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4인방 대표그림 보기
김홍도의 <주상관매도>
종이에 수묵담채. 개인 소장
이 그림은 느긋하고 한가로운 기운이 감도는 작품이다.
마치 여유롭고 유장한 평시조 가락이 허공 중에 여운을 날리며 떠도는 듯하다.
화폭은 어른 키만큼이나 커다란데 거기에 그려진 경물은 화면의 오분의 일도 채 되지 않는다.
희뿌옇게 떠오르는 아득한 공간 위로 가파른 절벽과 몇 그루 꽃나무가
슬쩍 얼비친다. 그 한복판은 짙은 먹빛이고 좌우로 갈수록 점점 흐려지고 있다.
화면 왼쪽 아래 구석에는 이편 산자락의 끄트머리가 꼬리를 드리웠는데
그 뒤로 잠시 멈춘 조각배 안에는 조촐한 주안상을 앞에 하고 비스듬히 몸을 젖혀
꽃을 치켜다보는 노인과 다소곳이 옹송그린 뱃사공이 보인다.
이 그림은 배 위에서 노인이 바라보는 각도에서의 꽃을 그린 것인데
우리는 그런 노인을 또 한 폭의 그림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여백이 하도 넓다보니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가늠을 할 수 없다.
이 그림에 어울리는 김홍도의 시가 이한진(1732-1815)의 편저
'청구영언'에 실려있다.
"봄 물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놓았으니
물 아래 하늘이요 하늘 위가 물이로다
이 중에 늙은 눈에 뵈는 꽃은 안개 속인가 하노라 "
'봄 물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놓았으니' 잎새 같은 조각배는 둥실둥실 흔들리며
기운 없는 노인에게 가벼운 어지럼증을 가져다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늙은 눈에 보이는 저 꽃나무은 아슴프레하니 안개 속에 잠겨 있는 듯하다.'
그림은 그가 지은 시조 그대로이고 시조는 그림을 꼭 빼닮았다.
가운데 쓰인 題詩는 '노년화사무중간 老年花似霧中看'이라 썼는데
이는 본래 두보(712-770)가 쓴 시의 한구절이다.
예술 작품에는 위대한 것이 있고 사랑스러운 것이 있는데
위대한 작품이 훌륭한 미술관에서 감상하기에 적합한 것이라면
사랑스러운 작품은 나만의 서재에 걸어두고 늘 가까이하며
바라보고 싶은 그림이라 할 것이다. 바로 이그림같은...
그가 지은 애틋한 평시조 한 수를 적어본다.
" 먼 데 닭 울었느냐 품에 든 임 가려 하네
이제 보내고도 반 밤이나 남으리니
차라리 보내지 말고 남은 정을 펴리라 "
누군가에게 어느 겨울 적어 보낸 편지의 한 구절
"섣달 눈이 처음 내리니 사랑스러워 손에 쥐고 싶습니다.
밝은 창가 고요한 책상에 앉아 향을 피우고 책을 보십니까?
딸아이 노는 양을 보십니까?
창가의 소나무에 채 녹지 않은 눈이 가지에 쌓였는데
그대를 생각하다가 그저 좋아서 웃습니다 ......"
안견 <몽유도원도> 1447년작. 비단에 수묵 담채.
( 일본 천리대학교 도서관 소장 )
이 그림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이 서른 살 되던 해(1447)
어느 여름날 밤에, ‘꿈속에서 노닐었던 도원을 그린 그림’ 이다.
‘도원’이란 옛적 중국에서 길을 잃은 한 어부가 이상한 복숭아나무 숲에 이르러
그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갔다가
맞닥뜨렸던, 꿈결 같은 이상향을 말한다.
이 세상이 아닌 아름다운 별천지, 무릉도원은
원래 중국의 자연시인 도잠(365?-427, 자 연명을 따서 흔히 도연명이라 한다) 의
글 [도화원기]에서 비롯한 말이다.
안평대군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시,서,화,악에 모두 능통하였다. 특히 당대에 제일가는 서예가였으므로 나라 활자인
경오자의 원본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이 그림은 한편의 장대한 교향시이다. 작품의 기본축은 오른편 위쪽에서
왼편 아래쪽으로 가로지르는 호쾌한 대각선이다.
그리고 보조축으로 오른현 아래에서 왼편 위쪽을 향해 점차 상승하는 대각선이 교차된다.
마치 교향곡에서 서로 다른 두 주제가 겹쳐져 화려장엄하고 내밀한 음상을
짜 보이듯이, 두 대각선은 서로 얼키고설켜 복잡다단한 산수의 경관을 내비침으로써
무릉도원에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림 한 폭에 신선 경계를 드러냈으니, 온 우주의 원기를 퍼올렸도다!”
이현로의 부시에 보이는 이 구절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
(1751년 76세 작 국보216호 호암미술관소장)
이 그림은 가장 남성적인 박력이 넘치는 화가이자 우리 산천을 우리 특유의 기법으로
그려내는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대가 겸재 정선이
일흔여섯 살의 고령에 그려낸 거작이다.
인왕산은 사실 높이가 338미터밖에 되지 않는 산이다.
그러나 산 전체가 온통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상반부는 거인이 솟구쳐 오른 것처럼
거대한 암반이 송두리째 드러나 있다.
그래서 길게 누운 모습 전체가 장엄하기
이를 데 없으니 조선 시대에 줄곧 명산으로 숭앙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더욱이 전통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경복궁 뒤의 북악산이 서울의 주산이고 타락산이
좌청룡, 인왕산은 우백호에 해당한다고 한다.
인왕산은 애초 왕조 초기에 새 왕궁터를
정할 적에 북악산 대신 서울의 주산으로 삼아야 한다는 논란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무학대사의 이 주장은 정도전의 의견에 밀려 채택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왕조 천 년의 운세가 오백 년으로 줄었으며
대대로 왕위가 맏아들에게 상속된 예가 적었고 또 불교가 크게 위축되었다는 설명이
아직도 야사로 남아 전한다.
이 그림은 ‘인왕산에 큰 비가 온 끝에 그 비가 개어가는 모습’ 을
순간적으로 포착해서 그린 작품이다.
그래서 화면 하반부로부터 자욱이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길게 띠를
이루면서 점차 위로 번져 나갔으니,
오른편 아래쪽에 기와집이 일부 드러났지만 다른 많은 집들은 모두 다 가려졌다.
반면에 화면 상반부는 아직 채 흘러내리지 못한
빗물이 평소에 없던 세 줄기 작은 폭포까지 형성하며 세차게 쏟아지고 있다.
그는 비가 젖어 평상시보다 짙어 보이는 화강암봉을 큰 붓을 뉘여 북북 그어 내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거듭 짙은 붓질을 더함으로써 거대하고
시커먼 바위산의 압도적 중량감을 표현했다.
정선의 <금강전도>에 담긴 금강산 이야기
(1734년. 종이에 수묵 담채. 국보 217호. 호암미술관 소장)
<금강전도>를 통해 금강산에 얽힌 이야기와 그림 속에 숨은 의미를 알아본다.
금강산은 靈山(영산)이다.
금강산의 수려한 일만 이천 봉우리는 바로 배달겨레의 정기를 상징한다.
이 산은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산이었다.
그래서 이 산엔 별명도 많다.우선 철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바뀐다.
‘금강산(金剛山)’은 새싹이 트고 향기로운 꽃이 만발한 봄 산을 가리킨다.
그러다가 녹음이 짙푸르게 깔리는 여름이 오면 신선이 사는 봉래산(蓬萊山)이 되었다가,
깎아지른 검은 절벽에 새빨간 단풍이 온 산에 핏빛 불을 지르는 가을에는
풍악산(楓岳山)으로 바뀐다.
이 계절을 그린 그림으로 <풍악내산총람도> 가 있다.
그리고 <금강전도>에서 보는 것처럼 잎이 진 겨울에 차가운 암봉만이 뼈다귀처럼
우뚝 서서 새하얗게 눈을 이고 있는 장관을 일러 개골산(皆骨山)이라 한다.
<금강전도>도 겨울산을 그린 것인데도 언뜻 겨울 그림처럼 보이지 않는데
푸르스름한 산 기운이 화폭에 번져있기 때문인데
이것은 어찌 보면 찬 듯도 하지만 생명의 기운을 띄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이 그려진 시기가 겨울이지만 저 땅속 깊은 곳에 벌써 양의 기운이
동짓날 언 땅을 뚫고 나오려는 양기를 품은 탓이라 할 수 있다.
금강산은 시대 흐름에 따라서도 이름을 달리했는데,
삼국시대에는 그저 ‘풍악’이라고 불렀다가,
통일신라와 발해, 곧 남북조시대에는 ‘상악(霜岳)’이라고 일컬었으니
이 또한 새하얀 뭇 봉우리가 서릿발처럼 삼엄한 기세를 보인다는 뜻이다.
여름 금강산을 뜻하는 ‘봉래’란 이름은 원래 신선 사상에서 말하는 삼신산 즉, 봉래,
방장, 영주 가운데 하나이거니와, 불교가 널리 퍼지기
이전에는 그저 ‘선산(仙山)’ 즉 신선이 사는 산이라고 불렀다 한다
첫댓글 음............ 좋은 자룝니다. 김홍도의 <주상관매도>에서 한국화의 여유로움을 보게 되어 맘이 넉넉해 지는 듯 합니다. 잘 보았읍니다. 고맙고 말곱니다.
눈이 호강하네요...
한국화에는 여유가 느껴집니다...
근데 왜 제 마음의 여유는 사라질까요...
그래도 여유를 가져 보려고 노력중입니다...
노력하다보면 되겠죠??!!
그래도 고동님 덕에 문화 생활을 집에서 할 수 있어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