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락사(安樂死)에 관한 논의
가. 안락사 문제
안락사(安樂死)의 영어 표현인 'Euthanasia'는 고통 없이 잠자듯 죽는다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에 "환자가 요구해도 어느 누구에도 죽음의 약을 주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자문에도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이 있다. '자비로운 살인'은 고대 그리스 때부터 있었던 것 같다. 스파르타에서는 기형아나 건강치 못한 아기가 태어날 때 안락사 시키는 관습이 있었다고 {플루타크 영웅전}은 전한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이기는 방안으로 자살을 권고했다. "신(神)의 뜻을 거역한다"는 종교계의 반대에 아랑곳없이 베이컨, 흄, 칸트 등 굴지의 철학자들이 이 안락사를 두둔했다.
안락사는 지금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살인에 버금가는 범죄 행위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 법적 규제는 날로 흔들리고 있다. 네델란드에서는 94년에 1천4백36명이 안락사를 당했다. 91년의 5백91명에서 92년과 93년에 각 1천3백여 명으로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기술적으로는 합법은 아니지만 엄격한 수칙에 따라 안락사 시킬 경우 법률적으로 문제를 삼지 않기 때문이다.
안락사에 관한 의학 윤리 논쟁은 '히포크라테스의 딜레마'로 불린다. 이 선서는 환자에게 '고통으로부터의 구제'와 '생명의 지탱과 보호'라는 두 가지를 동시에 약속한다. 불치의 병 막바지 단계에 고통이 극심해지면서 딜레마에 부닥친다. 생명의 연장은 '고통의 구제' 약속에 위배되고 고통의 구제를 위한 안락사는 '생명의 지탱과 보호' 약속에 위배된다. 해결 방안으로 실존철학자들은 '자살의 정당성'과 '죽음의 권리'를 들고 나왔다. 그 사회적 실험장이 네덜란드다. 네덜란드 왕립의학협회는 최근 안락사 허용에 관한 새 준칙을 공포했다. 첫째가 자발성이다. 환자의 자유 의지가 절대 요건이며 어떠한 외부 압력도 작용해서는 안 된다. 환자의 의지는 확고해야 하며 죽음 이외의 대안(代案)도 주지되어야 한다. 또 고통은 견디기 어렵고 구제받기 어려운 수준임이 객관적으로 인정되어야 하며 다른 의사의 제2 소견도 곁들여야 한다. '죽음의 약'은 환자가 스스로 먹고 의사의 주사나 투입은 스스로 약을 삼킬 수 없는 상태에 한한다는 내용이다.
네덜란드는 국제 사회에서 '고우더치(go Dutch)'로 유명하다. 식사 때 각자가 자기 먹은 것을 내는 속칭 '더치 페이'다. 안락사의 '더치 룰(Dutch Rules)'이 또 하나의 국제 '특허'로 통용될지도 모를 일이다. (중앙일보 95년 9월 12일자)
나. 안락사에 대한 사전적 정의
안락사(安樂死: euthanasia)
죽음이 절박한 병자가 고통이 심할 때에 그 고통을 제거하여 안락하게 죽게 하는 일. 안사술(安死術)이라고도 한다. 안락사에는 자연의 사기(死期)를 앞당기지 않는 경우와 앞당기는 경우가 있다. 특히 후자에 대해서는 고래(古來)로 종교 도덕 법률 등의 입장에서 당부(當否)가 논쟁되어 왔다. 또 문학 작품 중에도 자주 등장하여 T 모어의 <유토피아>와 마르탱 뒤가르의 <티보가의 사람들>에도 나타나 있다.
자연의 사기를 앞당기는 안락사에 대해서는 그것이 살인죄 또는 촉탁살인죄의 범죄를 구성하는지 어떤지가 논쟁되고 있다. ① 사기(死期)가 확실히 절박할 때, ② 심한 육체적 고통 때문에 죽음 이외에는 그 고통을 제거할 방법이 없을 때, ③ 본인의 참뜻에 의한 동기가 있을 때, ④ 방법이 부적당할 때 등을 조건으로 하여 범죄의 성립을 부정하는 입장과, 형은 가볍게 하더라도 범죄는 성립한다는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법원에서의 판례(判例)의 입장은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동아세계대백과사전 604쪽
안락사(安樂死: euthanasia)
자비로운 살인(mercy killing)이라고도 함. 고통스러운 불치병이나 신체질환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고통없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나 처지. 대부분의 법적 체계에는 이에 대한 특별한 조항이 없기 때문에 환자 자신에 의해 행해진 경우는 자살로, 타인에 의한 경우는 타살로 간주된다. 그러나 의사는 고통이 매우 심한 경우에는 생명을 연장시키지 않도록 합법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즉 환자의 수명을 단축시킬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약제를 투여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에 여러 유럽 국가들은 안락사로 기소된 경우에 관대한 처벌과 정상을 참작한다는 특별한 조항을 형법에 두고 있다.
안락사가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는 견해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스토아 학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통적인 크리스트교 신앙에서는 살인을 금지하는 6번째 계명에 위배되기 때문에 이를 반대한다. 안락사를 합법화하기 위한 조직적인 운동은 영국에서 1935년 C. K 밀라드가 후에 안락사협회로 불렸던 <안락사 합법화를 위한 자발적인 모임>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이 모임의 법안은 1936년 미국 상원에서 부결되었으며, 1950년 같은 논제에 대해 상원에서 재차 제안되었다. 미국에서는 1938년 미국안락사협회가 설립되었다. 현대의학이 점차 기술적 수단을 동원하여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게 되자, 특히 환자가 선택을 할 수 없는 경우에 극단적인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당하고 있는 환자의 가족과 주치의가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수동적으로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거나 생명을 보조 해주는 기구들을 제거하면 의사들은 범죄행위로 고소를 당했고, 반면에 의식이 없는 분명한 말기 환자의 가족들은 생명 유지를 위한 특별한 기구들의 사용을 중단시키게 만드는 의학제도에 반대하여 법적인 행동을 시작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안락사는 일부 의료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법의 해석 및 윤리, 종교상 견지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안고 있는 실정이다.
한글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497쪽
다. 직접적인 안락사와 간접적인 안락사
1) 직접적인 안락사
많은 사람들은 안락사를 용인하게 되면 수많은 사회적 혼란과 비도덕적인 관행이 야기되지 않을까를 두려워하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논의를 임신중절에 관한 논의의 부산물로 간주하기도 한다. 즉 달갑지 않은 어린아이를 출생 전에 제거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생산 능력이 없는 달답지 않은 노인이나 환자들을 죽이는 것을 금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직접적인 안락사는 그 환자의 요청 여부와는 상관없이 항상 나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신이 창조주이므로 신만이 생명과 죽음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가지며, 인간은 이 세상에서 어는 정도의 책임감을 갖고는 있지만,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인간의 지배가 생명을 죽이는 데까지 확장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간섭에 의해 사람을 죽이는 것에 반대하는 도덕적인 여론은 항상 있어 왔고, 또한 이는 대학살 ― 이는 결코 또다시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 에 대한 쓰라린 기억에 의해 지지되어 왔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직접적인 안락사를 허용하면 남용의 가능성이 너무 크다고 두려워한다. 즉 만약 오늘 소생할 희망이 없는 어떤 고통받는 환자를 구원해 주기 위해 그를 죽인다면, 이는 후에 어떤 사람이 귀찮고 '쓸모없는' 인간을 죽이는 것을 허용하는 선례로 사용되어질 것이다. 게다가 직접적인 안락사에 반대하는 논증의 근거를 생명의 존엄성과 무고한 자의 살인 금지라는 전통에서 찾는 많은 종교적인 증거들도 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환자를 위해 다른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직접적인 안락사는 살인이므로 윤리적 법적으로 모두 금지되어야 한다고 단순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자비로운 살인자에 대한 그 어떤 고발도 성공한 적이 없다 해도 이들은 모두 옳다.
마지막으로 환자 이외의 다른 사람에 의한 직접적인 안락사가 허용된다면, 이러한 역할의 담당자는 담당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죽이는 것이 아니라 치료하는 것을 의사의 소명으로 여겨온 의료 전문인의 전통에 어긋난다. 만약 이렇게 되면, 환자와 의사의 관계에 있어서 신뢰라는 중요한 요소에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다시 말해 중병을 알고 있는 환자는 의사가 직접적인 안락사를 도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 의사로부터 치료받기를 거부할 것이다.
다른 한편 직접적인 안락사를 찬성하는 논증들도 몇 가지 있다. 만약 어떤 환자가 불치의 병으로 고통받고 있다며, 그의 죽음은 어차피 불가피한 것인데, 왜 나중에 죽는 것보다 지금 죽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단 말인가? 즉 환자의 고통이 심하거나 환자가 회복될 수 없는 혼수 상태에 빠져 있고, 고통을 진정시키는 약을 사용하는 것 이외의 어떤 치료 방법도 없을 때, 왜 그 고통과 비참함을 종식시킬 수 없는가? 이러한 상황에서는 환자의 가족도 고려되어야 한다. 불치의 병과 그 질병의 치료는 개인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야기시키고, 그 가족에게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가져다 준다. 즉 친척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소생을 희망할 수도 없고, 또 그에게 도움이 되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 자신도 죽어가는 사람이 받아 온 만큼의 고통과 괴로움을 느낄 것이다. 또한 의료 행위의 비용이 하늘을 치솟을 만큼 엄청나기 때문에 그 환자의 가정과 재산이 파괴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가족 구성원에 대한 고려는 공정성과 정의의 문제를 야기하는 때문에 무시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체적 삶 그 자체는 최고의 선이 아니라고 진지하게 논의되기도 한다. 오히려 신체적 삶은 사랑, 우정, 사회화 등과 같은 모든 가치를 구현해 주는 선결 조건이 될 때에 한해서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직접적인 안락사는 그 환자의 상황이 중요한 인간적인 가치의 성취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정당화된다.
2) 간접적인 안락사
치료 행위를 거부하거나 이미 시작된 치료를 중단하면 또 다른 문제들이 생겨난다. 간접적인 혹은 소극적인 안락사로 알려진 이러한 행위를 대부분의 사람들과 종교적인 가르침은 용인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정당화는, 우리는 단지 일상 치료 수단을 사용할 도덕적인 의무가 있으며 또한 특수 치료 수단의 사용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전통적인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수 치료 수단이란, 환자나 그 밖의 관련된 다른 사람에게 지나친 비용이나 고통 혹은 다른 불편함을 야기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도 사용될 수도 없거나, 아니면 설사 사용된다 해도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효과를 얻을 수 없는 약, 치료, 수술 등을 말한다.
적절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즉 방광염으로 죽어가고 있는 7살 난 소년을 생각해 보자. 기적이 없는 한, 이 아이는 단지 몇 달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담당 의료진들은 말한다. 2주일 전에 이 소년은 심한 호흡 장애를 일으키면서 이 병원을 찾아 왔다. 그리고 지난 6개월 동안 그러한 장애를 다섯 번이나 겪었다. 이 소년은 지난 2년 동안 병원을 드나들었다. 그의 병세는 기관지 감염, 폐농양, 전반적인 염분 고갈증 등의 합병증에 의해 더욱 악화되어서, 그에게 페니실린 요법과 정맥 주사에 의한 염수 보충이라는 처방이 내려졌다. 게다가 기종과 기관지 폐렴이 이 소년의 병세를 급속하게 악화시키고 있다. 이 소년의 담당 의료진은,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때때로 희망을 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기관지경 검사법을 그 소년의 사람은 어떻게 죽어 가는가
T.샤논/J.디지아코모 지음, 황경식/김상득 옮김
생의윤리학이란 서광사, 1988
라. 미국에서의 안락사 논쟁
1) "말기 환자에 극약 처방권" 입법 美서 또 안락사 논쟁
오리건주 「의료법16조」 통과
치료 포기 수단 남용 소지, 연방 법원에 위헌 청구소 제기/반대
암암리에 성행 양성화 바람직, 투약 여부는 환자에 맡겨/찬성
미국에 안락사 논쟁이 또다시 불붙고 있다.
미 오리건주는 지난 8일 주민투표를 통해 치유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의사가 극약 처방을 해주는 것을 허용하는 주 의료법 제16조(Measure 16)를 통과시켰다.
오는 12월8일부터 시행될 예정인 이 법에 대해 오리건주 당국은 말기 환자에 대한 의사의 극약 처방권만 인정하고 실제 투약여부는 환자 스스로에게 맡기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안락사 허용과는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다.
제16조의 시행규칙에는 의사의 극약처방을 위해서는 환자가 6개월 이상 살 수 없다는 2명 이상의 의사 진단서와 환자 자신의 처방요구서를 반드시 첨부하도록 하고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격렬히 비난하고 있고 미 카톨릭 주교단도 미국내에 있는 1천2백개 카톨릭 병원에 대해 의사의 자살방조 행위를 철저히 규제하라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미국내의 의사와 시민들로 구성된 많은 단체들도 이 조항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으며 오리건주의 일부 의사들은 24일 미연방법원에 위헌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반대론자들은 위헌심사 청구 이유서에서 『제16조가 의사로 하여금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환자의 자살을 도울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환자에 대한 치료 포기수단으로 남용될 소지를 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이 조항은 오리건주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만 시행하도록 규정돼있으나 고통에 시달리는 시한부 환자들이 합법적인 자살을 위해 미 전역에서 오리건주로 몰려들 우려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내 많은 의료인 단체들도 『16조 규정대로 환자의 연명기간이 6개월밖에 남지않았다는 객관적인 판정을 내리기가 어려우며 환자의 투병의지 여하에 따라 이따금씩 일어나는 기적적인 치유현상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며 반대론에 가세하고 있다.
오리건 주당국과 제16조를 입안한 호스피스 전문의들은 『의사에게 자살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구하는 말기환자가 전체의 2%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대론자들이 주장하는 부작용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국내 진보적인 성향의 의사들은 『절망적인 환자들에 대한 의사의 자살방조행위가 법적으로만 금지돼있지 실제로는 암암리에 행해지고 있으므로 차라리 적절한 규제를 통해 양성화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며 16조의 시행을 지지하고있다.
위헌심사권을 갖고있는 미대법원 판사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으로 갈려있다.
현재까지의 미대법원 판례는 의사의 안락사 행위는 물론 이에 준하는 환자에 대한 의사의 자살방조행위까지 헌법위반으로 판시하고 있다.
미연방법원은 16조에 대한 위헌여부 판정이전인 다음달 8일까지 보류명령을 통해 법조항의 시행을 일단 연기한 뒤 위헌심사에 착수할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의 찬성으로 통과된 오리건주의 의료법 제16조에 대해 연방법원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목된다.
(이종연, 경향신문, 94. 11. 27)
2) 무뇌아와 안락사
의료 윤리면에서 미개척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안락사문제가 요즘 또다시 격렬한 논의의 대상으로 부각되고 있다.
워싱턴주는 지난해 일반투표에서 아주 근소한 표차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안락사를 합법화시키지 못했다. 또한 데릭 험프리가 쓴「자살하는 법」이라는 소책자는 현재 베스트셀러 대열에 끼여 있다.
점차 많은 수의 미국인이 더 이상 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의 자살행위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의료윤리학의 선각자들은 불치병 환자들의 경우 환자 자신을 위해서라도 안락사가 더 편하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지난주 이보다 더 복잡한 성격을 띤, 환자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무고한 한 생명을 고의적으로 단축시키려 했던 사건이 발생했다.
뇌의 주요 사고기능을 관장하고 있는 대뇌피질은 없고 호흡과 같은 기본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뇌간만을 갖고 태어난 테레사 아기의 경우였는데 그녀는 출생 당시부터 머지 않아 곧 죽을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었다(무뇌아의 경우 95%가 태어난 지 일주일 이내에 사망한다).
무뇌는 태아 시기에 감별되므로 대부분의 부모들은 당연히 태중에서 유산시킨다. 테레사의 부모는 그러나 자신들의 비극을 선으로 돌리기로 결심했고 따라서 그녀의 어머니는 아기를 마지막 달까지 그녀의 뱃속에서 키웠을 뿐만 아니라 심장, 간, 신장, 안구 등의 장기를 최적으로 보존하여 이를 필요로 하는 다른 아기들에게 즉각 이식시켜주고자 제왕절개수술도 감수했다.
그러나 여기서 뜻하지 않게 만일 테레사 아기가 자연스레 죽게 되길 기다릴 경우 아기가 죽어가는 과정에서 장기의 기능도 동시에 약화돼 이식에 부적합하게 된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따라서 그녀의 부모들은 법원에다 아기의 출생시 사망했다는 선고를 내려주길 요청했다.
이 방법만이 너무 늦기 전에 그녀의 장기를 이용할 수 있는 길이었다. 플로리다주의 법정은 이를 거절했다. 태어난지 9일만에 테레사 아기는 죽었다. 물론 그때는 이미 그녀의 장기는 그녀의 부모들이 우려한대로 기능불가의 상태가 돼 있었다.
그렇더라도 법원의 판단은 옳았다. 테레사의 장기를 제거하여 다른 아기들에게 심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출생시 그녀는 분명히 살아있었다. 물론 그녀는 머지 않아 곧 죽게 될 운명이었다는 주장에 나름대로의 논리는 있다. 하지만 이렇게 따지자면 불치병 환자도 곧 죽을 운명이고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도 곧 죽게 돼있다. 그러나 우리는 당장은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 단순히 그들의 장기를 이용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사망선고를 내리진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선 뇌가 없는 테레사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이 때문에 그 아기는 인간을 상대로 마련된 법적 보호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예일대학교 의과대학의 로버트 르바인 박사는 뉴욕 타임스지와의 인터뷰에서 『무뇌아는 인간이라기보다 물고기에 더 가깝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혹자는 르바인박사야말로 윤리학자라기보다는 얼빠진 인간상에 더 가깝다 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UCLA의과대학의 앨런 슈먼박사는 『최근의 신생아 연구를 보면 무뇌아들이 겪는 주관적 경험들은 그들의 외적 행동에서 보는 것처럼 「지속적 식물상태」의 성인보다 정상아들이 겪는 경험과 비슷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서 그의 주장은 테레사의 뇌간은 정상아의 대뇌피질 기능을 하고 있어서 그녀가 기본적인 「경험」을 할 가능성도 있다는 의미다.
뉴욕 타임스지는 지난주 무뇌아들은 통증을 비롯한 그 어떤 것도 경험하지 못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그릇된 정보를 제공했다.
슈먼박사는 이에 대해 『무뇌아는 통증을 느끼거나 경험할 수 없다고 하는 일부의 주장에는 그 어떤 논리적 심리적 근거도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무뇌를 사망상태로 정의하는데 찬성하고 있는 로버트 트루오그나 존 플레처같은 윤리학자들조차도 무뇌아들이 통증을 감지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고 시인하고 있다.
살 가망이 전무한 무뇌아의 장기들이 다른 아기들의 생명을 구하는데 활용되지 못하는 것은 어찌보면 비극이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생명을 구하고자 한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은 매우 야만적인 행동이다. 특히 타인의 목숨을 연장시키기 위해 죽어가는 생명을 고의로 끊는 것이야말로 이러한 야만적 행위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경우는 이쯤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무뇌아문제는 아직 확고하게 규명된 것이 없는 미개척 분야이기 때문에 명백하게 규정된 사항도 아직 없다. 따라서 장기이식을 위한 다음 희생 대상에는 회복불능의 의식없는 성인들이 포함될 것이고 그 다음 번은 불치의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이 될지 모른다. 이들 환자의 비극을 담보로 선을 행하려는 사람들이 없다고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선을 행한다는데 초점을 맞춰보자. 실로 테레사 사건에는 그나마 만족스런 점이 있다면 일반인들 사이에서 「선을 행하고자하는 충동」이 5년전의 비슷한 사건에서보다 훨씬 더 희석돼 있다는 점이다. 당시 무뇌아의 장기를 낭비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죽음을 정의하는 문제는 이번보다 훨씬 더 많은 세인의 관심과 과학적, 더 나아가 정치적 공감을 불러일으켰었다.
그러면 이 같은 일반인들의 수용태도 변화는 무엇에 기인하고 있는가. 이유는 이식을 담당하는 일선 전문의들이 이들 힘없는 천사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 무뇌아의 장기를 이용하고 싶어하는 바로 그 의사들이 살아있는 아기의 기관을 얻는데 따를 정치적 위험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일반인들 사이에 누군가가 자신들의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신장이나 폐를 떼내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팽배해 있음을 알아차렸다. 일년에 몇 안되게 태어나는 무뇌아들의 기관을 얻기 위해 합법적 장기 이식에 접한 일반인들의 관용적인 태도를 위태롭게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따라서 이제 이 같은 종류의 장기기증에 끝까지 남아 지지를 표명하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무뇌아의 부모들이다. 테레사의 부모는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비극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노력했다. 테레사 아기는 삶과 죽음의 연장선상에서 가장 불운하고 가장 인간다운 점이 희박한 존재였지만 인간의 신성 불가침성을 대표하고 있었다. 바로 이 점에서 테레사의 부모들은 자신들의 아기가 그런 불가결한 삶의 목적을 지니고 잠시나마 살 수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자기 위안을 얻게되길 바란다.
(찰스 크라우트 해머, 미 컬럼니스트, 세계일보, 92. 4. 16)
3) 불치환자 자살방조 정당한가
20여명 도움준 미국의사 케보키언 구속논란
의사가 회생불능 상태인 중환자의 자살을 돕는 것이 정당한가. 안락사나 낙태시술보다 한발 더 나아간 이런 생명 윤리 논란으로 미국사회가 떠들썩하다.
논쟁의 장본인은 90년 이후 20차례나 환자의 자살을 도운 병리학전문의 잭 케보키언(65) 박사. 그는 10월 22일 루거릭병이란 치명적인 신경질환을 앓아온 72살의 노파가 이산화탄소를 마시고 목숨을 끊도록 도운 혐의로 기소돼 지난달 30일 미시간주 오클랜드 카운티 지방법원에 의해 구속됐다.
케보키언 박사는 수감되자 곧바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고통받는 인간은 위엄있게 죽을 권리를 갖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의학적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케보키언이 구속되자 의료적 도움을 받는 자살문제에 대한 찬반양론이 들끓었다.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지지자들은 법원이 매긴 5만달러의 보석금을 대신 내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런 식의 보석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소신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꼴이라며 차라리 굶어죽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구치소에서 물과 주스, 비타민만 섭취하며 18일을 버틴 그는 결국 법원의 보석요건 완화로 17일 풀려났다. 상급법원의 위헌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의료자살 방조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탈진 상태로 풀려난 케보키언은 병원으로 실려갔다. 오클랜드 법원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그의 건강악화와 이웃 웨인 카운티의 연방순회법원 판사의 판결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순회 판사는 지난 13일 그가 기소된 또다른 사건에 대해 "모든 자살방조를 불법화한 미시건주법은 경우에 따라 연방헌법에 위배될 수 있다"고 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린 뒤 사건의 위법성을 따지기 위한 심리를 내년 1월 6일 열겠다고 밝혔다.
3년전부터 의료지원을 받는 자살 옹호운동을 벌여온 케보키언은 자신이 지켜보았거나 도움을 준 자살현장을 모두 비디오테이프에 담아두었다. 환자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난 2월 발효된 미시건주법은 자살방조와 자살에 도움을 주는 행위를 모두 불법으로 규정해 4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그는 주법의 위헌 심판을 신청해놓고 있는데, 연방헌법과 대법원 판례는 생명의 선택 권리를 상당히 폭넓게 인정하고 있어 앞으로 논란이 확산될 전망이다.
연방 대법원은 90년 의사가 생명연장용 의료처치를 거부할 권리를 인정했으며, 유명한 로웨이드 사건에서 낙태를 합법화한 바 있다.
(오룡, 한겨레신문, 93. 12. 21)
마. 일본에서의 안락사 논쟁
1) 일「존엄사」싸고 윤리 논쟁 "불꽃"
"환자 고통해소""생명 경시" 맞서
의사 단체의 존엄사 인정선언이 일본사회에 윤리논쟁을 일으켰다.
회복이 불가능한 말기환자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인간다운 자연사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의료계나 고통스러운 생명연장 조치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환자가족들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그러나 변호사 작가 종교인 등은 『목숨은 어떤 경우에도 경시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론을 펴고 있다. 남용 우려가 있다는 소리, 의료의 불신을 촉진시킬 뿐이라는 소리도 들린다.
일본 의사회의 생명윤리 간담회는 18일 존엄사를 인정한다는 보고서를 제출, 의사회의 승인을 받았다. 보고서는 환자의 뜻이나 「행복의 관점」에서 말기의료라고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 환자의 희망에 따라 산소호흡기·심장박동기 등 인위적인 생명연장조치를 제거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환자가 의사표시를 할 수 없을 경우에는 환자가족의 의사에 따를 수도 있고, 존엄사협회회원으로서 리빙 윌(생전발효유서)에 존엄사희망 의사가 명기돼 있을 경우에도 이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약물투여 등에 의한 안락사는 인정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 선언의 취지는 회복전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해 가는 것이 윤리라고 볼 수 없다면 본인 의사에 따라 편안히 죽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도리라는 것이다. 보고서를 작성한 간담회가 89년 1천6백명의 의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환자가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70.7%였고 『그래도 연명치료를 계속해야 한다』는 응답은 7.3%였다.
존엄사협회 회원수도 급증하고 있다. 일본 존엄사협회에는 현재 3만1천5백62명이 가입해 있는데, 이는 1년전에 비해 2배로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일부 의사들은 진정으로 죽음을 원하는 환자는 없음을 근거로 존엄사를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말기환자 전문병원의 한 의사는 빨리 죽도록 버려두어달라는 환자에게 『지금 강도를 만나 칼에 찔려 죽고 싶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살해당하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고 했다.
일본 의사회의 이번 보고서는 세계적 흐름의 반영이라고 볼 수도 있다. 81년 세계의사총회가 환자의 존엄사 권리를 수용해야 한다는 선언을 채택한 이래 미국과 유럽에서는 활발한 논의가 계속돼왔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50개주 가운데 47개주가 자연사법을 제정, 존엄사를 희망하는 환자의 뜻에 따르더라도 의사에게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
(한국일보, 92. 3. 20)
2) 살인죄 기소 일 의사 안락사 파문
생명의 존엄성 싸고 논쟁확산/가족 부탁 받고 말기 암환자 치사/「존엄사」 관련 원칙 확립 계기될 듯
불치의 병에 걸려 가망이 없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가족의 부탁에 따라 안락사 시킨 의사가 살인죄로 기소돼 일본사회에 큰 파문을 던지고 있다.
일본 요코하마(횡빈)지검은 2일 입원중이던 말기 암환자의 정맥에 염화칼륨을 주사, 사망케한 도카이(동해)대 의대부속병원 의사 도쿠나가 마사히토(덕영아인·36)를 살인죄로 불구속 기소했다.
도쿠나가는 지난해 4월13일 환자를 편안하게 죽게하고 싶다는 가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안락사 시켰다. 그러나 9월 초순 경찰의 검시로 환자의 사망원인이 밝혀지면서 사회문제화 하기 시작했다.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연명장치를 거부, 자기의 의사로 죽음을 선택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는가 하면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이에 반대하는 소리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를 검찰이 어떻게 다룰까가 사회적 관심거리가 됐다.
검찰은 『도쿠나가는 환자 본인의 승낙을 받지 않았으며 환자가 혼수상태에 있어 고통을 느끼지 않고 있었으므로 안락사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도쿠나가에게 살인죄를 적용했다. 검찰은 또 도쿠나가가 염화칼륨 정맥주사를 놓으면 환자가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사했으므로 살의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검찰은 그러나 살인교사 혐의로 수사하던 환자 가족에 대해서는 『윤리적으로 허용되는 방법으로 안락사를 요청한 것으로 인정된다』며 형사책임을 불문에 부치기로 했다.
일본에서는 지난 52년 나고야(명고옥) 고등법원에서 안락사의 허용조건으로 ▲병이 불치로 죽음이 목전에 이르렀고 ▲격렬한 통증이 있고 ▲환자에게 죽음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것만이 목적이고 ▲환자가 확실히 안락사를 위탁, 승낙해야 하며 ▲원칙적으로 의사의 손으로 하며 ▲방법이 윤리적일 것 등 6개 사항을 열거했다. 이중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위법이라고 나고야 고법은 판시했다.
지금까지 안락사에 관한 6회 판결은 모두 유죄로 내려졌으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들 사건은 모두 환자 가족들간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의사가 개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 의사가 업무와 관련, 살인혐의로 기소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요코하마 지검은 나고야고법의 판례를 참고로 했으나 도쿠나가의 경우 통증·환자의 승낙·윤리적 방법이라는 면에서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으므로 안락사가 아니라고 판단, 기소했다.
검찰은 염화칼륨 주사는 명백한 살인행위로 생명연장장치 제거라든가, 치료
중단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보고 염화칼륨주사 행위에 초점을 맞춰 기소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일본 국내에선 찬반 양론이 비등하고 있다.
일본 존엄사협회(회장 식송정·일교대 명예교수)는 『환자가 혼수상태에 있어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므로 서둘러 안락사 시킬 필요가 없지 않았는가』라고 의사를 비판하면서도 『의사의 행위에 동정이 간다. 검찰의 판단은 안락사를 부정하는 것 같다』며 안락사제도 확립을 역설했다.
일반인들 가운데는 환자가족을 처벌 않고 의사만 기소하는 것이 형평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 의사회 생명윤리위원 간담회는 『환자의 동의가 없는 이상 안락사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죽음을 선택하는 존엄사에 관해 논의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은 일본에서 안락사 문제에 관한 하나의 원칙이 세워지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재판결과가 주목된다.
(이석구, 중앙일보, 92. 7. 4)
바. 우리 나라에서의 안락사 논쟁
1) 식물 인간 「안락사」 찬반 논쟁
회생 불가 환자에 생명 연장 장치는 고통 : 찬
인간의 생명 의사 판단에 맡기는 건 무리 : 반
식물 인간에 대한 안락사가 일반 종합병원 등에서 암암리에 시행되고 있으나 이에 대한 법적인 대책이 없어 뇌사입법과 동시에 「품위있게 죽을 권리」가 논란의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염화칼륨이나 모르핀을 환자의 정맥에 주사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적극적 안락사」는 법조계뿐만 아니라 의료관계 전문가들도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장치를 제거하는 「소극적 안락사」는 찬성하는 의견이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일부 시행되고 있어 사회적 쟁점의 소지가 있다.
「소극적 안락사」는 뇌졸중 말기증세암 척추골절로 인한 사지마비, 교통사고로 인한 뇌출혈 또는 연탄가스 중독 등 심한 약물중독환자가 뇌기능 정지나 식물인간 상태에 있을 때 의사가 시술을 중단함으로써 사망케 하는 것이다.
부천 세종병원 최운성신경외과 과장(46)은 『환자를 「집으로 모시자」면서 심장박동기 인공호흡장치 등을 제거하는 관행이 「소극적 안락사」의 대표적 케이스』라고 말한다. 이는 생명유지장치의 제거가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의사는 법적인 책임이 있으나 일반화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병실이 3백40실인 S병원은 1주일에 3∼4명의 환자에 대해 「호프리스 디스차지」(Hopeless Discharge)=가망없는 퇴원)판정을 내린다고 알려졌다.
이처럼 「간접적 안락사」를 법률적 보완을 통해 의료계의 뒤안에서 밝은 곳으로 끌어내 명문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또 「안락사」시술의사는 현행 법률하에서는 명백하게 살인방조 또는 살인혐의가 씌워질 소지가 있기 때문에 면책을 위해 「회생불가」환자에도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죽음을 연기해 오히려 고통을 주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즉 사경을 헤매는 환자가 의사의 「치료적 열정」으로 「품위있게 죽을 권리」조차 박탈당한다는 것. 6년간이나 인공장치에 의존해 식물 인간으로 생명을 유지했던 전정부 각료 Y씨가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법제연구원 전재경 책임연구원(38·법학박사)은 『미국에서는 「품위있게 죽을 권리」가 사생활권에 포함되어 인정받고 있으며 항암제 투여로 말기암환자의 죽음을 연장시키는 행위는 오히려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짓』이라고 말한다. 즉 죽음이 임박한 불치병의 환자가 본인과 보호자의 희망에 따라 자격을 갖춘 의료인의 시술하에 편하게 눈감을 수 있는 법적인 권한을 주자는 것.
이를 위해서는 안락사의 족쇄가 되는 형법 제252조 「사람을 교사 또는 방조하여 자살하게 한 자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자살관여죄」에 대한 보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자살관여죄」의 적용을 의사들에 대해서만은 한정적 예외로 인정하고 「의료법」에 특례규정을 두어 안락사에 관여한 의사의 책임을 묻지 않는 법제 장치를 말한다.
그러나 안락사의 구체적 법제화 주장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법적용 때 악용의 소지가 있는 법은 제정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주장이다. 서울대 진교훈교수(55·철학)는 『안락사법을 제정해 놓으면 의사에게 환자를 죽이게 하는 근거를 마련해줄 우려가 크기 때문에 안락사입법은 어떤 경우에도 반대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유수 종합병원 오진율이 매우 높다고 의사들조차 비공식적 내부적으로 인정하는 상황에서는 생명을 중지시키는 일을 의사판단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안락사를 인정할 경우 치매증환자 등 불가항력에 처한 환자의 장기를 매매 목적으로 악용할 소지도 다분히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안락사 찬반론에 대해 국립중앙의료원 도종웅 신경외과과장(49)은 『뇌사환자의 경우 엄격한 판정아래 안락사는 인정할 수 있지만 회복가능성이 있는 식물인간에 대해서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역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뇌사이전 단계에 있는 「식물인간」에 적극적 시술이 베풀어져야 하며 이에 따르는 무한정 치료비 부담을 정부가 일정비율 뒷받침하는 제도적 보완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한용걸, 세계일보, 92. 10. 13)
2) 뇌사판정 오진염려 절대로 있을 수 없어
1968년 「시드니선언」 이래 뇌사를 죽음으로 수용하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부단히 장기이식이 개발 시행되어 왔다. 근년 우리 나라에서도 법적 토론에 앞서 뇌사와 장기이식을 찬성하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혹자는 의사들이 뇌사를 오진할 것을 우려하고 있으나 대한의학협회의 뇌사판정기준(안)에 명시된 의료시설을 갖춘 병원에서 판정한다면 오진의 염려는 절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병원에서 병상기록이나 뇌사판정 과정의 지침서를 엄격하게 기록하고 판정의사의 서명을 확실하게 시행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뇌사를 죽음으로 수용하는 것이 생명경시라는 인식은 바뀌어야 한다.
(이인수 대전중앙병원장·신경외과)
3) 정부에 장기 이식배분 전담 기구 설립을
뇌사 입법의 주요 내용으로 첫째 뇌사판정의 의학적 정확성을 반영할 수 있는 기준, 둘째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뇌사판정 기구, 셋째 장기이식에 따른 오진과 환자가족의 명시적 동의 등에 대한 구체화 넷째 부정판정행위, 장기의 불법적 거래에 대한 처벌 등이 다루어져야 한다.
결국 장기의 이식매매는 합법화돼야 한다. 그러나 막상 법제화되었을 때의 부작용이나 후유증을 최대한 감안하지 않으면 안된다. 장기의 수요공급체계가 허술할 경우 장기매매복덕방이 생겨날 우려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제반문제를 주관하는 국가기관으로서 적어도 보사부산하에 전담기구가 구성돼야 할 것이다.
백형구 변호사
4) 뇌사 인정하면 생명 경시 풍조 확산 우려
인간은 영성불성을 지닌 소우주적 존재로서 그 무엇보다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생명을 단지 현실적 필요성이라는 측면에서 뇌사를 인정, 장기이식을 시행한다는 것은 분명 생명경시 풍조를 낳을 수 있는 위험요소가 크다. 자칫 인간을 유무용형으로 구분짓는 세태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하지만 새 생명을 구해야 된다는 현실은 뇌사인정을 요구하고 있다. 현실을 수용해 뇌사인정 법제정을 추진한다고 해도 본인 및 가족의 의사, 즉 인간존엄성이 존중되는 법이 마련돼야 하겠다. 결코 산목숨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죽는 목숨을 살리는 생명중시의 철학이 기준돼야 한다.
(김항배 동국대교수·동양철학)
5) 뇌사 합법화로 장기 기증 활성화 바람직
일부에서는 객관성과 과학적인 판정기준 미비, 장기매매현상 등을 이유로 뇌사인정제도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뇌사를 인정하는 각국의 기준을 종합하고 객관적인 뇌사판정기준에 따라 전문의와 규정된 시설을 갖춘 병원에서 엄격하게 확인하면 뇌사판정 오류를 방지할 수 있다고 본다.
뇌사에 인정되면 인명경시풍조가 만연할 것처럼 우려를 하는데 이는 너무 관념적인 생각이다. 오히려 뇌사를 인정하고 장기이식을 함으로써 꺼져가는 타인의 생명을 5∼9명까지 구할 수 있다는 생명의 존엄성이 더 크게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장기기증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적극적인 뇌사인정제도가 마련돼야 한다.
(박진탁 사랑의 장기기증운동 본부장·목사)
6) 가톨릭의료원 의학 윤리 선언의 의미
기존 윤리 강령보다 구체적/미국등 선진국선 이미 시행
의료계가 일부 병원들의 도덕적·윤리적 비리로 국민들에게 비판과 불신을 받고 있는 가운데 최근 가톨릭중앙의료원(원장 김대곤)이 제정한 「의학윤리지침」은 의료계는 물론 국민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의료계는 진료비의 부당·과잉청구, 응급환자 진료거부, 오진으로 인한 의료분쟁 등 고질적인 병폐 등과 더불어 의사들이 혼수감이 적다고 아내를 구타하거나 투기꾼 명단에 빈번히 등장하고 최근에는 연골제거수술, 예비군훈련기피 등으로 국민들의 불신이 가중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환자들의 의식구조변화와 국민들의 민주화요구에 따라 나약해진 환자앞에서 권위와 불친절로 군림하던 시대도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 몇 년간 의료계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이번 가톨릭중앙의료원의 의학윤리지침이란 결실이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윤리 지침은 기존의 「병원윤리강경」「의사윤리강령」과는 달리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것이 특징이다.
「환자의 인격존중」「최선의 진료」「최고의 의학수준」 등의 비현실적인 문구 대신 『인체실험은 사전에 대상자들에게 내용 및 예정되는 부작용을 충분히 알리고 동의를 얻는다』는 등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돼 있다.
이와 함께 의료원은 지침의 실효성을 위해 의학윤리지침을 제정한 「이념구현위원회(위원장 김중호)」가 자정노력 차원에서 매년 8∼10회 모임을 갖고, 산하 5천여명 의료인들의 지침수행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번 가톨릭중앙의료원의 의학윤리지침제정도 선진국에서는 이미 실효화되고 있어 뒤늦은 감이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미국의 경우 「의사윤리강령」과 더불어 모든 의료행위에 대한 동료감시(Peer Review), 의료적정보장위원회(QA) 등을 통해 의사윤리의식을 강력히 고취시키고 있다.
이는 인맥과 학연을 중시해 동료의 과오를 감싸줘 의료의 질과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국내의료계의 잘못된 의식과도 크게 차이가 난다.
김위원장(강남성모병원 행정부원장)은 『의료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분야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분야보다 강력한 윤리의식이 필요하다』며 특히 종교적인 교리와 이념이 있는 우리로서는 더욱 중요하다』고 의료인의 윤리의식을 강조했다.
그러면 가톨릭 중앙의료원의 「의학윤리지침」중 종교적인 부분을 제외한 다른 의료기관에서도 적용이 가능한 지침내용을 요약해본다.
◇환자진료 윤리지침=▲영리성추구가 목적이어서는 안된다 ▲의료분쟁을 예상한 방어적 진료는 안된다 ▲차별하거나 과잉·과소진료는 안된다 ▲최선의 진료를 위해 힘쓴다.
◇태아진단 및 성감별 윤리지침=▲성감별 검사는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기형·유전병을 진단·치료하는 경우라도 성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인체실험 윤리지침=▲사전에 동물실험을 거쳐 인체의 피해정도가 크지 않다는 것이 알려져야 한다 ▲대상자들에게 내용 및 예상되는 부작용 등을 충분히 알리고 동의를 얻는다.
◇안락사 윤리지침=▲물리적·화학적 방법에 의한 적극적 안락사는 물론 의료행위를 지속적으로 시행하지 않는 소극적 안락사도 허용하지 않는다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도 음식물투입·간호 등 기본적인 생명 유지수단을 포기하지 않는다 ▲환자가 요청하더라도 응하지 않는다.
◇장기이식 윤리지침=▲의학적 지식이나 경험을 얻기 위한 시도가 있어서는 안된다 ▲장기제공은 강압 또는 의무감에서 행해지면 안되며 매매에 의해 이뤄져서도 안된다 ▲수령자의 선택은 장애자, 빈부의 차, 교육수료 등 사회적 조건으로 차별을 두면 안된다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원호, 중앙일보, 91. 10. 13)
7) 안락사 문제 해결의 길잡이
두 가지 갈등 구조를 지문으로 주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라는 주제는 논술에서 자주 등장한다.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의사가 '당신은 건강합니다'고 하는 '거짓말'처럼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고 판단할 수 있는 주제를 주고 학생의 견해를 묻는 것은, 학생이 자신의 주장에 대한 논증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매우 좋은 주제이다.
이 같은 딜레마의 해결은 우선 갈등 구조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물론 갈등 구조는 누구나 쉽게 안다. 이번 주제에서도 갈등 구조는 안락사를 찬성할 것인가, 또는 반대할 것인가이다. 그러나 이것만 갖고는 갈등 구조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각각의 주장이 갖는 논리를 바탕으로 왜 각각의 주장이 모두 딜레마에 빠져 있는지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상대 논리를 포괄하면서, 즉 상대 논리가 갖고 있는 긍정성을 받아들이면서도 상대 논리를 뛰어넘어 더욱 타당한 자기 논리를 주장할 수 있다.
이런 딜레마의 구조에서는 상대 논리를 일방적으로 부정해서는 자기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앞서 의사가 하는 거짓말의 예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라도 의사의 거짓말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을 할 경우, 단순히 거짓말이기 때문에 나쁘다고 하는 주장은 더 이상 논리의 확산이 불가능하게 만들고 문제 자체를 성립하게 하지 않는다. 즉, 갈등 자체를 부정하는(모든 거짓말은 나쁘다는 것처럼) 논리 전개는 사고력의 한계를 보여줄 뿐이다.
아무리 의사의 거짓말이 타당하지 않다는 주장을 펼 생각이라 해도, 의사의 거짓말에도 긍정적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문제가 성립하기 때문에 일단 의사의 거짓말이 갖는 효과를 먼저 검토하는 것에서 논리를 출발해야 한다. 따라서 의사가 거짓말을 해야 하는 배경의 긍정적 의미를 인정하되, 그 방법으로서 거짓말은 타당하지 않다는 식으로 자기 주장을 펼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사의 거짓말을 인정하는 논리가 갖는 딜레마, 또 의사의 거짓말을 부정하는 주장이 갖는 딜레마와 같은 각각의 주장이 갖는 갈등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가) 해설
① 두 가지 갈등 구조를 지문으로 주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라는 주제는 논술에서 자주 등장한다.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의사가 '당신은 건강합니다'고 하는 '거짓말'처럼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고 판단할 수 있는 주제를 주고 학생의 견해를 묻는 것은, 학생이 자신의 주장에 대한 논증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매우 좋은 주제이다.
이 같은 딜레마의 해결은 우선 갈등 구조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물론 갈등 구조는 누구나 쉽게 안다. 이번 주제에서도 갈등 구조는 안락사를 찬성할 것인가, 또는 반대할 것인가이다. 그러나 이것만 갖고는 갈등 구조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각각의 주장이 갖는 논리를 바탕으로 왜 각각의 주장이 모두 딜레마에 빠져 있는지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상대 논리를 포괄하면서, 즉 상대 논리가 갖고 있는 긍정성을 받아들이면서도 상대 논리를 뛰어넘어 더욱 타당한 자기 논리를 주장할 수 있다.
이런 딜레마의 구조에서는 상대 논리를 일방적으로 부정해서는 자기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의사가 하는 거짓말의 예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라도 의사의 거짓말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을 할 경우, 단순히 거짓말이기 때문에 나쁘다고 하는 주장은 더 이상 논리의 확산이 불가능하게 만들고 문제 자체를 성립하게 하지 않는다. 즉, 갈등 자체를 부정하는(모든 거짓말은 나쁘다는 것처럼) 논리 전개는 사고력의 한계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리 의사의 거짓말이 타당하지 않다는 주장을 펼 생각이라 해도, 의사의 거짓말에도 긍정적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문제가 성립하기 때문에 일단 의사의 거짓말이 지니는 효과를 먼저 검토하는 것에서 논리를 출발해야 한다. 따라서 의사가 거짓말을 해야 하는 배경의 긍정적 의미를 인정하되, 그 방법으로서 거짓말은 타당하지 않다는 식으로 자기 주장을 펼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사의 거짓말을 인정하는 논리가 가지는 딜레마, 또 의사의 거짓말을 부정하는 주장이 가지는 딜레마와 같은 각각의 주장이 가지는 갈등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② 이제 안락사를 둘러싸고 각각의 주장이 갖고 있는 딜레마를 이상과 현실의 문제로 접근해 보자. 안락사를 둘러싼 갈등 구조는 예문에도 나와 있듯이 환자를' 고통에서 구제해야 한다는 것'과 환자의 '생명을 지탱시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의 갈등이다. 생명을 지탱시키자니 환자를 고통에서 구제해 줄 수 없고 그렇다고 환자를 고통에서 구제, 즉 안락사를 시키자니 환자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탱시켜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의학 윤리를 저버리게 된다.
③ 그렇다면 안락사의 문제에서 이상과 현실의 갈등은 무엇인가? 안락사를 둘러싼 갈등 구조를 어떻게 이상과 현실의 구조로 파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안락사를 둘러싼 갈등 구조가 환자를 고통에서 구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즉 현실은 어떤 이유로, 예컨대 의학 기술의 한계라든가 생명의 한계 때문에, 환자를 완치시킬 수 없는 상황에 자주 처하게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환자를 무사히 고통에서 구제할 수 있다면 '안락사의 딜레마'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현실적인 문제는 '고통에서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이 된다.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