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펠러를 단 펭귄
이지우(산문:수필)
엄마는 오늘도 펜을 쥐고 그림판 위에서 한바탕 씨름을 벌였다. 한참을 사색에 잠겼다가 섬세하게 펜촉을 움직이는 모습은 제법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조용히 옆으로 다가서니 엄마의 그림이 보였다. 엄마가 그리고 있는 건 머리에 프로펠러를 단 펭귄들이었다. 일렬로 줄을 맞춰 선 펭귄들은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우스꽝스럽게 웃거나 오열하며 눈물을 흘리고 한껏 심드렁하게 드러누워 있기도 했다. 그들 모두는 과장된 표정을 지을 때 단춧구멍만 한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미술계의 거장을 닮은 손길로 고작 펭귄 무리를 그리는 엄마에게 익숙했다. 엄마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크게 부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내가 엄마의 새로운 과제에 대해 듣게 된 건 며칠 전 함께 점심을 먹을 때였다. 엄마는 갓 지은 밥을 한술 뜨려는 순간 식탁 위에 폭탄을 터트렸다. 이모티콘 학원에 다니게 됐어. 엄마의 짧은 통보에 나의 참견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물론 이모티콘을 배우는 일은 그간 엄마가 가져왔던 수많은 목표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에 불과했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시니어 골퍼 데뷔를 선언하고 난생처음 골프채를 휘두르기도 했다. 개인 카페를 차리려고 바리스타 자격증을 준비한 적도 있었다. 엄마는 그 모든 일을 일 년도 채 이어가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도전이란 엄마의 삶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공식과도 같았다.
그런 엄마를 볼 때면 나의 현실이 더욱 두드러졌다. 학교에서 나는 잠만 자는 아이로 모두에게 통하는 학생이었다. 그들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잠이 안 오는 날에도 괜히 책상 위에 엎드려 시간을 보냈다. 친척들은 명절이 되면 나에게 갖고 싶은 직업이나 하고 싶은 일 따위를 습관처럼 물었다. 가끔은 계절마다 다른 취미를 갖는 엄마가 다른 세상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매일 꿈에 젖어 사는 엄마에게 싫증을 부리는 것도 흔한 일이 되어갔다. 이모티콘 그리고 살 시간에 나 좀 봐줘. 좀처럼 날개를 달지 못하는 나의 명백한 화풀이였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밥을 천천히 씹어 삼켰다.
엄마의 펭귄들은 날이 갈수록 화면 속에서 더 생동감 있게 살아 움직였다. 웃는 얼굴의 펭귄이 프로펠러를 세차게 돌리며 하늘 위로 올라가기도 했다. 엄마는 나에게 꾸준히 작업물을 공유했다. 나는 나를 닮아 작은 눈을 가진 펭귄들이 발전하는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 했다. 어떤 날엔 그들이 나를 바라보며 약을 올리는 것처럼 느껴져 마냥 얄미웠다. 또 다른 날엔 그들에게 용기를 얻어 책 한 권을 읽고 감상문을 썼다. 처음 써보는 감상문은 엉망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펭귄들은 제자리에 멈춰 있는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와 단둘이 처음으로 패밀리 레스토랑에 간 날이었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메뉴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엄마가 나의 눈치를 몇 번 살피더니 가방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어 내게 건넸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메신저 플랫폼에서 엄마에게 보내는 계약 제안서였다. 계약을 체결하고 삼 개월이 지나면 엄마가 만든 이모티콘을 모두 쓸 수 있었다. 엄마는 나에게 이모티콘이 채택된 소식을 알려준 적이 없었다. 나는 적잖이 놀란 얼굴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한 가지 일에 꾸준히 매달려 성과를 이룬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펭귄들은 나와 엄마를 모두 진짜 어른으로 만들었다.
엄마의 이모티콘이 세상에 나오는 첫날이 되었다. 엄마는 평소보다 조금 들뜬 모습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엄마에게서 꿈을 꾸는 사람들의 반짝이는 눈빛이 보였다. 나는 축하의 뜻으로 엄마와 함께 먹을 아침 밥상을 직접 차렸다. 엄마는 입에 가득한 밥을 다 삼키지도 않은 채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음으로 출시할 이모티콘에 대한 발상을 늘어놓는 내용이 주가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나에게 홈페이지에 덧붙인 작가의 설명글을 읽어보길 당부했다. 식사를 마친 나는 곧장 신상 목록에 있는 엄마의 이모티콘을 클릭했다. 연한 글씨로 자그마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머리 위에 달린 프로펠러와 함께 날아오르고픈 모든 이들을 응원하며 그렸습니다.
< 새하얀 발자국 한 잎 >
이금희(운문:시)
대문 앞 오래된 골목길을 지나면
담장 너머 목련잎이 흩어져 내렸다
일몰이 내릴 때쯤 돌아오시던 아버지의 어깨 위로
헤진 목련 꽃잎이 부드럽게 흐르던 순간
커다란 뒷모습에서 봄의 끝자락이 보이곤 했다
누런 땀자국으로 물들어버린 작업복이
힘없이 떨어지던 목련잎과 겹쳐져 아른거렸다
시멘트와 벽돌을 지고 오르던 건물에서
아버지는 꼭대기에 올라야만 피어날 수 있는 사람
허리를 펴지 못한 하루하루들이
쇳내 나는 공기가 되어 꽃망울을 감싸안았다
뼈대뿐인 층마다 새겨져 있던 발걸음과
따가운 햇살을 모두 짊어지던 개화의 나날
널따란 어깨와 등은 가정 속 그늘을 위해
짓밟혀버린 꽃잎처럼 상처로 가득했다
퇴근하는 아버지의 손을 잡아보면
모든 부르튼 계절이 담긴 손바닥이 느껴졌다
굴곡진 마디마다 고단한 삶이 자라나 있고
굳은살을 따라 피어나던 가장의 무게
마음에 새겨진 아버지의 그늘이 다음 봄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담장 너머의 골목길을 나란히 걸어오며
나는 힘겹게 자리한 꽃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길 바랐다
그림자 속 유일한 빛깔이 꽃잎마다 새겨지고
둔탁한 아버지의 발소리가 아직 추운 봄을 닮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