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밤하늘에 떠있는 무수한 별만큼이나 많은 인총 중 나는 누구일까? 이 질문은 특별한 뉘앙스를 가지지 않는다. 가을 밤 선선한 바람을 쐬며 다정한 사람과 안마당 침상에 누워 있거나, 한 여름 열대야를 피해 강가 둔치에 나와 고개를 들었을 때, 창공에서 반짝이는 무수한 별을 보면 문득 떠오를 수 있는 의문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향해 던질 수 있는 이 의문은, 왕성한 활동기를 지나 사회나 가정에서 역할이 줄어들고, 세상으로부터 서서히 잊혀져갈 때에 문득 찾아온다. 이 시기에 사람은 미래의 예측보다 회상에 집착하게 된다. 살날이 급격히 줄어들수록 더욱 그렇다. 회상은 종종 회한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인생이 기쁨과 환희보다 씁쓸함과 아픔이 우세하기 때문인가 보다. 외향적인 사람은 인생을 덜 비관적으로 보겠지만, 말년이 다가오면 누구나 회한과 서글픔에 빠지고 허무함에 마찬가지로 휩싸인다.
젊은이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노년의 매일매일은 큰 변화가 없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지 않고, 내일은 오늘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신비함도 없고 모험도 없다. 계절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도 마찬가지다. 매일을 독자가 책장을 한 장씩 넘기듯 살아간다. 젊은 시절 읽고 읽어도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두툼한 책은, 어느새 말미가 가까워진다. 남은 페이지는 적은 데 주제를 찾지 못한 독자는 답답해한다. 독자는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을 생각을 한다. 다시 정독할 수 있다. 인쇄된 책을 읽는 독자와 달리, 주제를 찾지 못했다고 처음 페이지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책이다.
인생의 책은 일독만 허락된다. 그게 운명이다. 일독으로 답을 얻지 못했어도 어찌 할 방법이 없다. 한번 듣고 답을 찾아야하는 토익 리스닝 시험과도 같다. 다른 점은 토익 리스닝은 답을 모를 때, 선택지 중 한 개를 찍을 수 있다. 인생에 찍기란 없다. 치열하게 살아오지 못한 자신을 탓할 수 있지만 개선할 시간은 부족하다. 준비가 부족한대로 세상과의 하직을 준비해야 한다. 무의미하게 세상을 떠나는 것이 죽기보다 싫다고 살아온 과정을 천착하며, 헛되지 않은 삶임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노력해 볼 수 있지만, 그것은 무용하다.
그러나 밤하늘 높은 창공에 떠 있다가, 아침이 오면 스러지는 이름 없는 별과도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마감하기에 인생이 너무 아깝다. 특별한 이름을 가진 별이 아니어도, 기억할 만한 것을 남긴 별이 되고 싶은 소망은 버릴 수 없다. 소망을 이루지 못하면, 우리는 우연히 이 세상에 왔다가 의미 없이 세상을 떠나는 존재가 됨을 피할 수 없다. 유의미한 죽음은 없을까?
왜 하필 내 어머니는 내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을까? 어머니도 아버지도 각각 많은 선택지가 있었을 텐데, 굳이 그 둘이 결합하여 우리가 태어나게 하였을까? 의문이 생긴다. 의미 있는 인생을 만들기 위한 의심이다. 혹시 우리는 오묘한 삼라만상의 원리에 의해 세상에 출현하도록 태초에 계획되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에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도, 내가 왜 여기 지구에 왔어야 하는지, 내가 오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를 알려줄 사람은 없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답은 스스로 찾아야한다. 탐구가 인생이라고 하지 않던가.
내가 나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는 언제나 어머니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어머니는 스무 살에 나를 낳았다. 슬하에 두 자녀가 더 있다. 아버지를 피난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평탄치 않은 인생을 살다 2023년 88세에 요양병원에서 입원 중 코로나 감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출생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35년 포천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개성과 포천을 오가며 살다, 1.4 후퇴 시 고향에, 외할아버지와 외고모를 남겨두고, 두 살 어린 여동생과 먼 친척이 사는 이천을 향하여 피난길에 올랐다. 우연을 생성하는 과정의 시초이다. 의정부 고개를 넘다 미군 비행기의 오폭의 혼란 속에서 서로 헤어졌다. 동생을 찾아 헤매다 피난 행렬을 놓치고 혼자 남하했다. 종로거리에서 인민군에게 납치되어 경복궁으로 끌려가 간호병교육을 받았다. 1.2주 기간의 교육을 받고 인민군 전투부대에 배속되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여, 야간에 동료 한명과 탈출을 시도했다. 경복궁 광장의 담을 따라 설치된 하수구로 숨어들어 하룻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밤 하수구를 통해서 담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동료와 헤어져서 야음을 타 한강변에 다다르고, 얼음이 꽁꽁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낮에는 인가에 숨어들며 이틀 밤을 걸어, 당시는 경기도 시흥군인 지금의 광명시 소재의 조그만 마을에 도착하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에 이천으로 향하던 발길이 빗나가 그곳에 이르러, 제법 큰 집의 대문을 두들기고, 문을 연, 훗날의 나의 할아버지에게 한 끼의 식사와 하룻밤을 구걸하였다. 할아버지 앞에 나타난 만 15세의 키 작고 뚱뚱한 젊은 여자가, 머리에 쓰고 있는 한쪽 귀퉁이가 날아간 털모자를 벗자, 머리는 미친 사람처럼 산발이고, 흰색 무명 치마저고리는 시궁창에서 막 나온 것처럼 땟국에 절어 있었다. 헝겊쪼가리로 감싼 손발은 얼어서 퉁퉁 부어 있고, 얼굴은 시꺼먼 숯검정을 일부러 쳐 바른 듯 더럽고 파랗게 얼어붙어 있었다. 해명할 필요도 없이 한눈에 피난민임을 직감한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가엾이 여겨 집안으로 들였다. 보리밥 한 그릇을 따뜻한 물에 말고, 짠지 한 조각을 밥에 얹어 주었다. 게 눈 감추듯 허기진 배를 채운 어머니는 할아버지 집 따뜻한 아랫목에서 할아버지 내외와 밤을 보낸 인연으로, 이천으로 향하던 발길을 중지하고 그 집에 눌러 살며 할아버지 내외의 시중을 들었다. 기구한 우연의 중간 정착지다.
보름쯤 지났을 때, 인민군 부역에 끌려갔던 할아버지의 아들이, 야반도주하여 귀가하였다. 아내와 갓난아이 하나와 세 살배기 아이를 뒤에 두고 그가 부역나간 사이, 병으로 죽은 아이의 매장을 도운 남자를 따라 그의 아내는 집을 나갔다. 부역나간 남편의 생환은 불가능해 보였으니 그녀를 탓할 수 없다. 그는 자연스레 홀아비가 된 것이다. 다음의 우연한 인연이 준비되는 과정이다. 그 해 겨울이 지나고 한국군이 서울을 수복하였을 때, 할아버지의 주선에 의하여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우연한 사건의 연속으로 어머니의 인생이 중반전을 맞이한 것이다.
어머니에게 연달아 일어난 우연한 사건 사고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각 에피소드는 개별적으로 우연히 일어난 우연으로 생각하여야 할까? 어머니가 연로한 외할아버지와 외고모를 떠나 피난길에 오르지 않았다면, 의정부에서 여동생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종로에서 인민군에 납치되어 경복궁에 잡혀가지 않았다면, 간호병 교육 중 하수구로 탈출하지 않았다면, 방향을 잃지 않아 광명으로 향하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전처가 집을 나가지 않았다면, 어머니의 인생을 달라졌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일은 없었다. 각 경우의 수가 우연히 한 점에 수렴되어 한 인간이 태어났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각 경우의 수 중 하나라도 다른 방향으로 틀어졌다면, 일어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적이 일어나는 패턴이다. 이러한 기적 같은 우연을 말 그대로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
험난한 전쟁 통에 서 험난한 사건 사고를 겪는 특별한 경우를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우리들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연유는, 각각 우연한 사건의 연속적 결과물이다. 그들의 인생에 관여한 미세한 매개물 또는 사건이, 다른 각도에서 작용했다면, 그들, 즉 우리는 지구인의 일원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개개의 사람의 존재가 우연과 우연이 겹치면서 생성된 것이라면 그것을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무리한 면이 있다. 필연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우연을 가장한 계획된 법칙에 의해, 일련의 과정이 이행된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에 이르게 된다.
계획된 구도 속에 우리가 지구인의 일원이 된 것이라면, 출발이 그런 것처럼 종말이 우연한 형태로 마감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설사 우리의 태생이 우연이라 할지라도 각각의 인생의 주인인 우리 자신은, 우리의 종결이 의미 없이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유의미한 종결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인가를 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으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찾기는 쉽지 않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다. 마지막 페이지가 가까운데 인생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인생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내 인생이 허무하게 회한 속에 끝나서는 아니 되는데, 나의 오늘은 어제와 같은 오늘이 되고, 내일도 오늘과 같이 의미 없이 지나갈 것 같다는 불안이 엄습한다.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내 어머니가 그러하듯, 내가 훗날 내 자손에게 남길 말은, 어머니가 남긴 것과 같은 한마디에 불과할 것이라는 우려를 떨칠 수 없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치매증상을 보였다. 했던 말을 반복하고, 그 말을 잊어버리는 치매초기에 나타나는 완연한 증상을 보였다. 무언가 말을 남겨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는지 말이 많아졌지만, 평소의 비교적 조리 있던 말솜씨는 사라졌다. 치매병변을 일으킨 뇌가 혀를 둔화시킨 탓이리라. 불행 중 다행으로 마지막 순간에 명료한 의식이 돌아왔다. 중요한 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고뇌의 순간이었다. 파란만장한 삶의 대단원을 유의미하게 마감하기 위하여, 갈고 닦은, 의미심장한 88년의 삶의 진수가 요약된 한마디를 하여야 한다는 부담이 가중되는 모습이었다. 마침내 어머니는 그 말을 찾아낸 듯 보였다. “아들아 미안해!” 서두를 꺼냈다. 한동안 의미심장한 침묵이 흘렀다. 끝내 부언(附言)은 없었다. 무엇을 미안해하는 것일까? 명언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실망은 작지 않았다. 더할 말은 없었던 것일까? 궁리해보았지만 해답을 찾지 못했는데 조종이 울렸다. 그 때, 밝아오는 여명의 노란 빛살이 동창으로 비스듬히 스며들고, 창공중의 뭇별 하나가 스러져 갔다, 우연히 거기 있었던 것인지, 거기 있기로 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별 하나가.
강준건 (2024. 10월 파랑새장산백일장 장려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