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종지의 단상
임병식 rbs1144@hanmail.net
노모께서 차려주는 밥상에는 하얀 종지에 간장이 빠지지 않는다. 그것은 중앙에 놓여져서 늘 절반 정도 차 있다. 나는 이것으로 간을 맞추거나 김을 싸 먹는다. 매끼 마다 한 스픈 정도를 먹는데 그 양은 거의 일정하다. 줄어 든 양만큼 늘 다음에 보충 해 놓기 때문이다.
아내가 아프기 전, 차려준 밥상은 그렇지 않았다. 간장 종지를 빠뜨리기도 하고 다른 펑퍼짐한 용기에다 담아놓기도 하였다. 하지만 노모가 차려주는 밥상에는 한결같다. 나는 이 간장종지를 볼 때면 당신이 구순을 넘기고 계시지만 아직은 총명이 여전하심을 확인하고 마음 속으로 안심한다. 그만큼 기억력이 여전하시고 건강하시다는 걸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간장종지를 대하노라면 당신의 유별난 자식사랑에 가슴이 먹먹해 지는 때도 있다. 정성도 정성이지만 흰 간장종지가 마치 옛날 당신이 장독대위에 물을 떠놓고 비손하던 일이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때로 슬그머니 그것을 외면하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 당신의 삶은 온전히 자식들 걱정으로 바쳐진 세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큰아들과 막내아들이 열아홉 살이나 터울이 져, 그 바람에 자식 삼형제를 잊을 만하면 군에 보내게 되었는데, 그 세월을 온전히 걱정으로 보내고, 나중에는 그것도 모자라 큰 아들이 제대 후 상당기간 취직을 한답시고 객지를 떠도는 통에 시름이 떠날 날이 없었다.
그런 세월을 보내면서 당신은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서 비는 걸 일을 삼으셨다. 그럴 때를 보면 언제나 새 물을 떠 놓으셨다. 그리고는 흰 종지 앞에서 두 손을 모아 비손을 하였다. 그 장면을 보노라면 콧등이 시큰해졌다. 그런데 간장종지를 보면 그런 모습이 많이 떠오른다.
그때 보면 그 행동이 당신만의 엄숙한 의식이기에 보면서도 거친 숨 한번, 기침 한번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엄숙하기가 이을 때 없어서였다.
특히 이런 의식은 자식들이 군에 있을 적엔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큰아들이 객지로 떠도는 동안에는 늘 아랫목에 밥을 묻어두었다. 언제라도 오면 곧바로 밥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그런 생활을 계속하셨다. 일종의 당신만의 자식사랑의 표현법이었다.
나는 그러시는 당신을 보면서 그때는 모든 어머니들도 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렇지 않은 어머니들도 많음을 보고 여간 특별하신 분이 아니란 생각을 했다.
내가 간장종지를 대하며 특별히 감상에 젖는 것은 일상적인 추억 말고도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나는 군복무를 할 적에 예기치 않은 사고를 치고 말았다. 구치소에서 수감자들을 돌보던 때인데, 그 무렵은 군무이탈자 검거기간이 되어 수감자 수가 평소보다 갑절로 늘어났다.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비좁은 호실에 사람을 너무 몰아넣은 탓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영창복도를 순찰하는데, 어느 감방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아닌가. 알싸한 냄새로 보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감방 앞으로 다가선 나는 소리쳤다.“누가 담배를 피우나. 자수해?” 하지만 20여명의 수감자는 묵묵부답이었다.
“빨리 자수 않을 거야?” 그 말이 평소 말썽꾸러기 고참 탈영병이 입을 땠다. 심히 건방진 말로,
“지나가는 쥐 한마리가 꽁초 하나 물어다 쥐서 제가 피었습니다.” 하는 게 아닌가. 그러자 감방 안에서 일제히 웃음보가 터져 나왔다. 순간 나는 모독을 느꼈다. 석고대죄를 해도 시원치 않은 판에 농 짓거리를 하다니. 피가 거꾸로 솟아올랐다. 아니 그것은 참을 수 있었다.
한데 만약에 사람이 밀집한 곳에서 화재라도 발생했다면 어쩔 뻔 했는가.대형사고가 나고 말지 않았겠는가. 그 생각을 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영창문의 열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에도 여러 생각을 했다. 어디서 반입이 된 것일까. 전부터 이곳에 보관되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면회를 하는 과정에서 누가 가지고 들어왔을 것이다. 간혹 보면 면회를 마치고 들어오며 금지품을 허리춤에 감추거나 성냥 꼬투리를 잘라서 옷소매에 넣어 들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 같았다. 이때는 대부분이 고참 수감자가 시켜서 일어난 경우가 많다.
문을 따고 들어간 이상 이런 재발을 막기 위해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개인 체벌보다는 공동책임을 묻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그 감방 내 수감자 전원을 소위 원산폭격이란 머리 박기를 시켰다. 한데 그 과정에서 하필 농을 걸던 그가 마루에 넘어지면서 입을 찧어 틀니가 부러지고 마는 게 아닌가. ‘아이쿠’하는 소리와 함께 집어든 틀니를 보니 눈앞이 캄캄했다. 어떻게 변상을 할 것인가. 나는 고민 고민을 하다가 하는 수없이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어머니 급히 돈을 마련할 일이 생겼습니다. 이유는 묻지 마시고 오만원만 속히 붙여주십시오. 죄송합니다.’
돈은 일주일 만에 도착하였다. 당시 오만원은 꽤 큰 액수였다. 당신은 편지를 받고 얼마나 놀라셨을까. 그리고 그 돈을 마련하시느라 얼마나 애를 태우셨을까. 아니 그보다도 못난 자식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고 생기지 않을까, 얼마나 걱정을 했을까. 당시 당신이 뛰어다니면 모습은 알 길이 없지만 장독대 정화수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을 것임은 틀림없다.
그런 관계로 나는 40년도 넘은 일이지만 간장종지를 보면, 그때의 기억이 불현듯 되살아나고, 노모께서 노심초사 하시며 정화수를 떠놓고 비손하는 모습이 그려져서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다. 두 말할 것도 없이 간장종지는 또 하나의 정화수 그릇이라고나 할까.(2007)
첫댓글 꼭두새벽 길어오신 맑은 물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화수를 올리고
자식들 위해 비손하고 비손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의 전통에서 빛나는 참 신앙이었음을 느낍니다.
어머니의 비손은 다시 밥상 위에 놓인 그 작은 간장종지에 고이 아로새겨져 눈시울을 뜨겁게 합니다.
저는 어머니를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고생만 시켜드린 불효자식입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울컥해 집니다.
2008 창작수필 봄호 발표
간장종지에도 자식 사랑이 묻어있었군요. 어머니를 향한 마음이 특별할 수 밖에 없으시겠어요. 그나마 그 회한을 글로 표현할 수 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어머님이 머물고 가신 자리는 늘 그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가 남기신 유품중에는 천주경이 있는데 생각날때마다 그것을 펼쳐봅니다.
퇴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