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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장 주석
씨 뿌림의 비유 (마가복음 4:1-20)
앞의 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회당에 들어 가시"는(1절) 장면부터 시작하였는데 이 4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는 장면에서 시작하고 있다.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이를 수 있고 그를 통해서 역사 하심을 받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그의 방법을 바꾸셨던 것이다. 회당에서 좌석이나 상좌를 차지한 신분이나 가문이 좋은 사람들을, 다시 말해서 회당 외에는 다른 장소에서는 말씀을 듣는데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을 만족케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항상 "바닷가에" 가시어서 말씀을 전하시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자유스럽게 회당 안에 들어가실 수가 있었고 거기에서 복음을 가르치실 수가 있었지만 회당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어중이 떠중이들을 만족스럽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항상 회당에서만 복음을 전하시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그러한 모든 자들이 다 나와서 들을 수 있도록,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기 시작하신 것이다.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예수께서 전에도 바닷가에서 복음을 가르치신 일이 있지만(막 2:13) 여기에서는 새로운 편리한 방법을 알아내신 것 같다. 그것은 배를 타시고 복음을 전하신 일이다.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디베리야 바다는 내해(內海)이기 때문에 조수가 아니므로 썰물과 밀물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배를 타고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지장을 받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교훈의 말씀을 가지고 배 안에 들어가시어 거기에서 그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은, 구원의 복음을 이방인의 섬들에게로 보내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아주 풍부한 짐을 배에다 싣고, 그 하늘 나라의 열매를 더 많이 맺는 나라에 보내려고 유대 나라를 출항하려는 것을 보여 주는 전조(前兆)인 듯하였다. 그럼, 아래에서 주님의 교훈의 말씀을 살펴보기로 하자.
Ⅰ. 그리스도께서 무리에게 사용한 가르침의 방법(2절).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그들이 잘 듣게 하기 위해서 비유나 그와 유사한 방법으로 가르치셨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자기네들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무관심한 청중들은 평범한 일들에서 인용한 평범한 비유를 즐겨 들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설명하고 해석하기로 계획되었던 진리를 그들이 잊어버렸거나 들은 일이 없을 때에는 그런 비유를 계속하거나 반복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비유 가운데 들어 있는 진리를 찾아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것은 다만 그들의 귀만 즐겁게 해 주는 것이 되고 만다.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12절)라 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비유가 그들의 호기심만 충족시키게 된다며, 그것은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그것은 빛에 대하여 고의적으로 그들의 눈을 감는 격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에다 어두운 등불의 비유를 부가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곧 누구든지 그런 비유의 교훈을 그들 자신에 적응하고 그 교훈에 인도함을 받고자 한다면 그들에게 광명한 빛이 되지만, 다만 그런 비유의 말씀을 가지고 즐기는 기회로 삼는 자들에게는, 그 교훈이 이따금씩 그들에게 스쳐 지나가는 빛에 불과하고 결국 그들은 다시 어두움 가운데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지를 않는다. 그들이 알지를 못한다. 그것이 그들의 눈에 가리워 있다. 또는 그들은 아주 무관심해 가지고 주위만 두리번거리며 바라보고, 그들에게 평화에 관한 그런 일들에는 어떠한 관심도 안 보인다. 등등은 다만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Ⅱ.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사용한 설명의 방법.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의 뜻을 예수께 물었다(10절).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일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에게 가까이 하면 할수록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열두 제자와 함께 있고, 예수와 가까운 그 제자들과 사귀는 것이 그들에게 좋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그들에게 알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특별한 은혜가 그들에게 부여되었는가를 말씀하시었다(11절). 주님의 비밀이 그들에게 허락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만 즐기는 것뿐인데 그들에게는 가르침이 된 것이다. 그리고 모든 비유의 말씀마다 그들의 지식을 증가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비록 지혜 있는 자라도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사용하신 그 방법과 길을 잘 이해할 수 있게된 것이다.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은 "하늘 나라의 이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한 이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빛과 그 빛을 볼 수 있는 시력도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성경 말씀을 제자들에게 열어 보여 주실 때에, 그들에게 그것을 깨닫는 마음도 열어 주시었던 것이다(눅 24:27, 45). 그러면 이하에서 본 비유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이미 마태복음 13장 3절 이하에서 생각해 본 바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들으라"(3절)에서부터 시작하여,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9절)로 결론을 맺는다. 그리스도의 말씀들은 주의를 요구하며, 그리스도에게서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주의를 명령하여 주의를 불러일으켜 주는 것을 기억하라. 비록 우리가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지성적이고 무게가 있는 그런 말씀을 마침내는 이해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고 주의해서 듣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우리가 처음에 예상했던 것 보다 더 많은 진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하여 주시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설명하여 주시기 전에 그들에게 질문 한 가지를 하시었는데, 이것은 마태복음에는 나와있지 않은 질문이다(13절).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1) 이 질문을 하신 예수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너희가 이런 평범한 비유도 알지 못한다면 더 어렵고 희미한 다른 비유들을 알 수 있겠느냐? 그 비유를 들은 사람들에게 아주 평범하게 말씀을 전하여서 독특한 효과를 내다볼 수 있으므로, 너희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이렇게 너희가 당황하고 이해를 못한다면 너희가 전혀 상상도 못한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와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름에 대하여 이후로 말할 비유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이 질문은 우리에게 기도와 말씀의 지식을 위한 노력을 불러일으켜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말씀들이 많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평범한 복음의 진리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더욱 어려운 진리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렘 12:5).
(2) "말씀을 듣는데 있어서 너희를 지도해 주며,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유익을 얻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말하는 이 비유를 너희가 알지 못한다면, 너희가 앞으로 더 듣게 될 비유의 말씀에서 어떻게 유익을 얻을 수 있겠느냐? 이 비유는 너희가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씀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그 말씀으로 감동을 받아야 함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만일 너희가 이 비유의 말씀을 받지 않으면, 나머지 모든 비유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열쇠의 사용방법을 알 수 없게 된다." 만일 우리가 말씀으로 유익을 얻기 위하여 상고하는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규칙에 의해 유익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비유의 말씀을 설명하시기 전에 언급하신 바를 더 살펴보도록 하자.
[1]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교훈의 의미를 알도록 허락되지 않은 그들의 경우가 얼마나 슬픈가를 보여 주셨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는 특권을 원하나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 특히 일반적인 변화의 길에서 제외된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를 고려할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즐길 수 있는 특권에 대하여 그 가치를 인정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기억하라.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2절). 다만 회개한 사람들만이 그들의 죄 사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은 영혼들은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처지에 놓여 있으므로 비참한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들이 들은 말씀에 대해서, 그 의미를 먼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그러한 특별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그들이 얼마나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가를 보여 주시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더 해지기를 원하는 자들은 마땅히 그들의 무지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그들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이미 우리가 마태복음에서도 살펴 본 바 있지만 예수께서 그들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그럼 여기에서 이것을 조목별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교회라고 하는 큰 밭에 하나님의 말씀이 대단히 무질서하게 뿌려지고 있는 것이다.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14절). 씨뿌리는 자가 어디서 싹이 잘 나오고, 어떤 열매를 맺게되는 가를 모르면서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사 32:20). 모든 종류의 땅에 모험적으로 씨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많은 수확을 거두기 위해 씨를 뿌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기 위해 나가시었을 때에, 얼마동안 당신 자신이 파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당신의 종들을 보내서 그들의 손을 통해서 파종하게 하시는 것이다. 주께서 택한 종들은 바로 씨 뿌리는 자들이다. 파종자들은 파종의 방법과 재량이 필요한 것이다(사 28:24-26). 그들은 풍세나 구름을 살펴보지 말아야 한다(전 11:4). 그들은 다만 파종자에게 씨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고후 9:10).
둘째, 복음의 말씀을 듣고, 일고, 또 그 말씀을 잘 아는 자들은 비교적 많은 것이다. 그러나 그 복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얼마 안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좋은 결실을 내는 자들은 불과 사 분의 일에 해당한다고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렇게 귀한 하나님의 말씀이 대부분이 손실되고 헛되이 파종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손실된 말씀에 대하여 계산하는 날이 이르게 되는 것이다. "길가에 떨어지매." 그리스도 자신에 대하여 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후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떠나기를 간구 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으면서도 자기들의 종교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그 종교만을 생각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들을 속이는 것이 되며, 모래 위에 그들의 소망을 세우는 격이 된다(약 1:22; 마 7:26).
셋째, 현재는 말씀에 많은 감동을 받으나,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지 못하므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런 자들에게 영혼의 동작도 엿보이고, 그들이 무슨 말씀을 들었는가도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잠깐 비취는 불빛과 같으며 아궁이 속에서 타고 있는 가시나무와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안다고 자랑하는 외식자들과(사 48:2), "요한을 의로운 사람으로 알고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은"헤롯과(막 6:20), 에스겔을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같이 여겼"던 그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는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여기에서,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결실을 못내는 "돌 밭"으로 표현되어 있다.
넷째,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고, 그들 마음에 거하지 못하고, 인상을 못 주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말씀을 받을 만큼 정돈되고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점은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의 깊게 듣지 않아서 말씀을 잊어버리는 자들인데 이들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말씀이 그들의 한쪽 귀에 들어와서 다른 쪽 귀로 나가는 것이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말씀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죄의 세력에 덮이어,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남긴 좋은 인상을 상실하기 때문에 그들은 말씀으로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하게 된다.
다섯째, 공중에 나는 새들이 흙 위에 드러나 있는 곡식의 씨를 주어 먹으려고 바쁘게 맴도는 것처럼, 말씀을 주의 깊게 듣지 않고 땅에다 떨어뜨리는 자들의 주위에 바쁘게 맴도는 것이다. 그리고 심령이 큰길과 같이 단단하고 겸손하지 못할 때에, 그리고 복음의 씨가 아무렇게 떨어져 있을 때에 모든 길손들에 의해 짓밟히게 되는 것이며, 마귀는 새와 같이 빠르게 나타나 우리도 모르는 동안에 말씀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새들이 희생 제물 위에 앉으려고 할 때에, 아브라함이 그러한 것처럼, 그것들을 쫓아버려야 하는 것이다(창 15:11). 새가 우리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우리의 머리 위에 집을 짓는 것은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 고백을 버릴 만큼, 공적으로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해도 "돌밭"에 떨어진 씨가 그러한 것처럼, 그들은 말씀에 대하여 효험을 보지만 그들도 모르게 그 말씀은 성장을 못하고 질식하게 되어 아무런 결실을 못내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속이 텅 빈 외식 적인 신앙 고백만을 되풀이하게 되므로 아무런 성장도 결실도 못 보게 되고, 분명하게 그리고 그럴 듯하게 지옥을 향하여 내리막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일곱째, 말씀으로 인한 인상이 깊지 않고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시련이나 근심이 올 때에 곧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마치 바다의 모래사장에 남아있는 발자국들이 다음에 밀려오는 조수에게 씻겨 버리듯이, 박해의 거센 조수가 밀어닥칠 때에 모든 말씀에 의해 받은 인상이 씻겨지는 것이다. 부정한 일이 많이 행해질 때에 하나님에 대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간다. 평화의 날에 그들의 신앙고백을 지켜 오던 많은 사람들도 폭풍우가 밀어닥칠 때에 다 버리고 말게 된다. 그리고 쾌락을 즐기기 위해 바다에 나간 사람들이 바다에 바람이 일어나면 되돌아오듯이, 인생 향락을 즐기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외식하는 자들은 말씀에 대한 신앙의 뿌리가 없기 때문에 곧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말씀의 원리에 입각한 삶을 살아가지 않으며, 심령 속에서 우러나오는 일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없는 종교는 헛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러한 그리스도인은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덟째, 많은 사람들이 말씀에 의해 이익을 얻는데 있어서, 그들을 점령하고 있는 세상일들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 겸손, 자비심, 자기 부인, 하늘의 고상한 마음 등의 많은 좋은 교훈들은 그들이 소유하기 쉽고, 그들을 미소로써 유혹하는 세상에서의 자기 만족감의 힘에 눌려 결실을 못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일에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많은 신앙 고백 자들은 바로의 "파리한 암소"와 "마른 이삭"과 같은 결과밖에는 못 거두게 되는 것이다.
아홉째,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방해를 받지 않는 사람들도 "기타 욕심이 들어와" 그들의 신앙 고백에 의해 받은 유익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 마가복음에는 "기타 욕심이 들어와"란 말이 첨가되어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말은 인간의 감각이나 공상을 즐기는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 지나친 욕망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세상에 대해서 욕망이 많지 않은 사람들도 육체의 방종에 의해서 멸망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열째, 결실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달게 받는 사람들에게서 기대하시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씨의 종류에 따라서 그 결실은 마음의 성질이 될 수도 있고 인생의 진로가 될 수 있고, 복음에 일치하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은혜란 매일 매일 연단을 받아야 되고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올바르게 수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결실 하는 길이요, 그리고 이것은 우리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는 것이다.
마지막, 좋은 결실은 좋은 씨에서만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에 좋은 씨가 좋은 옥토에 뿌려진다면, 만일에 씨를 받는 심령이 겸손하고, 거룩하고 하늘의 고상한 마음을 가졌다면, 좋은 결실을 내게 될 것이요, 마치 옛날에 이삭이 많은 곡식을 거둔 것처럼 백 배의 풍부한 결실을 내게 될 것이다(창 26:12).
하늘나라의 비유들 (마가복음 4:21-34)
우리의 구주께서 이 비유와 비유적인 표현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가르쳐 주시려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다음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Ⅰ. 선한 사람들은 그들이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해야 할 그 의무가 무엇인가를 고려해 보지 않으며 안 된다. 그것은 이 앞의 비유에서 생각해 본 바와 같이 결실을 내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당신의 베풀어주신 은사에 대해서 감사의 보답과, 우리 안에 허락하여 주신 은사에 대한 유용한 활용을 기대하시는 것이다(21절).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함이 아니냐?" 사도들이 임명된 것은 그들 자신만을 위해 복음을 받도록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그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여 주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은사를 받을 때에, 사도들과 같이 자신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활용하고 섬겨야 한다.
1. 은사나 은혜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등불"과 같이 되게 한다. 빛의 아버지께서 불을 붙여 주신 "여호와의 등불"인 것이다(잠 20:27). 가장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약한 불빛을 내는 등불을 "의로운 해"(말 4:2)와 비교해 보는 것이다. 등불이 빛을 낸다. 그러나 가까운데 밖에 못 비치고 잠깐 동안 밖에 빛을 내지 못한다. 그리고 쉽게 바람에 꺼지며, 기름은 점점 소모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2. 많은 사람들이 등불과 같이 빛을 받아서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은혜를 나타내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 은혜를 활용하려고도 않는다. 그들은 많은 축복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좋은 일을 같이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마 좋은 손발과, 감각 기관과, 지혜와,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이일 보다 모든 것이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 그들이 신령한 은사를 소유하고 있지만 그것을 남을 위해서 활용하지를 않고 있다. 항아리 속에 넣어 놓은 작은 촛불과 같이 자기 자신들만을 위해서 촛불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3. 등불과 같이 빛을 받은 자들은 자기 자신들을 등경 위에 놓아 빛을 잘 비추게 해야 한다. 그것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을, 그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또, 그들이 소속해 있는 공동체를(교회를) 섬길 수 있는 것으로 잘 포착해서 활용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만을 이해서 빛을 내어서는 안 된다.
이 비유를 주신 이유는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한 말씀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22절). 은사와 은혜를 누구에 주시는 것은 다만 쌓아 두거나 감추어 두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활용하고 교제를 갖게 하기 위함이다. 사도들에게 복음이 비밀로 간직된 것도 아니고 숨겨진 것도 아니다. 그들은 이 복음을 가지고 전 세계에 전파할 사명을 받은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 비유들을 은밀하게 설명해 주셨지만, 그것은 그 제자들로 하여금 대중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더욱 유효하게 할 계획에서 그러하신 것이다. 그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 주도록 예수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성령의 역사 하심이 우리에게 나타남은 우리 자신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라 함은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Ⅱ. 이 비유는 복음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관련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복과 화가 그 복음의 말씀에 달려있으니 그들은 말씀을 명심하고 그 말씀을 잘 활용하라는 것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23절). 이 말씀은 이 앞에서도 말씀하였는데(9절), 여기에서 반복하시었다. 우리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복음에 귀를 기울여 잘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어서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24절).
이 말씀은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주의 깊게 들으라는 것이다. 하몬드 박사(Dr. Hammond)는 "너희가 듣는 바를 숙고하라"고 표현하였다. 우리가 무엇을 들을 때에 그것을 숙고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못 주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남을 가르치는 자들은, 그들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매우 주의 깊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들이 말씀에 정확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전해지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유익한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도 그와 같이 우리가 듣는 바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속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조심하고,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주의를 강권하면서 다음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만큼 하나님도 우리를 대해 주시는 것이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하몬드 박사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 진실한 종이 된다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에게 진실한 주가 되어 주실 것이다."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신다"(삼하 22:26, 27).
2. 우리가 부여받은 달란트(곧 재능)를 우리가 잘 활용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이 주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을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복리를 위해서 사용한다면, 마치 주식 거래가 활발하게 돌아가듯이, 현저하게 퍼져나갈 것이다. "말씀을 듣는 너희에게는 더 많이 주어질 것이요"(24절 하반절 중에 우리말의 개혁판 성서에는 빠진 말씀이 있어 영어판 K.J.V.에서 역자가 옮겨 놓았음-역자 주). "있는 자는 받을 것이다"(25절). 만일에 제자들이 주님에게서 받은 말씀을 교회에 전하였다면, 그들은 주님의 비밀을 알 수 있도록 인도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은사와 은혜는 활용하므로 더 많이 주어지며, 하나님은 부지런한 사람의 손을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었다.
3. 만일에 우리가 소유한 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25절). "없는 자는" 그가 가진 것에 대해서 유익하게 활용할 줄 모르고 마치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헛되이 소유하고 있으면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것이다. 달란트를 묻어 두는 행위는, 그것을 맡겨 주신 분의 신임에 대한 배반이요 이윤의 계산에 대해서도 모순이다. 그리고 은사와 은혜는 싫증에 견디다 못해 녹슬게 되는 것이다.
Ⅲ. 세상에 뿌려지고 인간의 심령에 뿌려진 복음의 좋은 씨는 점차적으로 놀라운 효과를 내게 되지만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렇게 된다(26절). 그러므로, 좋은 땅에 심겨진 씨처럼, 하나님 나라와, 복음도 인간의 마음에 뿌려지고 받아들여질 때에 그와 같이 말없이 성과를 내게 된다.
1. 뿌려진 씨는 곧 싹이 나온다. 비록 그 씨는 흙 속에 묻혀서 잃어버린 것 같지만 그 씨는 흙을 뚫고 싹을 내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씨가 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 속에 자리를 잡고 있게 하여 "위로부터 난 지혜"와 같이 "선한 말을" 하여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나타내 보여 주어야 한다. 들에 곡식이 뿌려진 얼마 후에, 그들의 풍경은 얼마나 아름답게 변하게 되는가! 그들이 파란색으로 덮이게 될 때에 얼마나 화사하고 유쾌하게 보이는가!
2. 농부는 어떻게 그 씨에서 싹이 나오는 가를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신비의 하나인 것이다.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27절). 농부는 씨가 나서 자란 것은 볼 수 있으나, 그것이 어떠한 모양으로 자라남과, 그 성장의 원인과 방법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없다. 우리가 바람 소리를 듣고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 가는지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어떻게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 안에 변화를 일으켜 주시는지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비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논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딤전 3:16).
3. 농부는 씨를 땅에 뿌리고 나서, 그 씨를 나오게 하려고 한일은 아무 것도 없다.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 그 농부는 저녁에 잠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해 가면서도, 그가 뿌려 놓은 씨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드려다 보지도 않고, 즐거운 일이나 사업에 분주하였다. 그러나 "씨가 나서 자라"게 되었고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게 되었으니, 이는, 자연의 일반적인 성장 법칙에 따라 된 것이며,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력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말씀이 신앙으로 받아들여졌을 때에, 말씀을 전한 자는 그 말씀이 싹이 나오고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욥 33:15, 16) 또는 일어나서 다른 일을 돌보고 있을 때에도, 그 귀한 일을 수행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선지자들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이 죽어 무덤에 묻힌 때라도, 싹이 나오고 열매를 맺는 일을 계속하게 된다(슥 1:5, 6). 씨가 싹이 나는데 필요한 이슬은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다"(막 5:7).
4. 그 뿌린 씨는 점차적으로 성장하였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28절). 씨에서 싹이 나왔을 때에는 그 싹은 계속해서 성장을 하게 된다. 자연에는 그 성장 법칙이 있고 그 성장이 가능하도록 자연의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해서나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가지시는 그리스도의 관심은 성장에 대한 관심이 될 것이다. 즉 처음 시작은 적지만 나중 끝은 크게 번성하는 그 성장의 관심에 대해서일 것이다. 당신은 곡식의 종자를 심어서 충실한 곡식을 거두지 못하고 쭉정이를 거둘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씨에게서 동일한 충실한 곡식을 거두시는 것이다. 처음에는 서리 에도 시들기 쉽고 밭에도 짓눌리기도 쉬운 연한 싹이 나오게 되나, 그것은 점점 자라서 이삭이 되고, 마침내는, 충실한 곡식으로 여무는 것이다. 자연은 아무 것도 갑자기는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소리 없이 은밀하게 당신의 일을 행하시지만 오래 참으시며 실수 없이 하신다.
5. 마침내 그 씨는 완전히 성장과정을 다 마치게 된다(29절).
그 씨가 성장하여 "열매를 맺"고 "열매가 익으면" 주인에 의해서 추수할 준비를 다 갖추게 되는 것이며, 주인은 "낫을" 대어 거두는 것이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진리를 우리에게 암시해 준다.
(1) 정당한 원리를 따라서 솔직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섬길 때에 그분은 이를 달게 받아 주시며, 인간의 심령에 자리를 잡고 역사하며 무르익어 가는 복음의 열매를,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운 추수 때에 당신에게로 거두어들이는 것이다(요 4:35).
(2)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복음의 열매를 맺은 자들에게 영생을 보상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복음을 올바로 받아들이고 그 과정을 올바로 거쳐 완전히 성숙하였을 때에 추수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때에 그들은 익은 곡식과 같이 하나님의 곡간에 모아 들여지게 되는 것이다(마 13:30).
Ⅳ. 은혜의 역사는 그 시작에 있어서 미약하지만 결국에는 창대하고 주목할 만하게 된다(30-32절).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과 같다고 할까? 이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메시야에 의해서 수립되어야 하였다.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내가 어떠한 방법으로 너희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리스도께서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어떻게 적당한 비유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을까 하고 혼자서 생각하는 것처럼 아니면 당신 자신과 의논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시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우리가 이 비유를 태양의 활동에서 인용할까 혹은 달의 공전에서 인용해 볼까? 아니다. 이러한 비유는 이 지상에 이는 것에서 빌어와야 한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이 비유할 수 있겠구나. 그리스도께서는 "겨자씨 한 알"로 천국을 비유하게 되었고 그들로 그 작은 씨를 보여 줄 것을 의도하여 아직 땅에 심겨지지 않은 씨를 들어 비유하시었다.
1. 복음의 시초에 있어서 천국은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인" 겨자씨 한 알과 같이, 대단히 작은 것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스도 교회가 이 땅에서 시작된 것은 한 방에도 다 수용될 수 있는 일백 이십 문도에 의해서였다(행 1:15).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에 그 수는 불과 칠십 명 정도였던 것이다. 사람의 심령 안에 은혜의 역사는 처음에는 "적은 일의 날"과 같고(슥 4:10),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과 같은 것이다(왕상 18:44). 사도들의 복음 전도에 의하여 나라들을 복음으로 정복할 것과 같이, 보잘것없는 몇 사람에 의해 그와 같이 거대한 일을 착수하였던 일은 달리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처럼 미약하고 보잘것없이 시작된 은혜의 역사가, 그처럼 큰 영광으로 유종의 미를 거둔 유례도 다리는 없는 것이다.
2. 그 적은 겨자씨의 결과가 매우 위대하였다.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세상에서 복음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어 먼 땅 끝에까지 퍼져 나갈 것이며 세상 끝날 까지 계속될 것이다. "큰 가지를 내니." 교회는 강하고 널리 뻗은, 그리고 열매를 많이 맺은 "큰 가지들을 내었다". 지금 성장 중에 있는 동안에도 인간의 심령 안에 은혜의 역사는 많은 열매를 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서 완전하게 될 때는 어떻게 되겠는가? "겨자씨 한 알"과 "큰 가지" 사이의 차이는 지상에서 새로 회개한 초신자와 하늘에서 영화롭게 된 성도 사이의 차이에 비할 수 없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요 12:24)/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이 상세하게 비유의 말씀을 마친 뒤에, 복음서기자는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대하여 결론적인 말로써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었다고 하였다(33절). 아마 그렇게 표현한 그 의도는 우리로 하여금 이와 같은 종류의 비유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함인 듯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비유들은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마태복음 13장에도 나와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비유로 말씀하시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많이 볼 수 있고, 생소하지 않은 그런 것들이나 그들의 수준에 알맞은 것들을 비유로 채택하여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표현으로 가르치시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모든 청중들이 다 비유의 비밀을 다 알게 하시지는 않으셨지만, 그분의 표현 방법은 쉽게 하시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그 후로 그런 비유의 말씀을 쉽게 회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34절), 주님의 영광은 구름에 가리워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인자들의" 언어로 말씀하시므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하신 그 의미를 처음부터 바로 이해할 수는 없어도 차차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처음에 그 의미를 바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그들 스스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해석 하"여 주시었던 것이다. 우리는 씨뿌리는 비유에서처럼,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말씀의 해석을 들었으면 좋겠다는 원함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많이 확장되고 번성할 때에, 우리가 더 이상 수고하지 않더라도, 바로 그 점이 이 비유의 말씀들을 우리에게 해석하여 주기 때문이다.
풍랑을 제압하심 (마가복음 4:35-41)
그리스도께서 단신의 제자들을 구하기 위하여 폭풍을 잔잔케 역사 하신 이 기적은 우리가 전에 마태복음 8장 23절 이하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더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럼 이하에서 이 말씀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이 기적은 예수께서 배를 타고 바다에서 말씀을 전하신 같은 날 이루어졌다. "그날 저물 때에"(35절) 그리스도께서 온종일 말씀을 전하시고 가르치시기에 수고하시었지만, 스스로 휴식을 취하시는 대신에 자신이 활동을 계속하시었음은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기까지는 이 땅에서 만족스런 참된 휴식을 생각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시는 듯하다. 수고의 결국이 풍랑의 시작이 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강단으로 사용하였던 그 배는 바로 그리스도의 특별한 보호 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제아무리 위험에 처해 있더라도 물 속에 빠질 우려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시려고 밤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자고 제의하시었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35절)하신 것은, 다음 장에서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그 곳에 가셔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선을 행하시기 위해 가시었고, 그 곳으로 가시는 노정에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 되며, 우리의 세대가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3. "저희가 무리를 다 보내"기까지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지 않았다. 그것은 곧 그들이 나온 목적을 따라 그들 각자에게 채워 주시고, 그들의 모든 요구에 따라 응답해 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에게도 그들이 헛되이 참석했다고 불평을 하면서 돌아가도록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또한 제자들은 그 무리들이 엄숙한 축복을 받아 가지고 돌아가도록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선포하러 오신 것뿐만 아니라 명령하시기 위해 오시었고, 축복하시기 위해 오시었기 때문이다.
4. 제자들은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다. 그것을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에 입으셨던 의상 그대로였고, 밤에 바다로 나가시면서, 더군다나 말씀을 전하신 후에, 바다로 나가시면서, 몸을 따뜻하게 보호하기 위해 외투를 입으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의 몸의 건강에 대해서 부주의를 해도 좋다는 추론을 내리지 말고, 우리의 몸에 대해서 지나치게 신경 쓰거나 염려를 하지 말라는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5. 광풍이 너무 세게 불었으므로 "물결이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던 것이다(37절). 배에 구멍이 뚫려서가 아니라, 아마 폭풍우가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폭풍우가 내린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제 아무리 배가 적다 하더라도 물결이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그 배 안에 타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명예와, 복음을 배에 태우고 몹시 서두르며 위험에 빠져 있는 일은 그 배에만 있었던 새로운 일이 아닌 것을 기억하라.
6. 예수께서 타신 배를 따르는 몇 척의 "다른 배들도 함께 하였는"데, 배들도 틀림 없이 이와 같은 조난과 위험을 당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이 적은 배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의 나타남을 통해서 은혜를 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태우고 갔을 것이다. 예수께서 배를 타고 출발하실 때에 무리를 돌려보냈는데 몇 사람들은 예수를 따라 바다의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르기 위해, 예수의 뒤를 따라 나섰던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행복을 바라는 자들은, 예수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하기를 원하지 않으면 안 되며 예수께서 당하시는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불어닥친 폭풍을 예견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항해를 같이 하기 위해 담대하고 유쾌하게 출항할 수 있는 것이다.
7. 광풍이 불어오는 동안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주무시고 계시었다. 여기 본문 말씀에 "예수께서는 고물에서……주무"시었다고 하였는데 이 고물은 선장의 자리인 것이다. 예수께서 조종실에 누워 계시었음은, 죠지 허버트(Mr. George Herbert)가 표현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말해 주고 있다.
바람과 풍랑이 나의 배를 공격하여 올 때에,
주님께서 키를 잡으시고 조종하시네,
배가 몹시 흔들리는 위험한 순간에도.
폭풍은 주님의 예술의 걸작품,
비록 주님이 눈은 감으신다 해도,
주님의 마음은 늘 깨어 있으시지.
예수께서는 "베개를 베시고 주무 시"었는데, 그러한 것은 예수를 위해서 배에 구비하여 놓은 것일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주무신 것은 당신의 제자들의 신앙을 시험해 보고, 그들에게 기도의 마음을 불러일으키시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풍랑을 당하였을 때에, 그들의 신앙이 약하였음이 드러났고 그들의 기도는 강하였음이 나타났다. 때때로, 교회가 풍랑을 당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주무시는 듯이 당신의 백성들의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곧 나타나시지 않으시는 것 같이 보일 때가 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나이다"(사 45:15). 그러므로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 2:3).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리로다"(시 121:3, 4). 그리스도께서는 아가서에 나오는 신부처럼, 주무시더라도 마음은 깨어 계시는 것이다(아 5:2).
8.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를 모시고 있는 사실로 말미암아, 스스로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최선의 길은 그들이 모시고 있는 주 예수를 의지하고, 구원을 호소하며, 배의 노를 젓는 것보다 기도의 노를 부지런히 저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제자들은 그들이 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이 사실에 자신을 가졌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가는 배가, 제아무리 그것이 풍랑에 심하게 흔들린다 하더라도, 침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속에 나타나신 덤불은 제아무리 맹렬하게 불붙어 타고 있다 하더라도 소멸되지 않는 것이다. 시이저(J. Caesar)는 그를 배에다 태우고 가는 선장에게 "그대는 시이저를 배에다 태웠다. 그리고 시이저의 행운도 마찬가지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일깨웠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 주께서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아야 했다(아 2:7). 그러나 그들은 주께서 이 허물을 용서해 주실 것을 알았다. 그리스도께서 풍랑가운데 주무시는 것같이 보일 때에, 그분은 당신의 백성의 기도 가운데 깨어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에, 우리의 눈이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대하 20:12). 우리가 구주 예수를 모시고 있는 동안은,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곤경에 이른다 하여도 신앙의 곤경에 이르지는 않는 것이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에게 말한 표현은 아주 당돌한 것이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 하시나이까"(36절). 나는 이 말이 주님을 깨우리 위한 간청이라기보다 주무시는 주님을 꾸짖는 말인 듯하여, 비위에 거슬리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기에 대한 다름 변명을 알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 항상 그들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신 고로 가까워진 친숙함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자유와, 그들이 그렇게 공포심에 사로잡혀 무엇을 말하는 것조차 모르게한 현재 그들의 당한 위험한 조난 등을 그 원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큰 잘못을 범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위험한 조난을 당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무관심하신 것으로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마 18:14).
9. 그리스도께서 바람을 꾸짖으신 명령의 말씀은 마태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았으나, 여기에는 언급되어 있다(39절). 예수께서 "잠잠하라," "고요하라," 명령하셨는데, 원어에는 "eiw,pa", "pefi,mwso" "잠잠하라," "소리를 내지 말라"로 되어 있다. 바람은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말고, 바다는 더 이상 노를 내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주께서는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훤화까지 진정하시었던"것이다(시 65:7). 그런데 이 시편 65편 7절이나, 93편 3,4절은 바다의 "소리"에 강조를 두고 있다. 그 소리가 위협을 주고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을 삼가기로 한다.
(1) 우리의 악한 마음이 "능히 안정치 못하고……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며," 이 주님의 명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욕망이 거세게 파도치고 안정되지 못할 때에, 그리tm도께서 우리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령하시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경솔하게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
(2) 우리에게 위로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고난의 폭풍이 아무리 요란하고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이것을 잠잠케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외부로는 싸움이 계속되고, 내부로는 두려움에 싸여 있으며, 마음은 격동되어 있을 때에, "이슬의 열매를 짓는" 그리스도께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명령하신다(사 57:19). 만일 그리스도께서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령하시면, 곧 잠잠하게 되는 것이다. 예레미야 31장 35절에 바다를 명령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특권인 것처럼 말씀하였다. 그러므로 바다를 명령하시는 이 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하나임을 증거 하시는 것이다. 바다를 만드신 분이 바다를 조용하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10.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의 두려워함에 대하여 책망하신 말씀이 마태복음보다 여기에 더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마태복음에는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마 8:26) 하였으며,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하였다. 비록 두려워할 원인이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무서워해서는 안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였고 여기에는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였다. 제자들이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는 무서움이 그들을 사로잡았으므로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믿음을 행사할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런 일에 너희가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내가 때에 알맞은 효과적인 구원으로 오는 것을 어떻게 너희가 생각할 수 있겠느냐?" 자기들의 신앙에 대해서 의심을 가질 수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멸망을 당하게 되어도 무관심하며 다만 그런 불행한 자리에 놓아두신다는 생각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이 기적이 제자들에게 준 인상에 대하여, 여기에는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마태복음에는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라고 하였고, 여기에는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라고 말하였다. 이제 신앙에 의하여 그들의 공포는 사라졌던 것이다. 그들이 바람과 바다를 두려워하였을 적에,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마땅히 표시해야할 존경심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바람과 바다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바람과 바다는 별로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예수에게 대하여 "심히 두려워하게"되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두려워하게 된 것은 그들의 불 신앙적인 공포로 말미암아 다시금 그리스도에게 실수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에게 존귀를 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들은 폭풍 가운데 나타난 창조주의 능력과 진노에 대해서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그 안에 고뇌와 놀람을 내포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고요 속에 계시는 구속주의 능력과 은혜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주님과 그분의 선하심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그 두려움 안에 즐거움과 만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요나를 태운 뱃사람들과 같이 두려움으로 인해 제자들은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었다. 요나를 태웠던 배의 선원들은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욘 1:15, 16). 이 두려움의 제물을 그리스도의 존귀 앞에 드리면서, 제자들은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마 8:27)라는 놀라움을 나타내었다.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확실히 사람보다 뛰어나신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