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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전태일문학상 심사평 | |
◑ 기록 · 생활글 부문 심사평 - 총평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하는 까닭 “노동청년 한 사람은 이 지구 위에 있는 모든 황금을 합친 것보다 더 소중하다.”(까르딘 추기경)라고 합니다. 이렇게 소중한 사람들이 쓴 글을 수상작품이니 가작이니 하면서 가르는 것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글쓴이 모두에게 상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원고를 모집한 까닭이 가려 뽑아서 상을 주기 위한 것이라 어쩔 수 없이 심사를 했습니다. 가장 먼저 전태일문학상의 근본 뜻에 맞는 글, 구호에 그치지 않고 진솔한 글, 일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성껏 쓴 글, 우리 말을 살려 쓴 글을 가려 뽑아서 상을 주기로 했습니다. ‘문학성’이니 어쩌니 하면서 아무리 읽어도 느낌도 없고 ‘뜬구름’ 잡는 말만 늘어놓은 글은 뽑지 않았습니다. ‘말하는 것처럼 쉽게 쓴 글’, ‘한글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글’이 가장 훌륭한 글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을 받은 사람이나 받지 못한 사람이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남의 흉내를 내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와 느낌을 자신의 말로 매끄럽게 잘 나타낸 글도 있고, 거친 듯 하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글도 있고, 글은 매끄러운데 사람냄새가 나지 않는 글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생각은 올곧고 하고 싶은 말은 가슴에 쌓여 터질 것만 같은데 어떻게 나타내야 할지 잘 몰라서 고민한 흔적이 많았고, ‘이 부분을 조그만 더 살려 썼으면 정말 훌륭한 글이 될 텐데’ 싶은 글이 많아 아쉬움이 더 컸습니다. 한평생 우리 말과 글을 살리기 위해 애쓰시다가 일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님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첫째, 노동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 둘째, 무식한 사람이 하는 말, 그 말이 진짜 우리 말이다. 이런 우리 말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 셋째,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려는 결심이 서 있는가? 그렇다면 글을 쓸 것이다. 글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세상이니까.”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진짜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말과 글을 살려 낼 사람도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감당할 수 없도록 많이 가졌고, 살아 있는 말을 하는 이 땅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이웃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으며, 알아야 삶을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물질이든 마음이든 자기가 가진 것만을 나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도시와 농촌을 숱한 위험을 끌어안고 다니는 버스 · 택시 · 택배 · 짐차 기사 님들도 글을 써야 합니다. 고무 냄새와 본드 냄새를 맡으며 일하는 신발공장 노동자도, 논밭에서 한평생 인건비도 나오지 않는 줄 뻔히 알면서 흙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가난한 농부들도, 수 십 년 동안 남의 집을 지어주고도 자기는 집 한 채 가지지 못한 채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는 노동자도, 식당 아저씨도, 술집 아주머니도, 신문 배달하는 학생도, 간호사도, 교사도, 공무원도, 들풀처럼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맡은 일을 다 하는 모든 이들이 글을 써야 합니다. 서로 생각을 나누고 삶을 나눌 때 세상은 그 만큼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의 삶을 가꾸고 세상을 가꾸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이 어떤 글을 쓰느냐에 따라 세상은 밝아지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합니다. 손발이 멀쩡한데 일하지 않는 사람은 밥도 먹지 말고 글을 써서도 안 됩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의 머리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우리는 눈으로 보지 않고도 훤히 알고 있으니까요. 일하는 사람이 시를 쓰고, 동화를 쓰고, 소설을 쓰고, 산문을 써야 합니다. 그래서 책방마다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널려 있어야 합니다. 교과서마다 일하는 사람들이 쓴 글이 실려, 우리 아이들이 그 글을 읽고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일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존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일하지 않는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써서는 안 됩니다.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삼각관계에 놀아나는 쓰레기 같은 사랑 이야기를 쓰거나, 우리 삶과 동떨어진 ‘특별한’ 이야기를 마치 우리 삶인 것처럼 꾸며서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뭔가 ‘특별하게’ 보여야 돈을 벌 수 있으니까요. 글을 쓰는 목적을 자기의 삶을 가꾸기 위한 것이지, 돈을 벌거나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의 삶을 가꾸면서 이웃들 삶까지 가꿀 수 있다면 세상은 저절로 아름다워지지 않겠습니까? - 생활글 심사평(서정홍)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이 10편입니다. 원고를 받아들고 마치 봄을 맞이하듯 마음이 설렜습니다. 이런 설레는 마음이 없으면 험한 세상을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장미자 <시장 할머니>, 이금주 <아주 잘 지냄>, 이금주 <운무>, 박재근 <나는 인간쓰레기가 아닙니다>, 서현희 <검은 얼굴>, 김준두 <담벼락 인생>, 서미애 <구두 수선>, 이원웅 <설상적화>와 같은 글은 누구나 읽어도 가슴이 찡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치훈 <사랑을 배운다> 외 여러 편을 한꺼번에 응모한 분의 글은 군더더기가 없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한편 한편 읽고 느낀 마음을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여기서는 당선작인 <담벼락 인생>에 대해서만 소감을 적겠습니다. 감원바람이 불어 “가벼운 형벌을 받아” 서울에서 부산으로 일터를 옮긴 글쓴이가 출퇴근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목소리 높이지 않고 잔잔하게 썼습니다. 그것도 남의 집 담벼락 아래에서 장사하는 가난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말입니다. “김 과장! 내일 출근할 때에, 회사 들리지 말고 L커피솝에서 만납시다!” 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고 “내일은 틀림없이 한바탕 비나 눈이 오려나 보다.” 라고 생각하는 글쓴이는 지금쯤 어찌 되었을지 궁급합니다. 이제는 “가벼운 형벌”이 아니라 “무거운 형벌”을 받고 도시의 밤거리를 떠돌고 있지 않은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은 죄라곤 부지런히 일한 죄밖에 도 없는 사람들이, ‘무거운 형벌’을 받고 거리를 떠돌지 모르는 세상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글을 읽으면서 아쉬운 점도 많았습니다. 한글 맞춤법과 문장 부호에 조금 더 정성을 기울여야 하고, 응모할 때는 누구나 읽기 쉽게 편집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고치고 다듬었으면 좋겠다 싶은 곳도 있었습니다만 자신의 삶과 가난한 이웃들의 삶을 진솔하게 써서 읽는 이들의 마음을 봄비처럼 적셔주리라 여겨 당선작으로 뽑았습니다. - 기록문 심사평(박영희) 기록문, 아직은 낯설다. 예심을 거쳐 손에 들어온 7편의 공모작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록이라고 하기에는 산만하고 로뽀로 보기에도 역시 엉거주춤한 자세다. 한번은 술잔을 들이켜는 속도로 그리고 다음은 담배를 피우는 속도로 읽었다. 그렇게 해서 남은 작품은 단편 임연화 <누가 홀로 시들어 간 들꽃을 기억할까>, 유정열 <고운 정 미운 정>, 최광리 <겨울이 오면 봄은 멀지 않으리>, 중 · 장편 이선옥 <……들이 운다> 등 4편이었다. 임연화 <누가 홀로 시들어 간 들꽃을 기억할까>, 유정열 <고운 정 미운 정>은 아쉬움이 컸다. 두 편 모두 간격을 좁히지 못한 가운데 손만 내밀고 있는, 고모로 대치된 한애자 씨도 담임을 감동시킨 영수도 작자와의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문학의 모든 장르가 다 그렇겠지만 특히 기록문에서 ‘천착’은 다시금 되새겨볼 일이다. 노숙인과 술은 가깝고도 먼 한 · 일관계? 그리하여 노숙자는 술 때문에 존재하고 또 술 때문에 죽어간다? 원고지 80여 매를 통해 한 작자의 삶을 얼마만큼 냉철하게 그려내고 파악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선뜻 자신할 수 없으나―설령 <겨울이 오면 봄은 멀지 않으리>가 주는 내용들이 상당히 유창한 글쓰기의 소유자라 할지라도―단편 당선자로 내세우는 데 있어 큰 망설임은 없었다. 왕년에 내가 잘 나갔다 하더라도 지금 사회는 한번 무너지면 재기가 어려운, 누구라도 기초생활수급자로 노숙자로 전락할 수 있음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후암동 쪽방에 찾아든 봄 햇살이 좀 더 오래 머물렀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 · 장편 <……들이 운다>는 서너 차례 고심이 뒤따랐다. 확인 작업도 필요했다. 예심에서 넘어온 중 · 장편이 딱 한 편이기도 했거니와 와중에 연작형태를 띠고 있어서 결정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낼 수밖에 없었던 건 인간의 소중함과 그 눈물들의 기록이 고스란히 묻어났다는 점이다. 광채에 이르기까지는 담금질에서 빼빠, 빠우를 거쳐야 하듯 <……들이 운다> 역시 그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승리보다는 더 많은 패배 속에서도 촛불은 타오르고 있었다. - 예심 : 서분숙, 고석근 - 본심 : 박영희, 서정홍 | |
◑ 시 부문 심사평 리얼리즘적 경향은 작가들에게 시대의 평균적 사회의식을 요구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민중문학, 노동문학 작품들은 사회학에 주눅이 들거나 그에 충실하려고 하는 경향도 보입니다. 문학의 사회적 역할은 오히려 사회 의식적 관계에서 패착된 현실적 난관을 감각적으로 뛰어넘는 힘을 가질 때 비로소 사회적 역할을 한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에게 시대적 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신인에게 우선적으로 신선한 감각을 요구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선을 거친 아홉 분의 시를 읽고 우선 세 분의 시를 추려보기로 했으나, 이순주 <째깍째깍 그를 재는 시간의 메트로놈은 피곤도 없다>, 장성혜 <높은 바닥>, 두 분의 시에서 일치를 봤습니다. 이순주 <째깍째깍 그를 재는 시간의 메트로놈은 피곤도 없다>의 시는 상상의 자유로움과 표현의 기교면에서뿐 아니라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 이면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우면서 독특한 시각도 돋보였습니다. 좋은 시인이 될 자질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장성혜 <높은 바닥>은 오랜 시간 습작으로 단련했음직한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민중적 삶을 미화하거나 과장하거나 엄살을 떨지도 않고, 한발 물러선 관찰자의 입장도 거부하면서, 있는 그대로 진실 되게 껴안으려는 자세와 이를 깊이 천착해가려는 노력으로 좋은 시를 쓸 수 소양과 저력을 키워온 것 같습니다. 두 분 가운데 삶의 현장에서 살아 숨 쉬는 전태일 정신을 살려내는 쪽에 무게를 실었습니다. 장성혜 님의 경우 투고작 모두 고른 수준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도 다소 가산점이 주어졌습니다. 이순주 님도 이미 일정한 수준에 올라 있습니다. 그를 다른 지면에서 곧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성혜 님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냅니다. 신인다운 패기로 기성 시에 주눅 들지 말고 맘껏 펼쳐 보이시기 바랍니다. 신인은 초보시인이 아니라 전위시인이기 때문입니다. - 예심 : 송경동, 표성배 - 본심 : 김해화, 백무산 | |
◑ 소설 부문 심사평 1. 소설 응모작품 역대 최다 올해 소설부문 응모작품수는 전태일 문학상이 생긴 이래 최대다. 장편소설 4편, 중편소설 4편, 그리고 단편소설은 응모자 105명에 작품 124편이 들어왔다. 2. 예심 예심평가 예심은 소설가 최용탁, 소설가 홍명진 님이 맡아 주셨다. 예심에 대한 의견은 아래와 같다. “이번 응모작품은 유난히 ‘실업’을 다룬 작품이 많았다. 문학이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임을 새삼 절감했다. 하지만 소재 대부분이 소설적 소재로 눈길을 끌지 못한 점은 아쉬웠다. 예심을 통과하지 못한 작품 중에는 몇몇 흥미로운 소재가 발견되기도 했으나, 이 소재를 구성이 제대로 받쳐주지 못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문장의 기본기를 갖추지 못한 점도 치명적 흠이었다. 이번 소설응모작 중에 특기할 만한 것은 총 4편의 장편이다. 200자 원고지 2000매에 달하는, 공을 무척 많이 들인 장편도 있었다. 그러나 4편 모두 예심에 통과하지 못한 점은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예심 통과 작품, 단편 7편 1) 임연화 <우리별에 SOS를 보낸다> 2) 임연화 <'해피타임'에는 해피 타임이 없다> 3) 반성호 <애절양 2010> 4) 최일걸 <감별> 5) 김다린 <알바당 선언> 6) 박송아 <굿나잇, 달마> 7) 김경락 <야쿠르트 한 개> 3. 당선작 : 최일걸 <감별> 4. 결심 총평 결심은 소설가 김하경, 소설가 안재성 님이 맡아 주셨다. 예년에는 응모작품 숫자도 적었지만, 문장도 제대로 못 쓰고, 표현도 미숙하고 거칠며, 구성이나 인물도 엉망인 그런 소설이 많았다. 그렇지만 글감만은 하나같이 총체적 삶을 담은 것들이어서 좋았고, 미숙하나마 문학에 대한 순수하고 뜨겁고 힘찬 에너지와 열망이 불끈불끈 솟아나서 좋았다. 그것만으로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응모작품은 역대 최다라고 할 만큼 응모작품수가 많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응모작 중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올라온 만큼 하나같이 문장도 잘 쓰고, 표현도 매끄럽고, 무엇보다 인물을 창조하고 짜임새 있게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이 많이 발전한 걸 느낄 수 있었다. 한마디로 글쓰기가 세련된 수준에 접어들었다는 느낌이 들어 반가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았다. 가슴이 꽉 채워지지 않았다. 전기가 오르듯 온몸이 찌르르 전율하는 그런 감동이 전해지지 않았다. 왤까. 우선 하나같이 글감이 함량미달이었다. 특히 당선작으로 올리기에 부족한 글감이 많아 갈등과 고민이 많았다. 결국 글감이 부족해서 당선작이 못 된 작품이 몇 편 있다. 사람들마다 내 인생을 책으로 쓰면 장편소설 한권이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현실에 널려 있는 이야기라고 해서 다 소설감이 되는 건 아니다. 아무리 많은 이야깃거리가 널려 있어도 글감 하나도 못 건지는 경우도 많다. 내가 쓰고 싶어 하는 글감과 나에게 맞는 글감, 내 능력으로 소화할 수 있는 글감은 다 다르다. 또 나만이 쓸 수 있는 글감과 시대가 요구하는 글감도 다르다. 이렇듯 수많은 경우수를 고려한 까다로운 과정을 통해 제대로 된 글감을 취사선택한다. 그런데 이번엔 특히 좋은 글감이 보이지 않았다. 좋은 글감은 좋은 소설의 첫걸음이다. 좋은 소설을 쓰려면 무엇보다 글감이 좋아야 한다. 아무리 능력 있는 작가도 글감이 안 좋으면 좋은 소설을 쓸 수 없다. 좋은 글감을 고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글 쓰는 사람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해석할 수 있는 관점과 가치관이 서 있어야 한다. 이것이 두 번째다. 아무리 좋은 글감도, 글쓴이만의 해석과 관점이 들어 있지 않으면 헛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사태가 일어난 걸까.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번 응모작품만 두고 보면, 글 쓰는 사람이 꼭 가져야 할 현실에 대한 통찰력과 사유의 깊이가 없다는 점을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적하고 싶다. 소설은 르포나 생활글, 실용문과 같은 일차적 글쓰기와는 거리가 멀다. 소설의 최종 목표는 감동이다. 이를 위해 지은이는 철저하게 자신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서 글감을 취사선택하고, 이야기와 인물을 재배치하고 재구성한다. 모든 과정에는 지은이의 엄청난 사유의 과정이 쌓인다. 따라서 한편의 소설은 글쓴이의 사유 전체가 쌓인 집적물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소설에서는 글쓴이의 통찰력과 사유가 중요하다. 특히 현실 참여적 소설에서는 글쓴이의 통찰력과 사유가 글의 성격과 질을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전태일 문학상이 다른 문학상과 다른 점은 현실참여적 글쓰기에 있다. 이는 곧 전태일 문학상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현실참여적 글쓰기가 전태일 문학상의 생명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전태일 문학상에 응모하는 응모자들에게서 현실에 대한 통찰력과 사유가 부족하다는 건 치명적이다. 첫째는 총체적 삶을 드러낼 수 있는 글감으로 소설을 써야 한다. 둘째는 자신만의 관점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는 현실에 대한 통찰력과 사유의 깊이를 가져야 한다. 이 세 가지가 앞으로 현실참여 소설이 고쳐나가야 할 지향점이 아닌가 싶다. 5. 각 작품별 평가 <우리별에 SOS를 보낸다> <'해피타임'에는 해피 타임이 없다> 두 소설은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부부의 대립과 갈등이 주요 모티브라는 점에서 두 소설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두 소설의 표현 형식은 사뭇 다르다. 이야기 내용이 비슷하다는 걸 전혀 느낄 수 없을 만큼 달라 보인다. 소설에서 형식이 내용을 얼마나 크게 좌우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해피타임’...>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접적으로 드러낸 리얼리즘 소설이다. 남편이 30년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퇴직금으로 마련한 함박스테이크 집 ‘해피 타임 체인점’이 문을 열기 시작해서 마지막으로 문을 닫기까지의 이야기다. 사업이 부진하고 빚이 늘어나자 아내는 하루빨리 청산하자고 우긴다. 반면에 남편은 30년 인생과 맞바꾼 창업 가게를 고집스레 붙들고 있다. 어느 날 우연히 한 남자가 가게에 나타나 행패를 부린다. 남편은 배달을 핑계로 도망친다. 혼자 남은 아내는 칼을 들고 사내에게 맞선다. 두려움을 이겨낸 이 특별한 경험 이후 아내는 ‘칼’의 엄청난 위력을 깨닫고, 급기야 남편에게 ‘칼’을 들이댄다. “해피타임의 문을 닫지 않으면 나도 어떻게 할지 몰라!” 이렇듯 <해피타임>의 아내가 칼을 들고 현실에 맞서 끝내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는 데 반해, <우리 별.......>의 아내는 집을 나와 일 년 넘게 무덤 속에 숨어 사는 것으로 현실 문제에서 도피한다. 갈등과 대립에 직접 맞서는 대신 무덤 같은 자기 혼자만의 공간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무덤이란 작은 창고 같은 비어 있는 복사가게를 말한다. 밖에선 비어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하기에, 불빛도 움직임도 소리도 낼 수가 없다. 마치 무덤 속처럼 컴컴한 어둠 속에 갇혀 어딘가로 구조신호를 보낸다. ‘현실로부터의 도피’라는 이 소설의 주요 테마에 맞게 이 소설은 판타지라는 표현형식을 선택했다. 아내는 마치 자신이 외계의 어느 행성에 갇힌 것처럼 착각한다. 현실에서 도망쳐 자기 혼자만의 공간 속에 자기 자신을 가두고, 자신을 구조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내용에 따라 다른 형식을 표현한 점이 아주 신선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지은이가 판타지 소설에 대해 뭔가 오해한 것 같다. 아무리 판타지소설이래도 판타지 속에도 현실이 존재한다. 이야기가 있고 긴장감이 흐른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에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하게 만들고, 긴장하며 기다리게 만드는 매력, 끌어당기는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10대들과 쥐들이 가끔 나타나 잠깐씩 긴장감을 조성하다가도 맥없이 사라질 뿐이다. 이야기라 해봤자 지문에 나타난 몇 줄의 설명이 다다. 그나마 현실을 해결하려는 의지나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판타지 소설에도 엄연히 현실이 존재한다. 다만 판타지 뒤로 숨어 안 보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는 이상하다. 보이는 것보다는 안 보이는 것에 더 관심과 호기심이 끌린다. 판타지가 나오면 더 현실에 끌린다. 이런 심리를 역이용한 것이 판타지다. 말하자면 소설에서 판타지는 현실에 대한 불안, 두려움, 긴장, 위기감을 더 확대 심화시켜 독자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더욱 증폭시키려는 일종의 전략인 것이다. 그래서 현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리얼리즘보다 판타지를 통해 보이지 않는 현실을 표현하는 것이 더 어려울 수가 있다. 그래서 판타지를 다룰 땐 주의해야 한다. 잘못 다루거나 미숙하게 다루면, 안 다루느니만 못하게 된다. 직접적인 리얼리즘에 기대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실패를 경험할 수 있다. 그만큼 판타지는 높은 문학의 공력을 필요로 한다. 웬만한 고수가 아니면 신인이라면 일단 신중하게 접근하는 게 좋다. 어쩌면 지은이는 판타지를 너무 쉽게 착각한 모양이다. ‘돈 때문에 대립하는 부부관계’라는 낡고 낡은 내용을 판타지로 포장하면 그대로 새로운 소설이 된다고 말이다. 형식과 내용은 둘이면서도 하나다. 이 둘이 자연스럽게 하나가 돼야 새로운 소설이 창조된다. 억지로 갖다 붙인 것처럼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따로 놀면,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어색하다면 그건 치명적 실패다. 오히려 판타지가 독이 된 셈이다. 리얼리즘이 식상하다고 섣불리 판타지에 달려들었다간 이런 역풍을 맞을 수 있다. 하지만, 시행착오 없는 성공이 어디 있겠는가. 새로운 시도와 용기만은 높이 사고 싶다. <애절양 2010> 세차장에서 일하는 황보는 여러 동생들과 외아들을 뒤치다꺼리 하노라, 평생을 바쳐 희생해온 인물이다. 월남전에서 입은 부상으로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으련만, 아무리 옆에서 신청하라고 부추겨도, 내 잘못이라는 둥, 아직 몸이 성하다는 둥, 어려운 정부한테 손 내밀 수 없다는 둥 하며 뒤로 미루는 그런 인물이다. 황보에게는 아내를 잃고 혼자 12살 때부터 키워온 외아들 용길이 그가 살아가는 이유의 전부다. 그런 아들이 감옥에 갇혔다. 유신도 아니고 오공도 아닌 시절에 데모를 해서 감옥에 갇힌 것이다. 용길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행정고시를 준비했으나 세 번이나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그 뒤 감정평가사 시험에도 응시했으나 다시 낙방, 이번엔 7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가 면접에서 최종 탈락했다. 그렇게 십여 년 세월이 가뭇없이 흘러 어느 새 나이 서른다섯이 된 것이다. 그런 아들이 면회장에서 황보에게 청천벽력같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동안 아버지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1, 2년 전부터 시험공부를 그만두고 데모를 해온 사실을 실토한 것이다. “아버지, 그동안 공들인 시간이 진짜 무엇을 위해서였는지 저는 이제야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저의 희생이 결코 무용한 게 아니라는 걸 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화가 난 황보는 아들을 원망하고 질타했다. 그러자 아들은 외려 아버지를 원망했다. “아버지의 희생자 근성이 너무나 원망스럽습니다. 왜 저한테 한번이라도 공부 그만두고 그냥 돈이나 벌면 어떻겠냐고 말씀하지지 않으셨습니까.....어쩌면 폭행은 제가 한 게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가 한 겁니다. 그런 희생자 근성 자체가 지금 이 사회를, 우리 집안을 망쳐놓은 거라고요. 저는 방관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정말 못살겠다고, 진짜 죽을 것 같다고 말할 줄 알고, 그렇게 말하면 동정심에서라도 뺏던 칼을 도로 거둘 줄 아는 이 시회에 살고 싶습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 땅을 알면 알수록 치가 떨려 자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들은 집행유예로 석방된 뒤에도 여전히 시험공부도 안하고 일자리도 구하지 않고, 4대강 반대 활동에만 전념했다. 황보는 기가 막혔다.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황보는 칡즙을 파는 여자 여숙의 유혹을 받아들여 잠자리를 같이 한다. 그러나 월남전 때 다친 성기가 화근이었다. 최소한의 요긴한 일을 제외하고는 딴 일을 하지 못하는 신세였다. 결국 여숙과의 잠자리는 뜻을 이루지 못한다. 황보는 아내의 묘를 찾아간다. 도중에 택시 안 라디오 방송에서 다산 정약용의 시 ‘애절양’이 흘러나온다. 그는 아내의 묘 앞에서 바지 지퍼를 내리고 안의 것을 밖으로 꺼내 놓는다. 손가락 두 마디만한 짧은 성기가 불에 덴 듯 모양은 심하게 뭉그러졌으나 어떤 생의 활력으로 꽉 들어차 싹이라도 틔울 듯 팽팽히 발기해 있었다. “그런디 이제와서 워째 그런지 모르겠단 말이여. 이놈의 것이 워째서 나를 그냥 병신처럼 살게 내뻔져 두지도 않으냔 말이여. 얼마 남도 않은 인생 노상 그래왔던 데로, 남이사 뭐라고 지쩔이든 말든 그냥 쥐 죽은 듯이 엎어져 그냥저냥 살려고 하는디, 워째 이놈은 이렇게 자꾸 기를 쓰고 살아보려구, 바락바락 워치게든 해보려구 이 지랄을 떠냔 말이여. 그러면 되려 진짜 병신이 되는 줄 알면서..” 그리곤 서슬 퍼런 낫부리를 성기에 갖다 댄다. “자네는 이해가 가는가. 나는 이제야 알겠네 그 옛적이나 지금이나 말여. 나 같은 놈헌티는 여직도 말이지,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용쓰는 그 마음들이 결국 죄가 되고 미움이 되는 세상 아니겠는가. 그래서 더 비참해지는 세상이 아니겠는가 싶네그려.” 황보는 하늘에 비친 돋는 별을 문득 바라보고는 이내 나머지 제 생의 파편을 잘라낸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줄거리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하필 성기일까. 다산의 시 ‘애절양’과 ‘애절양 2010’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그 거리가 이해되지 않는다. 의미가 와 닿지 않는다. 황보가 아들의 말 뒤에 숨은 진의를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여겨질 뿐이다. 아들은 불의에 저항하겠다고 일어서는데, 황보는 굳이 일어서려는 성기를 자른다. 용쓰면 죄가 되는 세상이니 비참하지만 그냥 엎드려 살겠다는 것인가. 지은이의 관점과 해석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삐꺽대는 소리가 들린다. 어쩌면 지은이는 이 소설을 전적으로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은이와 소설이 한 몸이 되지 못해 자꾸만 삐걱대는 것 아닐까. 치명적인 약점이다. <감별> 주인공의 직업은 ‘병아리 감별사’다. 병아리는 인간에게 생명체가 아닌 일개 소모품이다. 인간을 위해 알을 낳아주고 그 기능이 끝나면 사라지는 소모품인 것이다. 주인공의 직업은 이렇듯 철저하게 인간의 이해관계에 맞춰 병아리의 성별을 구별한다. 이익에 맞는 암컷 병아리만 선택하고, 이익에 맞지 않은 수컷 병아리는 가차 없이 죽여 버린다. 그런 그가 버스터미널에서 기거하는 홈리스 몽골 여인을 주목하는 이유는 뭘까. 자신의 손에 의해 죽어버린 수많은 병아리에 대한 죄책감? 보상심리? 이 작품의 특징이라면, 주인공이 현실에 대해 흥분하거나, 분노하거나, 탄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덕적인 설교를 늘어놓거나 장황한 생명철학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전주의 집에서 광주의 직장으로 매일같이 고속버스로 출퇴근하면서도 애초의 의도대로 광주 직장 근처의 숙소로 이사 가지 않은 이유는 몽골 여인 때문이다. 이 한가지로 그의 직업적인 죄책감이 보상받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일 뿐이다. 이 한계가 바로 현실이다. 이 리얼리티야말로 감동이다.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갇힌 인간의 나약함, 나약함 안에서도 최소한의 무언가를 잃지 않으려 안간힘쓰는 인간의 삶, 그러한 현실, 이것이 우리를 한없이 슬프게 한다. 소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백 마디 천 마디 외침보다 더 가슴이 먹먹하다. 몽골 여인은 보따리 하나를 아기집처럼 품고 산다.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놓지 않는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 보따리 안에 든 물건의 정체가 점점 궁금해진다. 그리고 마지막, 주인공은 몽골 여인과 하루 밤을 보낸 뒤 몰래 그녀의 보따리를 열어본다. 보따리 안에는 희귀한 보물도 거액의 돈도 없었다. 어쩌면 주인공은 그 보따리가 절망적인 현실에서 그를 구해줄 어떤 의미나 상징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따리 안에는 몇 번이나 빨아서 색이 바래고 낡아빠진 그녀의 속옷 몇 가지가 들어있을 뿐이었다. 평소에 쓸모없다고 여길만한 그런 하찮은 물건들이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현실이었다. 낡고, 지루하고, 무가치하고, 평범하기 그지없으며, 대수롭지 않은, 그런 하찮은 우리의 현실 말이다. 소설은 설명이나 주장을 하지 않는다. 현실을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그걸 통해 독자 스스로 가슴으로 느끼게 할 뿐이다. 독자가 책장을 덮는 그 순간 현실에 대한 슬픔과 분노, 욕망, 감동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울 것이다. 그 다음 독자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 아니면 아무 변화 없이 전처럼 그대로 살아갈지는 모를 일이다. 현실에서 떨쳐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든, 그대로 잊어버리고 돌아서든 그건 순전히 독자의 몫인 것이다. 한 가지 약점이라면, 몽골 여인의 개성이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는 점이다. 일부러 신비전략을 사용했더라도 나름대로의 캐릭터가 살아나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다. 어쩌면 몽골 여인에 대한 같은 묘사와 표현이 몇 번씩 중복되는 점 때문에 인물의 개성이 반감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은이가 인물의 캐릭터를 살리는 문학적 능력이 부족한 건지도. 아마 지은이는 알지도 모른다. 2% 부족한 뭔가가 무엇인지 꼭 찾아내주기 바란다. <알바당 선언> 주인공은 강북의 한 변두리 극장 안 매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다. 매점 알바생은 주간조인 희주언니와 나, 야간조인 성연이, 이렇게 총 세 명이다. 소설은 성연이가 희주와 나에게 시급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라며 비좁은 매점 안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장이 운영하는 영화관 매점은 강남과 강북 두 곳에 있다. 강남은 프랜차이즈 아이스크림 매장이고 아르바이트생이 무려 7명이나 될 만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곳이다. 반면에 강북 매장은 파리를 날릴 지경으로 한가하다. 이 때문에 강남 알바생 시급은 4천원이고 강북은 3,800원으로, 200원 차이가 난다. 희주와 나는 노동 강도가 다르니 시급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하다는 논리다. 200원 덜 받더라도 한가한 데서 일하는 게 낫다고까지 말한다. 반면에 성연이는 아무리 편해도 아닌 건 아니라는 식이다. 엄연히 법으로 정한 최저임금제가 있는데, 그걸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파업하자는 요구에 둘이 묵묵부답으로 대응하자, 성연이는 현장 다큐를 찍겠다며 카메라를 들이댔다. 끝내 두 사람이 할 말이 없다며 인터뷰를 거부하자 성연이는 이기적이라며 노골적으로 서운함을 드러낸다. 성연이가 그만둔 다음, 주인공도 복학하는 바람에 매점을 그만둔다. 얼마 뒤 우연히 인터넷에서 성연이가 찍은 다큐를 보게 된다. 다큐멘터리 영화제 블로그에 올라온 성연이의 ‘알바당 선언’이란 제목의 작품이었다. 인터뷰에 나온 강남의 한 알바생은 “물가인상을 반영하여 최저임금이 2.75%나 인상되었는데도 시급이 오르지 않은 건 부당하다”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이어서 “일이 수월하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판단해야 할 대상 자체가 아닌데 왜 그게 최저임금을 받아야 하는 당연한 권리에 걸림돌이 되어야 하냐”고 되물었다. 마지막으로 사장이 화면에 나왔다. 사장은 성연이의 날카로운 질책이 거듭되자 결국 최저임금을 따르겠다고 대답했다. 성연이가 “이백 원 올려줄 거죠?” 라고 윽박지르자 사장은 “그래 이백 원 올려주마.” 하고 빈정대듯 맥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서 성연이의 내레이션과 함께 나와 희주언니의 얼굴이 화면에 등장했다. 주간조 두 알바생에게 임금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들은 뒤 사장과의 임금협상이 체결되었음을 알리려고 했다는 내레이션을 들으며 주인공은 울적해진다. 영상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주인공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씨씨티브이만 올려다보며 어떻게든 사장의 눈치를 보며 질책을 피하려 신경 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복학한 뒤 주인공의 머리에는 성연이의 말이 가시처럼 콕콕 찔러댔다. 때마침 우연히 영화관에 들르게 되고, 매점에서 희주와 새로 온 알바생 그리고 사장 세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주인공은 사장에게 성연이가 찍은 다큐 이야기를 꺼낸다. ‘그때 분명 200원 주겠다고 했는데 왜 안 주냐?’고 따진다. 사장의 말이 나온 지 석 달 뒤에 그만두었으니, 200원 인상분 석달치를 달라고 손을 내민 것이다. 결국 주인공은 사장에게서 35200원을 받아들고 버스에 오른다. 여기까지가 이 소설의 줄거리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자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주요 테마가 될, 마지막 문장 하나가 영 마뜩찮다. “.... 나는 애달픈 사실 하나를 깨닫고 말았다. 내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주머니에 넣어둔 돈의 정확한 액수뿐이라는 현실을 말이다.” 이 마지막 문장이 그만 삐끗하는 바람에 소설 전체가 일그러지고 말았다. 모처럼 ‘아르바이트’ 생의 노동조건이라는 좋은 소재를 그것도 직접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반가웠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물고 늘어져 완성도를 높이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웠다. 사실 여기서 마지막 문장은 문장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은이가 이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 지은이가 이 소설에서 말하려는 가치관과 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다. 그런데 지은이는 바로 이 중요한 대목에서 자신의 직무를 다하지 못했다. 작가의 관점, 가치관 철학이 없어서 그런 건가? 아님 소설쓰기의 미숙함 때문인가? 모르겠다. <굿나잇, 달마>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지금 이 땅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낯익은 자화상이다. 비정규직이나 임시직으로 평생을 시험에 매달려 살아가야 하는 고시인생들이다. 하나같이 매일매일 이력서를 고쳐 써야 하는 백수들이다. 소재나 주제 또한 무겁고 진지하다. 이런 시대의 아픔을 다루다보면 잘못하면 축축 쳐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소설은 시종일관 유쾌하고 가볍다. 소재나 주제의 무거움과 진지함에 비해 표현이 참신하다. 아마도 영화 <와호장룡>이나 무협지 <영웅문>의 이야기가 잠깐씩 등장한 것이 칙칙한 현실을 다소 가볍고 유쾌하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할아버지가 그랬고 아버지가 그랬고 같은 빌라에 사는 고시 오빠라는 사람도 그랬다. 그리고 지금 29번째 이력서를 쓰고 있는 주인공 역시 그러하다. 모두가 하나같이 고시인생들이다. 고시인생은 무림에서는 무림고수로 손꼽힌다. 무림의 고수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술을 연마하고 수련에 정진한 것처럼, 고시인생들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를 해야 한다. 잠을 자지 않기 위해, 몰려오는 졸음을 쫒기 위해, 그들은 달마처럼 눈썹을 뜯어내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거의 잠을 자지 않는 경지에 이른다. 이것이 절대 고수의 경지다. 주인공은 이런 아버지를 떠올리며 29번째 이력서를 준비한다. 그런데 왠지 소설이 어지럽다. 지은이가 자주 길을 잃고 헤매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부족해 보인다. 2%가 부족한 게 아니라 참 많이 부족해 보인다. 소설은 재미와 의미 두 가지가 다 들어 있어야 제 맛이 난다. 뼈대만 앙상하면 재미가 없고, 살만 찌면 남는 게 없다. 그래서 튼튼한 뼈대에 적당한 살집이 붙어야 한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살집에 해당하는 부분이 <와호장룡>과 <영웅문>이다. 없으면 재미가 없는 그런 존재다. 가벼움과 유쾌함을 던져주는 이 소설의 가장 특별한 인상의 중심에 이 <와호장룡>이나 <영웅문>이 있다. 물론 이 영화와 무림소설은 누구나 다 아는 친숙한 내용이다. 지극히 대중적이라서 굳이 따로 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없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장점이기도 하고, 동시에 약점도 된다. 너무나 뻔하고 낡았기 때문에 잘못 사용하면 싼 티가 날 수 있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대중적인 영화나 소설을 인용할 때는 반드시 지은이만의 특별한 냄새와 색깔이 가미돼야 한다. 지은이만의 독특한 해석과 관점에서 우러난 보편성으로 공감을 얻어야 한다. 그러려면 현실에 대한 통찰력과 사유의 깊이를 가져야 한다. 만약 그냥 쉽게 가려는 의도에서 누구나 다 아는 그저 그런 영화나 대중소설을 인용했다면 엄청난 실수를 한 셈이다. 쉬운 길만 찾다가 싸구려로 전락했다는 비난을 듣기 쉽다. 그럴 거면 차라리 그 정성을 재미가 아닌, 의미를 튼실하게 세우는 데 썼으면 좋지 않았겠는가. 재미는 재미대로 못 살리고, 의미는 의미대로 잃으면, 남는 게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현실에 대한 통찰과 깊은 사유를 통해 자신만의 관점과 해석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문학에서의 내공 아니겠는가. <야쿠르트 한 개> 한 야쿠르트 아줌마의 소소한 일상사를 다루었다. 남편 잃고 혼자서 아들을 키우던 주인공은 어느 날 아들을 수술대 위로 보내게 된다. 그런데 수술실 안으로 사라진 아들의 모습이 마치 사라진 남편의 모습과 겹쳐진다. 주인공은 절망과 두려움에 몸을 떤다. 이상하게 아무리 읽어봐도,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음에는? 하는 호기심도 열망도 없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매력이 없다. 슬프면 슬픈 대로, 분노에 찬 현실이면 그런대로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주인공의 고단하고 비극적인 삶에 대해 아무런 느낌이 없으니 절실한 감동이 와 닿지 않는 건 당연하다. 소설은 허구다. 허구가 현실보다 더 힘이 있으려면 현실보다 더 힘 있는 허구를 상상해내야 한다. 창작자의 강한 상상력이 독자들로 하여금 창작자 이상의 상상력을 증폭시켜야 한다. 그럴 때 허구는 현실 이상으로 강한 포스를 품어낸다. 이 소설에서는 강한 포스가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 나약하고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다. 이유가 뭘까. 무엇보다 이야기 소재나 주제가 소설감이 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아무리 좋은 글발로도 이런 사소하고 평범한 이야기를 감동 있게 표현해내기란 어렵다. 더욱이 신인이 이런 지극히 평범한 소재에 도전하는 건 독약을 삼키는 것과 같다. 백이면 백 다 죽는다. 신인은 처음 쓰는 만큼, 소재나 이야기가 강렬한 글감을 골라야 한다. 비록 표현은 서툴고 문장은 모자라고 구성도 허술하기 짝이 없어 흠집투성이라 해도, 강렬한 주제의식이나 특별한 이야기 거리 만으로도 신인이라는 미숙함을 커버할 수 있다.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작가라면 아무리 낡은 소재, 평범한 이야기 거리만 갖고도 긴 장편 한권을 채워나갈 수 있다. 남는 의미는 없어도, 글발이나 상상력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게 이끌어나가면서 독자를 끌어당길 수가 있다. 하지만 신인은 다르다. 글발도 상상력도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이야기 감마저 평범하기 그지없다면 무엇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길 것인가. 신인이라면 새롭고 특별한 이야기 거리로 승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지 않겠는가. - 예심 : 홍명진, 최용탁 - 본심 : 안재성, 김하경 |
첫댓글 초보시인은 전위시인이다 라는 말이 인상적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