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보들의 행진
최용현(수필가)
영화감독 하길종. 미남배우 하명중의 친형이다. 여덟 살에 어머니를 잃고, 열 살엔 아버지마저 잃는다.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하자마자 3.15부정선거로 인한 4.19혁명에 가담하여 승리의 희열을 맛본다. 그러나 이듬해 터진 5.16쿠데타로 다시 절망에 빠진다. 졸업과 동시에 신 필름에 입사하며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지만, 그의 일은 잡일과 심부름이었다.
1965년, 그는 신 필름에 사직서를 내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돈을 벌기 위해 접시도 닦고, 주유소에서 기름도 넣고, 시체 닦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마침내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UCLA) 영화과 석사과정에 입학한다. ‘대부’ ‘지옥의 묵시록’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그의 동기였고, 후배 중엔 ‘스타워즈’ 시리즈의 조지 루커스도 있었다.
그의 졸업 작품 ‘병사의 제전’(1969)은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군인이 관을 끌고 해변을 거닐고, 벌거벗은 남녀가 전몰장병묘지를 뛰어다니고, 인디언 무당이 굿판을 벌이는 등 파격적인 내용인데, 이 영화로 그는 MGM영화사에서 미국의 영화학도 4명에게 주는 메이어그랜드 상을 수상했고 강사직도 제안 받는다.
그러나 하길종은 자신의 학생운동 전력과 병역미필 때문에 공직자인 형이 승진에 실패하고 낙마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을 택한다. 장발에 긴 가죽 부츠를 신고 온 그는 공항에서 정보부 요원에게 압송되어 조사를 받는다. 학부시절의 동료들은 대부분 반정부 행위로 감옥에 있거나 수배 중이었다. 그는 긴 머리를 자르고 늦깎이로 입대한다.
군복무를 마친 하길종은 이효석의 소설을 각색한 ‘화분’(1972)으로 감독에 데뷔한다. 그러나 권력자를 비꼬는 내용에다 표절논란까지 더해져 흥행에 참패하고 호된 충무로 신고식을 치른다. 다시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무협사극 ‘수절’(1974)을 만들지만, 칼자루를 쥔 정부에 의해 20여분 분량이 잘려나갔고 관객으로부터도 외면을 받는다.
두 번의 참담한 실패를 맛본 하길종 감독이 세 번째로 선택한 작품이 바로 대학생을 다룬 청춘영화 ‘바보들의 행진’이다. 서구문명의 영향을 받고 자란 당시 젊은이들의 불투명한 미래와 사랑, 그리고 방황을 그린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1975년 5월말에 개봉하여 서울관객 15만 명 돌파라는 대성공을 거두며 그해 최고의 흥행작으로 기록된다.
이 영화에는 1960년대 4.19와 5.16을 겪은 하길종 감독이 1970년대 소위 유신시대를 살아가는 후배들을 향한 따스하고 유쾌하면서도 우울한 시선이 담겨있다.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명목으로 장발단속을 하고, 통행금지라는 굴레를 씌워 밤 12시가 넘으면 돌아다니지 못하게 했지만, 그 속에서도 청바지와 생맥주, 통기타로 대표되는 청년문화는 꽃을 피웠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권침해가 일상처럼 행해지던 그 시절의 대학생들은 영화에서처럼 단체미팅을 하거나 막걸리마시기 대회를 열면서 좌절감을 달랬다. 감독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카메라는 그 시절의 대학생 영철(하재영 扮)과 병태(윤문섭 扮)의 발길을 따라가면서 그들이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한 번도 자신의 실력으로 합격을 하지 못했다는 열등감을 가진 부잣집 외아들 영철은 군 입대 신체검사에서도 탈락한데다 미팅에서 만난 여친 순자(김영숙 扮)마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자 절망에 빠진다. 스스로를 ‘쪼다’라고 생각한 영철은 고래를 찾는다며 혼자 자전거를 타고 동해로 떠난다. 그리고 가파른 절벽에서 동해바다로 뛰어내리고 만다.
철학도인 병태는 미팅에서 만나 친하게 지낸 여친 영자(이영옥 扮)가 철학과는 장래에 대한 비전이 없다며 절교를 선언하자 긴 머리를 빡빡 밀고 입영열차에 오른다. 그때 영자가 달려와 애타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병태는 열차 창문에 매달리는 영자와 입을 맞춘다. 이 마지막 장면은 한국영화사에 명장면으로 남는다.
주제곡 ‘날이 갈수록’의 선율이 잔잔하게 깔리고 송창식의 애잔하면서도 호소력 짙은 육성으로도 나온다. 이 곡은 요절한 가수 김정호가 리메이크해서 크게 히트했다. 또 영화의 삽입곡인 송창식의 ‘왜 불러’와 ‘고래사냥’은 시위학생들이 자주 부르는 바람에 금지곡이 되고 말았다. 고래사냥의 가사를 보자.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오~
‘바보들의 행진’의 시나리오는 4차례에 걸친 사전검열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완성된 필름도 여러 군데 칼질을 당해 어떤 장면은 전혀 엉뚱하게 연결되기도 했단다. 예컨대 야구경기에 응원 간다고 학생들이 단체로 강의실을 나가는 모습은 본래 데모에 참가하기 위해 빠져나가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하길종 감독은 심의를 통과한 직후, 잘린 필름을 다시 이어 붙여서 국도극장에서 상영을 하다가 당국이 파견한 요원들에 의해 남산에 끌려가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117분으로 완성된 ‘바보들의 행진’은 결국 러닝 타임 102분짜리 영화가 되었고, 이때 잘려나간 15분은 영영 복원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영화에는 이미 고인이 된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원작소설을 쓴 당대의 인기작가 최인호의 젊은 시절 모습도 나오고, 당시의 인기 코미디언 땅딸이 이기동, 왕년의 명우 최남현과 문오장의 모습도 보인다. 또 고교얄개로 유명한 이승현이 어린 신문팔이소년으로 나오기도 한다.
이후 하길종 감독은 ‘속 별들의 고향’(1978)과 ‘바보들의 행진’의 속편인 ‘병태와 영자’(1979)를 잇달아 히트시킨다. 그러나 시대와 불화했던 이 천재감독은 유신정권이 종식되던 그 해 ‘병태와 영자’가 연일 만원사례를 거듭하던 2월 마지막 날, 충무로의 어느 술집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슴아프던 시절.
저도 82학번이라 집회도
서너번 참석 했고 윗글을 읽다 보니
옛 학창시절 추억과 가난했던 시절등~
많은 공감을 가지고 있네요.
글 감사 합니다.
82학번이면 유신시대가 끝나고 전두환 시절이네요.
그 시절 대학은 온통 저항과 자조, 방황의 암흑시대였죠
군사독재의 잔재가 60년대부터 무려 30년간이나 지속되었죠.
요즘 대학생들이 그 시절 군부독재와 싸운 선배들의 고초를 알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감상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ㅡ
그 시대엔 어디 영화 뿐이겠는지요
대중 가요에서도 말도 안되는 이유 아닌 이유를 갖다붙여서 금지곡이 되엇고
영화도 검열에서 싹둑싹둑 동강나서 전혀 엉뚱한 영화가 되기도 했고
책도 .. 언론의 억압으로 많은 금서가 되기도 했지요
작가들도 줄줄이 감옥 행이었고..
유신시절은 그렇게 독재정권에 희생된 문인들..
영화인들.. 이 많았지요
잊지 말아야 할 우리들의 과거상입니다
지금이야.. 모든게 자유로운 환경에서 있으니까
좋은 영화도 많이 나오지만
그 못지 않게
참 졸렬한 영화들도 나오는 패단이 되었다는
뭐든지.. 선과 악은 바늘과 실이며 손바닥과 손등같은 양면성을 갖고 있는듯..
'바보들의 행진'이 연일 관객몰이를 하던 그해
1월에 군에 입대하여 한창 신병훈련을 받으며 군대생활을 했죠.
그 시절 군에서도 무슨 선거날이라고 반찬으로 김이 나왔던 기억이...
만 3년 군대생활을 하고 77년 말에 제대를 하니
이리역 폭발사고가 나고...
유신 정권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죠.
78년에 2학년에 복학을 했더니
걸핏하면 휴교령을 내려서 보따리를 사서 낙향을 해야했고...
'바보들의 행진'은 그 시절의 영화라서
나중에 영화를 보고 공감과 실감을 많이 했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화는 못봤지만 참 어려운시절이 생각나네요
네, 젊을 때 그런 시절을 살았었죠.
참 그렇죠
이제야 말 할 수 있지요
세상이 많이 좋아졌죠.
좋은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하고 옛날의 사랑이 생각 나게한다...
네, 감사합니다.
사복경찰이 바리깡을 뒷춤에 숨기고 골목에 숨어서
장발단속이 기승 부리던 시절,
잡히면 대그빡에 고속도로가 생기고
도망가면 시민들이 박수치면서 응원하던
그저 씁쓸한 헛웃음만~~~~
기억납니다.
저도 한번 잡혀서 머리에 고속도로가 난 적이 있습니다만
머리는 계속 자랍니다.
군사정권의 잔재였죠.
민주화가 많이 되긴 되었지만...
좋은 글 .. 정보 너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슴 아픈 시절의 영화죠.
저도 80학번이라.
그 시절은 그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