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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인권
▽일본의 영향력 있는 지식인 51명이 ‘북한 민중을 위한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지금까지는 북한 인권문제를 비판하면 보수파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북한 인권선언에 참여한 일본 지식인들은 청년시절부터 사회개혁에 관심을 가졌던 인사들이라고 한다. 북한 체제에 대해 냉전적 시각으로 비난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점이 중요해 보인다. 이념성향과 관계없이 지식인이라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 북한 인권문제라는 얘기다.
▽북한의 인권개선을 요구한 지식인 선언은 올해 3월 프랑스에서 맨 먼저 나왔다. 이번 일본 지식인의 선언도 이 프랑스 지식인들 움직임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프랑스에서 선언을 주도했던 ‘사회사평론’편집장 피에르 리굴로는 “경제원조로 체제가 변화될 것이라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지적하고 “북한 인권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회의를 열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북한의 인권개선을 촉구하는 지식인 운동은 프랑스와 일본에 이어 국제 여론층에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국제 비정부기구(NGO) 인권단체들의 북한에 대한 조사활동도 활발해질 것이다. 유엔과 NGO들의 인권운동은 두가지로 나누어진다. 의식주 문제를 중시하는 경제적 문화적 권리(유엔인권A규약)와 사상 신앙 표현 거주이전의 자유를 내용으로 하는 정치적 시민적 권리(유엔인권B규약)가 그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모든 국민에게 의식주와 교육 의료를 무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한 인권보장이라고 했다. 북한도 그런 입장이었다. 그러나 지금 북한에서는 매년 수십만명이 굶어죽어가고 있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아사(餓死)는 어느정도 개인 책임이라 할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지는 북한에서는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은 북한인권, 특히 B규약의 권리를 외면하고 있다.
북한 주민의 인권에도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이 진정한 포용이 아닐까 한다.
/donga/11/10/99 -
* 탈북자 강제송환
탈북자 보호를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정부가 전보다 적극적으로 나서 주한 중국대사관에 탈북자에 대한 관대한 처사를 요망했다고 한다. 바로 홍순영(洪淳瑛)외교통상부장관이 ‘조용한’ 외교적 해결방침을 밝힌 직후의 일이다. 하나의 발전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지역 탈북자들에게 살 길이 열린 것은 아니다. 근 20만명의 탈북자들이 압제의 땅을 벗어났으나 아직 곤궁과 천대속에 은신하고 있다. 붙들리면 야수적 폭력과 처절한 기근이 지배하는 북한으로 강제송환을 당한다. 중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접했거나 체제비판을 했다면 예외없이 처형되고 사상이 ‘불순’하다면 지상 최악인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진다. 훈방되는 경우도 있으나 도중에 맞아죽고 병들어 죽고 고문과 성폭행을 당하는 온갖 참상이 다 일어난다.
▼ 中에 태도변화 촉구를▼
탈북자가 송환되더라도 박해받지 않는다는 우다웨이(武大偉) 주한 중국대사의 말이 거짓이라는 증거는 무수히 많다. ‘조용한’ 해결책을 쓴다고 할 때 이러한 참상의 행진이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 연구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작년 한해 동안 동북(東北) 3성 지역에서만 탈북자 6300여명이 붙잡혀 북한으로 강제송환 당했다.
그들은 누구인가. 북한 이탈주민은 우리 법률상 대한민국 국민이고, 국제법상으로도 국적 선택권이 인정되는데 그들을 한 인간으로서 보호해주는 나라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견해도 있을 수 있다. “탈북자 문제를 아무리 거론한들 중국이 대북정책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탈북사태를 막기 위해 탈북자 강제송환을 계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용히 있으면서 탈북자를 묵인하는 관대한 조치를 기대해야지 자꾸 떠들어 다 잡아간다면 탈북자 죽이는 것 밖에 더 되느냐.”
이같은 의견은 현실에 입각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중국은 대국이요 제 마음대로 하는 나라인데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하는 패배주의적 사고가 아닐까. 아마 전에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그런 식의 비난이 있었을 것이다. 당하는 자, 조용히 그대로 당하게 하라는 말이요 불의 앞에 잠잠하라는 주문이나 같다.
악은 방해책동에도 불구하고 백일하에 이를 드러내야 비로소 사라진다. 동족이 이역 땅에서 나그네 되어 학대받을 때 돕는 것은 인간의 도리요, 자국민보호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다. 구원을 절규하는 사람을 사지(死地)로 도로 끌고 가는 것은 극악한 처사이다. 이런 야만행위를 묵인할 것이 아니라 온 세계에 알려야 한다.
또 오늘날의 탈북현상은 인력으로 막을 수 없다. 탈북자 전원 색출은 말이 쉽지 결코 용이한 문제가 아니며, 돕는 손길도 무수히 많다.
정의가 승리하는 데는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하고 악의 퇴치과정에서 부작용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포기해서야 되겠는가.
▼ 국제 공론화 필수조치▼
현재 중국 정부가 하는 처사는 옳지 않다. 탈북자는 그동안 러시아에서 국제법상 난민지위를 인정받았다. 또 베이징(北京)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에 일단 난민신청을 하는 데 성공하면 난민지위 부여가 거부된 사례가 별로 없다고 한다. 게다가 중국이 82년 국제난민의정서에 가입한 이유는 바로 베트남 학정을 피해 나온 수십만명의 화교들에 대한 송환을 거부하는 명분 때문이었다. 중국이 지금에 와서 북한의 학정을 견디다 못해 탈출한 한인들을 난민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너무 오래 위력의 지배에 길들여져 왔다. 조선왕조 500년간이 대체로 중국의 속국이었고, 이어 35년간 일본 식민지였으며, 해방 후에도 국가안보와 외교의 골격을 미국에 의존했다. 자연히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대가와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 잘 모르고 지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중국이 아무리 커도 세계 속의 한 존재이다. 국제규범을 마냥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탈북 난민 강제송환 조치의 비인도성과 위법성을 국제 공론화한다면 중국도 마침내 소외집단 북한의 후견자로서 얻는 이익과 세계 여론이 한 없이 나빠질 때 받게 될 손해를
저울질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저울이 반대로 기울게 될 그 날까지 우리는 결코 쉬지 않고 끈질기게 이 문제를
국제 공론화해야 한다. 승리는 우리 것이다.
(김상철<변호사·탈북난민보호 유엔청원운동본부장>
/donga/11/10/99 -
*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
미행정부의 대북정책과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해 미국의 비영리 민간단체들과 기독교계가 잇달아 공동서한과 결의안을 발표하는등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어 주목을 끈다.
미국장로교협의회(PCUSA), 월드비전, 월드 콘선, 세계교회봉사국(NCCUSA), 국제전략화해연구소,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등 지난 수년간 북한을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해온 12개 NGO들은 지난 5일 『북미정책에서 대화와 포용정책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것이 한반도와 동아시아 안정에 최선의 대안』임을 촉구하는 공동서한을 작성, 클린턴대통령과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그리고 국가안전보장위원회에 전달했다.
이 서한은 최근 미연방의회 공화당 중진의원들이 대북포용정책을 비난하고 강경정책을 주장하는 보고서를 내놓은데 따른 대응책으로 『끊임없는 대화와 적절한 지원, 포용정책의 계속적 추진과 끈기있는 협상이야말로 최선의 선택이며 궁극적으로 양국관계를 정상화할 것』이라며 『있는 그대로의 북한과 협상할 것』을 제시했다.
한편 연합감리교단도 10월31일부터 11월5일까지 열린 국제감독회의에서 한국의 평화통일 지원을 위한 5개 정책방향을 제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한인 김해종감독을 비롯, 전세계의 117명 감독이 참석한 이번 회의에서 연합감리교단은 『한반도 평화통일을 공식적인 미정책 목표로 채택할 것과 남북 양국이 전쟁위협을 제거하고 한반도 긴장을 최소화하는 평화조약을 체결할 것, 이산가족방문과 문화및 교육의 교류를 장려할 것, 북미간 외교 및 인도적 접촉의 향상, 주한미군의 철수』등의 5개 정책방향을 제시했다. 이중 주한미군 철수에 관한 부분은 김해종감독이 반대,
『평화조약과 불가침조약 정신에 바탕을 둔 한반도 평화정착의 비준이 있을때만 시행된다』
는 단서를 덧붙였다. /11/10/99/hkusa -
* 미군학살
- 노근리 사건피해자 가해자 오하이오서 합동추모 예배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의 생존자와 가해 미군병사들이 10일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올드스톤 장로교회에서 만났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대책위원회의 정은용 위원장(76) 등 한국인 5명과 당시 수색소대 상사였던 로버트 그레이(플로리다) 등 미군병사 3명은 한국전쟁 반세기만에 회동, 노근리 사건의 진상규명과 함께 용서 및 화해방안을 모색했다.
노근리 사건 당시 복부에 총상을 입었던 금초자(60·여)씨는 『울분을 참을 길이 없다』면서 『그들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인데 왜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야 했느냐』고 울먹였다.
가해병사인 에드워드 데일리(테네시)씨는 노근리에서 숨져간 부녀자와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맴돌고 있다며 당시의 사건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이번 행사는 미기독교회협의회(NCC)가 창설 50주년을 기념, 노근리 사건을 인정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통해 생존자들을 초청해 이뤄졌다.
노근리 사건 생존자와 유족들, 미군병사들은 이날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합동추모예배를 가졌다.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11일 워싱턴을 방문, 국방부 관계자들을 만난 뒤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기자회견을 가질 계획이다. -11/11/99/hkusa -
* 북의 인권, 세계적 화제로
프랑스, 한국에 이어 일본 지식인들이 북한의 민주화와 인권 존중을 촉구하고 나섰다. 북한 인권문제가 전세계 지식인들의 중심적인 화두로 확산되고 있는 셈이다.
일본 지식인 51명이 발표한 「북한민중을 위한 인권선언」은 그 내용 못지 않게 일부 참가인사들이 한때 북한 지지자들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짙은 호소력을 갖는다.
이들 가운데 예컨대 오가와 하루히사 동경대학 교수 같은 인사는 60년대부터 북한만이 한반도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던 좌파 지식인이었으나 이제는 북한의 폭압정치와 반인권적인 행태에 환멸을 느껴 북한인권 개선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다이라 겐기치 변호사 역시 현재는 북한난민을 돕기 위해 결성된 「북한난민 구원기금」의 대표다. 서명자 중에는 보수파 인사는 물론 시라야나기 세이이치 추기경, 가키자와 고지 전 외상, 교세라 그룹의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도 포함되어 있다.
서명자들의 이런 높은 공신력으로 인해 북한의 기아사태가 자연재해 아닌 1당 독재와 전체주의의 소산이라는 이들의 진단은 각별한 설득력을 갖는다. 이들은 북한민중이 직면한 기아와 인권참상은 양심과 인도주의에 반하는 행위라고 선언하고 북한 민주화와 인권개선을 촉구했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공정한 법적용, 정치범 수용소 폐쇄, 이산가족과 북송자들의 자유로운 왕래 보장, 집회 결사 언론 신앙의 자유 보장을 북에 요구했다.
또한 현안인 탈북자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5개국과 유엔 등 국제기구가 그들을 난민으로 인정해 그 보호에 앞장설 것을 촉구하고, 북한의 인권유린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한-일 양국의 정치인과 언론인, 종교인이 선두에 서자고 호소했다. 일본 지식인들의 이러한 선언은 한때 북한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던 진보적인 인사들이 앞장섰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답답함을 금할 수 없는 것은 북한 인권문제를 대하는 우리 사회 일각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편향적 시각이다. 그러한 시각들은 누가 북한 인권참상을 거론하기만 해도 대뜸 「냉전적」 이라며 매도하고, 북한의 잘못에 대해서도 그 원인이 마치 「남한 탓」인 양 뒤집어 씌운다.
전세계 지성인들이 북한의 인권말살을 규탄하고 있는데도 이러한 편견들은
성명서 하나 내기를 꺼리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기 짝이 없다.-11/11/99/조선 -
* 노근리·색깔론·보안법
한국전쟁 중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양민 수백명이 미군에게 집단학살 당하는 참혹한 일이 일어났는데도, 49년이 지나 미국의 AP통신이 보도하기 전까지 국내에서 사회 문제화되지 않은 데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한다. 아무리 전쟁통이라지만 그토록 억울하고 비통한 꼴을 당한 사람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왜 이제껏 말 한마디 못하고 지내왔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힐난은 이제와서나 할 수 있는 주문인지도 모른다. 졸지에 부모·자식을 잃은 당사자들로서는 얼마나 분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을까. 그러나 섣부른 문제 제기는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였을 것이다. 입을 잘못 놀리면 `빨갱이'로 몰려 간신히 건진 목숨을 다시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이들에게 오랜 침묵을 강요했다. 제삿날이 같은 집이 한 마을에 수십 곳이 되는 기막힌 현실을, 치미는 분노를 삭이며 살아왔던 것이다.
이들이 마냥 입을 닫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졌을 때 해빙 분위기에 힘입어 미국 정부에 진상 규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5·16쿠데타가 터지면서 이런 목소리는 다시 잦아들었다. 30년 군사정권이 막을 내린 뒤 94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다시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국내 언론의 반응은 냉담했다.
`빨갱이 공포'는 주민들의 지나친 피해의식 탓만은 아니다. 맹목적·공격적 반공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싸운 미군이 무고한 양민을 수백명이나 죽였다고 떠벌인다면, 불순분자의 사주를 받아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으로 사상을 의심받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양민학살 증언이 너무 일찍 터졌더라면 주민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노근리와 비슷한 양민학살이 여러 곳에서 벌어졌는데도 하나같이 입소문으로만 떠돌았던 정황이 이를 입증한다.
- 오랜 침묵 강요한 `빨갱이 공포'*
우리 사회에서 `빨갱이'란 말은 마녀사냥의 주술같은 위력을 발휘한다. 오죽했으면 신분이 확실한 제1야당 총재였던 김대중 대통령조차 색깔론만 나오면 잔뜩 움츠러들었을 것인가. 지금은 국정의 동반자가 됐지만, 김종필 총리가 김 대통령을 향해 “사상이 불그죽죽하다”고 덧칠하던 것이 엊그제 일이고, 92년 대선 때 김영삼 민자당 후보는 “북한 <평양방송>이 이 김영삼을 낙선시키고 김대중 후보를 당선시키라고 했다”고 있지도 않은 사실을 들먹이며 용공으로 몰아갔다.
색깔론의 위세는 정권이 교체된 지금도 완전히 꺾이지는 않은 것같다. 공안검사 출신으로 안기부 제1차장을 지낸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이 언론대책 문건 파동의 와중에서 김 대통령을 겨냥해 “공산당이 쓰는 전형적 선전선동”이니 “빨치산 수법”이니 하며 색깔론을 들고 나왔다. 그는 서경원 전 의원 등이 그에게 고문당했다고 폭로하자 “죄가 있다면 공산당의 마수로부터 나라를 구한 죄밖에 없다”고 맞받아쳤다. 이른바 공안통들은 자신들만 국가를 생각하는 양 `애국'을 독점하고 반대자들을 반국가사범으로 몰고는 했다. 그런 풍토에서 반인륜적 고문이 자행되고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우수경찰로 표창되었으리라.
- 국가보안법과 인간성 황폐화*
색깔공세가 먹혀드는 우리 사회의 폐쇄성은 인권을 침해하는 악법으로 국제사회에서 지탄받는 국가보안법 개정을 반대하는 토양이 된다. 유엔은 “남북대치라는 한국의 특수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의 단계적인 폐지가 필요하며, 특히 제7조 `반국가단체 찬양·고무'는 처벌범위가 불합리하게 광범위해 표현의 자유를 해치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비판했다. 국가보안법 때문에 우리가 수치스러운 인권후진국으로 낙인찍혀도, 현행 형법 규정으로 국법 질서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고 많은 학자들이 지적해도 반대세력들은 북한의 남침위협만 들먹인다.
이제 우리는 인간성을 황폐화시키는 모든 속박을 걷어내야 한다. 노근리의 비극적 진실을 밝히는 것도, 시대착오적 색깔공세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도, 색깔론의 배양처가 되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개폐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접근해야 한다.
더이상 인권 유린에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 한겨레/11/14/99 -
* 한국전 美전투기 무차별 공습
노근리 사건을 계기로 한국전 중 미군의 공격에 의한 민간인 희생 증언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당시 미군 전투기의 무차별 공격상황을 뒷받침할 만한 기록필름이 발굴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MBC(문화방송)가 23일 미국립기록보관소로부터 입수한 이 필름은 개전 초기인 50년 7월29일과 30일, 8월13일에 미공군 제25전투비행단 소속 F-80 전투기들이 작전을 수행하면서 기체 하단에 부착한 카메라로 촬영한 것으로 미군전투기들의 무차별 공습행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필름에는 기총소사와 로켓탄 공격으로 민가와 기차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고 도로변 둑으로 피한 행렬에 대해 총격을 가하는 장면 등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또 피난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가득 실은 나룻배와 헤엄쳐 강을 건너는 사람에게까지 기총소사를 가하는 장면 등은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들 전투기가 공격한 지역이 어디인지는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당시 전선이 형성돼 있던 경상남북도 일대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경남 의령과 함안, 사천, 경북 구미 등지에서는 노근리 사건을 계기로 50년 8월 초를 전후해 미군 전투기의 무차별 공격으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증언이 줄을 잇고 있다.
경남 사천시 곤명면 조장리 마을의 경우, 50년 8월1일 마을 앞 하천제방에 모여있던 주민들을 향해 미군 전투기가 사격을 가해 주민 60여명이 숨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한국/10/24/99 -
* 남북 가곡의 밤 연다
남북한 음악을 감상하며 통일의 염원을 다지는 남북 가곡의 밤이 21일 하오7시30분 윌셔이벨극장에서 열린다.
한국교향악단(상임지휘자 조민구)이 주관하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나성지역협의회가 후원하는 이번 남북가곡의 밤은 반세기이상 단절됐던 민족의 동질성을 음악으로 회복하고 통일의 기초를 마련하자는 취지로 열린다.
한국교향악단은 음악회 준비를 시작하던 4월까지만해도 북한과 남한의 성악가들을 초청, 음악을 통한 남북 문화 교류의 물꼬를 이곳 LA에서 튼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북한서적 「조선의 노래」(예술교육출판사·95년)에 실린 북한가곡 9곡을 골라 이곳
한인 음악인들을 통해 연주하기로 한 것.
이번 음악회에 출연하는 성악가들은 소프라노 곽현주, 박금춘(연변), 메조소프라노 전은선,
테너 두영균, 박흥섭, 이종헌, 바리톤 최명룡등 7명이다.
북한 연주곡들은 「비단짜는 처녀」「동백꽃」「기쁨넘친 내강산」「사향가」「산으로 바다로 가자」「압록강 이천리」「동지애의 노래」「문경고개」「시냇물」이며 남한 곡들은 「신아리랑」「바위고개」「고향의 노래」「그리운 금강산」「명태」「신고산 타령」「내마음의 강물」「바다가 보이는 산길」「하나의 열망」「세계에 산다」등이다. 또 마지막 곡으로 북한 가곡집에도 수록된 안병원씨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연주된다.
한국가곡으로 소개되는 「하나의 열망」은 5년전 권길상씨가 북한에서 보내온 가사에 곡을 붙인 것으로 북한에서도 연주된 적이 있는 곡이다. - 11/15/99/hkusa -
* 북에 이로우면 기밀?
최근에도 어김없이 유엔 인권위원회는 한국의 `국가보안법'과 전향제도에 이은 `준법서약서' 문제를 지적했다. 우리 사회 각계의 자탄과 반성이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다 국제 인권단체들과 유엔이 한결같이 그 폐기를 권고해온 지가 십년이 넘었다.
다행히 정부 일각에서 검토가 시작되어 `고무 찬양'과 `불고지'에 한해 개폐한다는 논의가 있었지만 이른바 야당과 보수 진영은 케케묵은 논리로 반대하고 있다. 단순 명쾌하게도 점잖게는 `한반도의 특수상황'이고 노골적으로는 `북괴가 호시탐탐'하기 때문이란 거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해외여행을 나가려면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관계기관이 직접 운영하는 곳에 가서 `소양교육'이라는 것을 받고 필증을 붙여야만 여권을 받을 수 있었다. 아니 그 이전에 `신원조회'라는 절차를 받아야 했는데 반공적 관점으로 보아 문제가 될 만한 점을 가진 본인은 물론, 가족이나 친척과의 관계가 밝혀지면 여권 수속 초입에서 좌절됐다.
또한 소양교육이란 것이 군사 퍼레이드를 하는 낡은 기록 필름을 보여 주고나서 강사가 나와 해외에서의 북한인 접촉 기피 요령이나 신고 요령을 가르쳐 주는 정도였고, 납치 사례를 설명하여 경각심을 갖게 하는 식이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한국인 해외 여행자는 사상은커녕 문예·학술 문제에 관해서도 거의 백치가 되어 기념사진이나 찍고 오는 형편이었다. 그런 기념사진조차도 사회주의 사상가나 심지어는 진보적인 예술가의 무덤 앞에서도 찍으면 안 됐다. 피카소가 공산주의자라 하여 미술 도구의 상호로도 쓰지 못하게 했을 정도였으니까.
국가보안법은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전쟁 때 그대로 쓰다가 반공법으로 바꾸고 날치기로 통과시킨 악법이라는 것은 공안 담당자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취조할 때 상대가 지식인 부류이면 `악법도 지켜야 한다고 소크라테스가 말하지 않았느냐'는 말로 먼저 기를 죽이려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유력하게 나오고 있거니와 악법이라고 판명되면 국민의 소청권에 따라 개폐를 하는 것이 선진 민주사회의 관례다.
현행 국보법 아래에서 누군가 북한 주민과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만나는 순간에 `회합 통신죄'에 걸리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지령 수수'가 되며, 자신이 말을 하면 `기밀 누설'이 된다. 이들 조항 모두 최고 무기형을 받을 수 있는 죄목이다. 만나고 나서 `북한 사람이 잘생기고 옷도 잘 입었더라'고 하면 `찬양 고무'가 되고 돌아와서 아내에게 위의 사실을 얘기 했는데 아내가 당국에 신고하지 않으면 `불고지'가 된다.
이런 만화와 같은 일화는 우스갯소리를 하자는 게 아니라 거의 최근까지의 사례에서 나온 것들이자 내가 겪은 일이기도 하다. 당시 친구들이었던 운동권 명망가들에 대한 평을 북에다 알려 주었다는 것인데(그것도 기관 취조실에서 수사관의 끈질긴 요구로 느낌을 말한 것을) 내용이란 `장 아무개는 원칙적인 지사형이다' `김 아무개는 외유내강한 지식인적 투사형다'라고 돼 있었다. 이것이 기밀 누설이란 것인데, 항소심에서는 부분 무죄가 됐으나 대법원에 올라가서 파기 환송되어 고법으로 내려왔다. 판례는 `다 알려진 사실이라도 북에 이로우면 기밀이 된다'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였다.
특히 `고무 찬양' 조항에 관한 한 할말이 너무도 많다. 꼭 한마디만 하자면 지난 대선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지역을 관할하는 관계기관에서 감옥에 있는 나를 찾아왔다. 요지는 진보 진영과 북을 비판하는 책을 쓰거나 강연을 하면 석방을 고려하겠다는 얘기였다. 나의 대답은 너무 온건했지만 이러했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국보법에 정면 도전하는 식의 행위는 못할 것이다.
나라가 흥망성쇠 영원 무궁토록 악법을 고수한다면 나야 무력한 작가인데 어찌
하겠는가.
그러나 통일을 한다면서 상대방의 장점에 대한 논의는 법으로 막아 놓고
비난만 하라는 것은 양심상 할 수 없다.
묶어 놓고 권투하는 식으로 불공평하지 않는가.
찬양 고무 죄를 없앤다면 평소에 북한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점들을
표현할 자유도 더불어 생길 것이다.”황석영/소설가- 한겨레/11/15/99 -
* 남북대화의 '커브볼'
‘언론대책문서’란 해괴한 문건으로 국내정가가 온통 술렁거리던 지난달말 중국 베이징에선 남북학자들간의 모임이 조용하게 열렸다. 남측 ‘통일포럼’과 북측 ‘사회정치학회’가 공동주최한 ‘제5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회의’(본보 10월27, 28일자 보도). 기자에겐 지난해 10일간 평양을 방문한데 이어 1년여만에 북측인사들을 다시 만나는 기회였다. 남북당국간의 대화채널이 모두 끊어진 상태에서 학자들 사이지만 지난 5년간 유지돼온 유일한 남북대화의 가교(架橋)라는 점외에도 알아보고 싶은 일들이 많았던 회의다. 금강산관광이 시작된후 첫 회의란 점에서 북측은 방북관광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페리보고서, 미사일문제, 나아가 햇볕정책에 대한 반응을 비롯해 단절된 남북당국대화의 재개가능성 여부도 궁금했다.
◆쟁점의 핵심 찔러
이번 회의가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양측이 우회적인 말을 써왔던 지금까지와 달리 상대의 핵심을 찔렀다는 점이다. 그런 가운데 문답식 ‘커브볼’을 주고 받았다. 실제로 남측이 제기한 북한 형법의 문제점과 북측이 주장한 남한 보안법철폐가 정면으로 부닥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관심은 ‘북은 변하고 있는가’에 모아졌다.
북측이 회의초 강하게 입장을 표명하고 나선 것도 바로 ‘변화’부분이다. 북측은 한마디로 잘랐다. “우리쪽엔 변화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통일의지와 논의는 더 강화될 것이다.” 이틀간 회의에서 북측은 끊임없이 통일의 3대원칙으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내세웠다. 조국통일 3대헌장기념탑을 평양에 건립중이라고도 소개했다. 1년전에도 그랬지만 북측인사들은 개혁 개방이란 표현을 싫어했다. 북측은 금강산관광,현대그룹 정주영(鄭周永)명예회장의 방북 등을 ‘광폭(廣幅)정치, 인덕(人德)정치의 산물’이라고 설명했다.
한 인사는 “남측 사람들이 평양에 오는 길을 열어 준 것은 변화 발전의 의지”라고 말했다. 북측이 던진 첫번째 커브볼이다. 그러면서도 통일논의에서 교류협력이 우선해야 한다는 남측주장에 대해 기능주의가 원칙에 앞설 수 없다고 비판했다. 주한미군문제나 신뢰회복우선 등 구체적 사안에서 남북간의 의견차이는 깊고 컸다. 북측은 남측의 햇볕정책을 계속 비난했고 남북당국자회담에 대해서도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페리보고서에 대해서는 “정세를 새로 평가, 대북접근방식과 수법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미사일문제를 넘겼다고 미국이 우리를 그냥 두겠느냐”고 했다. 남측의 한 참가자는 “이는 북측이 미사일문제 다음은 생화학무기라는 점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북측은 또 “왜 남측을 멀리하고 미국하고만 이야기하려는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모든 분야에서 미국은 뒤에서 남측의 다리를 잡아 당긴다. 그래서 너희가 무어냐, 왜 간섭하느냐고 묻고 따지기 위해 회담을 한다.” 북측이 던진 또다른 커브볼이다. 회의장엔 잠시 웃음이 터졌지만 남측으로선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대목인 것 같았다.
◆ 예상판단은 피해야
남북문제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남북양측에 대해 “쉬운 쪽으로만 풀이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싶다. 예상을 바탕으로 한 판단보다는 지난 일을 면밀히 살피는 것이 더효과적이라는뜻이다.‘북한은 개방쪽으로 나갈 것이다’라는 단정은 아직 이르고 헛짚을 수도 있다. 그보다는 ‘아직까지는 U턴의 징후가 없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남북사이의 공통점보다는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를 분명히 확인하는 것이 통일논의를 위해 필요하다”는 참석학자들의 자세는 솔직했다. 최근의 남북관계를 감안할때 회의후 발표된 ‘남북해외학자통일회의 공동평가서’는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다. 북한 조선중앙방송은 11일 ‘통일회의’를 언급,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더 많은 공통점을 모색할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공동평가서’는 △7·4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의 기본정신에 공감을 표시했고 △적지않은 부분에서 서로의 이견과 차이를 발견, 이를 논의하고 극복해야 할 필요성에 공감했고 △2000년부터는 통일회의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데 공감했다고 밝혔다. 이제 풀이와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남북대화처럼 팽팽하고 커브볼이 많은 대좌일수록 특히 남북당국에 이렇게 주문하고 싶다. “추정하지 말라. 의아해 하지 말라. 한가지에만 골몰하지 말라.”
(최규철〈심의실장〉- 조선/10/28/99-
* 금강산 관광 1주년
- 南北신뢰 디딤돌… '민족적 사업'으로
오는 18일로 금강산 관광 뱃길이 열린지 1주년을 맞는다. 금강산 관광은 관광객 억류에 이은 관광중단 등 숱한 우여곡절에도 불구, 분단 50년만에 남북관계의 새 지평을 연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14만명에 이르는 남한주민이 민족의 명산을 둘러보며 북한주민과 반갑게 만나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상사가 된 사실이 남북관계의 일보 전진을 상징한다.금강산 관광 1년이 가져다준 성과와 남북관계에 미친 영향,북한의 변화상 등을 돌아본다. <편집자>
저명한 북한전문가인 서대숙(徐大肅)미국 하와이대교수는 지난 11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전항이 북한의 군사항이어서 북한 군부의 거센 반발로 금강산 관광이 얼마 안가 중단되리라고 생각했었다”고 회고했다. 북한문제에 정통한 서교수조차 전망을 불투명하게 봤던 금강산사업은 그러나 1돌을 맞아 남북한의 ‘민족적 사업’으로 정착했다. 이제 금강산관광이 남북간 정치·군사적 신뢰구축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의 단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는 어느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게 됐다.
우선 북한이 최전방인 금강산지역과 군사항인 장전항을 남쪽에 개방했다는 것은 군사적으로 적지않은 양보이자 그 자체가 신뢰구축의 메시지로 해석된다. 물론 북측으로선 관광대가인 9억4천2백만달러의 경제적 실리를 외면하기가 힘들었겠지만 군사대치상황에서 휴전선 인근지역을 개방한 것은 남한당국에 대한 신뢰 없이는 내리기 힘든 결단이었기 때문이다.
또 지난 6월 관광객 민영미(閔泳美)씨 억류사건 당시 남북한 당국이 간접적 대화를 통해 문제를 타결지은 점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형식적 협상주체는 북한의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와 남한의 현대그룹이었지만 사실상 통일부가 협상의 전과정에 간여, 우리 정부의 의사를 전달했기 때문이다.금강산 관광을 매개로 남북당국은 간접대화를 지속하며 상호 신뢰기반을 쌓을 수 있었던 셈이다. 북한이 이처럼 금강산관광에 적극성을 보인 것은 우리 정부의 확고한 대북 포용정책 기조를 확인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정부는 지난해 ▲6월22일 북한잠수정 동해침투사건 ▲7월13일 동해무장간첩 시체 발견 ▲8월31일 북한의 로켓 발사 등 남북관계를 악화시킬 만한 ‘악재’가 잇달아 터졌는데도 포용정책에 기반한 ‘정경분리’기조를 일관되게 유지했다. 이같은 정부의 정책의지를 여러 경로를 통해 ‘시험’하고 확인한 북한이 금강산 관광을 허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금강산관광은 또 북한의 금창리 핵시설 의혹 등으로 인해 긴장이 고조되던 상황에서도 지속돼 한반도 긴장완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대한 투자를 주저하던 외국인 투자가들이 금강산관광에 대한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의 긍정적 평가에 접한 뒤 투자를 결정, 결과적으로 국제통화기금(IMF)체제극복에도
큰 도움이 됐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 문화/11/16/99-
* 여자 / 북한여성
-‘3중고’에 허리휘는 북여성-
남쪽의 남성이 잘났고 북쪽의 여성이 아름답다는 「남남북녀(南男北女)」. 반세기동안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없었던 북한여성들은 어떤 모습으로 얼마남지 않은 20세기를 보내고 있을까.
해방 직후인 1946년 북한은 「북조선의 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령」을 공포하는 등 전 여성의 해방과 혁명화, 노동계급화를 주창했다. 이후 해마다 7월30일을 남녀평등일로 기념하고 있다. 가사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측면에서 탁아소도 속속 문을 열었다.
한국전쟁을 겪고난 50년대에는 피폐해진 북한경제를 복구하는 데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면서 많은 여성이 전국 곳곳의 일터에 배치됐다. 60년대부터는 여성을 생산현장에 동원하는 한편 가정에서의 어머니 역할이 강조됐다.
김일성은 1970년 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여성을 노동에 참가시키는 목적은 그들을 온갖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하고 실질적으로 평등한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주려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80년대 이후는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과 김정일의 어머니 김정숙 따라 배우기가 이어지고 있다. 전통적인 어머니와 혁명가의 아내, 나아가 여성 자신이 혁명 주체가 되기를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북한여성은 남성과 같은 노동과 임금, 작업중 수유시간 보장, 90일간의 산전산후 유급휴가, 임신중 야간작업 금지, 세 자녀 이상 여성의 노동시간 단축 등 각종 혜택을 받는다. 이처럼 북한여성에게는 제도적으로 「해방」과 「평등」 「사회참여」가 보장돼 있다. 또한 여성정책과 관련해서는 오히려 남한보다 앞서 있는 분야도 상당수에 이른다. 그러나 제도와 현실은 상당한 괴리를 보이고 있다.
지난 2월 미 국무부가 펴낸 「98년 북한의 인권사례 보고서」는 『헌법에 「여성은 남성과 똑같은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이 노동력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나 당의 고위층에 이르는 여성은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미 의회도서관의 「북한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관한 보고서」도 『남녀평등을 강력히 지지하지만 북한여성은 완전히 해방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법적 제도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북한여성을 옭아매는 가장 큰 짐은 바로 「가부장적 권위주의」다. 이처럼 분명히 모순관계인 사회주의적 남녀평등 이념과 유교적 가부장 원리가 공존하는 것이 북한사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세대주(남편)에게 반말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직장에서도 서너살 손아래 남성에게 말을 놓으면 안좋게 봅니다. 청소나 빨래, 요리 등 노동으로 쳐주지 않는 가사는 온전히 여성의 몫이구요. 간혹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여성에 대해서도 맞을 짓을 했을 거라고 여깁니다』
북한의 일류대학을 나와 전문직에 종사하다가 3년 전 망명한 쁁씨(39·여)가 털어놓은 북한여성의 모습이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남녀평등이 하나의 원칙으로 자리잡은 사회주의체제지만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는 가부장주의로 인해 여성이 순종적으로 자리매김됐다는 설명이다.
통일연구원 임순희 교수는 『북한여성은 형식적 제도적으로는 남녀평등을 누리면서 실질적 내용적으로는 해방이후 50년이 넘도록 여전히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는 상태』라고 분석했다. 그는 『북한사회는 여성의 사회참여를 통해 해방을 꾀하는 한편으로 여성노동력을 최대한 동원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2중적 측면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반적인 북한 도시여성의 하루 일과를 살펴보면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표참조〉 남편보다 먼저 일어나 늦게 잠자리에 드는 고달픈 일상이 반복된다. 최근 남편과 함께 북한을 탈출한 둁씨(35)는 『북한과 비교할 때 집안일과 아이 돌보기를 기꺼이 돕는 데다 특히 여성을 한사람의 인격체로 대하는 남한 남성들을 보면 감동마저 느낀다』고 말했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이 펴내는 계간지 「생명과 인권」에 소개된 북한 노래 「녀성은 꽃이라네」는 북한여성이 살아가는 모습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녀성은 꽃이라네 생활의 꽃이라네
한 가정을 알뜰살뜰 돌보는 꽃이라네
정다운 안해여 누나여 그대들 없다면
생활의 한 자리가 비어 있으리
민간에서 흔히 불린다는 이 노래를 통해 북한여성은 「가정의 중심」이라는 찬사를 받는 한편 「밥짓고 빨래하는 살림꾼」의 역할을 요구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정일이 신상옥·최은희씨 부부를 만난 자리에서 『여편네는 애나 잘 키워야지 더 이상 뭐 바랄게 있느냐』고 말했다는 일화는 북한 지도층의 여성관을 부분적으로나마 반영한다.
최근 식량사정이 심각해지면서 북한의 가부장 문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식량문제 해결을 당연히 주부의 몫으로 여기고 있는 사회 분위기 탓이다. 가족의 끼니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는 주부는 남편으로부터 구박을 받을 뿐 아니라 이혼사유가 되기도 한다. 「장마당(시장)에서 억척스럽게 돈을 잘 버는 여자」가 최근 재혼대상 최우선 순위로 부각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편이 장사에 나서는 것을 수치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순박하고 부지런한 북한여성은 그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가족을 위해 묵묵히 인고의 세월을 살고 있다.
임순희 교수는
『남한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남존여비 사상이 북한에서는 여성의 자기비하로
나타날 정도이다.
통일 후 가치관에 대한 급격한 혼란이 예상되는 만큼 남북 여성들의 동질성
회복을 위해 여성단체들이 교류를 활성화하는 등 사전 준비작업이 필요하다』
고 지적했다.- 경향/11/1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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