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4일 (아! 내가 정말 여기 와 있단 말인가!)
왜 이렇게 코가 막히지? 우리는 아침과 저녁엔 쩔쩔맸다. 그랬다. 코가 꽉 막히는 거였다. 왜인지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아침에 세수하면서 코를 풀면(좀 비위가 상하는 얘기지만) 엄청난 코딱지가 나온다. 우리뿐만 아니라 트래커들이 다 그렇다. 왜 그런지를 유추해 보니 이번 산행길에는 계절 탓도 있지만 지독히 건조하고 길에 먼지가 많았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앞사람의 뒤를 3-4미터 간격으로 걸었는데 요즘 가뭄이 극심했던 히말라야의 산길이 사람과 버팔로, 야크, 염소들이 길을 짓밟아 놓아 먼지 구덩이가 되는 바람에 푸석푸석 먼지가 일자, 나중에는 10여 미터씩 띄워 걷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먼지가 코로 들어 갈 게 뻔하고, 그래서 아침에 코딱지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거의 코가 막혀 숨을 입으로만 쉬어야 할 지경이다.
그렇지만 카트만두의 그 악명 높고 지독한 먼지와 매연을 마시며 하루 종일 거리를 걸었어도 코가 막히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이상하다. 그게 아니면 높은 고도와 건조한 날씨 탓일까? 하지만 어떤 가이드북이나 여행기에도 '코딱지로 인한 아침의 고통'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사실은 다들 그런 경험을 하는데도 '점잖지 못한' 표현이라 무시하고 기술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무튼 아침에 세수하고 힘차게 코를 풀어 콧속이 뻥 뚫릴 때의 그 상쾌함, 그것도 뭐 상당히 괜찮은 기분이다. 정말로......
신곰파(Shin Gompa, 3,350m)를 아침 9시 5분에 출발, 찰랑파티(Chyolangpati, 3,584m)를 거쳐 라우레비나(Laurebina, 3,900m)에 12시 30분쯤 도착했다.
찰랑파티 까지는 아주 평탄하고 걷기 좋은 길. 멋있는 전경과 울창한 수림을 거쳐 왔고, 찰랑파티에서 라우레비나 까지는 안나푸르나 히말, 람중 히말, 머나슬루, 거네스Ⅳ, 거네스Ⅰ, 거네스Ⅴ, 티베트 렌지, 랑탕Ⅱ, 랑탕 리룽 등 차례대로 6,000-8,000미터급 거봉들의 파노라마가 장대하게 펼쳐지는 광경을 뒤로 하며 힘든 오르막을 올라야 했다. 4,000미터가 가까우니 호흡은 턱에 차고 간혹 관자놀이가 욱신거리지만 랑탕에서의 고소적응 때문이었는지 견딜 만 하다.
신곰파를 뒤로 하고 오를 땐 산불이 난 능선을 계속 30여분 거슬러 올랐는데 불에 탄 나무들이 색다른 풍경을 연출하여 때마침 새파란 하늘에 펼쳐진 빗살 모양의 구름과 어울려 새로운 신천지를 졸지에 방문한 나그네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곧이어 구상나무 잎을 한 키 큰(대략 30-40m) 나무들의 빽빽한 숲을 지나는데, 영화 '반지의 제왕'중 검은 망토와 검은 두건, 검은 말을 탄 악의 무리들이 프로도 일행을 쫒던 엄습한 숲 같다.
그 큰 거목들 사이를 일직선으로 비추는 햇살이 나무 표면에 두텁게 붙어있는 초록색 이끼에 비칠 때면, 숲 속은 환한 요정들의 요람 같기도 하다가, 밀교에 빠진 광신도들의 은밀한 집회소 같기도 하다.
또 거목들의 힘찬 뻗침 사이로 랑탕Ⅱ를 비롯한 설산의 봉우리들이 희끗희끗 보일 때는 가히 환상적이다.
긴 숲을 빠져나와 평탄하고 꽤 넓은 길을 걷다보니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것이 찰랑파티다.
서너 곳의 롯지는 한군데만 남기고 모두 문을 닫았다. 우리와 동행하여 숙식을 제공하고 돈벌이를 하겠다는 롯지주인이 지름길로 먼저 와 우리를 반긴다.
찰랑파티를 출발해 라우레비나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크로와상과 시나몬롤 등의 빵과 치킨 스테이크를 한다는 가이드북 속의 롯지를 찾았는데, 성수기에만 해당되는 얘기인 듯 크로와상 빵만 몇 개 있다. 오늘 아침에 만들었다는 아가씨의 완강한 주장과는 달리 빵은 바짝 말라있다.
빵을 몇 개 산 뒤 '마야'롯지에 여장을 풀었다. 마야 롯지는 겨울동안 폐쇄되어 있었던 듯 먼지가 자욱하다.
우리는 힘겹게 오르느라 변변히 뒤를 돌아보지 못했는데, 이 라우레비나는 가이드북의 첫머리 전면을 장식할 만큼 거네스 히말의 장엄한 연봉들을 막힘없이 바라볼 수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롯지의 마당에 나와 찌아를 보온병 통째로 시켜놓고 앉아 자리를 잡았다.
맞은편 거봉들의 파노라마는 갑자기 몰려 온 구름덩어리에 묻혀 버렸고, 거네스Ⅰ(7,429m)과 거네스Ⅴ(6,986m)의 봉우리만이 하늘위에 둥 떠있다. 구름 군(群) 들은 끈질기게 훼방하며 짓궂게 봉우리들을 막아서는데, 그 거대한 유희로 인해 마치 생경한 신세계의 한 자락들을 엿보는 흥분이 있다. 참으로 장쾌하고 웅장한 정경이다. 랑탕Ⅱ(6,561m)와 랑탕 리룽(7,234m)은 너무 가까이 있어 오히려 생뚱맞다.
시선을 고정 시키고 있으니 구름은 다시 내려앉고 안나푸르나 히말과 람중 히말의 봉우리가 얼굴을 내민다. 나도 좀 봐 주슈! 안나푸르나는 몹시 수줍다.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말이다.
설산의 파노라마는 눈앞에서 변신을 거듭하며, 그 엄청난 덩치가 어울리지 않게 애교를 부리듯 얼굴을 내밀었다가 도로 거둬 넣곤 한다.
이윽고 구름들이 거봉들의 아랫도리를 완전히 덮어 버린다. 구름들을 깔고 앉은 설산은 우리 눈앞에 거대한 함선(艦船)처럼 떠있다!
아! 내가 정말 여기 와 있단 말인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래, 이 광경을 보려고 그 높고 멀며, 험난한 여정을 계속한 것 아닌가.
우리 등 뒤에선 포터 몇 명과 이웃 롯지 사람들이 모여 기타를 치고 있다...... 우리는 거대한 파노라마의 함선에 눈을 떼지 못했다.
저녁준비가 늦어지면서 롯지의 난롯가에는 우리 셋과 프랑스인 트래커 세 명, 그들의 가이드와 포터 두 명, 이렇게 앉았는데 이 중 프랑스인 두 명의 커플은 통 말이 없다. 프랑스 말 말고는 영어를 통 쓰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나 만큼이나 영어에는 젬병인가 보다. 아니면 일부러 영어를 쓰지 않든가...... 그렇지만 가이드와는 불어로 간간히 얘기 하는 것 같다. 그것 말고는 그들은 대화에 끼어들지도 않고 줄곧 말이 없다. 다소 폐쇄적인 사람들처럼 보이기 까지 한다. 서양인들의 행색이나 얼굴을 보면 우리로서는 도무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지만 그들은 20대로 보인다. 난롯가에는 네팔리 둘(치린과 프랑스인들의 가이드)만 대화를 나누고, 외국인들은 입을 닫고 있다.
노을이 시작되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다시 밖으로 나갔다.
하늘엔 홍옥색(紅玉色) 페스티벌이 시작되고, 우리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우선 우리 시선의 가장 오른쪽에 있던 랑탕 리룽이 꼭대기부터 주황빛으로 점령되고, 구름위에 떠 있던 거네스 봉이 다음차례 물든다 싶을 때, 온통 하늘이 장막을 치듯 쫙 붉어지며 태양이 구름의 가장자리에 걸렸다. 무어라고 표현해야 될까? 내 시야의 한계를 넘치고 넘쳐 세상 전체에 펼쳐진 스크린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깔로 연달아 얼굴을 바꾼다.
대 파노라마의 시작! 정신없이 셔터를 누른다. 그렇지만 잠시 카메라 창을 들여다보는 시간도 아까운 생각이 들어 카메라를 내리곤 한다. 거네스 봉은 마침내 구름위의 대륙이 되어 둥 떠 있고 그 밑의 아스라한 골짜기는 모두 바다가 된다.
'입을 다물지 못 한다'는 이런 때 하는 말인가. 왜 우리는 '입을 다물지 못 한다'고 할까? 뭐라고 표현은 하고 싶은데 도무지 머릿속은 광대한 장면에 압도되어 할 말을 잊었기 때문일까?
황혼이 떨어진 저 구름바다는 새로 창조된 신세계 같다. 우리네 세상과는 너무도 다른 신세계가 엄연히 존재함을 확인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생경함과 경이로움이 있다.
그렇게 장대하고 표현할 길 없는 아름다운 광경은 약 15분간 지속되더니 대 파노라마의 스크린을 거뒀다. 우리는 한숨을 쉬며 장작불이 타 오르고 있는 난롯가로 다시 모였다. 모두들 깊은 상념에 사로잡힌 듯 말이 없다. 평생 오늘을 잊을 수 있을 것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