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종이학
서건동진(西乾東震), 급아해동(及我海東). 인도 땅에서 일어난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된 일을 글 한 줄로 쓰면 그렇게 되거니와, 그 사이에 수도 없이 접히었을 고귀한 신명들에게 삼가 헌향하는 마음이 없지 못할 터였다. 조석으로 올리는 예불에서 승속이 함께 음성으로 공양 올리는 뜻이 그러하다. 신라는 세 가지 성씨의 임금이 백성의 안위를 주관하는 수호신이었기로, 고구려보다 일백오십 년이나 늦게 불법을 받아들인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바탕은 남다른 불심으로 결집된 백성들의 호국 정신이었을 것이다. 백성들이 불법을 일상을 굴리는 바퀴의 축이자 구체적인 바퀴살로 삼았던 때, 그때에 절들은 하늘의 별처럼 벌여 있고[寺寺星長], 연이어 산 탑은 기러기의 행렬과도 같다[塔塔鴈行] 했다. 평지 사찰, 넓은 땅, 번화한 마을 한가운데에 세워진 절은 출입에 저어함이 없었으니, 여염과 같은 등위(等位)에서 공간만 넓혀진 곳이라 할 만했다.
흐느끼며 바라보매
이슬 밝힌 달이
흰 구름 따라 떠간 언저리
모래 가르며 흐르는 물가에
기랑의 모습이로다, 수풀이여
일오(지명:역주)의 냇가 자갈벌에서
님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좇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눈도 덮지 못할 고깔(높은 지조:역주)이여
―충담, ‘찬기파랑가’
그 옛날 삼월 삼짇날, 남산 삼화령에 계시는 미륵세존께 차 공양을 하고 돌아가던 충담 스님은 임금의 청을 받고 차 한 잔과 노래(‘안민가’) 한 수를 지어 바치거니와, 그가 지은 ‘기파랑가’는 임금도 익히 알 만큼 동경 땅에 널리 퍼진 노래였다. 그 임금이 경덕왕, 뒤이어 등극하는 혜공왕대에 이르면 쇠미해지는 국운의 징조가 빈발하게 되거니와,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가 울려 퍼지던 동경의 밤하늘, 들이 넓어 하늘 또한 드넓었던 그곳에 뜬 것은 꽉 차서 절정에 이른 보름달이었다.
산중 유벽진 곳에 세워지는 산지 사찰의 연원은 신라 말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스님들이 중국 조사의 전통을 따라 산중에 수행 도량을 마련한 데서 비롯된다. 심즉불(心卽佛)의 ‘불온한’ 사상은 왕족과 귀족을 중심으로 흥왕했던 나말의 교종에 대한 강력한 항거 의미를 띠니, 지리적으로는 중앙(경주)의 통치력이 미치기 힘든 변방을 구해야 했던 절실한 까닭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선종은 삼처전심(三處轉心)으로써 정법안장을 가섭에 전했던 부처를 원조로 삼으나, 서역에서 구도의 길을 떠나 중국 땅에 이르러 뜻을 편 보리 달마를 초조로 삼는다. 그러나 선의 종지는 6대조인 혜능에 의해 확립된다. 이후 그는 중국 불교 역사의 중심축을 이루게 되거니와, 하택 신회, 남악 회양, 청원 행사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즉심즉불’, ‘평상심시도’를 주장하는 마조 도일에 이르러 중국의 선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그의 문하에서 나온 백장 회해, 서당 지장, 남전 보원 등은 마조의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상수 제자들이다.
나말에 전래된 구산(九山) 선문의 개산조는 거의가 마조 도일의 선법을 이은 사람들이다. 5대조의 제자인 신수가 편 ‘점수법’은 중국 땅 북쪽에 자리잡아 이후 ‘북종선’으로 불리거니와, 동문인 혜능이 남쪽 지방에서 편 ‘돈오법’은 남종선‘이라 불리니, 남종선을 처음 이 땅에 선 보인 사람은 도의였다. 그러나 그는 때를 얻지 못하여 설악산 진전사로 몸을 숨기었고, 뒤이어 귀국한 홍척이 지리산에 실상 산문을 연다. 마조와 서당과 회해로부터 37년 동안 가르침을 받고 귀국한 도의가 설악산으로 숨었다고는 하나, 그의 선법을 숭앙하여 진전사를 찾는 무리가 개미떼와 같았다 하니, 최치원은 이를 두고 ‘북산(설악산)의 도의’라 표현하여 초전(初傳)의 뜻을 기리었다. 또한 ‘남악(지리산)의 홍척’이라 함은 선의 종지를 이 땅에 실질로 뿌리내리게 한 초조의 위업을 기리려는 뜻이다.
골품 제도의 폐해를 깊이 인식하여 개혁 성향을 보였던 흥덕왕과 선강태자의 후원을 받고 개산한 실상 산문은 수철과 편운으로 맥이 이어지거니와, 이후로 일천의 제자가 배출될 만큼 융성한 가문을 이루었다. 현재 실상사가 보유하고 있는 국보와 문화재급 유물은 단일 사찰로는 국내 최다인 만큼, 그 옛날의 영화를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영남과 호남의 접경 으름에 있는 실상사는 천왕봉을 마주 바라보는 너른 들에 세워진 평지 사찰이다.
종이학이 날아간다
지리산으로 날아간다
비가 오면 종이는 슬쩍
남겨 두고 날아간다
―정호승, ‘종이학’ 중
실상사 옆으로 흐르는 만수천(남천)은 반야봉, 노고단, 고리봉 등에서 흘러 내린 물이 모여 된 냇물이다. 그것이 어쩔 수 없이 ‘푸른 물’이 되고 마는 것은, 삼봉산, 백운봉 등의 양편 산이 드리우는 산그늘 때문이다. 그 위로 종이학 한 마리 날아간다. 종이는 지우고, 비상하려는 뜻만 남아 날아간다.
실상사는 팔팔고속도로에서 인월로 접어들어 마천쪽으로 향하게 되는 큰길 가에 있다. 초입의 해탈교는 근년에 세워진 콘크리트 다리이다. 그것이 생기기 전에 벗은 몸으로 월천(越川) 공덕은 쌓던 것은, 똘똘, 만수천이 빚어 내는 물소리를 꼭 닮은 징검다리였다 한다.
그 옛날에 부처를 뵈오러 그 어여쁜 다리를 건너기도 했을 허리 굽은 할머니 한 분, 오늘은 해탈교로 건너간다. 부처님께 절하기 전, 손에 든 정(淨)한 보시물은 검은 흙에 놓을 수 없겠기로, 짝을 잃고 한 분만 남은 큰 나무 밑 돌사람에게 마음으로만 합장한다. 집안의 평안과 일신의 안녕, 저보다 커 보이는 어떤 것을 믿고 의지하여 빌어 보려는 것이 오죽잖은 것이라 하더라도, 비는 마음이 지심(至心)일 적에는 어여쁘지 않다 할 수 없을 터였다. 벼랑 바위에 새긴 부처, 불심은 그것이 제가 지어 낸[作] 형상이 아니라, 바위 속에 계신 부처를 껍질을 벗기어 나타나도록[現] 한 것이라 여기었다. 지나치는 큰 바위에마저 절을 했던 미불(米芾)처럼, 아만이 있고서야 갖추지 못할 불심이다.
절로 들어가는 길, 그 길이 옹근 십리가 넘게 멀었던 것은, 발을 적시는 물길로 가로막히기도 했던 것은, 때로 장승이나 당간 따위로 단속했던 바, 일주문, 사천왕문에 이르러 또 허리 굽히게 했던 것은 버려야 할 아만과 구해야 할 하심을 위한 것이었다. 사문의 길에 든 자로서 예비해야 할 바, 행자가 닦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 또한 그러하다.
차수(叉手)한 채로 도량을 가로질러 가는 감물색 옷 저 행자, 해는 기울어 어두워지니, 땅 디디는 정결한 흰 고무신이 더욱 또렷해지는 저녁 도량.
도서출판 호미 간행 < 초승달도 눈부시다! > 중, '달빛 기행'
첫댓글 애궁^^ 좋은 공부하고 갑니다. 카페지기 둥지보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