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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여행13 - 도요쿠니 진자와 이총을 보고 호코지 종에서 오사카성 전투를 떠올리다!
2019년 4월 9일 교토에서 우지(宇治)시 에 도착해 뵤도인 절을 보고 윤동주 시비 에 참배
한 후에 겐지모노 가타리 뮤지엄 을 구경하고는 전철을 타고 주소지마역 에 내립니다.
사케의 명가 겟게이칸 (月桂冠 월계관) 과 사카모토 료마 가 자객에게 칼을 맞은 데라다야
를 보고는 걸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지은 후시미 모모야마성 伏見桃山城 에 오릅니다.
산을 내려와 전철을 타고 후시미 이나리역 伏見稲荷(복견도하) 에 내려서 천개의 붉은
도리이 가 인상적이라는 후시미 이나리진자 (稲荷神社 도하신사) 를 구경합니다.
신사를 내려와 후시미 이나리역 에서 다시 전철을 타고는 3정거장 교토 케이한
전철 시치조역 京阪電鉄 七条駅 에 내려서는 걸어서 교토 박물관 을 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를 모시는 도요쿠니 진자 豊國神社(풍국신사) 에 도착하는데 맞은편에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 12만 6천명의 귀와 코 가 묻힌 이총에 참배 합니다. 조선에서 일본에 12차례나 갔던
통신사들은 이 무덤에 들러 참배 를 했으며 1990년에는 박삼중 스님이 영혼을 사천으로 모셔 왔습니다.
무서운 것 을 "에비야" 라고 하는데 이는 ‘이비야(耳鼻爺)’ 에서 유래한 것으로 귀(耳), 코(鼻), 사람(爺) 이
합쳐진 말로 귀나 코를 베어가는 사람 이라는 뜻인데..... 왜군은 정유재란 때 울산에서 순천까지 26개
왜성을 쌓고 늦봄에 출격해 경상, 충청, 전라도 를 휩쓸면서 왜병에게 1인당 한되씩 코를 베도록 해서
위협을 가하고는 늦가을에는 왜성에 돌아와 쉬며 몇년을 되풀이하면 하삼도를 얻을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도요쿠니 신사 옆에는 히데요시가 자기 집안의 절, 다시말해 우지데라 로 지은 호코지
万廣寺(만광사) 라는 절이 있는데..... 호코지의 다이부쓰덴(大佛殿 대불전) 은
서쪽을 면하고 있는 2층 지붕의 건물로 그 규모는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인 나라 도다이지(東大寺) 의 다이부쓰덴(大佛殿) 보다도 조금 더 컸다고 합니다.
건물 높이 200척에 나무로 조각한 본존방광불 (本尊方廣佛)의 높이는 160척이었다고
전하니 이 불사의 건설은 근세 초기의 최대 구조를 가진 공사였으나.... 1592년
지진으로 붕괴 되었으며 아들 히데요리(秀賴) 는 1610년에 이 절을 재건하였는데
건물의 건축 규모는 히라노우치케(平內家) 에 보존되어 있는 도면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다이부쓰덴(大佛殿) 은 회랑으로 둘려 있는 중정 안에 배치되어 있으며...... 정면
88m(295척), 측면 58m (184척) 이었고 건축 당시 일본 최대의 목조 건축물
로서 모모야마(桃山) 시대의 웅대한 기상을 나타내었다는 평을 듣습니다.
부쓰덴(佛殿 불전) 중앙에 가라하후 (唐破風 당파풍) 를 만들었으며 공포는 7출목(出目)
으로 다이부쓰요 (大佛殿 대불전) 건축양식을 따라서 사시히지키(揷肘木) 를 사용했습니다.
1610년에 히데요리(秀賴) 가 재건하였던 이 건물은 1662년 지진으로 재차
파괴 되었으며 현재는 회랑 자리에 초석 들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이 절을 찾은 이유는 절에 걸린 종 을 보기 위함이니......
어두운 가운데서도 종의 모습은 참으로 커서 위압적인데, 이 "종에 새긴
글씨" 로 인해 무려 30만 대군이 오사카성에서 격돌하는 대전투 로 이어집니다!
히데요리가 호코지 万廣寺 (만광사) 절을 재건축하며 만든 종에 '국가안강 군신풍락
(國家安康 君臣豊樂)' 이란 부분이 있으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의 손녀 센히메 를 시집보냈던 오사카성에 웅거한 사위 히데요리 를
죽여서 도요토미 가를 멸문시키기 위해 트집 을 잡았던 이른바 '국가안강의 종' 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포로인 조선 선비 강항 에게서 주자학 을 전수받은 후지와라 세이카
의 제자 로 막부 어용 성리학자인 하야시 라잔 의 도움을 받아 이에(家) 와 야스(康)
사이에 자(安) 를 넣어 이름을 끊어버림으로써 자신을 해하려 하고, 도요(豊)토미
(臣)를 주인(君)으로 하니 즐겁다(樂) 라는 부분이 있으니 자신을 저주한다며 사위
인 오사카성의 도요토미 히데요리 豊臣秀頼 를 1615년에 20만 대군을 동원해 공격 합니다.
히데요리 는 히데요시(豊臣秀吉) 와 그의 측실인 차차(茶茶, 요도도노 淀殿)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으로 히데요시 사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関ヶ原合戦)
를 비롯한 도쿠가와 세력과의 알력 끝에 결국에는 1615년 오사카 여름의 진
(大坂夏の陣) 때 오사카성(大坂城)이 함락되자 생모 요도도노와 함께 할복 했습니다.
히데요리 는 1593년 부친 히데요시거 57세때 태어났는데 어머니 요도기미 는 히데요시의
측실로 아사이 나가마사(浅井長政) 의 처(妻) 였던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 의
여동생인 오이치의 장녀 차차 인데, 차차의 여동생 고우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결혼
하니 이에야스의 며느리가 되었는데 그 딸 센히메는 이종사촌인 히데요리와 결혼 합니다.
히데요리가 태어나기 전 히데요시는 조카 히데쓰구 (豊臣秀次)를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해
간파쿠(関白) 의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친자가 태어나니 장래를 위해 1595년 7월
히데쓰구의 간파쿠 직책을 박탈하고 할복시킨 뒤 그의 처자 또한 몰살 하였으며...
다이묘들로 부터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혈판 서약서 를 쓸 것을 강요 합니다.
이후 후시미성(伏見城) 이 완공되어 부자가 함께 거처를 옮기는데... 히데요시는 그때
까지 독재였던 자신의 정권 체제를 수정해 고다이로(五大老), 고부교(五奉行)
제도를 도입하여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새로운 체제 를 수립하였으며 이듬해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히데요리가 그의 뒤를 이었고 거처는 오사카성 으로 옮깁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가 중신 합의제 의 원칙을 자주 어기고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갈등이 증폭되던 중에...... 또 다른 고다이로인 마에다 도시이에
(前田利家) 가 사망하고 고부교이자 친 도요토미파인 이시다 미쓰나리 (石田三成)
가 실각하면서 결국 이에야스 가 어린 히데요리를 제치고 정국의 주도권 을 쥐게 됩니다.
1600년 이시다 미쓰나리 등 이에야스에 대항하는 세력들이 군사를 일으킨 세키가하라
전투 가 발발하니 히데요리는 고다이로의 일원이자 서군의 총대장으로 옹립된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의 비호 하에 있었으며.... 히데요리의 친위대인
나나테구미 (七手組)의 일부도 서군에 참가해 사실상 미쓰나리의 서군 편에 속했습니다.
20만 대군이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 는 이에야스의 동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2년 전에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위광 이 아직도 일본을 덮고 있던 때라 명분상 서군과
동군이 모두 “히데요리 공을 위하여” 군사를 일으켰음을 천명 하였으므로......
히데요리는 이에야스를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물로 치하하며 위로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후 처리 에 있어 이에야스는 셋쓰(摂津), 가와치(河内), 이즈미(和泉) 의
직할령을 제외 하고 각 다이묘들과 가신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던 도요토미
종가의 영지를 마음대로 분리하고 분배 하였으며..... 이로써 히데요리 는 일본
전국에 퍼져 있던 220만석의 대영주에서 65만석의 일개 다이묘로 전락하고 맙니다!
1603년 이에야스 는 바쿠후(幕府 막부)의 최고 권력자 를 상징하는 세이이 다이쇼군
(征夷大將軍 쇼군) 의 지위를 획득하고 에도성(江戸城) 의 보수에 여러
다이묘들을 동원하는등 독자적인 정권을 행사 하기 시작하였으니..... 사실상
히데요리 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로 천하인(天下人) 의 자리에서 밀려난 것입니다?
하지만 히데요리 는 이후에도 여전히 셋칸케 (摂関家 섭관가)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조정
(천황, 일왕) 에서 순조롭게 높은 관직을 부여받았으며 가신들에 대해 독자적인
관직 서임권 을 행사하였고 매해 신년마다 조정의 구게(公家 공가)들 에게 거성
오사카 성에서 참배 를 받는 등 히데요시의 생전과 다름없는 높은 예우 를 받았습니다.
무가 사회에서도 히데요리의 가신 은 부신(陪臣)이 아닌 도쿠가와의 직통 가신과 동등하게
인정받는 등 도요토미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과 대등한 관계 를 유지하여 일각에서는 이
시기를 두개의 정권이 공존 하는 “이중 공의 체제(二重公儀体制)” 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1603년 7월 10살 도요토미 히데요리 는 이에야스의 손녀 이자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로 부친 히데요시의 생전에 약혼했던 6살인 센히메(千姫)와 혼인 하니......
이종사촌간의 결혼 이라? 센히메는 이모였던 요도기미를 시어머니 로 불러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인데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 이 있을 수 없으니...
1614년 호코지(方廣寺) 종명(鐘銘) 사건을 계기로 도요토미가문과 도쿠가와가문이 결별
하면서 오사카 겨울 전투 가 발발하는데 히데요리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福島正則),
가토 요시아키라 (加藤嘉明) 등 도요토미 가문의 휘하에서 은혜를 입은 전적이 있는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격문을 날렸으나.... 도요토미 측에 가담하는 다이묘는 없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후 다이묘의 지위를 상실한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고토 모토쓰구,
조소카베 모리치카 (長宗我部盛親), 모리 가쓰나가 (毛利勝永), 아카시 다케노리
등과 그 외에도 주군이 서군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개역당하면서 낭인(浪人)
이 된 수만명의 무사 들은 도요토미의 격문에 반응하여 곧장 오사카 성에 입성 합니다.
그러나 이들 낭인들은 사기가 매우 높았던데 반해 오합지졸로 통제가 어려웠고, 낭인 무리와
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 및 요도도노 측이 전투의 마지막까지 서로 대립하여 갈등
을 빚었으며 전술에 있어서도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 등은 교토로 진격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오노 하루나가등의 반대로 결국 오사카 성에서 농성 하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도요토미군이 10만 인데 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명을 내려
20만 대군 이 모이니 기쓰가와구치 전투(木津川口の戦い), 바쿠로부치 전투등에서
도쿠가와군에게 연패한 도요토미군 은 노다 수상전투(野田の戦い) 및 이마후쿠
전투, 시기노 전투에서도 패배해 주변 성채를 모두 버리고 오사카 본성으로 철수 합니다.
오사카 성에서의 전투에서는 도쿠가와군이 낭인들의 활약으로 지속적으로 격퇴당하면서
성내 진입이 좌절되었고 사나다마루 전투(真田丸の戦い) 때 도쿠가와측이 큰
손해를 입자.... 도쿠가와군은 심리적인 압박감 을 줄 의도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사카성에 포격을 가하는데 사나다무라 전투는 2016년 NHK 대하드라마로 방영되었습니다.
이윽고 도요토미 측과 도쿠가와 측 양쪽이 식량과 탄약이 고갈되면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
측에 화친을 제의 하는데 당초 히데요리는 반대하였으나 어머니 요도도노(요도기미)
등의 설득으로 결국 "오사카 성의 해자를 메운다는 조건으로 화의" 를 받아들이는
데..... 맹장이자 지장인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유키무라) 의 주장이 무시된 것입니다.
화의는 맺어졌으나 도쿠가와 측 은 도요토미 측이 스스로 요건을 이행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해자를 메웠으며 성곽의 일부도 파괴 하였는데... 이에
도요토미 측이 크게 항의 하였으나 도쿠가와 측은 이를 일축하고 오히려
낭인들을 모조리 추방 하고 영지의 일부를 교환할 것을 도요토미 측에 요구합니다.
결국 이듬해인 1615년 도요토미측 이 도쿠가와 측의 요구를 모두 거부하고 해자를 도로
파내면서 이에야스는 전쟁의 재개를 선포 하니 오사카 여름 전투 가 발발하는데
도요토미 측 장수인 오노 하루후사 (大野治房) 가 야마토 코리야마성 (大和郡山城)
으로 출격해 제압하고 약탈을 벌이고 되돌아온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됩니다.
도요토미측 은 오사카 쪽으로 북상하고 있던 도쿠가와의 대군을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군대로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좁은 지역인 야오(八尾) 로 진군하였는데..... 결국
야오와 와카에(若江), 도묘지(道明寺) 에서의 전투에서 조소카베 모리치카 휘하의
도요토미군 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휘하 도쿠가와군을 괴멸 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기무라 시게나리(木村重成), 고토 모토쓰구 등이 전투에서 전사 하면서 도요토미군
도 타격을 입었고...... 오노 하루후사 등이 출정한 가시이전투(樫井の戦い) 에서
선봉인 반 나오유키의 도요토미군이 아사노 나가아키라 (浅野長晟) 의 도쿠가와군에게
패퇴하고 나오유키 또한 전사 하면서 도요토미군은 후퇴하여 오사카 성 으로 물러납니다.
잇따른 패전 으로 전력을 잃고 피폐해진 도요토미 측은 도쿠가와의 수장인 이에야스와
히데타다 가 오사카에 포진한 때를 노려 최종 결전 을 다짐하니, 사나다 노부시게 는
총대장인 히데요리가 직접 전선에 나와 군사들을 독려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아들을
염려한 요도도노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으니 전투에 모든걸 걸지못한 어리석은 일입니다.
5월 7일 도요토미 측의 모리 가쓰나가 부대가 도쿠가와 측의 혼다 다다노부 부대를 사격한
것을 시작으로 오사카 마지막 전투인 덴노지 전투 (天王寺の戦い) 가 발발하자.....
순식간에 모든 전선에 파급되어 전장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오노 하루후사 의
도요토미군이 오카야마구치(岡山口) 의 히데타다 본진으로 돌진 하였으나 저지됩니다.
반면 덴노지 방면에 포진한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 모리 가쓰나가 군은 차례 차례
도쿠가와 측을 무너뜨려 한때 이에야스가 자결을 각오할 정도로 도쿠가와군을 궁지에
몰아넣었으니.... 특히 사나다 노부시게 는 적과 아군 양 쪽에서 “일본 제일의 용사
(日本一の兵)” 로 칭송 받았을 만큼 여러 차례 장렬한 돌진을 감행하며 분투 하였습니다.
군세가 적어 이에야스를 죽이지 못한 노부시게 는 간토무사가 백만이라고 자랑하지만
남자는 하나도 없구나 (関東勢百万と候え、男はひとりもなく候)」라는 유명한
말로 도쿠가와군을 조소 하면서 의연히 말에 올라 퇴각했다는데...... 그러나
퇴각 중에 결국에는 힘이 다하여 전사 하였고 다른 도요토미군도 서서히 괴멸 됩니다.
도쿠가와 군이 오사카성에 입성 하면서 히데요리와 요도도노 는 본성을 버리고
야마자토마루(山里丸) 로 피신 하였으나 곧이어 도쿠가와군에 포위되니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야마자토마루에서 어머니 요도도노와 함께 자결 하는데
이 전투에 모든 것을 다 걸지 못하고 아들의 안위만 생각한 여인의 어리석음 이라....
첫댓글 선생님 어떻게 이렇게 일본역사도 다 꿰고 계시는지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하아....... 무슨! 그냥.....
옛날부터 역사에는 흥미가 있었던지라
책은 엄청 읽었는데 이제 이터넷에
온갖 지식과 역사가 다 올려져 있으니
기본 지식만 좀 있으면 얼마든지 검색이 가능하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