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문턱서 포기하지 말라

전남 나주 다보사에 천진불, 천진도인으로 유명했던 우화 스님이 있었다. 법문을 청하면 “대오는커녕 소오도 못해 할 말이 없다”며 좀처럼 자신의 살림살이를 내놓지 않았다. 어느 날, 전강 스님이 우화 스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공 스님이 입적했으니 한마디 해 보라는 것. 우화 스님은 “도(道)를 못 깨쳤는데 어찌 큰스님 열반을 놓고 뭐라고 해요”라며 사양했다. 아무리 재촉을 해도 뜻을 접지 않자 전강 스님이 농을 건넸다. “정, 안하려면 다보사를 내 놓으시오.” 이에 우화 스님이 한마디 내어 보였다. “푸른 산에 함박눈 내리니 한 봉우리가 드러났다(雪浮靑山 一峰獨露),” 이 한마디에 전강 스님은 탄복했다.
수좌들 사이에서는 이미 ‘수좌 중의 수좌’라 칭송되어 왔지만, 언론 인터뷰는 물론 대중법문을 청하는 자리에서도 ‘아직 할 말이 없다’는 일언으로 극구 사양해 온 선사가 있었다. 우화 스님의 제자 적명(寂明) 스님이다.
문경 봉암사 보림당(寶林堂)에서 친견한 적명 스님은 화두의 요체를 설파해 갔다. 군더더기 없는 한마디 한마디였다. 한 눈에 보아도 티끌 하나 앉아 있지 않을 것 같은, 아니 앉지 못할 것 같은 범상치 않은 풍모다. 선기다. 그러면서도 찰나동안 보이는 미소는 너무도 천진난만해 보는 이의 업장마저 녹여 버리는 듯하다. 무릇 수좌란(首座) 대중에게 수행과 법도의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 했는데 적명 스님이야 말로 이에 ‘딱 맞는’ 수좌다.
수행은 고행아닌 행복
초선만 경험해도 확신
일단 시작하면 중단 말길
상대초월한 경지 만날 터
적명 스님은 고등학교 졸업 후 우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직후부터 전국의 제방선원에서 50여 년 동안 묵묵히 수행의 길만을 걸어왔다. 천성산에서의 12년 토굴 정진 후 은해사 기기암에 주석하고 있던 스님이 봉암사로 발길을 돌린 것은 지난 해 정월 보름. 봉암사 대중이 스님을 찾아가 조실로 추대하며 후학을 지도해 달라 간청했었다. 이에 스님은 ‘조실’이라는 이름은 거두고 ‘수좌’로 있겠다며 봉암사 주석을 결정했다. ‘조실 불허’ 이유는 간단하다.
“선지식이셨던 향곡 스님은 용상방을 붙일 때 자신은 선원장이라 이름하고 조실엔 보조 스님을 써 넣었습니다. 호걸 중의 호걸이셨던 춘성 스님 역시 자신은 주지에 이름 붙이고 조실에는 전강 스님을 써 넣었습니다. 송담 스님 역시 조실에 손색없는 분이시지만 스스로 선원장이라 하지요. 조실이라 하면 권능이 있고, 조실이라 하지 않으면 권능이 없겠습니까? 물론 대중과 문중의 관계 속에서 ‘조실’, ‘방장’이라 이름 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저 역시 다른 방도가 선뜻 그려지지 않습니다. 조실이란 이름 떼겠다는 자신만의 주장만을 고집해 여러 사람 힘들게 하는 건 저 역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봉암사와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 굳이 조실이란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는 거지요.”
적명 스님은 봉암사 주석을 결정하며 제1 수행도량으로 거듭나게 할 것임을 천명했다. 외부불사는 끝났으니 이제 내면불사에 주력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봉암사는 가난한 절이었다. 지금의 도량은 지난 20여 년 간의 불사가 원만하게 진행되어 온 결과다. 봉암사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스님은 22년 전의 일화 한 토막으로 보여줬다.
“한 스님이 공양 중에 콩나물 무침을 많이 드셨습니다. 당시 주지 소임을 보시던 고우 스님이 한마디 하셨지요. ‘아니, 먹을 것이 없어 콩나물 무침을 해 둔 것인데 스님 혼자 그리 많이 드시면 어떻게 합니까?’ 콩나물 무침 하나 좀 많이 공양했다고 핀잔 아닌 핀잔을 들어야만 했던 시절입니다.”
적명 스님은 머지않아 한국에서 정진 제일 잘하는 산사, 가장 정진하고 싶은 산사로 만들겠다고 대중에게 약속했다. 조계종 종립선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시키겠다는 원력을 세운 것이다.
적명 스님은 간화선 수행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선정과 지혜의 요지를 들어 보였다. 굳이 말하자면 정은 체(體)요 혜는 용(用)이라 한다. 호수에 이는 파랑을 비유로 들어 설명해 갔다.
“정이란 호수의 파랑을 가라앉히는 겁니다. 호수에 파랑이 일면 물이 흐려지니 그 속에 있는 돌 하나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파랑이 멈추면 호수는 맑고 고요해지지요. 정(定)입니다. 고요한 호수 그 자체는 체이지요. 명경지수의 호수는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특성을 나타내는데 바로 비춤입니다. 호수 속의 작은 돌 하나도 잘 보입니다. 하늘의 푸른색도, 구름도 그대로 비춰지지요. 혜(慧)입니다. 호수의 고유 특성이 나타났으니 용(用)입니다.”
적명 스님은 ‘정을 닦지 않으면 혜가 이뤄질 수 없고, 혜가 갖춰지지 않으면 올바른 정이라 할 수 없다’했다. 참선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심성에 본래 갖춰져 있는 정혜를 계발하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화두란 진정 무엇일까?
“화두는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그냥 선지식이 깨달은 상태에서 보고 느낀 그대로를 말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불제자는 화두에서 명백하게 법 자체를 우리 눈앞에 보여준 것’이라 한 조사들의 말이 와 닿는다. 그렇다면 범부는 왜 화두를 타파하기 어려운가? 적명 스님은 “정혜가 이뤄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무명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정혜가 발현된 선사에게는 호수 속 푸른 하늘이 보이지만 무명에 가려져 본성을 찾지 못한 범부의 눈에는 푸른 하늘과 구름은커녕 돌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호수 속 푸른 하늘을 보라 한들, 보이겠는가!
“얼굴을 남쪽으로 한 상태에서 북극성을 보라는 화두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까요? 바로 ‘어떻게’하는 순간이 의심하는 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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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명 스님은 현재 봉암사 동방장에 주석하고 있다. |
적명 스님은 밤길을 가다 어떤 이상한 소리가 나거나 희미한 대상을 만났을 때 어떤 동작을 취하는지 살펴보라 한다. 우선 발걸음을 멈출 것이다. 그리고 이내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전의 사념은 온데간데 없다. 소리에 집중하는 순간 이전의 생각이 끊긴 것이다. 집중했기 때문이다. 화두를 처음 드는 단계의 이치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의심이 커지다보면 순일해집니다. 일념, 무념상태가 되면서 삼매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대승불교권에서 볼 때 대상은 망념일 때 나타납니다. 고요한 호수처럼 명경지수 상태에서는 저절로 상대성을 초월합니다. 대상이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무념과 대상이 없다 함은 단순히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이 아니며, 대상이 없다는 것 역시 눈앞에 실제의 대상이 없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어느 경지에 이르면 대상이 있다 해도 대상에 따른 마음 작용이 없다는 것이리라. 다시 말하면 경계가 있어도 그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다는 말의 다름 아니다. 물론 더 나아가면 아예 우리가 말하는 망념, 망상 따위는 아예 일으키지도 않는다고 선인들은 말해왔다. 여하튼, 적명 스님의 설명은 “오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는 몽산 스님의 말과 함께 음매해 보아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적명 스님은 적어도 수행의 길에 들어선 수좌들은 절대 이 공부를 놓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이 길은 고행의 길이 아닙니다. 사선팔정 중 초선에만 들어 보더라도 희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행복이라 해도 좋습니다. 수행에 뭔가 있다는 확신이 섭니다.”
좌선을 한다는 게 화두 하나 들고 본 거라고는 벽 밖에 없는데 우리가 말하는 희열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체험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선미’다.
“직접 경험 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체험 했다면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의 문턱에까지 갔는데 어찌 희열이 없겠습니까.”
초선에만 들어 보아도 이 공부에 대한 확신이 선다는 일언을 전하는 스님의 모습에도 확신이 서 있어 보였다. 정말 ‘내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무간지옥에라도 가겠다’는 결연한 모습이다. 오신(悟新) 선사도 말한 바 있다.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고 추궁하다 보면 홀연 마음빛이 활짝 밝아 시방세계를 비추게 될 것이다. 그 때는 가히 마음에 맞고 손에도 어울려 능히 대지를 변하여 황금을 만들고, 큰 내를 지어 소락(酥酪)을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니 이 어찌 평생이 유쾌하고 시원하지 않으랴!”
적명, 오신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 볼 일이다.
10분이라도 매일 앉으면
절로 하고 싶은 때 올 것
현재 고난은 전생서 비롯
약으로 알고 감수하기를
적명 스님은 재가불자들에게 하루 10분이나 30분이라도 좌선에 들어보라 권했다. 물론, 꼭 화두를 들지 않더라도 염불이든 주력이든 관법이든 한 번 해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고 싶든, 하고 싶지 않든 일단 시작하면 매일 해 보는 것이다. 처음엔 힘들지만 지속하다보면 괜찮다고 느껴짐은 물론 더 나아가면 저절로 하고 싶어질 때가 있을 것이라 한다.
적명 스님은 또한 달마대사의 사행(四行)론을 들어 보원행(報怨行)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원행이란 남으로부터 고통을 당할 때 자신의 전생에 저지른 원한 때문에 생긴 일이니 상대를 원망하지 않고 수행하는 자세를 말한다.
“내가 지은 바가 현재 나타난 것이니 책임을 져야지요. 고맙게 받고 감수한다면 두려움이나 원망, 회피도 사라질 겁니다. 이는 인과를 믿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현실에서 사는 지혜의 길이요 수행의 길이며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인과법을 해결한다면 그 자체가 해탈입니다.”
보원행은 사행의 첫 길이다. 이를 수용하면 모든 일이 인연따라 생기는 것임을 알기에, 최선을 다할 뿐 성공과 실패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후 공(空)의 이치를 깨달아 사물을 탐내지 않는 무소구행이 이어질 것이며 나아가 진리의 법대로 살아가는 청법행이 이뤄질 것이다.
어떻게 얼굴을 남쪽으로 하고 북두의 별을 볼 것인가? 참구해 볼 일이다. 우리로서는 옛 선사의 말에 의존해 선미의 단편이나마 맛볼 수 있을 뿐이다.
남전 선사가 시중해 말했다. “삼세의 부처님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살쾡이나 흰 염소가 있음을 안다.” 이에 보림본(寶林本)이 말했다. “있음을 알거나 있음을 알지 못한다 함이여. 푸른 물, 높은 산이 그대로 있고 조계의 거울에는 티가 없다. 굳이 남쪽을 향해 북두칠성을 보려 하리요(知有不知有 綠水靑山且依舊 曹溪鏡裏本無塵 何必面南看北斗).”
푸른 물 하나도 그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는 적명 스님의 말을 그대로 믿고 좌선에 들어볼 일이다. 잠깐 동안이라도 좌선하면 항하사수의 보탑을 쌓은 것보다 낫다고 했다. 보탑은 허물어져 티끌로 돌아가지만 한 생각 맑은 마음은 필경 부처를 이루기 때문이다.
휴휴선사는 “바깥에서 어떤 경계도 들어오지 않고 안에서 어떤 마음도 내놓지 않는 것을 좌(坐)라 하고, 집착할 것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어서 늘 마음의 빛이 환히 드러나 있는 것을 선(禪)”이라고 했다.
적명 스님의 확신을 믿고 좌선에 든다면 우리도 분명 호수 속에 비친 구름 한 점은 볼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10분이라도 매일 앉으면 절로 하고 싶은 때가 오고, 현재의 고난은 전생에서 비롯된 약으로 알고 감수하길.." 감사합니다. 한번 부딪쳐 보겠습니다. 퇴굴심도 조급함도 없이 그저 묵묵히 그냥 한 번 걸어가 보겠습니다. 가다보면 가다보면 무지로 가득찬 물잔이 조금씩 조금씩 비워 질 것이고, 설령 이 생에서 해결이 안 된다고 포기치 않겠습니다. 이~~뭣~고~~
좋은 말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공부 잘하고 갑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