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1차 간산 안내 (2015년 11월 22일 충주지역)
우리 연구소에서 실시하는 제 51차 정기 간산은 풍수고전에 의한 심화답사 및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중부지부 개소식을 겸한 특별간산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이곳 충주지방으로 기운을 불어넣는 지맥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남하(南下)하다가 강릉의 두로봉(1422m)에서 한강기맥(漢江岐脈)으로 분기(分岐)되어, 남서진(南西進)하다가 오대산(1563m)► 삼계봉► 치악산(1282m)을 솟구친다. 지근(至近)의 남대봉(1180m)에서 백운지맥으로 분지(分枝)되어 백운산(1086m)을 일구고 진행하여 십자봉(983m)에서 다시 천등지맥으로 분지되어, 남하하다가 옥녀봉► 오청산을 지나 충주의 명산인 천등산(807m)► 인등산(667m)► 지등산(535m)을 차례로 일으키면서, 알토란같은 생기덩어리를 요소요소에 공급시켜 명당 터를 일구는 청정지역입니다.
<충주지역 용맥도>
이번 답사는 단독간산이 녹녹치 않은 난코스에 입지하면서 인등산 자락에 등을 대고 기룡혈(騎龍穴)로 소문난 좌의정을 지낸 권상하의 묘소를 비롯하여, 교과서적인 터에 영면하고 있는 사대부들의 음택을 간산할 예정입니다.
풍수인이라면 필연적으로 접해야 하는 간산과 관련하여《설심부(雪心賦)》에 “부귀한 조상의 무덤을 보는 것은 반드시 산천의 정기(正氣)를 얻는 것이고, 선적(仙跡)을 추심(追尋)하여 격(格)을 본다는 것이 오히려 책을 보는 것보다 낫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의룡경(疑龍經)》에 “그대에 권하건대 옛 무덤을 가서 살펴봐라. 천권(千卷)의 감룡문(撼龍文)을 읽는 것보다 더 좋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격(格)을 많이 보면 마음이 쉽게 밝아지고, 많이 보는 것은 귀로 천 번 듣는 것보다 낫다” 하였습니다.
이번 답사에도 연구소 회원들과 풍수호사가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며, 특히 풍수는 문외한이지만 역사나 유적지에 호기심이 많으신 분들도 참여가 가능하니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특히 이번답사는 중부지역의 개소식을 겸한 관계로 많은 임원들의 참여와 함께, 입지적으로 대형버스 진입이 어려운 관계로, 부득이 중형버스를 투입할 예정이오니, 꼭 리필을 달아 선착순 마감에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1. 간산 일시
- 2015년 11월 22일(일요일), 양재역 08:00시
▶ 태릉역: 07:30, 지하철 6, 7호선 태릉역 1번 출구로 나오시면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 양재역: 08:00, 지하철 3호선 양재역에서 하차하여 1번 출구로 나와 50m 정도 걸어오시면 서초구청 맞은편에 관광버스 대기(수도권에서 참여하시는 분들의 편의를 제공하고자 최대한 시간을 늦췄습니다)
2. 최종 집결장소
▶ 서울 : 양재동 서초구청 맞은편(수협은행 앞)
- 지하철 3호선 양재역 1번 출구에서 걸어오시면 수협은행 앞 도로에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08:00 까지)
※ 태릉역에서 출발하실 회원께서는 07:30까지 지하철 6, 7호선 태릉역 1번 출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3. 회비: 50,000원 (교통비, 중식, 석식, 기타비용 등)
4. 답사 경유지 및 간산지 안내
서울 양재역 출발(08:00)→ 죽전 임시정류소(07:50) → 영동고속도로 → 충주 감곡IC → 산척면사무소 → 우천석 묘소 → 손순효 묘소 → 권상하 묘소 → 이극감 묘소 → 중부지부 개소식(16:30) → 귀경
※ 다른 장소에서 합류를 희망하실 분은 김명식 고문(010-2212-3494), 정철화 부소장(010-3475-2357)에게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5. 답사지 안내
1) 횡결맥(橫結脈)이 일군 우천석 묘소
고려의 무신으로 본관은 단양(丹陽)이며, 출생 및 사망 시기는 분명치 않다. 1268년(원종 9) 몽고와 강화 후,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로서, 낭장 박신보(朴臣甫)와 함께 몽고의 사신 왕국창(王國昌)일행을 흑산도로 인도하면서 뱃길을 살폈다. 이것은 남송(南宋)과 일본의 도발을 미리 막고, 견제하기 위한 몽고의 조처였다. 1273년 서해도안찰사(西海道按察使)로 제주를 거점으로 저항하는 삼별초 공격에 참가했으나 전함을 파선했다는 이유로 다루가치(達魯花赤) 이익(李益)의 문책을 받아 투옥되었다. 1277년(충렬왕 3) 전라도안렴부사(全羅道按廉副使)를 거쳐, 1280년 잡단(雜端: 어사대의 종 5품 관직)에 이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이곳 묘소는 천등산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주룡(主龍)의 허리를 비집고 나온 횡결맥(橫結脈)의 용진처(龍盡處)에 터를 일구었으며, 횡락(橫落)및 횡결(橫結)의 필수조건인 귀성(鬼星)이 뚜렷하다. 전방의 나지막한 안산이 묘역을 향해 양면(陽面)으로 응기(應氣)하고, 조산(朝山)으로 매김하는 좌우측의 귀인사(貴人砂)가 조배(朝拜)하는 교과서적인 터다.
이곳 묘소의 횡결접맥처(橫結接脈處)지근에는 과룡처(過龍處)에 터를 정한 고총(古冢)이 스산하고 쓸쓸한 몰골을 하고 있어 풍수인 들에게 좋은 교훈을 시사(示唆)할거라 본다.
묘소는 계좌정향(癸坐丁向)에 좌선수 곤파(坤破)로 88향법의 정묘향(正墓向)을 놓았다.
우천석 묘 바로 뒤에는 그의 아들 우평 묘가 있는데, 조성 양식이 우천석 묘와 동일한 고려 때 묘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고려밀직부사추봉시중사우공평지묘〉란 옛 묘비와 1980년에 세운〈문하시중평장사단양우공지묘 배군부인 청풍김씨합 부〉라 새겨진 묘비가 있다.
그러나 이곳 묘소의 포인트는 우천석 묘란 것을 여러 풍수적 상황 등으로 판단할 수 있다.
2) 오목한 양면(陽面)으로 향(向)을 정한 손순효 음택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경보(敬甫)이고, 호는 물재(勿齋), 칠휴거사(七休居士)이며, 1427(세종9)년 밀(密)의 아들이다. 1453년(단종 1) 생원(生員)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과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각각 급제, 경창부승(慶昌府丞)이 되고, 병조좌랑(兵曹佐郞), 형조정랑(刑曹正郞), 장령(掌令)을 거쳐 성종 때, 전한(典翰) 겸 집의(執議)에 특진되었으나 직무상의 과오로 무관직인 상호군(上護軍)으로 전임했다. 뒤에 다시 문관으로 복귀하여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 동부승지(同副承旨), 도승지(都承旨), 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성종이 윤비(尹妃)를 폐위할 때, 그 부당함을 극간(極諫)하였다. 형조판서를 지내고, 1480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공조판서, 경기도관찰사,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1485년 임사홍(任士洪)을 두둔했다가 왕의 비위를 거슬려 경사도 관찰사로 좌천되었으나, 돌아와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였고 특히 「중용(中庸)」,「대학(大學)」 과 「역경(易經)」에 정통했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그림은 죽화(竹畵)에 능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이곳 묘소는 천등산 지맥이 서쪽으로 진행하다가 인근의 우천석 묘소를 일구기전, 몇 가닥의 지룡(支龍) 및 지각 등을 내려 보내 일군 묘역이다. 이곳 묘에서 사방을 바라보면 모든 사격이 주밀(周密)하고 국세가 완취(完聚)하여 그 모습이 아름답다. 그리고 손에 닿을 듯 가까운 안산의 안쪽인 양면(陽面)으로 향선(向線)을 정했다.
풍수 입문과정에서 특정 터가 결혈(結穴)이 되었나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 중에 용호사(龍虎砂)와 조안산(朝案山) 등이 혈을 잘 감싸고 있느냐의 여부가 관건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국이 잘 되어도 진혈(眞穴)이 아닌 곳이 있고, 국세가 완벽하지 않아도 혈을 맺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기에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씨름선수는 몸집이 커야 좋다는 일반적인 기준이 있지만, 몸집이 크다고 모두 씨름선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몸집이 작아도 얼마든지 씨름계를 제패할 선수가 될 것이다.
이곳 묘소의 사격(砂格)에도 흠집이 발견된다. 청룡자락 안쪽에 붙어있는 암석이 각충(角衝)하고, 백호방 끝자락이 주먹을 움켜진 경권(擎拳)의 모습과 흡사하여 지손(支孫)중의 막내가 속을 썩일 거라 판단된다.
이곳 묘소는 4층 임좌(壬坐), 8층 해좌(亥坐)로, 병방(丙方) 파구(破口)된다.
3) 기룡혈(騎龍穴)로 알려진 권상하 음택
서울출신으로, 아버지는 집의를 지낸 격(格)이며, 우참찬을 지낸 상유(尙游)가 동생이다. 송준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1660년(현종 1)에 진사가 되었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 중, 1668년에 스승 송시열이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우의정을 사직하자 유임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문제가 발생하여 송시열이 관작을 추탈당하고 덕원(德源)에 유배되자 관계 진출을 단념하고 청풍의 산중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득세하면서 송시열이 제주에 위리안치되어 후명(後命)을 받자, 유배지에 달려가 이별을 고하고, 의복과 서적 등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송시열이 남긴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향 하였다. 숙종 재위 중에 서인과 남인 간에 당쟁이 치열하자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703년 찬선, 이듬해 호조참판에 이어, 1716년까지 13년 동안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705년 이조참판에 이어 찬선, 1712년에는 판윤에 이어 이조판서, 1717년 좌찬성에 이어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으며, 1721년(경종 1)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꽤 높은 산길을 따라 이곳에 들어서면 서울출신인 그가 서울근교에 묻히지 않고, 왜 이런 산골 오지에서 영면하고 있을까하고 의아심을 느끼게 한다. 물론 정승이란 반열까지 오르고, 해직이 아닌 사직서를 제출한 그의 성품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보지만, 풍수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곳 터가 일반 민묘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기룡(騎龍)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곳 묘소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나지막한 과협처(過峽處)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내맥(來脈)의 용신(龍身)이 치올린 전방의 본신 안산(案山)을 응시하고 있어, 마치 내팔거팔(來八去八)을 이루는 순기룡(順騎龍)의 격을 이루면서 제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룡혈은 꽤 까다로운 조건을 요하고 있어, 즉흥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세세하게 살피는 산안(山眼)이 요구된다.
기룡혈(騎龍穴)에 대한《담자록(啖蔗錄)》의 내용이다.
【前途不結而脊落。謂之騎龍。正面無情而側扦。謂之咬虱。騎龍者。行龍前去不結穴。于過峽之處。融成星暈。如珠。如宕。當脊而生。後山枝脚向前。前山枝脚轉後。四圍周密。局勢完聚。于此珠宕上作穴。前山雖遠去。只屬餘氣。所謂去非真去。是也。因其形止氣蓄。與他處結穴相同。故可作穴。非謂陟然。山脊亦可裁鑿也。以其穴不居于盡處。故曰騎龍】이라 하여, 『앞으로 나가 결작하지 못하고, 혈이 등성마루에 있는 것을 기룡(騎龍)이라 하고, 정면(正面)이 무정(無情)하여 옆으로 천(扦, 꽂다)하는 것을 교슬(咬虱, 이를 물다)이라 한다.
기룡(騎龍)이란 행하는 용이 앞으로 나가 혈(穴)을 맺지 못하고, 과협처에 성운(星暈)을 이루므로 주(珠)와 같고, 탕(宕: 굴)같은 등성마루에 생긴다. 뒤의 지각(枝脚)은 앞을 향하고, 앞의 지각은 뒤를 돌아보며, 사방이 주밀(周密)하고 국세(局勢)가 완취(完聚)하니 주탕(珠宕, 넓은 구슬)상에 작혈(作穴)하는 것이다. 앞산이 비록 멀리 나가지만 여기(餘氣)에 속하므로 이른바 거비진거(去非眞去)이며, 그 형(形)이 멈추고 기(氣)가 응축되는 것은 다른 곳에서의 결혈(結穴)과 서로 같다. 그러므로 작혈(作穴)할 수 있으며, 높다고 말하지 않는다. 산의 등성마루를 뚫어 심는다 하여 재착(栽鑿)이라 하며, 혈(穴)은 진처(盡處)에 있지 않다 하여 기룡(騎龍)이라 한다.』하였다.
즉, 기룡혈의 핵심은 내팔거팔(來八去八)의 사이에 위치하여 순세(順勢)로 팔을 벌리는 거팔보다, 내팔의 조건인 본신 안산이 역세(逆勢)를 취했느냐가 관건이다. 그리고 묘소가 위치하는 과협처의 취기(聚氣)를 보호하는 양쪽의 강협사(扛夾砂)의 유무 등도 따져보아야 한다.
이곳 기룡(騎龍)의 진위(眞僞)여부는 현장에서 논단하고 평가하고자 한다. 묘소는 계좌정향(癸坐丁向)을 놓았으며, 이곳 묘소처럼 높게 상취(上聚)하거나, 기룡으로 물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기적(理氣的)으로 응용하는 파구는 논할 필요가 없다.
권상하의 후손으로 그의 손자인 권양성(權養性)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증손인 권제응(權濟應)은, 진양목사, 고손인 권중집(權中緝)은 진산군수를 지냈으며, 그의 5대손인 권돈인(權敦仁)은 철종(哲宗)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
4) 보국(保局)이 아름다운 이극감 음택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자는 덕여(德輿)이며, 집(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직(之直)이고, 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인손(仁孫)이다. 그는 이극배, 이극감, 이극증, 이극돈, 이극균 등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중에 2정승 3당상관(장관급)이 나올 정도로 대단한 명가를 이뤄낸 장본인이다. 이극감은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집현전에 발탁되었고, 1447년에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부수찬에 임명되었으며, 1448년에는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이 새로 설치되면서 우찬독(右贊讀)이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즉위하자 경연사경(經筵司經)을 지내고, 이듬해 대제학 정인지(鄭麟趾)의 추천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455년(세조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즉위하자 검상이 되었고,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녹훈되어,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1458년에 동부승지가 되고, 이어 이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1460년 북정(北征)때는 기무를 관장하였다.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수찬하였으며,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양평의 구정승골에 터를 정한 영의정 이준경이 그의 증손(曾孫)이다.
음택 산야를 답사하면서 경험과 사실관계를 종합해보면 조종산과 내룡(來龍)의 모습과 기세에 따라 자손들의 부귀빈천(富貴貧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물의 행방을 알 수 없듯이 꼬리를 감추듯 빠져나가는 입지라면 재산(財山)으로 재물이 풍족하지만, 수구처가 횅하니 열려있으면 채산(債山)으로, 항상 쪼들리거나, 마음의 여유가 녹녹치 못하거나, 바쁘게 사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터를 일구는 혈성(穴星)의 모습은 한 가문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혈처는 한 가정의 길흉과 관련된 사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곳 터는 인등산에서 거의 서쪽으로 진행하는 지룡(支龍)에서 분지된 한 맥이 나지막한 평지로 내려와 묘소를 일구었는데, 그야말로 생기 한 점 새나갈 수 없을 정도로 사방으로 펼쳐지는 보국이 아름답다. 전방의 안산 너머에는 고축사(誥軸砂)와 함께 형상이 범상치 않은 사격이 연이어지고, 좌우를 포진하는 용호사가 기를 불어넣어준다.
그런데, 우측 백호사의 끝머리가 배를 내밀 듯이 반견(反牽)하여, 좌선수의 국세에서는 흠으로 작용한다.
이곳 묘소의 좌는 4층 건좌(乾坐), 8층 술좌(戌坐)로 매김 되고, 파구는 백호방의 진파(辰破)를 이룬다.
6. 지참물
산행을 할 수 있는 간단한 복장과 나경패철, 필기도구, 간식 등
7. 신청 방법
참가를 희망하시는 분은 반드시 이름과 연락처를 아래 신청 등록란에 꼬리말로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간산은 연구소 정기답사와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중부지부 개소식이 예정되어 조기 마감될 수 있으니 반드시 리필을 요합니다)
8. 연락처
서울, 경기, 전국 : 정철화(010-3475-2357), 김명식(010-2212-3494)
충남 : 정수일(011-9823-2588)
대전 : 정부연(011-9800-0307)
충북(청주) : 김홍길(010-8001-0020,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충북 지부장)
중부(충주) : 이현철(011-774-8854,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중부지부장)
경북, 경남 : 박정수(011-530-2847,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상주 지부장)
전북 : 장원기(010-5638-6905,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전북 지부장)
전남 : 손인호(010-6471-1040,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전남 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