 “밀양군 밀양면”으로 되었다. ◦ 1914년 3월 1일 면의 명칭 및 구역이 합병되어 12면을 두었다. ㅇ 1931년 4월 1일 읍제 시행에 따라 부령 제103호로 대전, 순천, 안동 등과 함께 밀양면이 “밀양읍”으로 승격되었다.
현대 ◦ 1963년 1월 1일 법령 제1177호로 삼랑진면이 “삼랑진읍”으로 승격되었다. ◦ 1966년 7월 15일 군조례 제103호로 삼랑진읍 “임천출장소”가 설치되었다. ◦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3호로 하남면이 “하남읍”으로 승격되었다. ㅇ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50호로 밀양읍이 “밀양시”로 승격되어 밀양시(6동 28통 316반)와 밀양군(2읍, 9면)으로 분리되었다. ◦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밀양시, 밀양군 통합으로 “도 · 농 복합형의 밀양시”(2읍, 9면, 6동)가 설치되었다. ◦ 1998년 9월 21일 지방자치법 제4조 5항에 의거 인구 5,000명 미만 과소동 통합으로 “행정동 용활동을 내일동에 통합”(2읍, 9면, 5동)이 되었다.
- 문화축제 밀양아리랑제 : 밀양부사의 외딸인 아랑이 젊은 관노(官奴)의 요구를 뿌리치다가 억 울하게 죽은 것을 슬퍼하여 "아랑,아랑"하고 노래 부른데서 비롯되었는데 매년 5.16 ∼ 5.20까지 열린다. 밀양백중놀이 : 백중날 노는 민속놀이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밀양문화예술제 : 매년 10월 9일부터 13일까지 열린다.
ㅇ밀성대군 등 9왕자들의 계파 ─밀성대군(密城大君) : 휘(諱)는 언침(彦忱) 오늘의 밀성․밀양박씨(密城․密陽朴氏)다. ─고양대군(高陽大君) : 휘(諱)는 언성(彦成) 오늘의 고령박씨(高靈朴氏)다. ─속함대군(速咸大君) : 휘(諱)는 언신(彦信) 오늘의 함양박씨(咸陽朴氏)다. ─죽성대군(竹城大君) : 휘(諱)는 언립(彦立) 오늘의 죽산박씨(竹山朴氏)다. ─사벌대군(沙伐大君) : 휘(諱)는 언창(彦昌) 오늘의 상주박씨(尙州朴氏)다. ─완산대군(完山大君) : 휘(諱)는 언화(彦華) 오늘의 전주박씨(全州朴氏)다. ─강남대군(江南大君) : 휘(諱)는 언지(彦智) 오늘의 순천박씨(順川朴氏)다. ─월성대군(月城大君) : 휘(諱)는 언의(彦儀) 오늘의 경주박씨(慶州朴氏)다. ─고려 정종(定宗)때 국상공(國相公) : 휘(諱)는 교순(交舜) 오늘의 울산박씨(蔚山朴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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