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빌립보서 2 : 5 - 11
제목: 그리스도의 마음
일시: 2007. 9. 9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지난 한주간은 먼나라 이웃나라선교중보기도팀은 헝가리에서 김흥근 서명희선교사님 사역에 동참했다. 그분들은 1991년도 헝가리에 처음 들어가서 사역을 시작했는데 미국에서 공부하는 5년간을 빼고는 지금까지 헝가리에서 12년간을 사역하고 있다. 원래는 CCC스탭으로 사역하다가 3년 전부터 스탭에서 물러나고 노숙자사역에 전념하고 있다. 그들의 사역은 주린자를 먹이는 밥퍼주는 사역이다. 그들을 씻기고 청결하게도 해 준다고 한다. 짓이긴 똥묻은 바지를 벗겨 빨아주기도 한다. 이가 얼마나 많은지 그 옷들을 다 수거해서 이를 없애준다. 냉동고속에 넣어 얼린다음 이를 털어내고 잡는다고 한다. 역을 중심으로 하는 이 거리사역은 월요일은 동부역, 화요일은 모스크바역, 목요일은 서부역, 그리고 금요일은 남부역에서 사역을 한다. 거리 노숙자 사역이었지만, 그것은 교회사역이었다. 그 교회는 빛과 소금의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건물은 역 계단이다. 교인들은 노숙자들이다. 말이 노숙자이지, 그 내면을 보면 전과범, 걸인, 병자, 버려진 노인들 등이다. 그 선교사님들이 지나가다 만나는 사람들은 다리 한짝 없이 목발짚고 다니는 사람, 휠체어 끄는 사람, 뭔가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차를 타고 가다가 “우리 남부역교인 아무개네”라고 하면서 지나간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교인이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다.
우리는 일주일간을 있으면서 좋은 경험한다 싶어 열심히 했다. 작정하고 갔으니 닥치는 대로 주어지면 했다. 설거지와 밥은 기본이고 물건 나르기 노래하기 신디사이저 치기... 그러나 생각해 보았다. 이 일을 일년 열 두 달을 한다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감정으로 될 사역이 아니었다. 낭만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 이 선교사님들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얻은 결론은 그 일을 하겠노라고 마음에서부터 감동이 있고 시작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온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셔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도전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바울이 전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이다. 혹자는 안 품고 말래요. 그냥 도전 안 받고 이렇게 살래요 할찌도 모른다. 모든 이들이 그 사역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지 말라는 말도 아니지만... 하지만, 우리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이 마음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품어야 할 마음이다. 그러면 이 마음은 어떠한 마음인가? 두 가지 포인트를 기억하라.
II. 그리스도의 마음은 희생의 마음이다.
6절 말씀을 보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의 본체였다. 하나님과 동격의 관계에 있었다. 그분이 하나님이셨다. 하지만, 자신의 것을 버리셨다.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다고 하지 않는가! 이게 주님의 마음이다. 과감히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마음이다. 버리는 마음이다. 그래서 그의 사랑을 희생적인 사랑, 헌신적인 사랑이라고 한다. 이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다. 희생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그분은 없는 것이 아니었다. 풍요로우셨다. 그러나 그것을 희생하신 것이다. 그분은 낮은 분이 아니셨다. 왕이셨다. 그러나 그 자리를 버리신 것이다. 그분은 죄가 있으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을 죄인 중 하나로 일부러 욕되게 만드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주님이 원래는 그렇지 않지만 희생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의 마음은 바로 희생의 마음이다.
이 마음을 품는 것은 사실은 축복인 줄 알아야 한다.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은 뭔가 희생할 것이 있는 사람 아닌가! 처음부터 아예 없는 사람과 있는데 버린 사람과는 천지 차이이다. 두 사람 다 공통적인 것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예 없는 사람은 희생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버린 사람은 희생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돈이 많이 있는데도 옷을 수수하게 입고 다니는 사람이 있고, 돈이 없어 수수하게 다니는 사람이 있다. 똑 같이 별 볼품없이 옷을 입고 다녀도 원래 돈이 많은 사람이 그렇게 입는 것과 돈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입는 것에 대해서는 평가가 다르다. 원래 돈이 많은 사람이 그렇게 입으면 “검소하”다고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그렇게 입으면 “궁색하고 초라하다” 고 한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 버리는 사람은 알고 보면 넉넉한 사람이다. 원래 풍요로운 사람이다. 버릴게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한다. 이 희생의 의식을 품고 살라. 가난해도 난 원래 부자인데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가난해졌지라고 생각하라. 왜 나는 이렇게 못사는 나라, 신앙생활을 하기 어려운 나라에서 태어났지?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라. 원래는 미국에서 태어날 수 있었는데, 이 나라에서 의미있는 일을 하고 주의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지라고 생각하라. 선교사도 자기 나라를 버리고 그 나라로 가지 않는가! 어려운 나라에 가서 사역하고 좀 힘들게 살아도 선교사들은 난 원래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으니 언제나 넉넉하다. 만일 내가 아프거나 장애인이라면 원래 나는 건강한 사람이었는데, 이 아픈 이들을 위해서 내가 아파 주고 장애인이 되어준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없겠는가! 어떤 분은 소록도에서 자신이 일부러 문둥병에 걸리려고 작정했다고 하지 않는가!
예)서명희선교사님 왈, 만일 내가 고등학교만 나와서 이렇게 밥퍼주는 사역을 한다면 열등의식과 자괴감이 들 것이다. 내가 못 배워서 하는 사역이라고는 밥하는 것이지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분은 대학원까지 다 공부를 했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오랫동안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니 희생의식이 드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우리가 공부를 하고 많이 배우면 나중에 갈등이 있게 된다. 많이는 배워놓았는데, 겨우 이거 할려고 배웠냐? 겨우 이런 거나 하려고 어렵게 돈 투자하고 시간 투자하고 젊음을 투자해서 유학을 했던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람들의 불만족이 무엇인가? 나는 이렇게 크고 대단하고 많이 배우고 재능도 많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썩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라이프찌히에서 썩고 있다. 내 그릇에 차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보라. 내가 썩는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예수님은 하늘의 그 보좌를 버리시고 하나님의 모습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은 그야말로 썩는 몸을 입으신 것이다. 오직 우리는 주여 버릴 것이 있어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한다. 버리기 위해 배워라. 희생하기 위해 희생의 제물을 만들라. 주님은 우리의 모델이다. 그분은 희생함으로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셨다.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 넣은 옥합을 깨뜨렸듯이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가장 귀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것처럼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내게 남아있는 마지막 자존심까지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아직도 희생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면 우리는 준비되지 아니한 것이다. 희생함이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는 것이다.
III.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의 마음이다.
7절과 8절을 보라.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종의 형체를 취했다고 한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된 것이다. 이전에는 The form of God 하나님의 본체였지만 이제는 자신을 낮추셔서 The form of a bond-servant 종의 형체를 가진 것이다. 종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섬김의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김흥근, 서명희선교사님은 “섬겨주시니”라는 단어가 입에 배었다. 물을 한잔 따러 주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섬겨주시니... 찬양하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찬양으로 섬겨주시니... 오늘도 노숙자분들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한다. 섬김을 하는 것이 그의 삶에 밴 것이다.
종이 된자만이 서빙을 할 수 있고 종이 되어야 사용할 수 있다. 주인처럼 행세를 하면 어떻게 사용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도 자신을 비워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하셨다. 자신의 캠바스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빈 공간으로 내버려 두었다. 하나님이 그리시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쓰실 때 겸손할 때까지만 쓰신다! 조금이라도 교만의 생각이 올라오면 그 부분부터는 무효다.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 쓰여지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사울왕도 다윗왕도 솔로몬왕도 겸손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서빙할 수 있었다. 교만해지니 하나님이 쓰실 수 없었다.
예)절여진 배추처럼 있어라. 바닷물에 뜨기 위해 우리의 힘을 빼는 것처럼 그분의 강물에 내 자신을 맡겨라.
주님은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한다. 아니 사람들이 어때서 그렇다는 것이냐?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되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ccording to our likeness.(창1:26) 그 모습은 아름다웠고 건강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즉, 하나님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가장 고귀한 것이지만, 그 기능을 상실하고 제 모습을 갖지 않으면 가장 추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인간이고 가장 더러운 것이 인간이고 인간이 창조의 질서에서 무질서로 만들어 놓는 중심에 있다. 그러니 예수께서 사람과 같이 되셨다는 것은 가장 낮은 자로 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바로 겸손이었다. 가장 낮은 곳으로 오는 것이었다. 이것을 유식한 말로 성육신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셨다는 말이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이다. 성육신이 바로 예수님의 방법이다. 낮아짐이 예수님의 방법이다. 겸손함이 예수님의 방법이다. 이 마음을 품으라! 이 마음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마음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 이 마음으로 인간관계를 가져야 한다. 이 마음으로 선교를 해야 한다.
예)이전에 선교학을 공부할 때 한가지 테마가 있었다. 선교사는 현지인과 같이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다르게 살아야 하는가? 그들의 음식을 먹고 그들의 옷을 입고 그들의 언어를 하고 그들 속에서 살아야 한다와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수 있냐? 중국이라면 중국전통의상을 입고 한국이라면 한복을 입고 일본이라면 기모노를 입을 수 있겠지. 하지만, 파푸아뉴기니처럼 타잔 같은 옷을 입고 살 수 있는가? 숲속 썩은 나무속에 살고 있는 굼뱅이를 잡아먹고 부화되다가 만 발룻이라는 것을 꼭 먹어야 하는가?
결론은 성육신의 모습으로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사의 사역은 한마디로 성육신의 사역이 되어야 한다. 선교를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그 나라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 속에 푹 젖어 들어가야 한다.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매국노가 되어야 한다. 2002년 한국과 독일이 준결승축구시합을 하는데 어느 미국선교사가 묻는다. 당신은 독일과 한국 어느 편을 들 것인가? 나는 한국편을 들었다. 그때 그 질문을 한 선교사가 당신은 선교사가 아니다라고 했다. 완전히 그 나라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선교사들은 자신이 사역하는 곳을 혹평하고 잘못 소개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늘진 부분을 보여줄 수 있다. 사실일 수 있다. 그래야 선교비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일까? 우리는 선교지를 가장 아름답게 묘사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존경해야 한다. 무엇을 불쌍히 보아야 하는가? 그들의 벗은 발이 아니다. 떨어진 옷이 아니다. 못 배운 교육이 아니고 불량스러운 의료시설이 아니다. 좁은 집이나 불편한 시설이 아니다. 불쌍한 것은 그들의 영혼이 되어야 한다.
IV.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 보상은 무엇인가?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희생의 마음이요 겸손의 마음이다. 얻게 되는 보상이 이것이다. 썩는 것을 넣고 고난을 넣고 애통함을 넣었지만, 생산되어지는 것은 이름이 높임을 받는 것이다.
주님의 사역은 페시브해 보이지만, 가장 악티브한 것이다. 무능력해 보이는 것이지만, 가장 강력한 것이다. 십자가를 끝으로 죽어 사라없어져 버리는 것 같았지만, 주의 이름이 온 세계에 전파되고 더욱 강렬한 인상과 영향을 주게 된다. 효과만점이다.
예)이승복-에스비 혹은 수퍼맨닥터리-에 관한 책이 있다.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라는 책에서 이승복씨는 자신이 간증임을 말하고 있다. 이승복씨는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홉킨스 재활의학과 척수신경장애병동에서 의사로서 일하고 있다. 그는8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 1.5세대이다. 그는 고 3시절 전 미국 올림픽최고 상비군으로 선발되어 있었다. 그는 1983년 7월 4일 1과 3/4 공중회전을 하다가 턱을 땅에 박고 척수신경을 다쳐 사지마비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올림픽의 꿈을 의사에 두고 콜롬비아 공중 보건학석사를 졸업하고 다트머스 의대를 졸업한 다음에 하버드에서 인턴으로 수석졸업을 하게 된다. 존스홉킨스 재활병동에서 다른 척수환자가 절망 속에 있을 때 그만이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그가 다른 환자들과 같은 환자라는 것이었다. 성육신은 파워이다. 성육신의 낮아지고 겸손하고 불완전한 모습과 같지만 그것은 파워였다. 이승복씨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에게 장애는 축복이었다. 나는 다른 의사들보다 환자들의 마음을 더 빨리 열 수 있고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들에게 나는 의사인 동시에 그들과 똑 같은 환자였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우리가 버리고 천하게 되는 것 같아도 보상은 하나님이 하신다. 아무것도 아닌 사역 같아 보인다. 청승맞아 보이고 지저분한 사역처럼 보인다. 그리고 허드렛일처럼 우아해 보이지 않는 그저 밥이나 해주는 사역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는 그 사역에서 하나님이 여러 가지로 도전하심을 알았다. 1)그 작은 사역을 통해서 일차적으로 노숙자들이 영육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말씀으로 변화되어 노숙자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역주변이 깨끗해졌다. 거리의 예배지만, 법도가 생겼다. 자신들이 오줌도 싸고 지저분하게 만든 곳이기도 하지만, 비짜루로 쓸어 주변을 정리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모든 것을 들어 나른다. 무엇인가 자신들이 해야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2)그리고 돕는 이들로 하여금 도전받게 한다. 한국타이어 가족이 돕는다. 중국인들이 돕는다. 주의 일을 위해 아르바이트로스들을 참여자들로 만들고 있고 그 속에 위로와 격려가 있음을 보았다. 이제는 경찰도 그 차는 역 안에 주차를 할 수 있게 한다고 한다. 3) 그리고 지나다니는 건전한 시민들로 하여금 도전받게 한다. 어떤 이는 에스프레소를 사와서 드시라고 한다. 어떤 이는 박물관에 관련된 분인데, 많은 것을 자세히 묻는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돕게 만든다. 비록 그 일이 쉽지 않고 힘든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희열을 주신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성경에 나타난 역설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주님이 낮아지셨기 때문에 높아지셨다.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님이 희생했기에 많은 결실이 생긴 것이다. 성육신적인 삶과 사역은 세상이 볼 때는 어리석어 보이고 지는 것 같고 비효과적인 것 같을찌라도 결국에는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높이시는 것이다.
V. 지난 한 주간 참으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가 “선교라는 테마가 있는 여행”을 가면서 그것을 기대했다. 가서 선교사님의 사역을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우고, 다른 세계를 경험하자! 한마디로 이번 여행을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라는 오늘의 말씀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럴 때 얼마나 주님이 사용하시는지를 알았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 마음은 희생의 마음이요 겸손의 마음이다.
주님은 관계를 맺기 위해 이 땅에 오셨는데, 당신 자신에게 우리를 맞추신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자신을 맞추셨다. 우리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셨다. 뭘 바라시겠는가! 노숙자들과 같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시겠는가? 이 한주간도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나를 희생하라. 섬기기 위해 겸손하라. 그때 아름다운 관계가 회복된다.
내가 인내하지 못하고 참지 못하면 내가 아직 성육신이 못되었구나 라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아직 버리지 못해서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라. 모든 이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어, 가정이나 교회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지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