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의 계속)
4. Night Club
인간의 심리라는 것이 참으로 묘하다. 궁금할수록 더 가보고 싶고, 안 그런척 하면서도 한 발짝 한 발짝 자신도 모르게 빠져간다. 한때는 부산 남포동의 이름난 나이트클럽을 쓸고 다닌 경력이 있는지라 이곳은? 하는 그 놈의 호기심이 대가리를 들고 흔든다.
혼자서 이곳 최고라는 ‘Lido Night Club’을 구경하러 나섰다. 짧은 바지에 스립퍼에 보리짚 모자 차림, 이곳에서 외출복인 셈이다. 입장료 1나이라. 공짜나 마친가지다.
4인조 악단의 연주가 요란스럽게 큰소리로 울려댄다. 가운데 hall, 춤을 추는 곳은 그냥 하늘이 지붕이다. 우산(雨傘) 모양의 짚을 덮은 곳은 악단의 자리다. 역시 어둠의 편리함이 이곳에도 있다. 낮 같으면 들어오기가 꺼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홀 안이 그득하다. 차라리 흰 놈들이 이상하게 보인다. 대부분 뱃사람들일 것만 같은 백인이 수월찮게 있다. 요란한 Rock music에 맞추어 흔들어 댄다. 가지각색이다. 허리를 굽혀 땅에 떨어진 돈이라도 줍듯이 허둥대는 녀석, 높이가 세 치는 더 돼 보이는 두꺼운 굽의 구두를 신은 남녀의 그 구두 부딪는 소리하며, 어릴 때 본 경상도 문둥이들이 쓰던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정신없이 다리를 흔들어 대는 젊은 친구, 아마도 이 녀석은 이곳 사람인 듯도 하다. 짐승 가족 같은 조끼만 걸치고 그 굵고 우람한 팔뚝에 해마(海馬)의 문신을 새기고 솥뚜껑만한 발바닥, 그나마 맨발로 궁둥이를 지탱하며 흔드는 백인. 어느 외국선박의 선원이 분명하다. 바로 광란의 물결이다. 오직 하나의 질서가 있다면 어떻게 움직이던 한 박자에 한 번씩만 움직인다는 것이다. 유독스레 튀어나온 이곳 여인들의 히프(엉덩이), 그것이 마치 제 몸의 살이 아닌양 따로 움직인다. 요란스럽지도 않다. 어디를 어떻게 하는지는 몰라도 볼수록 신기하다. 늘씬한 키에 아마 가발을 쓴 듯한 검은 아가씨의 허리가 선정적일 만큼 잘 움직인다. 밤의 덕분으로 아름답게 뵈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아쉬워서 그런가. 담뱃불을 빌리는 척하고 닥아가서 본 얼굴에서는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다.
좀 전에 마신 맥주가 슬슬 신진대사를 일으키는가 보다. W.C에 가다. 어이구 이건 또 뭔가. 오줌누기가 민망타. 자기가 쏟아낸 것이 바로 발에 젖는다. 옆에서 쏴! 하기에 슬쩍보니 예의 그 우람한 체구의 팔에 문신한 백인이다. 그 물건(?)도 가당찮게 크다. 오줌이 철철 넘쳐 흐르는데도 맨발로 떡 버티고 서서 마치 소방차가 물 뿜어내듯 기운차게 쏟아낸다. 옆에 서 있는 내 것은 마치 어린애 고추 같다. 기 쥑이네!
200여 명은 족히 될 것 같다. 그 중에 짧은 바지를 입은 놈은 나하고 그놈 둘뿐이다. 조끼단추도 열린체로다. 가슴과 배에 텁수룩하고 붉그스름한 털은 마치 성난 불독처럼 무성하다. 이상하게 이 더운 지방에서 왜 짧은 바지를 입지 않을까? 대개가 통바지, 판타롱이다. 남자들이-. 아니면 아예 바지 대신 천 같을 것을 둘렀으니, Short Panty만 입은 내 자신이 쑥스러워지기도 한다. 마치 외눈박이 세상에 두 눈 가진 넘이 병신 같다는 것처럼….
몇몇 아가씨들이 저네 집에 가잔다. 하! 이런 것도 있었구나. 바야흐로 하늘의 별마져 잠들 시간, 자정을 넘어 2시경이다. 그러나 여긴 별도 잠 못 이뤄 눈을 뜨고 내려다 보는 듯하다. 아예 조용한 리듬은 없다. 런닝샤쓰에 맨발로 신나게 쳐대는 드러머가 악단의 리더인가보다. 그들도 미쳐있다. 악기만 메었고 자리만 다를 뿐 흔들고 뛰는 것은 마찬가지다. 정문의 수위도, 카운터의 맴버도 마찬가지다. 맥주를 날라 주면서도 발과 궁둥이는 쉬질 않고 실락거린다. 오직 부동(不動)의 인간은 하나, 금전등록기 앞에 앉은 뚱뚱한 중년의 검은 여인. 그만은 이 물결에 휩싸이지 않고 꼭꼭 돈만을 받아 챙기고 계산을 한다.
두 아가씨의 청을 거절하고 혼자 있으니 Waiter가 저쪽 테이불에서 누가 찾는다고 귀뜀한다. 돌아보니, 어라! 점잖은 아가씨 같다, 연초록색의 긴 드레스에다 긴 머리카락이다. 목걸이도, 귀걸이도 하고, 혼자란다. 내가 필요하면 이쪽으로 오랬더니 왔다. 단도 직입적이다. 역시 자기 집에 가자고 한다. 5$면 된단다.
애라! 한번 가보자. 이왕 나선 몸. 따라 나섰다. 밖에는 부산에서도 몇 대 없다는 독일산 Benz가 기다린다. 부잣집 자가용 운전수들이 야간에 주인이 잠든 사이 몰래 아르바이트 하는 모양이다. 그리 멀지 않는 곳, 길다란 연립주택 중간쯤에 선다. 자기집이랬다. 문을 노크하니 안에서 문을 따준다. 어어? 두 머슴애가 자다 일어난다. 방금 문을 연 녀석은 여나믄 살은 됨직하다. 단간방이다.
구석에 침대가 있고 냉장고 하나 전축하나 응접의자 두어 개, 바닥에 애들이 그냥 잔다. 작은 놈은 파우다인듯한 하얀 가루를 칠했으니 더욱 이상하게 뵌다. 벽에는 아름다운 백인여자의 나체 사진들이 꽉 차게 걸려있다. 역시 어둠이기에 다행이란 생각이 들지만 어딘가 역겨움이 오른다. 긴 머리카락의 가발을 벗고 옷을 갈아입는 그녀의 뒷모습과 얘들의 눈동자가 클로스업된다. 얘들에게 그냥 자라고 한다.
큰 녀석이 심술궂게 힐끗 쳐다본다. ‘뭘 봐 임마’ 나 혼자의 중얼거림이었지만, 공자님이 노한 모습으로 꾸짓는 듯 한 소리를 들었다. 마신 술이 올라온다.
얼른 5$를 주고 문을 나섰다. 길거리의 밤 공기가 한결 시원하게 속을 식혀준다.
“왜 가는냐?”고, 따라 나와서 “돈을 주고 그냥가면 되느냐?”고 한다. 우거지상이다. 막무가네다. 기어이 뿌리치고 큰길까지 나오는데 족히 10분은 걸렸다. 받은 것은 고사하고 더 뺏어 가지 않은 것만도 오히려 다행인 일이었다. 아직은 순박함이 살아있다는 것인가.
술이 나빴는가 골치가 팅하고 아파온다. 곧 날이 새려나 보다. 한참 걸어 택시를 잡았다. 여기서도 치열한 삶의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입안이 쓰고 목이 메케했다. 목이 말라도 어쩔 수가 없다. 귀선(歸船)! 역시 내가 이 길을 걷는 한 그것은 곧 귀향(歸鄕)과 같은 아늑한 보금자리임을 확인한다.
5. 별난 방문객
낮시간 멀끔하게 정장차림의 신사가 선장을 찾는다고 하면서 경비가 데려왔다. 누구냐니까 이곳 Harbor Master Office(항만청)에 있단다. 또 뭘 하나 얻으러 왔나보다 짐작했다.
조그마한 명분만 있으면 정박중인 선박에 올라와 뭐 하나 달라고 하는 것이 상례(常例)였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
“당신 머리가 아주 까맣고 좋은데 무얼 쓰느냐?” 희한한 사람이고 질문이다.
“보통 비누를 쓰지.”
“보여줄 수 있나?” Lome에서 산 Lux 비누 쓰던 것을 보여 주었다.
이게 무슨 비누냐고 묻고는, 냄새를 맡아보고 만져보고 손으로 문질러 보고 별 수작을 다하곤 고개를 갸웃한다.
“당신 머리 한 번 만져볼 수 있오?” 했더니 쑥 내민다.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어진다. 머리카락을 당겨본다. 20여 센티나 된다. 그런데 그게 어찌 그리 말렸는가. 오뉴월 땡볕에 국수가락 말리듯이 탱탱 말렸다. 이것을 뻗쳐 땋자면 얼마나 힘이 들고 정성이 들까 싶은 생각이 든다. 대리점 아가씨의 머리가 마치 성게처럼 땋아 묶어둔 것이 새삼 떠오른다. 만약 그 비누 때문에 머리가 그러니 한번 써보라고 했으면 하루 열두 번도 더 감을성 싶다. 아무래도 비누 하나 얻으러 왔나 싶어 하나 줄까 했더니 괜찮다며 고맙다고 인사만 하고 간다. 하나 주면 두 개를 달라고 하는 것이 정해진 코스인데….
“?”. 별놈 다 있다. 아니다. 아마도 그가 돌지 않았으면 내가 잠시 바보가 된 게 틀림없을 상 싶었다.
6. 자전거 산책
일요일이다. 오전에 작업 인부의 자전거를 하나 빌렸다. 담배 한 갑을 주니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타고 가란다. 지금 달려 있는 것에서 한 개라도 없으면 자전거 행세를 하지 못할 것 같은 것이다. 바지가 짧아 앞에서 그 놈이 보일 것 같지만 그대로 양말만 신고 나섰다. 1시간 반가량 부근을 돌았다. 미니골프장, NaNa 대학도 있다. 여자대학인 모양이다. 기숙사 밖에서 쉬는 학생들의 복장이 똑같다. 구내 평상복도 통일되어 있나보다.
약간 큰 간선도로 이외의 비포장 길이 험하다. 내 눈에 그들이 신기하듯이 그들 눈에는 내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백인같이 머리가 노랗고 코도 키도 크며 흰빛이 아니고, 그렇다고 저들같이 탱탱 말린 곱슬머리에 그리 검지도 희지도 않으니 말이다. 길 바닥 위에 닭, 염소, 쥐, 개 등이 차에 치어 죽은 채로 두었거나 어떤 것은 몇 번이고 차에 깔려 말라붙었다. 영 기분이 역겹다. 또 어떤 곳은 지금도 한창 집들을 짓고 있다. 잘 사는 흑인들은 멋있게 산다. 산뜻한 집, 날씬한 자가용, 그러나 그 곁에는 마치 우리의 옛 농촌에서 본 단간짜리 오막살이 같은 토담집이 이어져 있기도 하다.
공회당(公會堂)에서 거행되는 결혼식도 보았다. 그 더위에 겹겹이 검은 양복으로 정장한 신랑과 그의 친지 가족들이 안타까우리 만큼 땀을 흘린다. 가발에, 흰드레스, 꽃을 안은 검은 신부, 그 앞에 노랑 원피스를 입은 4명의 꼬마 여자애들이 역시 노랑 상자를 메고 있다. 들러리인가보다. 또 한쪽엔 신랑 신부와 둘러리 2명뿐인 결혼식도 뵌다. 역시 신부는 유난히 큰 가발을 섰다.
일요일의 교회도 각양각색이다. 목사 같지 않은 차림의 목사가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는 뒷편 좌석엔 엎드려 자는 여인이며, 뒤를 돌아보고 앉아서 구경하는 나를 보고 윙크를 하는 여자도 있다. 나 때문인가 싶어 쉬이 그 자리를 떴다.
한 가지 의심스러운 것은 이들의 생활수준이나 사회적 · 경제적 기반으로 봤을 때 어떻게 그렇게 많은 젊은 사람들이 운전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영국 식민지 시절의 영향이 아닌가 싶었다. 이미 두어 해 전에 일본이나 대만에서도 같은 것을 보고 자동차 운전이 선택이 아닌 필수과목이 될 것이니 이것만은 빨리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국민소득과 자동차 값이 맞먹을 때 ‘My Car’ 붐이 일고, 그 절반이 될 때는 평균화된다는 어느 경제학자의 학설을 기억했다. 어쩌면 우리에겐 요원한 것도 같았지만 실지로 내 자신이 이로부터 불과 수년 후에 차를 갖게 되었다.
첫댓글 아프리카를 여행간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
.
늑점이님으로 인해 호기심을 가지고 읽게 되네요.
<걸어서 세계속으로>에서도 볼 수 없는 상황을 읽게 되었습니다.
비슷하기는 커녕 너무도 다른 이방인. 어쩜 무섭기도 한 이방인이잖아요.
겁도 없이 어슬렁 어슬렁 쏘다녔다니 늑점이답습니다요.ㅋㅋㅋ
시간 내어 이국의 모습을 담아 올려 주시느라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재미난 글을 잘 읽었습니다. 세계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좋은 경험을 하신 서 선배님 부럽습니다.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