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시리즈.
"마지막 때와 심판에 대한 경고",
성경본문 "사 5:20"
2) 악을 선하다 하는 자 - 선악이 뒤바뀐 자리에서
이사야 5장 20절
5:20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몇 해 전,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옆에서 어르신 두 분이 나누시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 분이 이러셨습니다.
"요즘은 뭐가 옳고 그른지도 헷갈려요. 젊었을 때는 다 분명했는데."
저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뜨끔했습니다.
이사야서 5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 한 구절 안에 세 쌍의 반대말이 뒤집혀 있습니다.
선과 악, 어둠과 빛, 쓴 것과 단 것.
삶의 가장 기본적인 방향 감각이 통째로 뒤집힌 사람들에게 임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화 있을진저"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호이(הוֹי)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장례식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터져 나오는 애곡 소리였습니다.
"아이고" 하는 탄식이 법정의 판결문처럼 굳어진 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사야는 지금 판사처럼 선고하면서 동시에 상주처럼 울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장 전체에는 이 호이가 여섯 번 나옵니다.
땅을 탐하는 자에게, 술에 취해 하루를 허비하는 자에게, 죄를 수레 끄는 줄로 끌어당기는 자에게,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선악을 뒤바꾸는 자에게.
이건 어느 특정한 죄 하나가 아니라, 한 사회 전체의 도덕적 감각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여섯 장면으로 찍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원래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이방 나라,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앞 1절부터 7절까지, 하나님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성껏 가꾼 포도원에 비유하십니다.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
그러니까 5장 20절의 "화 있을진저"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한 손가락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예배드리던 사람들, 절기를 지키던 사람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저는 이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자꾸 "세상이 왜 이렇게 됐나" 하고 밖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본문은 정확히 그 반대 방향, 예배당 안쪽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선을 악하다, 악을 선하다" 하는 이 일이 어디서 처음 시작되었을까요.
저는 이것이 창세기 3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생각합니다.
에덴동산 한가운데 있던 나무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히브리어로 에츠 하다아트 토브 바라(עֵץ הַדַּעַת טוֹב וָרָע), 직역하면 "좋고 나쁜 것을 아는 나무"입니다.
사람이 그 열매를 먹은 것은 단순히 규칙 하나를 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 좋고(토브, טוֹב) 무엇이 나쁜지(라아, רַע)는 내가 정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보시고 "좋았더라" 하고 판단하시는 분이셨는데,
3장에서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으려 한 것입니다.
이사야 5장 20절은 바로 그 옛날의 반역이,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몇백 년이 지나 다시 무르익은 모습입니다.
처음엔 작은 타협이었다가, 나중엔 아예 기준 자체가 뒤집혀 버린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선악이 뒤바뀌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엔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시작합니다.
자녀에게 신앙보다 성적이 먼저라고 은근히 가르치면서도, 그것을 "지혜로운 부모"라고 스스로 부릅니다.
형제자매 사이의 다툼에서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면서,
그것을 "믿음의 확신"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오히려 이런 뒤바뀜이 더 조용하고 능숙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어에 익숙합니다.
죄를 신앙의 언어로 포장하는 법도, 어느새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그저 두려워하며 살아야 합니까.
여기서 복음이 등장합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정확하게 선을 악하다고 불린 사건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십자가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을 두고
"이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선하신 분이, 가장 확고하게 "악하다"는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이사야서는 뒤로 가면서 이 예언까지 품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그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선악을 뒤바꾸는 우리의 병이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까지 이르렀다는 것,
이것이 이사야 5장 20절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자리입니다.
여기서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다가 받은 심판과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저주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유다는 자신의 죄로 인해 앗수르의 침략이라는 역사적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 선을 악하다 부르고 악을 선하다 불렀던 바로 그 죄 때문에,
갈라디아서 3장 13절의 말씀처럼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가 되어 우리 대신 그 화(禍)를 짊어지셨습니다.
유다에게 임한 화는 죄의 결과였지만, 그리스도께 임한 화는 사랑의 선택이었습니다.
우리가 뒤집어 놓은 선악의 자리를, 그분이 대신 심판받으심으로 바로잡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입니다.
우리의 분별력이 좋아져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새로운 분별력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순서를 눈여겨보십시오.
먼저 마음이 새로워지고, 그다음에 분별이 따라옵니다.
우리가 애써서 선악을 다시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마음을 새롭게 하실 때 저절로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뒤집힌 기준을 바로잡을 힘을 낼 수 있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먼저 우리 안에서 그 뒤집힘을 보게 하시고 돌이킬 마음까지 주시기에 회개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번 주,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크게 결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작게, 오늘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첫째, 이번 한 주 동안 "이건 괜찮아"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던 순간을 하루에 한 가지씩 적어보시기 바랍니다.
적으면서 물어보십시오. "이게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인가, 아니면 내가 편해서 좋다고 이름 붙인 것인가."
둘째, 데살로니가전서 5장 21절의 말씀,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는 말씀을 이번 주 묵상 구절로 삼아보십시오.
판단하는 훈련이 아니라, 분별해달라고 기도하는 훈련입니다.
셋째, 가정이나 소그룹에서 최근에 겪은 갈등 하나를 떠올려 보시고, 그 갈등 속에서 내가 "선하다"고 여겼던 나의 태도가 정말 선한 것이었는지, 조용히 한 사람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판단은 종종 우리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자리에서 가장 쉽게 뒤집힙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이사야 5장 20절은 세상을 향한 손가락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거울입니다.
그 거울 앞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 조용히 자라온 선악의 뒤바뀜을 봅니다.
그러나 그 거울 옆에는 또 하나의 장면이 함께 걸려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선하신 분이 가장 악한 자로 심판받으신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뒤집었던 그 자리를, 그분이 대신 바로 서심으로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두려움에 떠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하시는 그 은혜를 따라 매일 다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선악을 뒤집던 우리의 눈을, 십자가에서 대신 저주받으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열어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