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산 사성암, 정신대, 원효대사,
설총, 최부자 집
사성암
우리나라 사찰터 풍수지리설의 뿌리인 사성암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 물결을 따라가면 구례
사성암은 구례에 우뚝 솟은 오산(鰲山)에 있다.
[ 오산 & 사성암 ] 지도
[ 오산 & 사성암 ] 지도
연기(緣起), 원효(元曉), 도선(道詵), 진각(眞覺)
4명의 성인이 수도한 사찰이라 하여 사성암(四聖庵)
2005년 4월 21일 신라대렴공차시배지 기념비 제막식
해가 서산마루에 걸릴 무렵 사성암 주위 풍경은 아름답다.
60년간 사성암을 지켜온 김경례 보살은 7년 전 돌아가셨다.
김보살은 100여 마리 고양이를 키웠던 보살로도 유명한 분
김보살이 운명 후 하나, 둘 떠나
지금은 고양이가 한 마리도 없다.
'원효대사가 손톱으로 조성했다는 마애불.'
전각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볼 수 있다.
유리창을 통해 환하게 미소로 반기는 듯한 마애불
마애불이 왼손에 든 찻잔이 방문객의 눈길을 이끈다.
"아, 저것은 혹시 찻잔이 아닐까!!?'
대개 약사여래불 입상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약병.
따라서 이 불상의 경우에도 지금까지 '약병'이 정설.
그러나 일각에서는 찻잔의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
보성에서는 해마다 다향제가 열린다,
원효가 손톱으로 새긴 찻잔 든 마애불.
'그렇다면, 상호 관련이 있지 않을까?'
이곳 정상에 오르면 발 아래로 구례 오산과 사성암,
섬진강과 구례읍의 전경이 수채화처럼 펼쳐져 있다.
수십 개의 바위 기둥과 절벽들이 있어 소(小)금강산
사성암을 중심으로 풍원대, 망풍대, 배석대,
낙조대, 신선대 등 12비경이 자리하고 있다.
12비경을 따라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변 사이
구례읍에 잡힐 듯 시야에 다가오는 사도리촌
바로 여기서 한국 풍수의 시원을 연 도선국사
도선 국사가 만난 지리산 이인은 누구일까?
도선이 사성암에서 지리산 이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날 풍수지리설은 어떠한 형태로서 변형되었을까?
도선은 오산 정상에서 지리산 이인과 교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지리산 이인은 도선에게 구례천 아래 구령을 손짓.
"제가 세상 밖에서 숨어 산 지가 근 수백 년이 됩니다.
제게 조그만 술법이 있으므로 대사님께 바치려 합니다.
천한 술법이라 여기지 마시고 뒷날 남해의 물가에서 드리겠습니다.
이것도 역시 대보살이 세상을 구제하고 인간을 제도하는 법입니다."
지리산 이인은 도선에게 말하고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도선이 기이하게 여겨 남해 물가를 찾은 곳이 사도촌(沙圖村)
그처럼 구례는 한국풍수지리의 비원이 탄생한 곳이다.
연기 조사가 창건하고 도선이 머물렀던 오산의 사성암
원효가 찾아와 큰 암벽에 손톱으로 약사여래 입상을 조성.
이렇게 볼 때 사성암은 연기 조사가 맨 먼저 주석했고
그 뒤 원효와 도선 국사가 주석, 진감 국사 혜심이 안주.
차문화의 공간으로 볼 때 사성암은 도선국사가 주석
그 사성암에 원효대사가 찻잔을 새겨 놓았던 것이다.
그동안 사성암을 욕심 낸 수십 명 스님이 다녀갔다.
하지만, 사성암은 속된 생각을 하루도 용납 않는 곳.
사성암 오산으로 줄이어 찾아오는 페러 글라이더 처럼.
백운산 지맥이 구례읍을 향해 북향으로 솟다가
섬진강 변에서 우뚝 솟아 멈추어 선 곳이 오산.
오산을 오르는 차량마다 허덕거릴 만큼 오르막길.
오산 사성암 곁에 있는 패러 글라이딩 활강장.
섬진강 위 허공을 향해 달려가는 패러 글라이더.
이륙 순간에 풍향이 바뀌면 구경꾼들 가슴도 철렁.
'삶과 죽음 사이를 활강하는 패러 글라이더.'
현실에서 미래의 내세를 추구하는 불교신자.
사성암 계단마다 불자들이 놓고 간 기왓장들.
수많은 기왓장마다 그들의 염원이 담겨있는 곳.
'패러 글라이더들과 불도들의 묘한 앙상불.'
........................................
........................................
사성암을 사수했던 김보살의 애잔했던 삶.
김경례 보살은 1915년 전북 남원군 운봉면
아영리 성니 마을 두메 산골에서 태어났다.
가난했지만 부모와 함께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
그런데 17살 꿈 많은 처녀 시절에 찾아온 불행.
1931년 일본은 조선인 장정의 강제징병과 정신대 모집
일제의 마수는 그녀가 살고 있는 두메산골에도 뻗쳤다.
그녀가 일본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피신한 화엄사
화엄사에서 2년간 스님들 빨래를 해주면서 지냈는데
그무렵 일제 하에서는 스님이 각시를 얻어도 되었다.
당시 그녀는 19 꽃다운 나이라 한창 어여쁠 때 였다.
노승은 그렇지 않았는데 젊은 중은 그녀를 추근 추근.
당시에는 각시를 2~3명씩 데리고 산 스님들도 있었다.
그녀는 49세 대처승 이용산 스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밥해주고 빨래해주다가 20세 되던 해에 사성암에 왔다.
한번은 부처님 앞에 푸짐하게 차려놓고 절하라던 대처승.
그날 그일이 김보살에게는 결혼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화엄사의 말사였던 사성암
마땅히 관리할 스님이 없어 폐허
종단에서 화엄사 스님 한 명을 파견.
그가 김보살이 모시던 이용산 스님.
그당시 다 쓰러져 갈 정도의 사성암.
53 부처를 모셔 혼자도 겨우 누울 비좁은 방.
그 방에서 그녀는 이용산 스님과 함께 지냈다.
53 부처를 모신 비좁은 법당 방에서의 신혼생활.
23세 되던 해 친정 논 5마지기 팔아 불사를 시작
그후 80세까지 고양이와 함께 사성암을 지킨 60년.
처음 사성암에는 불상이 35불 밖에 없었다.
나머지 불상들은 태안사에서 옮겨왔다 한다.
53불은 높이가 53m에서 작은 것은 36cm까지.
조성 연대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로 본다.
사성암은 544년(성왕 22년) 연기조사 창건
원래 오산암이었는데 네 명의 고승이 수도.
그리하여, 오성암에서 사성암으로 바뀌었다
김보살이 운명한 후 사성암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사성암에 길이 놓이고 단번에 구례 제일의 기도 도량
오늘날 사성암은 참배 인파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사성암에서 특이한 점은 이름을 쓴 수많은 기와장.
지붕위에 있지 않고 발걸음 아래 곳곳에 널려있다
돌계단 곳곳의 기와들은 가족의 행복을 비는 바램들.
그 기와장 하나 마다 불자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듯.
그 기와들은 탐방객에게 특이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다른 사찰에서는 구경할 수 없었던 풍경이기도 하다.
불자가 아니라도 이곳에 서면 사라지는 마음속 시름.
정신대(挺身隊).
일제가 2차대전 당시 동원한 여성 종군 위안부.
1910년 한일합병 후 강간 대상이 된 이조 여인들
1932년 상하이 사변이후 일본군의 강간행위가 빈발
오카무라 야스지 중장은 나가사키 지사에게 위안부 요청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전쟁터에 위안부를 끌어들인 첫 시기
그후 1937년 난징 대학살 사건 때 일본군이 일반시민을 강간
일본군 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종군 위안부 정책을 취한다.
특히 이조여성은 유교관념이 투철해 성병이 없으리라 판단
미혼의 이조 여성을 종군 위안부의 적당한 대상으로 정했다.
근로 정신대는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을 충족하기 위한 정책
제사·방직공장의 이조 여성들을 동원해 노동력을 착취했다.
<모집과 동원>
중일전쟁이 확대된 후인 1937년 8월 24일 일본 각료회의
여성도 전쟁에 참여하는 '국민정신 총동원 실시 요강'가결
1941년 11월 '국민근로보국 협력령'에 따라 14~25세 여성들.
연간 30일 이내의 국민 근로보국 대협력 활동을 하도록 했다.
1942년 8월 국민징용령 제2차 재정에 따라 여성들 징용 가능.
자주적 참여를 원칙으로 이조 여성들의 근로동원이 실시되었다.
1943년 9월 17개 직종에 관한 남자취업이 제한 또는 금지되고
여성을 취업하게 하는 '여자 근로동원 촉진에 관한 건'을 결정
'여자근로정신대'를 자주적으로 편성시켜 여성들의 동원을 도모.
정신대는 1~2년간에 걸친 장기동원이었다.
1944년 8월 '여자 정신대 근무령'이 공포
1년 동안의 정신 근로를 법으로 강제 동원
1941년 12월 이후 이조에서 여자몰이가 본격화되어
지원과 동원을 위한 강연회와 회의가 계속 이어졌다.
1942년 5월 발송된 '제2차 특별요원 진출에 관한 조회' 문서
병사 29~35명당 1명의 군대 위안부가 계획되어 그 수를 배당
군부는 필요한 인원수를 산출해 면사무소 등을 통해 동원령.
"군인들의 심부름하는 일"이란 말로 속여
10대 후반에서 20대 이조 여성들을 모집했다.
1937년 중일전쟁부터 본격적으로 끌려간 정신대.
모두 17만 ~ 20만명 가운데 80%가 이조 여성들.
< 정신대 활동.>]
정신대는 노동력을 주로 착취당한 근로정신대
성적인 착취를 당한 종군위안부로 나뉘어졌다.
그러나, 근로정신대로 차출된 이조의 여성들
강요에의해 위안부를 해야 했던 것으로 추정.
근로 정신대는 일본의 도야마 시즈오카 등지와
대구·부공장과 방직공장에서 하루 14시간 노동.
임금도 제대로 못 받고 굶주리며 노동력만 뺏겼다.
종군위안부 경우는 중국·일본·동남아시아로 끌려가
군 감시와 통제 아래 군인들의 성욕을 해소하는 역할
미얀마, 트랙 섬, 필리핀, 테니안 섬, 마리아 군도,
수마트라, 셀레베스, 인도네시아, 오키나와[沖] 등
각지마다 종군 위안소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이 된다.
위안부의 배치와 유지관리 막사 등도 군이 준비한 것
위안소의 규정을 보면, 30분 이상 머물 수 없다는 명시.
콘돔을 착용하지 않으면 여자를 가까이 할 수 없다고 명시
위안부들은 보통 하루 12시간 정도 군인을 받는데,
이른 시간에 병사 하사관, 밤엔 장교를 주로 받았다.
월 3회가량 성병검진을 정기적으로 받았고
외출 등의 사적인 행동은 엄하게 규제했다.
전쟁에 지쳐 있는 군인들의 유일한 '놀이감' 위안부
일본인 매춘 여성도 있었으나 이들은 돈을 선불받고
그 돈을 갚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조건이었다.
반면 이조 여성 위안부는 달랐다.
그만 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조건.
한번 들어가면 빠져 나올 수 없는 곳.
"흰 쌀밥을 배불리 먹고 돈을 번다"
그 말에 속아 갔거나, 강제로 끌려가
하루 30~100명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육체적인 고통.
특히, 정절을 목숨처럼 여겼던 정조관념
남녀칠세부동석 전통적인 고루한 유교관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성을 상대하는 일.
'수치심으로 자살한 위안부도 상당수.'
<패전 후 위안부의 처리와 생활>
종전 후 위안부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던 일본.
군 내부의 공창단까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우려
일본은 위안부 증거 인멸을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종군 위안부에 관한 각종 문서와 자료들의 인멸
중국 동남아 남양군도 위안부들을 현지에다 방치.
또는 참호에 가둬놓고 폭파해 일본군과 함께 옥쇄.
중국은 각지의 징병 학도병 징용부 등과 함께
종군 위안부를 상하이에 집결시켜 귀국시켰다.
그러나, 일부 위안부는 비관 자살, 귀국 거부.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라 현지에서 정착.
운이 좋아 살아 귀국한 경우에도 성병의 후유증
또는 대인관계 기피증, 불면증으로 시달린 위안부.
그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마음 고생도 많았다.
대부분 결혼도 하지 못하고 잡일로 하루 하루 연명.
설령 결혼하더라도 원만한 가정을 이루기 힘들었다.
<일본의 태도와 대응책>
정신대 배상요구에 일본은 방관하는 태도로 일관.
19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으로 끝났다고 주장.
1965년 '김종필 오히라' 청구권 협정으로 완결 주장.
1992년 1월 일본 육군이 위안소 관리일지 발견.
일본이 위안소 감독과 통제에 관여한 증거 포착.
종전까지 일본은 정부와 군의 개입을 거부해왔다.
그리고, 위안소는 민간인의 상행위로 전가했다.
1992년 2월에 발견된 정신대 강제동원 관련문서.
일본 국왕이 재가해 공포한 '여자 정신대 근무령'
일본정부가 정신대 강제모집에 깊숙히 개입.
정신대를 모집하고 관리한 사실도 드러났다.
1988년 한국교회 여성 연합회 정신대 연구 팀
후쿠오카에서 오키나와까지 답사하며 표면화
1990년 발족된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이러한 문제를 규명하려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가
일본 정부에 보낸 공개서한 내용.
일본은 정신대 사실 인정과 사죄,
피해 유족과 생존자에 대한 배상,
역사 교과서에 정신대 사실 명기
일본 정부는 정신대에 관한 개입사실을 부정
책임 회피성 발언으로 일관하는 태도를 취했다.
1991년 8월 김학순 씨
정신대 최초 증언자로
국내에서의 기자 회견
같은 해 9월 정신대 신고 전화 개설에 힘 입어
근로정신대와 종군위안부 신고가 들어오고 있다.
1992년 1월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의 방한 반대
일본 정부의 정신대 진상규명과 배상을 요구하는 시위
이를 계기로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정기 시위
1990년 7월 발족된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산하에 '정신대 연구회의'의 지속적인 연구활동
자료집 발간 사업으로 정신대 문제를 새롭게 조명
정신대 문제를 역사 기록으로 남기려는 움직임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듯.
덧 말.
정신대 강제 동원을 피하려 사찰로 숨어든 당시 처녀들.
스님과 혼인해서라도 정신대 동원령을 모면하려 했던 듯.
일제치하 태평양 전쟁 당시 여러 부인을 거느렸던 고승들.
'정신대 강제동원을 모면하게 해주려던 조치였던 듯.'
..................
세계 제 2차 대전
..................
세계 경제공황 후 강대국들이 참여한 전쟁(1939~45).
전쟁을 일으킨 중요 주축국은 독일·이탈리아·일본
그에 맞서 싸운 프랑스 영국 미국 소련 중국 연합국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남겨둔 분쟁의 씨앗.'
20년 잠복기를 거쳐 다시 폭발한 제2차 세계대전
이 전쟁은 유럽 대륙 전역뿐 아니라 태평양의 섬들,
중국과 동남아시아, 북아프리카, 세계의 바다로 확산
그 결과 소련은 동유럽 여러 나라까지 세력을 확산.
중국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고 세계 열강 판도의 변화.
서유럽 국가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옮겨가는 결정적 계기
4,000만~5,000만 사망자를 낸 제2차 세계대전
인류 역사상 가장 최악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추축국 선제 공격과 연합군 대응으로 전쟁 발발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과 연합군의 이동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 국민의 굴욕감
나치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을 초래했다.
1933년 히틀러는 집권하자 은밀히 독일을 재무장
히틀러는 1936년 3월에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고
1936년말 에티오피아를 침략한 이탈리아와 동맹체제
독일 이탈리아는 반공 명목으로
1936년부터 스페인 내란에 개입.
1938년 3월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점령했고,
1939년초 폴란드를 침공·점령하기로 결심했다.
폴란드는 독일이 공격해올 경우
프랑스 영국의 군사원조를 보장
히틀러는 소련과 비밀협상을 벌여,
독일과 소련간 불가침조약을 체결.
양국은 폴란드를 동서로 나누어,
1/3에 해당하는 서부는 독일이 갖고
나머지 2/3 동부는 소련이 갖기로 합의.
8월 25일 영국과 폴란드가 정식 상호원조 조약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을 며칠 연기했다가 공격.
하여,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
'이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
1939년 9월 무렵 연합국(영국 프랑스 폴란드)
산업 자원과 인구 및 병력 면에서 모두 우세,
독일군은 무기와 훈련, 작전이론, 규율 및 사기
세계에서 가장 능률적이고 전투적으로 강한 군대.
독일군 보병사단의 질적인 우세와 강력한 기갑사단.
독일 공군도 1939년 당시 세계 최고였다.
독일 해군은 연합국 해군보다 열세인 상황,
폴란드는 약 5,760km에 이르는 엄청나게 긴 국경
전쟁이 일어나자, 폴란드 육군은 100만 병력을 동원
그러나 폴란드는 장갑차, 대전차포, 대공포도 없는 상태.
독일 공군은 폴란드 공군보다 10배나 전력이 막강.
9월 17일 소련군이 서쪽 국경을 넘어 폴란드로 침공.
독일군은 민간인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비오듯 포격.
독일군은 총 70만 명을 포로로 잡았고,
폴란드 병사 8만 명이 국경을 넘어 탈출.
독일군은 4만 5천 사상자를 내고 폴란드 점령.
러시아-핀란드 전쟁
독일과 협정으로 짧은 기간에 큰 이익을 얻은 소련
1939년 11월 30일 핀란드를 공격했으나 격퇴 당했다.
핀란드의 많은 호수와 숲 천연장애물을 과소평가한 탓.
서구 열강은 소련이 맛본 굴욕을 공공연히 기뻐했다.
핀란드 승리로 서구 국가는 소련 군사적을 과소평가
그러나 소련은 1940년 3월 마침내 핀란드를 점령한다.
핀란드는 이 전투에서 약 7만 사상자,
소련은 2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폴란드 침공에 성공과 히틀러는
다른 나라를 정복할 계획을 수립
노르웨이에 30만 주둔군을 배치했다.
히틀러는 노르웨이를 점령함으로써
스웨덴에서 독일로 오는 철광석을 보호
영국을 공격할 해군 및 공군 기지를 확보.
독일군은 노르웨이 진군과 동시에 덴마크를 점령.
1940년 5월 10일 서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대공세.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단숨에 휩쓴 뒤 프랑스로 진격.
80만 프랑스 상비군은 당시 유럽 최강의 군대
그러나, 독일군의 적수가 못된 프랑스, 노르웨이.
히틀러의 빠른 공격으로 영국 원정군은 유럽에 고립.
19만 8,천 영국군과 14만 프랑스군 및 벨기에군이 구조
대부분 전투 경험이 많은 병사들
이후 연합국 전력에 귀중한 보탬.
무솔리니는 프랑스 붕괴를 보고,
독일과 맺은 협력 관계를 강화한다.
국익을 위해 프랑스와 영국에 선전포고
독일군은 1940년 6월 14일 파리에 입성했고,
프랑스의 휴전 요청이 히틀러에게 전달되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휴전협정이 르통데에서 조인.
프랑스와 이탈리아 휴전협정은 6월 24일 조인.
독일군 점령 지역은 프랑스 북부지역 전체였다.
비점령지 남동부 지역은 프랑스 전 영토의 2/5
1940년 6월 프랑스의 붕괴는 영국 해군에 심각한 문제
막강한 프랑스 해군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탈리아 해군도 영국과 싸우고 있었으므로
프랑스 군함들이 독일 수중에 들어가면 영국은 패배.
영국은 항구에 정박해 있는 모든 프랑스 군함을 압류.
프랑스 점령으로 유일하게 남은 적은 영국뿐.
그러나 영국해협이 있어 접근조차 어려운 영국.
독일 공군과 영국의 공중전은 영국 공군의 승리
히틀러는 원래 1943년 소련을 기습할 작전계획
1940년 7월 영국이 저항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미국이 독일에 대해 점점 더 비우호적인 태도
1941년 5월 독일은 소련의 유럽점령에 동참.
독일의 전력을 영국에게 과시해
미국이 유럽개입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다시 한번 계획을 바꾸어야 했다.
미국은 폭력과 맞서 싸우는 세력에 물자제공을 선언.
이 정책에 따라 미국은 독일과 싸우는 영국을 도왔다.
루스벨트는 낡은 구축함 50척을 영국 대서양 기지와 교환
미국의 잉여 전쟁물자를 영국에 넘겨주고 13조 달러를 지원.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영국의 상황은 당장 유리하게 바뀌었다.
그때까지 영국의 장래는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영국을 구해준 것은 히틀러였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을 도운 미국.
독일의 기습 공격에 소련은 완전히 허를 찔렸고
소련군은 후퇴하며 농작물을 불태우고 다리를 파괴
독일군은 소련의 철도망과 군수물자를 쓸 수 없었다.
독일군은 640km를 진격하여, 모스크바 320km에 육박.
10월과 11월 추위에 직면해 얼어죽는 동상자가 속출.
이미 프랑스 전투와 발칸 전투 사상자 수를 넘어섰다.
11월까지 독일군은 약 73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소련은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독일군에 반격을 개시.
한편, 중국에서 오랫동안 계속된 전쟁에 싫증난 일본
유럽의 상황을 이용하여 동아시아 유럽 식민지를 강탈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영국이 차지한 말레이 반도는 주석·고무·석유의 생산지.
일본은 미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
미국 전투함 70척과 보조함정 24척 및 300여 대 항공기
그중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2,000명이 넘는 장병이 사망.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은 바다에 있어 피해를 모면
진주만 해안 군사시설과 유류 저장 설비도 피해를 모면.
일본은 필리핀 동남아시아와 미얀마 대부분 지역을 점령.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태평양의 많은 섬들까지도 점령했다.
1942년 4월 18일 미군 폭격기 16대가 도쿄(東京)를 공격.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으로 일본이 참패.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세계 2차 대전은 종식된다.
정부 관련국이 쏟아부은 전비는 1,000조 달러
전쟁으로 인한 불행과 고통 및 혼란은 그 이상.
'제 2차 세계 대전' 여파로 일어났던 6.25 전쟁
1950년대 우리나라 정세에 큰 영향을 끼친다.
세계 민주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간 사상전.
특히, 지리산 일대는 치열한 사상전에 휘말린다.
원효대사.
원효(617-686)는 한반도 불교가 낳은 불멸의 성사(聖師).
세계 불교사에 있어서도 원효의 위치는 찬란하게 빛난다.
이름 그대로 민족의 첫 새벽을 열어간 원효
그의 저술은 100 여종 240여권(또는 86부 180권)
법화경종요, 대승기신론, 화엄경소 등 수많은 불전.
그는 거사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고
석공들의 쇠칼과 쇠망치를 가지고 다니며 글을 새기고,
<화엄경>에 대한 해설서를 지어 그것을 강의하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여염집에서 유숙하기도 하고
혹은 명산대천을 찾아 좌선하기도 하는 등
어떤 일정한 틀에 박힌 생활태도가 없었다.
신라의 승려인 원효는 617년 진평왕 때 경북 경산 출생.
남달리 총명해 10세 출가 때부터 스승따라 경전을 배웠다.
15세에 불교의 진리를 담고 있는 삼학에 능통하게 되었고
화랑으로서 여러 전투에 참가하며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삶에 대한 반성과 속세의 허무감 때문에 승려가 되기로 결심
29세에 황룡사에 출가 불교통합과 실천을 통한 대중화에 심혈.
34세에 의상과 함께, 당나라 요동까지 유학갔다가 실패.
현장 법사와 규기 화상에게 유식학을 배우려다 첩자로 몰려
여러 날 옥에 갇혀 고생하다가 겨우 풀려나 신라로 돌아왔다.
10년 후 45세 때 두 번째로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 시도.
백제 항구로 가는 도중에 비를 만나 산속 토굴에서 하루 밤
토굴속 고인 물로 갈증을 해소했는데 물맛이 달고 시원했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보니 토굴이 아니고 오래된 공동묘지.
물을 떠서 마시던 그릇은 해골이고 마신 물은 인골 썩은 물.
이 때 해골에 괸 물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깨달음.
"모든 깨달음은 마음속에 있다."는 진리를 깨닫고 유학을 포기
그가 깨달은 진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 나누어주려고 애썼다.
그는 남루한 옷을 입고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중생을 구제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불교는 대중에게 널리 전파
신라가 삼국통일하는 정신적인 기둥이 되었다.
그는 항상 열심히 배우려는 자세로 노력하여
유학, 불교, 도교에 대해 많은 지식을 쌓았다.
성인이 되어서는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다.
원효는 경학뿐 아니라 유학도 당대 최고의 선지식.
한 때 파계하여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았고
'무애가'를 지어 부르며 대중속에 파고들어 불교 전파.
당나라 금강삼매경을 왕과 고승들 앞에서 강론하여 존경
우리나라 불교사상 가장 훌륭한 승려로서 추앙 받고 있다.
원효의 사상에는 일심사상, 화쟁사상 그리고 무애사상.
일심사상이란, 모든 진리는 결국 하나의 진리로 통한다.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화쟁사상이란 두 가지 이상의 다른 견해가 있을 때
서로 다른 견해를 융섭의 이념에 의하여 화해시키고
회통시켜 큰 법의 바다로 귀납시키는 것이 화쟁사상.
무애사상은 그의 사생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이었다.
“일체에 걸림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
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이 아닌 하나로서 보았다.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라고 하였다.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衆生心)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 자유인이 되었으며,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과 일심을 주장한 독자적인 사상관
......................................................
......................................................
북한산 대서문 방향에서 오르면 왼쪽이 원효봉이다.
대서문 오른쪽 의상봉과 좌청룡 우백호처럼 마주본다.
원효와 의상이 어린 시절 동문수학하며 수도를 하던 곳.
원효봉은 원효의 서민적인 사상세계를 깨닫게 하는 산세.
의상봉은 의상의 학처럼 고고한 기품을 깨닫게 하는 산세.
원효는 의상과 더불어 한반도 불교 역사상 최고의 고승이다.
원효의 관념에서 보면 유교 불교 도교는 셋이 아닌 하나.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이조 초반까지 그 맥은 이어져왔다.
.......................................................
.......................................................
원효대사는 차를 즐겨마신 것으로 전해 내려온다.
신라시대에 차 문화가 성행했음을 알수 있는 증거.
우리나라에 차가 언제 들어왔는지 정확하게 모른다.
김해 김씨 후손들은 가락국 시대에 들어왔다고 믿고있다.
차 잎이 움트는 3월 가락국 왕궁에서 제례에 사용했단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보면 661년 신라 30대 법민왕
수로왕 제사때처럼 술과 단술을 만들고, 떡, 밥, 차 과자
따위의 제수로 제전을 거르지 않게 했다는 기록에 근거.
이 기록을 보면 이미 가락국에 차가 존재했다는 증거.
김수로왕의 부인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차씨.
우리나라 최초 차 문화는 가락국에서 시작된 듯 싶다.
'삼국사기'에는 흥덕왕 3년 대렴이 당나라에서 차씨를 가져와
왕은 지리산에 심게 하였고 이때부터 차문화가 성행했다는 기록.
신라의 차는 떡차, 가루차, 잎차가 있었는데 떡차를 많이 마셨다.
서기 640년 선덕여왕은 화랑들과 다유회를 즐겼다.
떡차를 마시면서 화랑들과 담소를 나누었다는 기록.
차는 신라 사회 깊숙이 중요한 문화로 자리잡은 듯.
신라 화랑들은 경포대 하송정에서 차를 끓였다는 기록.
<남행월일기>에 원효대사와 사포스님에 관한 차이야기.
원효대사를 모시던 사포 스님이 원효 스님께 차를 공양
신라에서 차를 즐긴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로는 원효대사,설총,
지장법사, 보촌과 효명태자, 최치원, 충담사, 월명스님 등이다.
오늘날 스님들이 차를 즐겨 마시게 된 유래는 신라시대부터 인듯.
설총.
신라10현(新羅十賢)의 한 사람,
최치원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
아버지는 원효, 어머니는 요석공주.
태종무열왕 때인 654~660년 출생.
천성이 명민(明敏)했으며
경사(經史)와 문학에 능통.
〈삼국사기〉열전 제6에
설총이 신문왕의 요청으로
우화를 지어 들려 준 내용.
"국왕에게 아첨하는 여인의 애교보다
정직한 신하의 충고에 귀를 기울일 것"
전제정치 하에서 유교적인 도덕정치 이념을 주장
설총은 6두품 출신으로서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왕의 총애와 신임을 얻어 정치적 진출을 이루었다.
682년(신문왕 2) 국학(國學)의 장인 경(卿)이 설치되자
국학이 교육기관으로서의 정식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는데,
설총은 이러한 국학의 설립과 교육에도 크게 공헌한 듯.
그는 구경(九經)을 우리말(方言)로 읽어
학생들에게 강론해 유학 발전에 기여했고,
중국 문자에 토를 다는 방법을 만들어서
당시 중국 학문 섭취에 도움을 주었다.
후세, 특히 고려 말기에서 조선시대로 들어와
설총이 우리말로 경서를 읽는 방법을 발견했다.
하여 이를 이두(吏讀)의 창제로 보는 견해가 대두.
그러나 이두 기록이 이미 그전부터 나타난 점으로 미루어
설총은 이두를 창제한 것이 아니라 정리 집대성한 듯 하다.
글을 잘 지었다고 하나, 비명(碑銘) 몇 점 외 남아있지 않다.
'오늘날 그의 저서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719년(성덕왕 18)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를 지었다.
고려시대인 1022년(현종 13) 홍유후(弘儒侯)에 추봉.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경상남도 경주 서악서원에 제향
............................................
.............................................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유교학자.
신라 때 이두문자를 집대성해 한글이 있게 한 학자.
원효대사는 어떤 사연이 있어 설총을 낳게 되었을까?
두 사람의 사랑은 우리나라 역사 상 10대 로멘스.
원효는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여위는 아픔을 겪었다.
남다르게 정 깊은 심성이라 전투와는 거리가 먼 원효.
'화랑의 길을 택했다가 중도에 황룡사 행.'
불교에 심취하며 승려가 되며 이름도 원효로 바꾸게된다.
고승을 찾아다니며 불도를 닦고 많은 것을 배우려던 원효.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던 중 동굴 속에서 하룻밤을 잔다.
동굴에서 달게 마신 샘물이 다음날 보니 인골 뼈속의 물.
인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유학을 포기한다.
그후 어려운 중국 불경 서적들 해석에 일가견
무열왕은 그 높은 인품과 실력에 감복하게 된다.
하여 국가적인 행사에는 꼭 원효를 부르게 되었다.
때로는 먼발치에서
때로는 가까이에서
원효를 본 요석공주.
공주는 사모의 정이 나날이 깊어가지만
원효가 승려였기에 애달픈 심정만 가득.
마침내 원효에게 모란꽃과 승려복을 선물.
원효는 공주의 속마음은 읽었지만
승려라 속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다.
공주는 고민끝에 연모의 정을 아버지 무열왕께게 토로.
만약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고 싶다고 고백한다.
무열왕은 딸인 요석공주의 고백을 듣고서 난감한 입장.
한편, 원효도 공주의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려 답답함
거리를 방황하며 뜻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다닐 정도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려나.
하늘을 바칠 기둥을 찍어 내려네."
거리의 사람들은 원효의 말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원효의 뜻모를 말은 얼마 후 무열왕에게도 전해졌다.
무열왕은 그 말을 듣고야 원효의 속마음을 짐작한다.
'혹시, 원효가 아들을 낳으려는 뜻 아닐까?'
'나라에 큰 인물을 얻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으랴.' -진평왕.
무열왕은 신하에게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라 명.
신하는 남천 다리에서 만난 원효를 개울에 빠트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까운 요석궁으로 원효대사를 인도.
일찌기 남편을 백제 전투에서 잃고 홀로 지낸 공주.
남천에서 가까운 요석궁은 요석공주가 홀로 사는 곳.
원효는 그곳에서 젖은 옷이 마르기까지 머물게 된다.
그곳에서 젖은 옷이 마르기를 기다리던 원효.
원효의 젖은 옷을 벗게하고 새옷을 내민 공주.
그동안 서로의 마음속 연민의 정이 봇물 터지듯.
꿈과 같은 3일 동안을 요석공주와 함께 보낸 원효.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설총.
그후 하늘을 떠받칠 재목이 된 설총.
하루밤 사랑이지만 역사에 남는 로멘스
그후 원효대사는 어디로 떠난 것일까?
소요산 계곡의 바위벽 석굴 옆 원효폭포
그곳에서 속리교 건너 오른쪽 정상 공주봉
그후 원효는 속복으로 바꿔 입고 소성거사라 자칭.
많은 중생을 교화하며 불교를 대중화시키는데 전념.
그후 원효대사는 소요산에 와서 은둔
그 은둔처가 자재암 앞 석굴인 나한전.
요석공주는 공주봉 밑 별궁에서 살면서
설총으로 하여금 매일 일주문에 나아가
원효대사가 은둔하고 있는 석굴을 향해
절을 하게 했다는 봉우리가 바로 공주봉.
.....................................
.....................................
그후 요석궁은 어떤 곳으로 변했을까?
이조 말엽에 경주 최씨 가문에서
옛 요석궁 자리에 저택을 지었다.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람을 하며,
나라 잃은 울분을 달래며 경주를 찾았을 때,
이들은 대부분 최씨 집을 방문하여 머물렀다.
최씨 집에 머물며 대접받은 전통요리.
그 맛과 멋으로 입소문이 나게 되었고
그 솜씨는 더욱 더 유명해지게 되었다.
고종황제의 아들인 이강 왕자는
훌륭한 음식을 즐기며 머물렀단다.
지금은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멋이 배인 한옥.
.....................................
.....................................
호젓한 요석궁의 뜰악의 운치있는 소나무
그 아래에 앉아 여름날 먹는 팥빙수 한그릇
그것만으로도 경주 여행에서의 커다란 즐거움.
이조시대 300 년간 만석꾼 최부잣집 경주 고택.
그 요석궁 터는 원효가 공주와 만나 사랑을 나눈 곳.
남천 개울을 지나다 빠진 원효가 젖은 옷을 말리던 곳.
그 공주가 신라 진평왕의 둘째딸인 요석공주.
평소 원효를 흠모했고 불심이 깊었던 요석공주
원효는 젖은 옷을 말려주던 공주와 사랑.
그곳에서 3일간 머문후 요석궁을 떠난 원효.
....................................................
....................................................
여름날 시원한 팥빙수의 맛과 같은.. 전설
.....................................................
......................................................
그 사이에서 태어난 설총은 신라 경덕왕 때 학자.
6두품 출신에 관직은 한림. 신라 십현(新羅十賢),
경주 설씨의 시조이고 출생시기는 태종 무열왕 대.
삼국통일 전후 무학은 왕실, 귀족 서민도 인도할 대상
원효는 설총을 낳고, 승복을 벗고, 小姓居士라고 자처.
그러나 그 파계의 소생이 우리나라 최초 유교학자 설총.
공자에서 유래된 유교 이념은 나라를 잘 다스리는 사상.
석가모니로부터 유래된 불교는 중생을 잘 제도하는 종교.
신라 왕실에서부터 불교와 유교가 공존했음을 알 수 있다.
"더럽고 깨끗함이 둘 아니고,
진리와 세속이 본래 하나이다."
이미 그것을 깨달은 원효에게 성(聖)과 속(俗)의 구별은 무의미.
당시의 승려들은 대부분 왕실과 귀족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귀족생활.
그러나, 원효는 전국 방방곡곡 시장 뒷골목을 세속인 모습으로 다녔다.
'누가 그런 원효를 국사로 알았을까?'
그는 겸손한 성자였고 민중의 벗이었다.
천민, 부랑자, 거지, 어린이까지 따랐다.
그는 아직도 우리 민족의 정신과 한국사상.
그 새벽을 열어 놓은 인물로 여전히 살아있다.
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다.
무릇 중생의 마음은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바다
모두가 다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
그는 자유가 중생심(衆生心)에 있다고 보았고,
그는 어느 한편의 종파에도 치우친 적이 없었다.
통일신라 불교의 대중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
원효대사는 의상대사와 쌍벽을 이루는 고승이었다.
태종이 궁리(宮吏)에게 내린 왕명(王命)을 기록한 칙(勅)'
설총은 7세기 650 년경 경주 요석궁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았던 요석궁이 오늘날., 최부자집
최부자 집.
최씨는 우리나라 역사 상 가장 오랜 씨족 중에 하나
최씨는 역사상 많은 인재를 배출한 전통있는 명문가문.
최씨 특유의 '기개, 신념, 절조, 최고집'을 비롯
"최씨앉은 자리에 풀도 안난다 " 등 애칭도 낳았다.
최씨 원조는 신라 전신인 사로 6촌 중
돌산 고허촌 사량부 촌장 소벌도리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57년경 유민들이
여러 산골짜기에 살며 여섯 마을을 이루었다.
신라 3대 유리왕 9년(32년)봄, 6부를 개정한다.
알천 양산촌장 알평에게는 이씨[李氏].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에게는 최씨[崔氏],
무산 대수촌장 구례마에게는 손씨[孫氏],
취산 진지촌장 지백호에게는 정씨[鄭氏],
금산 가리촌장 기타 에게는 배씨[裵氏],
명활산 고야촌장 호진 에게는 설씨[薛氏]
각각 성을 내려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유사엔 6촌장이 하늘에서 내려온 기록.
그러나 실제 시조는 소벌도리의 24세 손이며,
신라 말기 대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을 주축
선대 및 후대에서 분파되었다고 보면 정확하다.
문헌에 의하면 최씨는 387본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거의가 지명이고 실제 시조가 확인된 것은 43본이다.
소벌도리 24세손 최치원 윗대에서 분파된 본관
개성, 삭녕, 동주(철원), 전주(군옥파)가 있고,
최치원의 후대에서는 함양, 청주, 영흥, 충주,
용강, 수원, 부안, 강릉, 강화, 탐진, 전주(순작,균)
분파 기록으로 보아 거의 모든 최씨가 소벌도리 후손
경주 최씨를 원조로 하는 소벌도리와
최치원을 잇는 최씨 후예가 틀림없다.
신라시대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3이 당나라에 유학
최치원 같은 문장가는 동양사에서 보기 힘든 지성(至聖)
고려사를 보면 서기 1196년~1258년까지 60여년간 군벌정치
한때 최씨 왕국을 방불케했고 명장 최영 장군이 그 한 예.
국내 혼란기마다 평정하여 시련을 극복하고 나라에 공헌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충절은 최씨 가문의 특성이다.
경주시 교동 최부자집은 12대 만석군, 10대 진사로 유명.
문공부가 1969년 신라의 집으로 선정하고 보존하기로 했다.
마지막 만석군 최준은 이조 청백리 정무공 최진립의 11세손
상해 임시정부에 100억원(현재 기준)을 보내어,
백범 김구선생이 제일 먼저 만나보고 싶어했다.
당시 최준은 조선총독들이 문교부장을 요청했으나
끝내 거절하였고 특히 육영사업에 많은 투자를 했다.
그 예로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을 설립하였고
보성전문(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 건립 등등의 업적.
이조 명종, 선조, 인조 등이 내린 전교.
"최치원은 우리 동방의 이학 시조
그의 자손들은 귀천을 불문하고
군역[軍役]에 동원하지 마라"
이렇게 대대로 나라에 공헌하고
근대사회 발전에 앞장선 최씨 가문
..................................
...................................
'베푸는 삶.'을 실천한 참다운 부자.. 최부자 집 가문.
전란 위기마다 가난한 이웃이 앞장서 보호했던 최부자집
최부자집의 전통을 통해 부(富)의 참 가치를 조명해보자.
......
가훈
.......
'부자 3대를 못 간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경주 최부잣집 만석꾼 전통은 무려 300년
1600년대 초에서 1900년 중반까지 12대로 이어졌다.
1950년 전 재산을 영남대 전신 ‘대구대학’에 기증
미래 한반도 역사에도 길이 남을 본보기..전통.
300년 넘게 부를 유지한 비결은 최부잣집..가훈.
황금만능주의 현대사회에서 가슴에 손을 얹게 한다.
최부자 집 가훈
절대 진사(제일 낮은 벼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
높은 벼슬은 당쟁에 휘말려 가문이 화를 당한다는 뜻.
재산은 1년에 1 만석(5천 가마니) 이상을 모우지 말라.
지나치게 재산을 모우다 보면 욕심이 화를 부른다는 뜻.'
1 만석 이상 재산은 이웃에 돌려 사회에 환원하라.
2. 나그네가 찾아오거든 누구이든 후하게 대접하라.
3. 흉년에는 어려운 이웃들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흉년 때 먹을 것이 없어서
남이 싼값에 내놓은 논밭을 사서
그들을 원통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
4. 며느리가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새 며느리 스스로 어려움을 겪고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는 뜻.
5. 사방 100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특히, 흉년에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양식을 풀어라.
결국, 그로 인해 동학란 여순반란 사건에서도 무사.
'최부자 가문의 마지막 부자' 최준(1884-1970)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를 세웠고
백산상회를 세워 일제시대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그는 노스님에게 받은 금언을 평생 잊지 않은 때문.
“재물은 분뇨(똥거름)와 같아서
한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나누어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이조 말 활빈당조차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는 최부잣 집.
일제 때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댄 백산상회.
해방후 김구 선생이 최부자 가문에 고맙다고 치하할 정도.
부산 백산상회가 부도위기에 몰릴 만큼 독립자금 지원.
일본 식산은행 총재조차 부도처리하지 못했던 백산상회.
우리나라 민족의 신망을 받을만큼 민족기업이었던 때문.
백산상회가 부도나면,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욕먹기 때문
최부잣집은 해방 후 전재산을 교육기관 설립에 투자.
'대구대학교'와 '계림학숙'이 훗날 '영남대학교'.
교수들에게 무척 많은 월급을 주는 학교로 유명
훗날 영남대학교은 이병철 회장이 인수한다
그후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박대통령에게 기증.
하여, 설립자를 박정희로 오해하는 사람도 많다.
.............................................
..............................................
경주시 교동 69번지 경주 최씨., ‘교촌가(校村家)'
10대에 걸쳐 만석 재산을 유지해 온 경주 최씨 일가
18세기 요석궁터에 지었던 99칸 고택에 대지 2000평,
후원 만평에 달했으나 해방 후 대지1000평에 건물 5채
그나마 1970년 원인 모를 불로 별당과 사랑채를 잃었다.
2006년 복원으로 옛 모습을 되찾은 사랑채 36평
구한말 영덕 출신 의병장 신돌석 장군이 피신 왔었고,
최익현(崔益鉉)이 의병 수백 명과 함께 며칠 묵었던 곳.
일제시대 스웨덴 구스타프 국왕이 왕세자 시절에 묶었다.
의친왕이 엿새 머물고 집주인에게 준 '문파'(汶坡) 호
이 고택의 집주인 최준은 최치원(崔致遠) 28세 손이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은 말라’,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 재산을 늘리지 말라’,
‘사방 백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의 가훈을 받들어 일제 때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제공하고,
광복 후에는 영남대 전신인 대구대의 설립에 전 재산을 기부.
영남대는 교촌가 고택을 한국 전통문화 교육의 장으로 쓸 방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