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호수/ 김정희
이러는 게 아니다
연꽃이 져버린
호수에 가면
글썽이는 눈물들
살을 베어 낸 상처마다
꽃도 열매도 아닌
오래된 마른 꽃자리가 엉키고
지푸라기같이 가벼운 것일까
까맣게 지워진
그대 생각도
잊혀진 지난 꽃일 뿐
간간이 출렁이며 넘어지는
길고 긴 그대 인연의 연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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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김종
식은 자의 가슴에 불을 넣는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불을 넣는다
귀먹고 눈먼 자에게도 불을 넣는다
아아 무등산 고여도 넘치지 않는 바다
아아 무등산 무등산 죽음의 허리에서 눈뜨는 불씨
아아 무등산 끝끝내 끝까지 가득하던 산
강추위와 찔찔거리는 눈물과 째째한 목숨과 닫힌 방과
밤중까지 흘러내리지 않게 쓸어안고
흙 아닌 자 흙으로
인간 아닌 자 인간으로
모두모두 앉은뱅이에서 일으켜 세우며
크고 무서운 하늘의 말씀으로 굽어보고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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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손/ 박판석
어린 토끼 같은 놈들이
날 저물고 땅거미 내리자
아빠 병원 뒷바라지 가고 없는 엄마가 그립다
세 살배기가 울음줄을 놓았다
다섯 살배기가 동생 손을 잡아 흔들어 주었다
언니 손을 꼭 붙들고 그칠 줄 몰랐던
그리운 울음을 내려놓았다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을
오른손등으로 닦아주며 제 눈물은 왼손으로 훔쳤다
할머니 등에서 여직 억장을 놓았던 아가는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듯
언니의 손목을 꼭 붙들고 졸았다
언니도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면서
아가의 손은 꼭 쥐고 놓지 않았다
팽목항 앞바다에서는
침몰하는 세월호의 보도가 연이어 깔리고
구조대의 손목 붙들고
선장 홀로 탈출하는 광경을
지속적으로 쏘아 보내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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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시/ 서연정
빚어 숨 불어넣고 뜨거운 펜 놓았겠지
뒤에서부터 한 행씩 더듬어 올라간다
깊은 산 시의 탯자리 분화구를 찾아서
도착이 출발인 길 정상(頂上)은 원점이다
씨앗 속 꽃잎 같은 휘파람을 물고서
아름찬 벼랑을 날아 발자국을 지운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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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오명규
바람은 바람이군요
동구 밖 느티나무 이파리들이
미소를 던집니다
바람은 바람이군요
파란 하늘 이고 선
코스모스 꽃잎들이 하늘거립니다
바람은 바람이군요
청산은 가부좌를 틀고
하루 종일 요지부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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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폭포/ 이봉춘
폭포가 말한다.
더위야 물러가라.
여름도 물러가라.
물러가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
쉬지 않고
큰 소리로 말한다.
마음의 문을 열고
시원한 바람 마신다.
새로운 각오로
힘찬 걸음 걷게 하는
여름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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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고구마/ 이성자
부엌에서 뒹굴던
고구마 하나 주워서
물 담긴 유리병 위에
앉혀주었어요.
어느덧 실뿌리 내리더니
아기 새싹을 낳았어요.
쑥쑥 자라나는 새싹,
기엉기엉 잘도 기어가요.
-오냐, 오냐.
고구마가
아기 새싹을 어르는 소리.
온몸이 쪼글쪼글해도
마냥 행복해 보이는
유리병 위의 엄마 고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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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성(城)/ 전원범
이순(耳順)의 한 간이역
그 풀섶 길에서
옷섶에다 받는
가을 볕 한 줌.
나도 내 손금을 따라
이 길을 걸어 왔구나
슬픔도 사랑으로
다스릴 나이인데
먹빛 갈기만 세워
쌓아온 안개성
구름이 집을 짓는다
바람이 집을 허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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