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에서
김재희
매일 한 시간 정도의 산책을 한다. 나름대로 운동을 한다고 하는 산책인데 다른 사람에 비하면 그저 발자국만 찍고 오는 정도이다. 그래도 하루에 한 번은 꼭 하는 일로 정해져 있다.
우리 집은 전주천 옆이어서 산책하기가 참 좋다. 하루해가 기우는 저녁나절에 집을 나선다. 다른 때보다는 다소 느긋한 마음이 되는 시간이어서 하루를 마감하고 다음 날을 위한 휴식을 취하는 기분이다. 전주천의 물이 맑고 그 속에서 노니는 백로의 하얀 날갯짓이 사랑스럽다. 그래서일까 편안한 마음이 되는 시간이다.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수채화처럼 은은하고 고즈넉하다. 위력은 잃어가지만 엇비슷이 비치는 햇살이 왠지 정겹고 살랑거리는 바람이 더없이 다정하다. 철 따라 피는 꽃들이 다양하고 풀벌레들도 살갑게 느껴진다. 그럴 때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무조건 카메라 속에 담아 두었다가 심심하거나 필요하면 꺼내본다.
가다가 잠깐 물속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고기들이 떼 지어 몰려다닌다. 저들은 왜 저렇게 떼 지어 다닐까. 더 희한한 것은 그들의 움직이는 몸짓이 거의 똑같다는 것이다. 한 마리 한 마리 다르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며 이동한다. 아주 철저히 훈련된 군인들의 사열 같기도 하다. 저들에게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는 듯하다. 어찌 보면 세상사 돌아가는 것이 그냥 제멋대로는 아닌 듯싶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도 지켜야 할 규칙은 있을 것이다.
운 좋은 날은 백로의 먹이 사냥을 보기도 한다. 움직이지도 않고 숨죽이고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순간 잡아채는 모습이 참으로 날쌔다, 물고기를 삼킬 때는 반드시 머리부터 삼킨다. 잡을 때 어느 방향으로 잡히든지 먹을 때는 꼭 머리부터 먹을 수 있게끔 방향을 바꾼다. 그 기술이 대단하다. 잠깐 입에서 떼는 순간 방향을 돌리면서 재빨리 다시 문다. 그때 잠깐 허공에 뜨는데 그렇다고 해도 절대 놓치지를 않는다. 아마도 비늘이나 날개의 방향을 삼키기 좋은 쪽으로 택하는 듯싶다.
그럴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 있다. 순방향과 역방향,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도 두 가지 방식이 교차한다. 순방향인 날일 때는 행복한 마음일 것이고 역방향인 날일 때는 힘들고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어찌 좋은 날만 이어질까. 때론 마음 아프고 고생스러운 날도 있지 않던가. 그래도 그런 것들을 꼭 나쁘게 생각하지만은 않는다. 어려움을 겪어 봐야지만 좋은 일이 더 값지게 느껴진다고 생각한다. 부족한 것에 대한 어려움을 모른다면 아무리 풍족해도 풍족함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왕이면 순방향의 날들이 많기를 바란다.
방아깨비도 보았다. 참으로 오랜만이라서 무척 반가웠다. 우리 어렸을 적엔 방아깨비가 장난감이었다. 서로 한 마리씩 잡고 누구 것이 방아를 잘 찧는지 시합을 했다. 잠시 모습을 보여 옛 동심을 들추어 주더니 금세 포르르 날아가 버린다. 그 모습 뒤로 메뚜기를 잡아 풀줄기에 줄줄이 꿰어 가지고 불에 구워 먹던 기억이 가물거린다. 먹거리가 귀했던 그때의 그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뱀이 스르르~~ 지나간다. 섬뜩한 마음에 잠시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어찌 보면 반가운 일인 듯싶다. 아직은 우리의 자연생태계가 건강하다는 증거 아닐까. 며칠은 그 지점을 살짝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대범해지자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바람이 서늘해지니 잠자리 떼가 한창이다. 금방 손에 잡힐 듯해 팔을 휘둘러보지만 어림없는 짓이다. ‘나 잡아봐라!’는 듯 내 근처를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그런 잠자리 떼 속을 거닐다 보면 나도 잠자리가 된 듯 함께 어우러진다. 그들이 스치고 간 코끝에 싸한 가을 기운이 감돈다. 나도 모르게 가을 노래를 흥얼거린다. 가을 노래들은 왜 그리 애잔한지…….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비나 눈이 오면 오는 대로 산책하는 것이 좋다. 꿀꿀한 기분을 풀어내기도 하고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일들로 행복하기도 하다. 그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 나만의 생각들을 펼치고 가다듬으며 걷는다. 이렇듯 하루의 정리 시간이지만 어찌 보면 평생을 정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산책길은 내 삶을 정리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