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문학 9호 추모 허일만 시인>
화려했던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허일만 선배님을 추모하며
양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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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일만許壹滿(1941-2017) 선배님은 1941년 8월 13일 만주에 머물고 있던 부모님의 슬하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이름자에 만주를 지칭하는 滿이 들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전에 선대의 세거지인 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로 돌아와 유년 시절을 고향에 서 보냈다. 소년시절에는 부모님이 부산에서 사업을 했던 관계로 부산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 진주로 이사간 부모님과 떨어져 있기 싫어 진주고등학교에 1956년 3월 입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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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고등학교 시절의 허 선배님의 문학 활동은 화려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한 해 선배인 성종화, 정재필 시인들이 주도한 《시부락》 동인으로 참여하여 2집과 3집에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진주학생문단회에서 발간한 동인지 《청천》에도 참여하였으며, 진주학생문단회가 발전적으로 확대된 영남학도문학회의 창립 동인 38명 중에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57년 11월 23일(음력10월 3일)에 개최된 영남예술제에 맞추어 영남학도문학회는 동인지 《영화嶺火》가 창간되었는데 그곳에 시를 발표하였다.
창간호 편집에 직접 간여한 허 선배님이 편집후기에 남긴 글은 다음과 같다.
건물은 군데군데 헐었다. 이건 전쟁이 지나간 자취다. 회원들이 핼쑥해진 얼굴과 야윈 팔로써 재건의 못을 박고 있구나. 다음에는 더 나은 집을 짓겠다는 뜻을 간직하고--. 이번 창간을 위해 지도해주신 본회 명예회장 설창수 선생님, 고문 강천석, 박세제, 천옥석 선생님들께 삼가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또 표지를 곱게 그려주신 정은호 형과 우리와 한 덩이 되어 일해주신 조상길 형과 회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창립 후 처음 맞는 예술제 때에는 출판기념회를 겸한 행사로 백일장에 참가한 외지 고등학생 전원 약 100명을 진주문화원에 모와 환영회를 열고 채 잉크 냄새가 마르지 않은 창간호를 나누어 주었다. 그 때의 기념사진을 보면 부산에서 온 이유경(경남고, 시인), 강남주(동아고, 시인), 박송죽(남성여고, 시인), 문육자(부산사범,수필가), 그리고 뒤에 허 선배님의 부인이 된 선영자(부산사범, 시인) 등의 모습이 보인다.
이듬 해 1958년에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된 허 선배는 진주사범의 김상남, 강종홍, 조진태, 김안자, 진주여고 조현희 등과 어울려 《영화》 2집을 내는 등 영남학도문학회의 전성기를 주도하였다.
이 해의 영남학도문학회의 경사는 허 선배님이 서라벌예술대학에서 모집한 전국 고등학교 학생 문예작품 모집에 시 부문에 입상하여 트로피를 받은 것과 진주 사범 김상남(3대 남강문학회 회장, 아동문학가, 소설가)이 국학대학 주최 전국학생문예작품 모집에 입상한 일이다. 이 두 대학으로부터 장학생을 입학하라는 권유도 받았고 박용수 시인이 경영하는 연일사진관에서 두 사람이 상장과 트로피를 놓고 기년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 두 사람 말고 진주사범의 강종홍(소설가)의 활약도 대단했다. 1957년 고등학교 2학년 때에 부산 국제신보 주최 전국학생문예콩쿨에 소설이 당선되기도 했으며 1958년 영남예술제에서는 진주 학생문사 중 참방으로 유일하게 입상했다. 이 세 사람을 《영화》 2기 동인 트리오라고 불렀다.
허 선배님은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58년 8월 20일에는 시 15편을 엮어 활판인쇄의 시집 《조약돌》을 발간한다. 이 일은 그 당시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으며 국제신보사 문화부장 최계락(1930-1970) 선배님께 보냈더니 격려 편지와 함께 신문에 보도까지 해주었다. 이렇게 고등학교의 화려한 시절은 끝났다. 1959년 2월 말 허 선배님은 진주고등학교 29회로 졸업하게 된다. 그 동안의 문예반 활동으로 보아 서라벌 예대의 문예창작과 장학생이나 국문과를 진학할 수 있었는데 사업하던 선대의 영향 탓인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 무역학과로 진학하게 된다.
비록 상과대학 무역학과를 진학하고도 문학에 대한 열정은 놓지 않았다. 1959년 11월 3일부터 8일까지 개최된 제 10회 영남예술제(개천예술제로 이름이 바뀌기 전임)
한글시백일장 대학부에서 참방으로 입상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 《영문》에 시가 추천되기도 했다. 1959년 3월부터 1963년 2월까지 부산대학교 재학기간에는 부대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많은 글을 썼고 편집국장까지 지냈다.
(3)
고등학교 시절의 문학활동이나 대학시절의 부대신문사 기자와 편집국장을 한 것으로 보아 언론사에 입사하여 언론인이 되었다면 쉽사리 문학의 길로 들어섰을 터인데 허 선배님은 대학 전공을 살려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동안 고등학교 시절 문학활동으로 잠시 만났던 선정자 시인과 결혼을 하여 슬하에 두 아들을 낳게 되고, 그 당시로서는 벤처기업이라 할 수 있는 렌터카 업체를 창업하여 대표이사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부산상공회의소 대의원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며 의료법인의 행정원장으로 정신병원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개신교 신자로 신앙생활을 하였고 와이즈맨과 로타리클럽 회원으로 봉사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 그리고 부산 사하팔각회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남강문학회가 2008년 인터넷 카페에서 남강문우회라는 이름으로 발족할 즈음 허 선배는 계간 《시와 수필》에 시로 신인상을 받아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하였다. 그리고 초대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면서 다시 시의 창작에 힘쓰기 시작하였다. 필자가 2011년 4대 회장을 취임하기 직전 허 선배님이 먼저 회장을 해야 된다고 사양했으나 극구 안 하겠다고 하여 결국 4년 동안 필자가 회장을 맡게 되었다. 그동안 허 선배님은 자기는 시집을 내지 않으면서 부인인 선정자 시인의 시집을 두 권이나 엮게 하는데 많은 외조를 하였다. 2007년에 낸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2012년에 낸 『詩가 흐르는 江』이 그것이다. 특히 제2시집에는 선배님의 부탁으로 쓴 필자의 해설 「시적 관심의 확대와 심화」라는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시집 속에는 선정자 시인의 신앙이 육화된 많은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시집을 보면 시집의 제자는 우리 회지 《南江文學》의 제자를 쓴 중산 신경식 서예가의 글씨로 장식되어 있다. 사실 남강문학의 제자는 허 선배님이신경식 서예가에서 받은 것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표지는 허 선배님이 소장하고 있던 사진작가 정인성(1911-1996)의 「1958,진주남강」이다. 이렇게 허 선배는 부인의 시집 발간에 애를 썼다. 필자는 부부 시집을 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허 선배님은 말없이 웃기만 하였다.
그 동안 소원했던 남강문학회에 나오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허 선배님이 암투병 중이라는 소문이 들여왔다. 필자는 문병차 방문하기를 몇 번 시도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후강암이라 말을 제대로 못하는 탓으로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2017년 6월 24일 허 선배님은 끝내 부부시집과 개인 시집을 내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다. 2년의 투병 과정에 우리 회원 가운데 가족처럼 돌본 사람은 허 선배님과 함께 사무차장으로 봉사한 서창국 시인이다. 허 선배님의 외국에 있는 자식 대신에 많이 보살펴주었다.
허 선배님은 신앙을 가졌기에 분명히 천국에 가셨을 것이다. 이 땅에 남은 유족들과 우리 남강문학회 회원들이 힘을 모아 유고 시집이나 하나 엮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 본다.
<허일만 시인 대표작>
길
내 젊은 날의 갈 길은
너무 많았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모두 가고픈 길
이제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고
추억도 낙엽처럼 쌓여
내가 걸어온 길
오직 한길 뿐이었구나
그 길은
조금만 헛디뎌도
쓰러질 것 같은
험난한 길
지금은 한곳에 머물러
걸어온 길
뒤돌아본다
지금 나는
내가 가고 있는 길 위에
끓어오르는 일정도
황망한 욕망도
다 내려놓고
어린애 같은
아장 걸음으로
여유를 즐기며
한길로 한길로 가련다
-《남강문학》 창간호 발표
첫댓글 양왕용 고문께서 너무나 자상하게 허일만 선배님 추모글을 올렸네.
그 발자취를 읽으며 우선 글도 잘 썼지만...
생전의 허선배님 모습이 떠올라 가슴 몽클함을 느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