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을 위한 기도 본 문 : 창18 : 23 - 33 2008/08/31주일 낮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는 “기도하라 그리고는 하나님이 걱정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기도하면 자신의 근심이 곧 하나님의 근심으로 바뀌어 진다는 말입니다.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입니다. 기도함으로 삶의 문제가 나라고 하는 좁은 인간사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사건이 되기 때문에, 신앙인은 결코 기도를 떠난 삶을 살 수 없는 것이죠.
또한 마틴 로이드 존스는 “기도란 하나님을 믿는 최고의 표현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있는데 기도해본 적이 없는 것은 신앙이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존 번연은 “당신이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당신은 이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기도가 없는 그리스도인이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또 기도를 이렇게 자랑합니다. “기도는 내 영혼의 방패요,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재물이요, 기도는 사탄을 향해 휘두르는 채찍이다.”
C. S. 루이스는 이런 말을 합니다. “마귀가 쓰는 첫 번째 전략은 성도들 마음속에 기도하는 마음이 생겨지지 않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녀 된 놀라운 특권인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 내 사건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바꿀 수 있는 위대한 권리를 포기하게 하는 것이 사탄이 쓰는 전략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때로 힘들고 외로운 위기와 역경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내 자신과 우리의 공동체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사탄이 두려워 도망가는 일입니다.
폴 스톨츠는 「장애물을 기회로 전환시켜라」라는 책에서 사람들이 역경과 재난을 만날 때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서 세 가지 종류의 사람으로 분류했습니다.
첫 번째는,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도전하지 않고 먼저 도망가고 도피하는 사람, 그리고 아예 포기하는 겁쟁이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소극적이고 임시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으로 역경 앞에서 뚜렷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현상유지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적당히 안주하는 사람인 ‘캠핑족’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으로 위기와 실연이 다가올 때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전부다 동원해서 도전하고 정복하는 등반가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세 번째 사람은 자기만 혼자 도전하고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힘을 복 돋아 주어서 함께 그것을 이루어내는 특징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것을 연구하면서 A.Q.라는 단어를 씁니다. I.Q.는 지능지수를 말하고, E.Q.는 감정지수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A.Q.는 ‘Adversity Quotient’ 로 ‘역경극복지수’, ‘위기극복지수’라는 뜻입니다. 즉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런 역경극복지수, 위기극복지수가 대단히 높은 한 인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자기가 갖고 있는 많은 문제를 중보 기도할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전에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변화시킵니다. 본문 말씀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기 시작한 다음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여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는 풍요의 땅인 동시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에 악과 부패가 가득한 것을 보시고 이제 심판해야 되겠다고 마음속에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소돔을 향해 지나가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에 가득한 소돔 땅을 다 멸망시키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내심은 멸망시키고 싶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있는가를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마음을 알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있다면 참으로 마음에 기쁨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좋아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다가가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들이 엄마, 아빠를 찾을 때 부모의 마음이 기쁩니다. 그런데 부모의 마음이 더 기쁠 때는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알아줄 때입니다.
중보기도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행동입니다. 심판하려고 하셨지만 진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용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백성이 심판당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시며 슬퍼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용서를 베풀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실 때 아브라함이 생각났습니다. 본문 말씀 이전에 있는 17절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친구처럼 생각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내 맘을 알아주겠지.”라고 생각하시며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고 말씀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벌써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말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정말 원하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공의가 아닙니까? 정의보다 사랑이 우선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중보기도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에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노아방주식 삶이고,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과 같이 중보기도식의 삶입니다. 노아방주식 삶은 이 세상은 죄와 악이 가득하여 나는 더 이상 이 세계 속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이 세계로부터 탈출해서 방주라는 별도의 구원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틀린 방식은 아니지만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방법입니다. 반면에 중보기도식 삶의 방식은 위기탈출이 아니라 문제와 죄악이 있는 현장으로 뛰어 들어가는 태도입니다. 중보기도를 드렸던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감히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무차별 심판은 안 됩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지만 그 속에 의인이 있는데도 의인을 악인과 함께 다 멸하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의인 때문에 악인을 좀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아브라함은 남이 고통 받으며 죄악 속에서 허덕일 때 그것을 내버려두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여기 보면 그는 50명의 의인으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곧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50명 찾을 수 있겠느냐? 한번 가서 찾아봐라. 50명 찾으면 내가 그 의인 50명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지 않겠다.” 갑자기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아브라함이 떨렸습니다. ‘50명이 안되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얼른 5명을 줄여 45명으로 여쭤봤습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그것도 안 될 것 같아서 40명으로 줄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30명으로, 또 다시 20명으로, 마지막 10명으로 줄이게 되었습니다.
의인들의 숫자를 줄여가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생각하면 막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이렇게 부탁합니다. “하나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님께 아뢰나이다.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대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도 두렵고 떨렸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고자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겸손하게 요청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 저들을 사랑해주시고 용서해주세요.” 아브라함은 저 혼자 안전하게 탈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 살고 보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던 나만 내 울타리를 쌓아놓고 나 혼자만이라도 살자.”는 노아 방주식의 삶도 인생을 사는 한 방법이지만 아브라함은 그러한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기대할 바가 없고, 문제와 어려움이 많지만 탈출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 뛰어들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다 탈출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무능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곳곳을 지배하게 되어서 이 세상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기독교인은 결코 세상에서 도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중보기도하며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때로는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 많은 세상을 끌어안고 세상의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어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인이 세상에 참여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사회가 갖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가슴으로 안고 울면서 기도할 때 내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이 하나님의 눈으로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생겨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기도는 실패한 기도였을까요? 아니면 성공한 기도였을까요? 외면적으로 보면 그의 기도는 실패했던 것으로 보여 질 수 있지만 결코 실패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한 기도요, 하나님의 아픔을 고통스럽게 체험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한 사람, 두 사람, 열사람, 백 사람이 모여지면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바뀌고, 이 세상과 역사를 변화시키게 됩니다.
사랑하는 ㅇㅇ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기도하는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어느 날 우리의 기도 속에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 제목이 들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 자녀를 위해서, 내 아내와 내 남편을 위해서, 내 부모님을 위해서, 내 직장동료를 위해서, 우리 교회를 위해서, 사회와 민족을 위하는 기도의 제목이 내 기도 속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질 것입니다. 중보기도를 하게 되면 나 중심의 사고에서 하나님 중심의 사고로 전환됩니다. 나만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그 중심에 내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는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중심이 되어주십니다.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마음속에 사랑이 생긴 사람입니다. 마음에 사랑이 생긴 사람만이 이웃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를 하면 사랑이 생기고 사랑이 생기면 중보기도를 하게 되어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다가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야고보서 1장 20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지금도 수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우리 주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몰라 하고 도망갈 것입니까? 상대하기 귀찮으니까 포기할 것입니까? 분노의 깃발을 내두를 것입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어떻게 이루시는가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 만큼 살게 된 것은 중보기도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벽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도 새벽마다 단잠을 포기하고 교회를 위해서, 여러분 가정을 위해서,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 있기에 지금의 우리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금요일 저녁에는 특별히 중보기도를 위한 모임을 갖게 된 것입니다. 매일 새벽에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형편이 맞지 않는 분들이나 시간을 내기가 어려운 분들은 금요일 저녁 9시에 교회에 나오시면 함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9월에 있을 항존직 선거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고, 어려운 경제를 위해서도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자녀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고, 병중에 있는 가족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원하기는 이제 우리 ㅇㅇ교회에 기도의 붐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이웃을 위한 중보기도 운동이 일어나서 저와 여러분 모두가 중보기도의 즐거움에 푹 빠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