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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찰 순례 및 문화유적 답사기(5)
정진옥
제6일 ( 2016-09-04, 일요일 ) :
내금강( 표훈사, 만폭동, 보덕암, 묘길상, 삼불암 )
눈을 떠보니 7시가 다 되었다. 베란다로 나가 눈앞에 넓게 펼쳐진 장전항을 굽어본다. 물굽이(灣)라서 호수처럼 동그랗게 보이는데, 오른쪽은 바다에 면하는 쪽이라 산줄기가 멀리 낮게 보이고, 왼쪽은 뾰족한 바위봉들의 산줄기가 가까와서인지 제법 높게 벌려있다. 어제 보다는 드리운 구름이 많지 않아 왼쪽으로 있는 산줄기의 정상들을 볼 수 있는데, 산자락의 여기저기에 리본같은 구름띠들을 두르고있어, 이 역시 범상치 않은 어엿한 금강산의 한 자락임을 드러낸다. 호수같이 고요한 물굽이, 기품氣稟있는 바위산 줄기, 신비로운 구름띠 -산과 바다, 바위와 구름이 어우러진 신영神靈한 아침을 몸으로 눈으로 코로 깊게 빨아 들인다. 금강산가족호텔이라는 이 시설을 이곳에 지은 이의 안목과 배려에 경의를 올린다.
아침식사를 위해 구내식당에 모인다. 김형근단장이 우리 일행에게 두만강 유역 어딘가에 큰 홍수재해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인명피해人命被害도 많은 것 같다니, 안쓰럽다. 즉석에서 다들 기탄忌憚없이 십시일반十匙一飯의 수재의연금을 갹출한다. 자세한 피해상황을 모르지만 이런 때 남북한의 정부간에 원활한 소통과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동포애同胞愛 차원의 염원을 가져본다.
8시반에 내금강을 향해 출발하는데, 오늘도 역시 외금강호텔에 들린다. 오늘은 많이 걷기가 힘든 분들을 위해 중간에 두 팀으로 나누어 탐방(探訪)을 한다고 하여, 김명주라는 해설강사를 덧붙여 태운다. 역시 밝고 예쁜 처녀이다. 하늘엔 컴컴한 구름이 가득하여,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든다. 고려의 이곡‘李殼’이라는 분이 쓴 동유기‘東遊記’에, 풍악“楓嶽을 유람하려던 사람들 중에는 구름과 안개때문에 구경을 못하고 그냥 돌아가는 일이 허다하다”는 것을 읽었는데, 오늘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다. 차창으로 보이는 경관들이 다 수려하다.
숙소를 나온지 40분쯤이 지나고 차가 가파른 산길(아마도, 온정령; 857m)을 힘들게 오르고 있을때, 안내원이 오른쪽 차창밖으로 만물상이 보인다고 알려준다. 나는 왼편 좌석에 앉아 있는데다가 산봉우리가 높아서 그 봉들을 한번도 제대로 볼 수 없어 안타깝다. 차에는 전혀 빈자리가 없어 옮겨 볼 수도 없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만물상을 볼 수 있다는 말에 다소 위안을 삼는다.
차가 내리막으로 접어들고 나서 바로 ‘온정령굴’이라고 쓰인 터널을 지난다. 조명시설이 아예 안되어 있는지, 정말 ‘굴속같이’ 깜깜한 터널이다. 수려秀麗한 산길에 이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길을 지나고 이제는 넓은 들길을 지난다. 연초록 벼이삭들이 고갤 숙이며 익어가는 논을 지난다. 산간마을의 집들이 저만큼 안쪽으로 보인다. 아름다운 산하이다.
굴을 지난지 1시간이 될 무렵에, 그 옛날 고향 인근의 면사무소를 연상시키는 건물이 있는 곳에 차가 멎는다. ‘내금강명승지관리소’라는 건물이다. 아마도 관람허가절차를 밟나보다.
그로부터 약 15분후에 ‘장안사터’라는 표지말뚝이 있는 곳에서 차를 내린다. 보존유적 제96호임을 밝히고 설명판이 있다. 70여채의 절 건물과 많은 유물이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다 불타버렸다는 내용이다. 군데군데 주춧돌만 보이는 빈땅으로 온통 무성한 잡초에 덮여있다. 70여 건물들이 있었던 대가람의 터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만큼 좁아 보인다. 아마도 주위 산자락들에 있는 초목들이, 이 텅 빈 땅을 그들의 세상으로 빠르게 환원시켜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저쪽 뒤편 멀리로 부도탑으로 보이는 석물이 하나 서있을 뿐이다. 장안사라는 유서깊은 거찰 스스로가, 우리네 어리석고 욕심많은 중생에게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함’을 설파키 위해 직접 자기 몸을 불사른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절실한 가르침이 바로 이 풀밭인지 모르겠다.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1439~1504)이라는 분이 남긴 장안사‘長安寺’라는 시를 인용하여 이 자리를 기려 본다.
烟霞深鎖洞中天 說利浮圖萬劫傳 松檜迎遮山上日 竹筒流引石間泉
轉輪藏動開深殿 無盡燈明照大天 梵唄聲殘群動息 坐看凉月陟層顚
저녁안개 짙게 끼어 하늘까지 감도는 골, 부처님 좋은 말씀 만겁萬劫을 전해오네.
높이 솟은 노송老松 끝에 서산西山의 해 걸려있고, 잇대놓은 대나무 대롱 돌샘물 끌어온다.
전륜성왕轉輪聖王 큰 가르침 깊은 大刹 열게 했고, 꺼지잖는 등불 밝혀 온 우주를 비춰주네.
念佛소리 끊어지고 삼라만상森羅萬象 잠이 드니, 산마루에 돋아오른 차가운 달 홀로 보네 - 졸역
불지암에서 기념촬영.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김금순 해설강사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한지 10분쯤에 표훈사 경내(‘表訓寺’ 境內)에 도착한다. 차를 내리니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의 왼쪽으로 사찰건물의 기와지붕이 나무들 사이로 보인다. 12단의 돌층계 위에 세운 2층 누각양식의 능파루(‘凌波樓’)가 맨 앞에 나온다. 절의 맨 앞 입구에 세워져 있는 건물임에‘세상의 험난한 파도를 건넌 피안의 집’이라는 의미를 담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그 옆으로는 판도방(‘辨道房’)이라 현액이 붙은 건물이 있다.‘길을 찾는 사람들이 묵는 방’이라는 의미인 듯 한데, 寮舍가 아닌가 싶다. 국보유적 제 97호인 표훈사의 연혁을 소개하는 화강암 설명판이 있다. 679년에 처음 세워졌으나 지금의 건물은 1778년에 다시 지은 것이란다.
다시 몇 계단을 올라간다. 널찍하고 정갈한 흙마당인데 중앙에 8층으로 보여지는 소박단순한 석탑이 있다. 마당 뒤로 ‘반야보전’이라는 현액이 있는 대웅전이 또 몇 계단 위 높이로 터를 잡아 건립되어 있다. 좌우로 영산전과 명부전이 벌려있고 뒤에는 작은 사당인 칠성각이 배치되었다. 왼쪽 맨 뒤로는 어실각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있다. 왕가를 위한 기도처이거나 궁중에서 부탁받는 행사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던 곳인가 한다.
전체적으로 단아하고 간결하다. 주지스님과 젊은 스님 한 분이 우리를 맞아 주신다. 부처님의 좌우로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을 모셨다는 대웅전에서 두 분 스님의 인도로 예불을 하고 작은 시주를 보탠다. 주지스님의 설명이 끝난 두에 단체사진을 찍는다. 약 30분을 머물렀다. 표훈대사가 창건한 절이라서 표훈사라고 한다는데, 스님의 법명으로 사찰명을 삼았다는 설명이 다소 의아하다.
여기서 우리 일행은 두 개의 팀으로 나뉜다. 나는 만폭동을 보면서 묘길상까지를 다녀오는 팀에 든다. 표훈사를 나와서 녹은이 짙은 좁은 산길에 들어선다. 작은 계곡의 물길을 건너는 작은 철제교량이 나온다. 그 앞에 “금강문 108m, 보덕암 1669m, 묘길상 3747m”라는 이정표가 있다.
금강문 앞에 이르렀다. 외금강 구룡연계곡에서 보았던 금강문과 유사하다. 집채만한 천연바위 2개가 서로 몸을 맞대어 기대고 있다. 왼쪽 앞의 큰 바위에 금강문 금강문‘金剛門’이라 새겨져 있는데, 진한 녹색의 돌이끼로 고색창연古色蒼然하다. 그 바로 뒤에는 한글로 ‘원화문’이라고 새긴 화강암 표지석이 있다. 11시 15분에 이 원화문을 지난다. 이 만폭동을 이르는 또 하나의 이름이 원화동천‘元化洞天’이라고 하여, 후대에와서는 이렇게 원화문으로 부르기로 했나보다. 하긴 봉래 양사언이 이곳 만폭동에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 元化洞天”이라는 초서체의 큰 글씨를 남긴 것이 더욱 ‘원화문’이라 개명한 배경일지도 모르겠다. ‘元化洞天’이란 기묘함과 아름다움을 다 구현한 으뜸가는 곳이라는 뜻이라 한다.
계곡 옆으로 나있는 탐방로를 따라 7~8분을 가다보니,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 233호 금강초롱”이라는 팻말과 해설판이 있다. “금강초롱은 내금강만폭동구역의 묘길상妙吉祥부근에 퍼져 있으며, 그 면적은 7.5정보이고 그 자원량資源量은 4000포기정도이다. 금강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1909년에 알려진 우리나라 특산식물이다. 도라지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식물이며 7~8월경 푸른보라색의 초롱모양꽃이 송이꽃차례를 이루고 몇개가 성글게 피거나, 드물게는 한개씩피는데 내리드리운다.” 얼핏보면 남가주의 山麓에서 자주 보게되는 Poison Oak을 닮았다.
왼쪽의 원천골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만폭동 계곡과 합류되어지는 곳에 이른다. 튼튼하게 잘 축조된 교량이 있다. 왼쪽으로 수려한 암석미岩石美의 금강대金剛臺가 절벽처럼 우뚝 솟아있다. 암봉巖峰의 가슴에 해당될 매끈한 부위에 지원“志遠”이란 글씨가 크게 새겨져 있고 그 왼편에 ‘김형직선생님탄생예순돐기념’이라고 附記되어있다. 김형직金亨稷(1894~1926)은 32세의 젊은 시절에 살해된 김일성주석의 부친父親이고 지원‘志遠’은 그의 좌우명이란다.사후 死後 28년이 되는 1954년에 새긴 것으로 헤아려지니 아마도 회갑아닌 회갑을 기리는 뜻이 아닌가 추측된다. 민족의 聖山일 金剛의 멋진 바위봉에 두드러진 큰 글자의 새김-다행이라면 특정인의 이름이나 어록語錄이 아닌, 좋은 뜻의 말이라서 거부감이 덜하다는 점이겠다.
이 금강대金剛臺에서 부터 상류쪽인 화룡담火龍潭까지를 만폭동萬瀑洞 계곡으로 본다고 한다. 만폭동의 大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조선 중기의 학자였던 어유봉魚有鳳(1672~1744)이 남긴 류금강산기‘遊金剛山記’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이 분이 60세였던 1732년경에 이 산을 유람遊覽한 내용이다.
“이 산에 뻗어있는 큰물은 셋이 있는데 만폭동(萬瀑洞), 내원통(內圓通), 영원동(靈源洞)이다. 만폭의 물은 한 줄기는 비로봉에서 나오고 한 줄기는 구룡령에서 나오고 한 줄기는 안문점에서 나와 이허대(李許臺) 아래에서 합쳐져서 서남쪽으로 몇 리를 흘러 화룡담(火龍潭)이 되고 선담(船潭)이 되고 구담(龜潭)이 된다. 선담은 못의 모습이 배처럼 생겼기 때문이며, 구담은 담 안에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아래로 몇 步를 가면 진주담(眞珠潭)이 되고 벽하담(碧霞潭)이 되며, 아래로 몇 보를 더 가면 흑룡담(黑龍潭)이 되고 또 몇 리를 가면 황룡담(黃龍潭)이며 다시 몇 리를 가면 청룡담(靑龍潭)이니, 이른바 팔담(八潭)이다. 그 사이에 비파담(琵琶潭), 응벽담(凝碧潭) 같은 것들은 대개 모두 다 셀 수 없다.”
이 분은 상류에서 하류쪽으로의 記述을 하였는데, 우리는 하류에서 상류로 오르는 탐방探訪을 한다. 금강대를 지나면서 만폭동계곡은 확실히 수려秀麗해진다. 철재鐵材로 건립한 튼튼하고 긴 다리를 지나 마치 잔교棧橋처럼 계곡의 직벽에 바짝 붙여 조성한 보호난간이 있는 탐방로를 걷는다.
오른쪽은 금강산 계곡의 아름다움을 대표한다는 만폭동의 계류溪流가 온통 폭포를 이루고 소沼를 이루면서 부단不斷히 흘러내린다. 금강대에서 1분정도의 거리의 계곡 너럭바위에 예의 그 유명한 “蓬萊楓嶽 元化洞天”이라는 양사언의 초서草書글씨가 있다.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종縱으로 2자씩을 쓰면서 왼쪽으로 이어진다. 이 글씨의 주위에는 많은 人名들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다. 획수劃數가 많지 않은 뒤의‘元化洞天’ 네 글자는 마치 뱀의 움직임을 보는 것 같이 구불구불하다. 유명한 文人이며 조선의 4대 명필名筆로 꼽아주는 분의 글씨라니, 그런가 보다 한다. “금강산의 값을 10,000냥이라고 한다면, 그 가운데 5,000냥은 봉래 양사언이 만폭동의 바위에 남긴 글씨의 몫”이라는 말이 있으니, 이런 류의 글자새김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대자연의 외람猥濫된 훼손毁損인가, 의미있는 인간역사의 기록記錄인가?”
금강산 계곡에서의 깨우침인데, 옛 시절에는 탐방객의 이름이나 싯귀를 돌에 새기는 것을 업業으로 삼는 石工들이 상주常住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골 저 골, 이 바위 저 바위에 새겨진 인명人名들이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 아마도 몇 푼 품삯을 받고 이들 이름을 새긴 그 石工들의 바로 그 손으로 마애불磨崖佛인 묘길상妙吉祥도 삼불암三佛巖도 새겨졌을 것이겠다. 善과 不善을 따지기 어려운, 우리네 인간들의, 실로 고금동서古今東西에 일관된 장수長壽와 영원永遠에 대한 본원적本源的 희구심希求心의 발로發露라고 이해해야 할 것도 같다. 하기는 인간의 흔적이나 설화가 아예 없는 대자연에서는 인간 입장에서의 풍류라는 맛이 덜 하고 어쩌면 생소함 공허함 마저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양사언이 없고, 김규진이 없는, ‘봉래풍악 원화동천’이 없고, ‘미륵불’이 없는 금강산이란다면 뭔가 아름다운데 향기가 없는 꽃이랄까, 절세가인인데 온기가 없는 그런 좀 무미한 경지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겠다.
계곡 뒤로 솟아있는 산봉우리도 역시 금강산답다는 느낌을 일으킨다. 명징明澄한 옥빛의 물이 흘러 넘치는 潭沼와 와폭臥瀑을 여럿 지나는데 사람들이 그에 붙여놓은 이름들은 모르겠다. 튼튼해 보이는 다리를 통해 계곡을 오른쪽으로 건넌다. 계곡바닥이 아주 넓은 범위에 걸쳐 굴곡없이 매끄러운 盤石으로 되어있는 지역이다. 계곡의 오른쪽에서 이제 기슭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나온다. ‘흑룡담’이라는 標識가 보인다. 지금 시각이 11시40분이다. 바위와 시멘트를 섞어서 내구성耐久性이 있게 만든 標識이다. 면적이 130평이고 깊이가 7.5m란다. 마당같이 넓은 너럭바위를 타고 水簾으로 넓게 갈라진 채 미끄럼을 타고 내린 물들이 잠시 여울져 흐르는 큰 담소이다. 못의 저편 기슭의 바위절벽면이 유난히 검은 빛을 띄고 있다. 흑룡이라는 이름이 이에서 비롯됐겠다.
상류쪽으로 또 다른 철재 허궁다리가 보인다. 다리 너머로 오른쪽 암봉 중턱에 제비집처럼 조그맣게 붙어있는 것이 보덕암이라는 암자란다. 흑룡담 바로 위에 있는 비파담을 지나고 다시 벽파담을 지난다. 다리까지 다가가는 계곡의 바닥이 온통 운동장같이 너른 바위마당이다. 그러고보니 외금강구룡연 계곡은 사나운 野性의 물길이 크고 둥그럼한 바위덩이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격의 격렬함으로 비유한다면, 이곳 내금강만폭동 계곡은 차분히 순치馴致된 물길이 넓고도 반반한 너럭바위들의 보드라운 몸결을 간지르며 애무하며 흐르는 경쾌함으로 비유할 수 있을 듯하다. 그 쪽이 약동躍動이라면 이 쪽은 원숙圓熟이고, 그 쪽이 동動이고 무武라면, 이 쪽은 정靜이고 문文이 아닐까. 물론 상대적인 관점에서의 그런 특성이 있는것같다 라는 의미이다.
허궁다리를 건너 보덕암을 향한다. 다리 밑으로 보이는 큰 연못처럼 넓은 물웅덩이가 분설담이겠다. 법기봉 중턱의 절벽에 달랑 매달려있는 형국인 보덕암으로 오르는 길은 아주 가파르다. 2자 남짓될 좁은 폭의 돌로 쌓은 계단을 밟고 오르는데 경사가 아주 급하고 약간 나선형으로 휘어지며 오른다. 이윽고 산 중턱에 오르면 10평 내외로 조성된 평지에 닿는다.
국보유적 제99호라는 팻말이 있고 다음과 같은 설명판이 있다. – “보덕암은 고구려 중 보덕이 세웠다고 하며, 지금의 건물은 1675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높은 절벽위에 9m의 구리기둥 하나로 떠받든 한 동의 건물에 우진각, 배집, 합각식의 조선건축지붕형식이 배합된 기발한 건축수법으로 지은 것으로서 금강산의 수려한 자연경치와 어울리는 정교한 예술적 미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보덕암은 앞에서는 3층 건물로 보이는데, 실내에 들어가보면 단층이다. 바깥의 평지가 3층 지붕의 추녀와 같은 높이라서, 절벽 아래로 향하는 10 단계 쯤의 무너질 듯 위태로운 형세의 좁은 돌계단을 내려가서야 암자의 입구에 닿는다. 폭이 60cm쯤이고, 높이는 사람이 겨우 일어설 만큼인, 좁은 통로로 들어가서, 왼쪽 문을 열면 바로 절벽 바깥의 허허공중으로 만폭동 계곡이 저 아래로 까마득하고, 오른쪽은 천연의 좁은 석굴이 바로 코 앞이다. 폭이 약 1m, 깊이는 약 2m, 높이는 사람의 키에 맞을 정도이다. 안으로는 더 좁아지는데, 더 안쪽에는 허리높이쯤의 석단을 쌓았다. 불상을 모시고 일용품을 얹는 용도였겠다. 6면이 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석굴로, 홀로 고행을 겸한 정진도량으로나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이 천연의 석굴을 수행도량으로 삼으려는 보덕의 아이디어가 이러한 독특한 건축물을 조성해낸 것이리라. 석굴의 맨 안쪽에는 빛이 들어오는 작은 틈새가 있으니 환기는 될 듯하다. 이 몸이 천학비재淺學非才라 직접 읊진 못하겠고, 선인先人의 詩 한수를 빌어 어설픈 내 감회를 승화한다.
鐵鉤銅柱勢相撑 石室雲樓坐欲傾 特比世途尙安地 老僧無累度平生
쇠갈구리 구리기둥 서로서로 버티었네 돌집이며 구름루대 앉으면 무너질라 사바세계 비겨보면 그래도 편안한 곳 늙은 스님 한평생을 탈없이 보냈으리
퇴어당退漁堂 김진상金鎭商(1684~? ) ‘보덕암普德窟’ - ‘금강산 한시집’
우리 일행이 한번에 암자에 다 들어가지 못하고 交代로 돌계단을 내리고 오르며 庵子의 내부를 살펴본다. 이 보덕암寶德庵의 앞마당은 천길허공이라는 점이 生疏하고, 뒷마당은 가장 윗쪽 지붕과 높이가 같다는 점이 기묘하다. 뒷마당에서는 축소縮小된 萬瀑洞의 계곡을 지붕너머로 볼 수 있으며, 서쪽의 촛대봉이 아주 가깝다. 촛대봉은 대체로 북한산의 인수봉처럼 미끈한 화강암으로 보이는데, 좀 더 뾰쪽한 삼각봉이면서 약간의 판상절리현상이 빚어져 있어 암석미가 탁월하다. 또 성긴 소나무들과 조화미가 더해진다. 꼭 닮은 모양의 두 봉우리가 남매라도 되는 양 가까이 딱 붙어있는 점도 희귀하다.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아슬한 보덕암寶德庵 계단길을 내려와 아까의 허궁다리를 되 건넌다. 上流를 향해 다시 걸음에 나선지 몇 분에 또 하나의 장엄壯麗한 와폭臥瀑과 담소潭沼가 나온다. 진주담眞珠潭이 아닌가 짐작한다. 계곡 바닥 전체가 한 덩이의 넓직하고 미끈한 암반으로, 이 풍성한 만폭동의 물줄기가 얇고 넓게 퍼지면서 미풍에 너울거리는 비단포가 되어 부드러운 형세로 흘러 내린다. 듣건대 이 만폭동萬瀑洞을 포함한 내금강內金剛의 물줄기들은 북한강北漢江의 上流가 되므로 나중에는 당연히 서울을 감싸고 흐르는 한강이 되어지고 종내는 西海로 流入된다고 하니,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신기하다. 국토분단國土分斷 민족분단民族分斷의 통분함이 새삼 절실하다. 지금 이렇게 진주담眞珠潭이라 불리며 내 곁을 흐르는 이 물들이 더욱 정겹고 소중하고 또 안타깝다.
계곡의 왼쪽 암봉巖峰의 기슭에는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이 썼다는 법기보살‘法起菩薩’이라는 단아한 해서체楷書體의 큰 글씨가 종縱으로 새겨져 있다. 곧이어 역시 이 분이 썼다는 천하기절‘天下奇絶’이라는 초서체草書體의 글씨도 보인다. 역시 縱으로 내려 썼는데, 워낙 굵고 깊게 새겨져 있어서 마치 이 만폭동萬瀑洞 계곡의 담소潭沼에 숨어있던 용龍들이 마침내 하늘의 허락許諾함을 입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암벽岩壁을 타고 승천昇天하는 것이란 상상想像에 빠진다.
다시 잠시의 걸음으로 구담에 이른다. 역시도 넓은 반석盤石의 계곡溪谷바닥 중간에 거북의 모습을 한 바위덩이가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있어‘거북이 못’으로 불리게 되었겠다. 해설강사 아가씨가 이 거북바위에서 5~6m아래의 작은 못의 가운데에 있는 까만 동혈洞穴을 가리킨다. 이 구멍은 동해東海의 용궁龍宮으로 통하도록 뚫려있어서 때로 거북이가 이곳을 통해 龍宮을 오가기도 한다는 전설傳說이 있단다. 아무도 믿지 않을 이야기지만, 별주부와 용왕님의 이야기를 代入해 본다. 거북이, 자라, 남생이는 다 거북의 범주範疇에 든다니, 이 거북이를 별주부로 간주看做하고, 용왕님의 근황近況이 어떠신지, 病은 다 나으셨는지를 주부벼슬의 이 거북바위를 향하여 물어보고 싶어진다. 아 참, 그 동안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 이 거북님은 이젠 주부主簿 아닌‘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쯤의 어엿한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차陞差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침 고개를 바짝 쳐들고 있는 당찬 모양새를 보니 고관대작高官大爵에 오른지도 하마 오래 전의 일이었나 보다. 이런 명승名勝을 탐방探訪함에 있어서는 事實로 볼 것이 아니요, 想像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는 六堂의 권고勸告는 정말 탁월卓越한 견해見解임을 分明하다.
다시 上流를 향한다. 50m쯤의 앞에서 계곡溪谷이 왼편으로 굽어지는지, 계곡의 정면이 높직한 봉우리에 가로 막혔다. 푸르른 나무들이 가로막은 봉우리의 大綱을 덮고 있는 중에 맨 앞의 한 부분은 岩壁의 맨 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아래로는 또 하나의 와폭臥瀑과 潭沼가 눈처럼 희게 부서지고 비취翡翠처럼 푸르게 고여있다.‘선담船潭’이라는 못이 바로 여긴가 보다. 뒤편에 드러난 바위벽이 영락없는 범선帆船의 회색빛 돛이다. 팽팽한 바람을 돛에 담고 담소潭沼의 푸른 물에 떠서 동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한 척 범선이 완연하다.
다시 2~3분을 나아가니 이제는 계곡이 완연히 평평하다. 양안兩岸의 숲도 더 푸르르다. 얕으면서도 넓은 담소가 나온다. 火龍潭일 것이다. 다른 潭沼들이, 계곡의 암벽岩壁 암반岩盤과 조화調和를 이루었다면 이 화룡담火龍潭은 兩岸의 숲과 조화調和를 이루는 情景이다. 물의 흐름이 순하고 완만緩慢하다.
金剛門에서 이 화룡담火龍潭까지의 1.2km가 北韓의 천연기념天然記念物 제455호로 指定된 만폭8담 또는 내팔담內八潭이라고 부르는 구간이다. 下流부터의 순서로는 흑룡담, 비파담, 벽파담, 분설담, 진주담, 구담, 선담, 화룡담을 꼽는다. 앞의 7담이 폭포“瀑布 아니면 소沼, 沼 아니면 瀑布”였다면, 이 화룡담火龍潭만은 다른 7 담潭들과는 달리, 넉넉하면서 평화롭고 푸르른 아름다움이다. 굴곡이 큰 계곡 아닌 평활平闊한 물길을 따라가는 양상樣相이다. 주로 널찍한 盤石들을 타고 와폭臥瀑으로 담소潭沼로 이어지던 계류溪流가 이제는 그닥 크지않은 둥근바위나 자갈이 깔린 물길을 따라 낙차落差없이 유장悠長하게 흘러간다.
외금강쪽에 주로 서식棲息한다는 홍송紅松 또는 미인송美人松들이 계류溪流의 양편兩便 언덕받이에 간간이 그 요염妖艶한 자태姿態를 드러낸다.‘명월이 만공산 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로 무정한 님의 발길을 붙잡으려던 天下의 해오화解語花 황진이의 교태嬌態가 여기에 어른거린다.
화룡담火龍潭에서 15분 가량 걸어 이정표里程標가 있는 곳에 다다른다. 일부 숫자가 마멸되었는데,‘마하연터 102m, 묘길상 708m, 표훈사 2553m’로 읽힌다. 우리는 이제 만폭동萬瀑洞구역을 벗어나 백운동白雲洞구역에 들어온 것이란다. 12시27분이다. 마하연摩訶衍 절터의 입구에는 공덕비와 ‘금강산마하연중건사적비’가 있는데, 마하연摩訶衍을 의상조사義湘祖師(625~702)가 創建한 것으로 새겨 있다.마하 마하‘摩訶’란 크다는 뜻으로 대승大乘을 의미하고, 연‘衍’이란 넘친다는 의미라고 하니, 뭇 중생衆生을 크게 제도濟度하겠다는 서원誓願을 담은 이름일까 추측推測해 본다.
근세 한국불교 선승들의 고향으로, 내노라 하는 선객치고 이곳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비록 한 철이라도 이 선방 안거安居를 하지 않았으면 제대로 된 선승禪僧으로 인정받지 못했었다는 그런 곳이, 지금은 가지런히 남은 4단의 석축石築 위의 빈터에 잡초만 무성한 가운데, 30여개가 됨직한 둥글고 네모진 초석들이 사라진 옛 절의 존재를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오른쪽 옆으로 50m쯤을 들어간 곳에 3X1간인 칠성각七星閣이 주인을 잃고 덜렁 홀로서서 풍우風雨에 삭는다. 해설강사의 손가락을 따라 바라보니, 우거진 숲속 멀리로 亭子 하나가 겨우 보인다. 전망 좋기로 유명한 8각정자 蓮花臺이고, 그 부근에 금강초롱이 많은 것으로도 또한 유명하단다.
계곡쪽으로 되돌아 나와 妙吉祥을 목표로 동쪽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간다. 계곡바닥에 비하여 별로 높지 않은 양안兩岸으로 역시 참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하다. 윤택하고 푸르른 숲을 이루었다.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은 역시 명경지수明鏡止水, 맑기가 여전하다.
12시 50분, 불지암佛地庵에 닿는다. 반듯하게 잘 지은 큰 건물인데 머물러 있는 스님이 없어서일까 많이 퇴색되어 있다. 6X3간 건물이다. 표훈사表訓寺에 딸린 암자庵子란다.
다시 행보行步에 나선다. 곧 길가에 서있는 팻말과 설명문을 만난다. 국가지정國家指定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제232호의‘금강국수나무’에 대한 안내案內이다.-“금강국수나무는 1917년에 금강산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잎이지는 떨기나무이다. 이 나무는 바위벼랑짬에 뿌리를 박고 가지는 아래로 내리드리워져 있다. 높이는 1m 안팍이고 7월경에 가지끝에 붉은색이 도는 흰색의 꽃들이 많이 피며 열매는 8월에 여문다.” 많이 보아온 딸기나무와 흡사恰似하다. 잎이 5장으로 보이고 별처럼 퍼져 있다.
다시 계곡을 따라 간다. 계곡의 한쪽면이 수직의 암벽을 이룬 협곡峽谷을 지난다. 무언가 전설이 어려있을만한 절승絶勝을 이루고 있다. 구룡연 계곡의 연주암이 생각나는 2개가 연이어지는 푸른 물빛의 아름다운 沼를 지난다. 다시 수직의 암벽에 잔도棧道처럼 바짝 붙여지은 교량橋梁을 따라 길이 나아간다.
13:00, 드디어 묘길상妙吉祥에 다다른다. 놀랍다. 그 엄청난 크기가 놀랍고 生動하는 따뜻한 표정表情이 놀랍다. 비에 젖은 암벽岩壁의 차가움이 아닌 따뜻하고 부드러운 氣運이 느껴진다. 41m의 높이가 된다는 산줄기의 절벽면에 부조浮彫로 발현發顯시킨 마애불磨崖佛을 除外한 바위면들이 오늘도 이따금씩 내린 빗물로 흠뻑 젖어 어두운 色調를 띠고 있음에 반反해, 미소微笑를 머금은 부처의 얼굴과 몸의 대부분은 말갛게 희고 뽀송뽀송하다. 절벽의 중간보다 조금 더 높은 위치에서 암벽岩壁을 둥근 감실龕室 모양으로 깎아냈는데 머리부분은 깊게, 그 아래로는 차츰 얕게 깎아내어, 그 안의 상단에 부처의 머리를 안치安置했기에 거친 풍우風雨를 피할 수 있나보다. 마치 우산이나 삿갓으로 받쳐드린 셈이랄까. 또 그랬기에 머리와 얼굴 전체를 특히 고부조高浮彫로 두툼하게 깎아 올릴 수 있었고, 따라서 입체감立體感이 극대화極大化 될 수 있었겠다. 또 이 磨崖佛 왼쪽의 절벽면絶壁面이 ㄱ 자 모양으로 앞쪽으로 굽어나온 지형地形이라서 산간계곡山間溪谷의 세찬 비바람을 일정부분 가려주므로, 더욱 안온安穩하게 부처님이 모셔진 형국形局이다.
묘길상 마애불과 석등 앞에 선 필자 정진옥 거사
이 거대한 부처님은 확실히 온화溫和함과 장중莊重함을 지니셨는데, 이는 특히 입술과 눈썹에 그 비밀秘密이 있어 보인다. 입술은 福德스런 얼굴에 비해 조금은 작은 듯 한데, 윗입술에 비해 아랫입술을 약간 넓게 또 도톰하게 새김으로써 관대온후寬大溫厚한 미소微笑가 배어 나오고, 두 눈썹 아래를 깊게 파낸 후에 눈두덩이를 낮게 새긴데서 장중莊重함이 풍겨 나오는 것 같다. 典型的인 우리 韓國人의 면모面貌와는 좀 다른 듯 하다.
이 묘길상妙吉祥이 우리나라의 마애불磨崖佛 가운데는 가장 크다고 한다. 좌불의 전체높이가 15m나 되고, 몸의 너비는 9.4m이다. 얼굴높이 3.1m, 얼굴너비 2.6m, 발길이 3.2m, 손길이 3m, 눈길이 1m, 귀길이 1.5m, 손가락길이 2~3m이다. 그러나 이 부처님을 뵈올 때, 크기도 크기려니와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소微笑가 특히 따사롭고 신비神秘스럽다. ‘각자覺者는 미소微笑한다’는 次元의 表情인지, 어리석은 衆生을 연민憐憫과 자애慈愛로 감싸주시려는 미소微笑인지 궁금하다.
불상佛像 앞에는 높이가 3.6m에 이르는 초대형超大型 석등石燈이 마련되어 있어 장대壯大한 부처님과 크기의 調和를 이루고 있다. 고려시대의 나옹懶翁스님이 묘길상妙吉祥을 직접 새기신 것으로 傳해 온다고 한다. 아마도 스님이 발원發願을 하시고 터를 잡으시고 또 총연출總演出도 하셨겠으나, 실제로 이 높은 절벽에 매달려 이 거대한 부처님을 한 땀 한 땀 쪼고 깎고 갈아가며 양각陽刻을 해낸 것은 아무래도 스님은 아니셨을 것이다. 金剛山의 이 계곡溪谷 저 암봉巖峰 온갖 바위에 식솔食率들의 한 끼 양식糧食을 위해 兩班님네들의 姓名 3글자를 새기던 그런 石工들의 精誠된 마음과 손길이 보태져 이 無心한 바위절벽이 저리도 친근親近한 부처님으로 發顯되고 점정點睛되어진 것이려니 한다.
어찌 생각하면 이러한 名山이나 승지勝地를 찾은 양반兩班이나 풍류風流선비들이 石工을 시켜 그들 자신의 이름이나 싯귀를 바위에 새기는 일이, 어쨌거나 몇 푼 품삯이 건네어질 터이니, 어쩌면 그 시절 나름으로는 결과적으로는 민초民草를 대상으로 하는 시주施主이고 공양이었다는 측면側面이 있겠다. 그렇다면 웬만한 계곡溪谷은 다, 이 바위 저 바위에서 탐방객探訪客들의 발에 밟히고 눈에 띄는게 古人의 이름을 새긴 글씨들인데, 이 글자 하나 하나가 다 보시報施와 적덕積德의 표징表徵이 되니, 훨씬 더 情겹고 아름다운 금강산의 풍광風光으로 보여지겠다. 거구巨軀의 이 금강산 마애磨崖부처님께서 내 편협偏狹한 시각視角의 하나를 이 瞬間 홀연忽然히 일깨워주시는 또 하나의 가피加被이다. 나를 향해, 살아계신 분처럼 완연한 생동감이 있는 얼굴로 다정히 미소를 지으신다.
우리들이 보통 명산명소名山名所를 탐방探訪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픈 情緖가 자연스러운 일이듯, 사진기寫眞機가 없던 옛날에는 힘들여 오른 승경勝景의 바위에 이름을 새기고픈 욕구가 당연히 있었을 것이라 이해가 간다. 오늘날 유명관광지有名 觀光地에서 사진사寫眞師들을 보게 되듯,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이 금강산金剛山에는 일감을 기다리는 석수장이들이 존재하던 風景이 있었음직 하다. 또 당시에는 절대絶對인총이 많지않아, 풍류도風流道는 있어도 환경파괴環境破壞라는 개념槪念은 전혀 없었을 것임에야.
석등石燈 옆에“보존유적 제256호 묘길상”이라는 표지석標識石이 박혀있다. 부처님의 오른쪽 옆의 절벽 하단에 직암直菴 윤사국尹師國의 글씨로 크게 ‘妙吉祥’이라고 새겨져 있어, 이를 통상 妙吉祥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妙吉祥이란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뜻하는 말이고, 이 마애불磨崖佛에 맞는 호칭呼稱은 아니라 한다.
여기서 계곡을 따라 더 나아가면 금강산의 제1봉인 비로봉에 오를 수 있다는데, 우리는 여기서 걸음을 중단한다. 아쉽기가 그지없으나 애써 마음을 비운다. 점심을 먹는단다. 妙吉祥을 조금 더 지난 계곡의 너른 반석盤石에 자리를 잡는다. 오늘 점심은 온정리의 금강산가족호텔에서 준비하여 차에 실어준 도시락이다.
표훈사表訓寺 앞에 차를 세우고 만폭동萬瀑洞으로 들어올 때에 一行의 점심꾸러미를 가장 나이가 젊은 이철진 운전기사가 등에 짊어졌다. 산길에 적합치 않은 보통의 구두를 신었기에 가끔은 미끌어지고 땀도 꽤 흘리는데다, 어깨에 두른 멜빵도 제대로 된게 아니라서 많이 불편해 보여, 내 마음이 불편하다. 두세번 내가 잠시라도 메 보겠노라고 했는데, 그 때마다 ‘일 없슴네다’ 라며 으젓한 표정表情으로 극구 사양辭讓했었다.
도시락 2개와 ‘金剛山 병물’ 1개씩이 나누어진다. 도시락 1개는 흰쌀밥이고, 다른 1개는 밑에 깐 풋깻닢 위에 생선부침, 삶은 계란, 깻닢조림, 오이장아찌, 풋고추 2개, 양파조각 등의 반찬이 담겨있다. 옥같은 맑은 물이 콸콸콸콸 흘러내리는 妙吉祥 옆 내금강內金剛계곡의 반석盤石 위에 남과 북이 다 함께 옹기종기 둘러앉아 맛깔스런 도시락 점심을 먹는다. 북측 동포同胞가 셋이고, 남측이며 미국측이기도 한 우리 답사단踏査團 일행이 넷이다. 그 모습과 정경情景이 참으로 소중所重하게 느껴져 얼른 일어나서 카메라에 담는다. 이내 그 소중한 정경情景속으로 다시 들어가 앉는다.
밥을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을 한 食口라고 한다던가! 우리는 지금 금강산을 무대舞臺로, 비록 일곱명에 불과한 작은 집단集團이지만, 한 민족 한 식구로 앉아있다. 우리의 이 모습처럼 남북한과 미국이 다같이 한 식구食具가 되어 오손도손 多情하게 살아가는 그 날이 어서 빨리 와 주기를 妙吉祥의 부처님께 발원發願한다. 점심을 끝내고 일어서니, 13시30분이다.
이젠 발길을 돌려야 한다. 온 길을 그대로 되짚어 나간다. 돌아 나오기 시직한지 7~8분이 지날 무렵 길섶의 약간 뒤쪽에 비에 젖어 피어있는 금강초롱꽃 몇 그루가 있다. 길쭉한 鍾모양의 꽃이 몇 송이가 달렸는데, 사진에서 보는 것들 보다는 보랏빛이 아주 연하여 얼핏보면 하얀색으로 보일만한 송이들이 달려 있다.
법기보살‘法起菩薩’이라는 큰 글씨가 새겨진 바위봉을 지난다. 13시58분이다. 흑룡담黑龍潭이 있는 곳에 이르니 14시 05분이다. 북한주민北韓住民으로 보이는 男女 관람객觀覽客 3인이 담소潭沼 주위를 서성인다. 모처럼 우리 일행 아닌 타인을 본다. 금강대 앞의 다리를 건넌다. 14시17분이다.
다른 사적事蹟을 보기위하여 표훈사表訓寺에서 서로 헤어졌던 우리 一行과 合流한다. 불과 몇 시간 잠시 헤어졌다가 만나는 것인데도 다들 크게 반가와 하신다.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한 북한 땅에서 침식寢食과 행동行動을 같이 하다보니 급속急速히 정情이 들게 되는 것이리라.
‘백화암부도 15m’라는 이정푯말이 있다. 옆으로 들어간다. 2~3계단 높이의 숲속 잔디밭에 크고 작은 부도탑과 부도비들이 모여있다. ‘국보유적 제306호 백화암부도’라고 쓴 팻말이 있고 ‘백화암부도떼’라는 제하의 說明板이 있다. - “백화암부도떼에는 7개의 부도浮屠와 2개의 부도비浮屠碑가 있는데 그중에서 基本을 이루는 것은 서산대사비와 부도浮屠이다. 서산대사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조형예술적造形藝術的으로 우수優秀한 비碑의 하나로서 높이가 5.41m이다. 임진壬辰조국전쟁시 1500여명의 僧兵을 거느리고 왜적과 잘 싸운 서산대사의 공적功績을 후세後世에 傳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부도탑浮屠塔들이 대체로 크고도 아름답다. 서산대사비는 특히 대단히 높은 석비石碑인데 거북 모양의 기반석基盤石 위에 길쭉한 몸돌을 세워 비명碑銘을 새겼다. 비의 머리는 단검短劍자루의 형상으로 돌을 다듬어 올렸으며, 사명당四溟堂이 建立한 것으로 傳해진다고 또 다른 설명판說明板이 적고있다. 그리알고 바라보니, 미상불 석비未嘗不 石碑 자체가 한자루의 단검短劍형상을 담고 있음을 알겠다. 스님과 검劍 –살생유택 ‘殺生有擇’의 정곡正鵠을 찌르신 호국護國의 劍에 敬意를 올린다. 14시 50분이다.
부도浮屠밭을 나와서 서둘러 일행을 따라 가다보니 불과 2분쯤만에 길의 兩便으로 집채만한 큰 바위가 각기 하나씩 놓여있고 그 좁은 사이로 길이 계속되는 곳에 이른다. 왼쪽의 바위가 더 크고 높은데, 정면에 세 분 부처가 양각으로 새겨있다. 그 앞에 표지팻말과 설명판이 있다. ‘보존유적 제309호 삼불암’으로, 높이 8m, 길이 9m의 삼각형 바위에, 높이 3.7m, 너비 1.3m로 각기 조각된 세 부처님인데, 석가불, 아미타불, 미륵불을 고려시대에 새긴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바위 오른쪽 편에는 4m쯤의 길이로 縱으로 써내린, 희미하지만 아직은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남아 있는데 “三佛巖”이란 세 글자이다. 직암 윤사국職菴 尹師國이 썼다는 묘길상“妙吉祥” 글씨와 많이 닮았다. 아마도 同一人의 글씨일 것으로 推測해 본다. 다시 차를 탄다. 15시 정각이다. 이젠 만물상을 경유經由하여 다시 외금강外金剛의 온정리溫井里로 가는가 보다.
외금강 만물상
차창車窓으로 금강산의 아름다운 산과 계곡이 스쳐 지나간다. 溪谷이 다 하고 제법 넓고 평평한 흐름이 된다. 松林을 지난다. 계곡의 흐름이 이제 널찍한 개천이 되고 마을이 보인다. 푸른 풀밭에 10여마리의 소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는다.
오늘 우리를 처음 만나게 된 해설강사解說講師 김명주양이 심심풀이로 이 金剛山地域 마을들에 회자膾炙되어온 시조時調를 하나 소개紹介하겠단다. 모두가 귀를 쫑긋한다.
“늙은이 불사락不死藥과 젊은이 불노초不老草는
금강산金剛山 상상봉上上峰에서 캐낼 수 있으련만
아마도 리별離別 없앨 약藥은 못 구할까 하노라”
두 볼에 가득 홍조紅潮를 띠고 암송暗誦하는 모습이 예쁘고, 나이먹은 미주동포美洲 同胞를 맞아 한 나절을 같이했을 뿐인데, 벌써 헤어지는 시각時刻이 임박臨迫해가는 마당이라서 나름대로의 아쉬움을 담아 냈을 그 마음이 너무 고맙다. 모두들 내용을 잘 기억하고 싶은 마음으로 다시 한번 읊어주기를 부탁한다. 잠시 침묵沈默이 흐른다. 너 나없이, 오늘 이 時刻의 이 작은 헤어짐과 북녁 땅을 방문해 있는 이 소중所重함을 아쉬워하는 마음에 젖는것이리라. 난 그대로 잠시 잠에 든다.
아마도 온정령을 다 올랐을 때 였는지, “만물상등산로”라는 안내판案內板이 서있는 곳에서 차가 멎는다. 삼불암三佛岩을 떠난지 1시간이 지난 16시 쯤이 된 시각時刻이다. 빗방울이 간혹 내리고 구름이 잔뜩 깔린 상황狀況인데, 해동의 백동무가 시간의 여유餘裕가 없으니 화장실만 들렸다가 바로 出發하겠단다.
아니, 여기가 金剛山의 대표적인 名所의 하나인 그 유명한 “만물상萬物相”의 입구인데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결코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는 욕심이 치솟는다. 우리 일행 몇사람이 김형근단장을 향하여 萬物相을 잠시라도 보고 가자고 건의建議한다. 마침 김금순 해설강사가 “서두르면 10분이면 三仙岩까지는 갈 수 있다”며 우리를 살짝 거들어 준다. 그렇게 예쁠수가! 백동무는 단호하다. 빨리 승차乘車하란다. 믿는 구석은 김단장 뿐이다. 망서리던 김단장이 20분안에 돌아올 것을 약속하란다.
야호! 일행 몇몇이 새장에서 풀려난 새가 되어 등산로를 종종걸음으로 올라간다. 아니, 훨훨 날아간다. 16시 05분이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亭子를 지난다. 등산로가 잘 造成되어 있다. 돌다리, 돌축대, 돌계단 및 난간 등 손이 많이 간 보기에도 좋은 등산로登山路이다. 이 곳을 찾는 人波가 많을테니 이렇게 견고堅固하게 해놓아야 주변환경周邊環境이 잘 保全되어질 것이다. 저 멀리로 나무들 사이에 날카로은 바위 峰의 일부가 보이기 시작한다. 왼쪽으로 3개의 岩峰이 나란하다. 三仙岩이란다. 나로서는 엄연한 峰으로 보이는데, 峰이 아니고 바위라고 봐야 하나보다. 첫번째의 바위보다 두번째의 바위가 더 높고 더 뾰쪽하고, 세번째 바위는 또 더 높고 더 뾰쪽하다.
5분이 지나니 正面으로 돌계단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折斧岩으로 가는 方向이다. 그야말로 뭉게뭉게 둘러있는 구름들 사이사이로 奇絶한 기암봉奇巖峰들이 첩첩疊疊하고 유현幽玄하다. 俗界를 떠나 仙界로 들어가는 골짜구니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20분이라는 시간의 제한制限 때문에 여기서 더 가면 안된단다.
왼쪽으로 바짝 꺾이는 계단을 올라간다. 三仙岩의 세번째 바위로 오르는 가파른 철계단鐵階段이다. 계단階段에 올라서니 난간欄干이 있다. 사방을 둘러볼 수 있다. 折斧岩이 있는 쪽이라 생각되는 방향의 경계景槪는 정말 기가 막히고 숨이 막힐 정도로 대단하다. 가운데로 실낟같이 溪谷인지 길인지 분명치 않은 하얀 띠가 뻗어나가고, 그 왼쪽으로는 기암절별의 암봉岩峰이 우뚝하다. 그 뒤로 또 다른 岩峰이 있고 또 뒤에 다른 岩峰이 가물하다. 소위 풍운조화미風雲造化美까지 더해진 경치景致여서 그럴까, 도저히 뭐라고 形言할 수 없게 너무나도 神秘한 아름다움이다. 나는 지금 무슨 판타지 映畵속에 있는 俳優이고 저 앞의 경치景致는 想像과 幻想의 背景인 것이다. 아니 나는 지금 사슴의 勸告로 仙女의 날개옷을 훔쳤던 그 나무꾼이다. 어느 날 날개옷을 다시 입고 두 아이를 안은 채 무정無情하게 승천昇天해버린 처자妻子를 찾아서 여기에 이르렀다. 이제 저기 저 天上界로 들어가 上帝께 읍소泣訴를 하는 일만 남은 순간瞬間이다. 내가 남가주南加州에서 매주 열심히 산에 다니는 등산광登山狂이라는 얘기를 들으신 김수곤 선생님께서 바로 어제 차안에서 건네주신 싯귀가 떠오른다. 당송시대唐宋時代의 주옥珠玉같은 漢詩 300首 이상을 암송暗誦하실 수 있다는 놀라운 풍류風流를 임선생님의 귀뜸으로 알아지게 된 김선생님이 메모지에 적어주신 것은 24세라는 젊은 날의 두보杜甫가 泰山을 바라보면서 지은 망악‘望嶽’이라는 詩이다. “岱宗夫如何 齊魯靑未了 陰陽割昏曉 造化鍾神秀 탕胸生層雲 決자入歸鳥 會當凌絶頂 一覽衆山小” 이 가운데 “조화종신수造化鍾神秀”를 “조물주造物主가 신묘神妙하고 빼어난 것을 다 모아서 이 산을 만들었다”로 해석解釋할 수 있다는데, 그가 만약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자리에 섰다면 과연果然 어떤 表現을 하겠는지 궁금하다.
절부암折斧岩으로 통하는 계곡의 왼쪽으로 가까이에 뾰쪽하게 높이 솟아있는 바위봉이 귀면암(鬼面岩)이다. 꼭대기 정점에 동그란 큰 바위가 올려져 있다. 누가 일부러 올리려 해도 잘 될 것 같지 않은 아슬아슬한 형상이다. 귀신鬼神의 얼굴형용을 한 바위봉이라는 이름일텐데, 그렇게 무서운 느낌이 없다. 귀면鬼面이기 보다는 차라리 높은 첨탑尖塔 위에 설치한 둥근 감옥監獄으로 想像을 해본다. 아마 천상세계天上世界에서 罪를 지은 神仙 仙女를 유폐幽閉시키기 위한 격리시설隔離施設일지 모르겠다. 아. 그러나 이런 천하제일天下第一의 절경絶景에 귀양소를 설치할리 없겠다. 너도 나도 罪를 자청自請하여 이곳에 오려고 할 것이 분명하겠다. 반대로 특별한 포상褒賞의 일환一環으로 이곳에서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준비한 천상세계天上世界의 휴양시설休養施設이라야 더 맞겠다. 이 밖에도 주위의 다른 절경絶景들이 거듭거듭 탄성歎聲을 자아낸다.
철계단 아래의 등산로에서 김명주양이 우리를 재촉하는 손짓을 보낸다. 서둘러서 20분이라는 시간을 지켜낸다. 짧은 시간이지만 매우 고마운 시간이다. 萬物相의 겉만 핥았지만 그 맛이 甘味롭다. 하마터면 두고두고 안타까움으로 남을 뻔 했다. 다시 차에 오른다.
17시 경에 注油所에 들른다. 내 평생에 걸쳐 보았던 注油所 중에서 가장 빼어난 자연환경(自然環境)을 가진 곳이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금강산의 白玉같이 깨끗하고 수려秀麗한 바위봉이 바로 코 앞이고 그 산 아래와 注油所 境界 밖에는 금강산의 미인송(美人松)들이 제 각각 기품氣稟있는 미태媚態를 자랑하고 있다.
새로 멋지게 잘 지은 시설로서 부속건물附屬建物이나 주유소건물注油所建物 주변은 아직 공사가 덜 끝난 모습이다. 2대의 쥬유기注油機가 있는데 ‘휘발유’라고 써있고, ‘담배 손전화 금지’라는 標識가 부착되어 있다. 역시 용모容貌가 단정端正하면서 복스럽고 앳된 두 處女가 주유원注油員이다. 휘발유를 채운다. 그러나 잘 안되는 모양이다. 내려서 보니, 전기공사가 마무리가 다 안되었는지 이동식 발전기를 연결하고 있다. 가녀린 처녀가 직접 그런 일을 한다. 주유를 마친다. 김수곤선생님은 주유원 소녀가 꼭 당신의 손녀를 닮았다며 애틋해 하신다.
김금순 김명주 두 해설강사들이 여기서 작별인사를 한다. 짧은 동행이었지만 그래도 서로가 다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북녁 땅에서 만난 예쁜 두 처녀의 미래에 천지신명과 부처님의 가호가 있으시길 기원한다. 17시 10분이다.
호텔에서 짐을 챙겨 나온다. 오늘 밤에는 원산에서 숙박을 하고 내일 아침에 평양으로 출발한단다. 동해의 경치가 아름다운 도로를 지난다. 비가 내리다 멎다 하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달리던 차가 도로변에 선다. 이철진 기사가 뒷바퀴 하나가 펑크가 났다며, 이의 스페어타이어로의 교체작업을 혼자서 익숙하게 해낸다. 그 동안 우리는 차에서 내려 바람을 쐰다. 저녁 7시쯤이다. 길 옆으로는 끝이 안보이게 옥수수밭이 펼쳐있다. 길변으로는 역시 코스모스가 비에 젖은채로 피어있어 정겨운 느낌이 든다.
원산에 도착한다. 어느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된장국에 삼치구이와 감자튀김이 중심메뉴이다. 역시 맛이 좋다. 식당에 붙은 가게에 들러 반다나($1.50)와 사과 2개($0.80)를 산다. 원산동명여관에 든다. 6층의 방이 배정(配定)됐는데, 걸어서 올라간다.
잠을 자기 전에 김수곤 선생님이 건네주신 망악( ‘望嶽’)메모지를 앞에 놓고, 아까 낮에 삼성암三仙岩에 올라서 만물상萬物相쪽을 바라볼 때 일었던 감동(感動)을 되새기며 표절시剽竊詩를 하나 적어 본다.
먼저 두보(杜甫)의 ‘망악望嶽’의 언해諺解를 만들어 본다.
< 태산泰山을 바라보며 >
泰山은 과연 어떠한 山인가
齊나라 魯나라에 걸친 푸르름이 끝이 없구나
造化翁이 神妙하고 빼어난 것 다 모아 놓았고
山의 북쪽이 저녁일 때, 南쪽은 벌써 아침이라네
층층層層이 솟아오르는 구름을 바라보니 내 가슴이 탁 트이고
시야視野를 멀리하여 살피니 둥지를 찾는 새들 눈에 들어오네
내 반드시 언젠가는 저 頂上에 올라
뭇산이 작게 보이는 形容을 꼭 한번 보고 말리라
이제 어줍잖은 내 표절문剽竊文이다.
< 등삼선암 登三仙岩 >
金剛山 어떻더뇨
일만이천一萬二千 기기묘묘奇奇妙妙 헤아리질 다 못하네
조물주造物主, 신묘神妙함 빼어남 다 모아 이 뫼를 만드셨고
山의 東과 西로 바다와 육지陸地를 가르셨구나
짙고 옅게 드리운 구름너울 신비감神秘感 더해주고
가물한 골짜기 바라보니 神仙 仙女 넘노누나
언젠가 내 반드시 비로毘盧 절부折斧 찾아 올라
별유천지 기암절승別有天地 奇巖絶勝 한 눈에 다 보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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