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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세부적인 체계
[1].
마음의 밑바닥에서 보면 소소영영하고 고요적적한데
마음의 껍데기에서 보면 뒤숭숭하다고 했는데
마음의 밑바닥에서 본다는 것은,
어떻게 본다는 것일까?
답;
화엄선원에서 배우는 [조론의 물불천론]에서. 사물의 움직임 속에서 사물이 움직이지 않는 도리를 보는 것과 같고, (마음의 껍데기에서 보지 않고 마음의 밑바닥에서 봄)
“러시안룰렛게임”에서 죽음의 공포 속에서 마음이 여여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과 같으며,(마음의 밑바닥에서 보면 소소영영하고 고요적적하지만, 껍데기에서 보면 공포와 두려움으로 정신이 혼미해진다)
또 이것을 “진제와 속제”라고 하고
또 이것을 “진공 묘유”라 하는 것이다.
또 이것은 색계4선정에서 (욕계에서 벗어난 후) 색이라는 물질이 해체되고 진공이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문제는 모든 경전에서 수없이 다뤄지고 있다. 새삼스러운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공부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아쉬움]
그러나 큰스님께서 경전을 많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의 깨달음을 표현하는데 넓지 못하다. 좀 더 많은 경전을 보셨더라면 다양한 표현법을 가지고 부처님처럼 수많은 중생을 이끌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이 아쉽다. 이 영상에서도 깨달음을 정확히 표현하지 않으시고 어중간하다.
일반 알음알이는 절대 안 된다고 하시면서도 깊은 경지의 깨달음과의 차이를 똑 부러지게 가닥을 잡아주지 못하신다. 만약 “진공묘유”나 “색계4선정”이나 또는 “9차제정”이나 “공(空)”에 대해서, 그리고 “지혜”와 “삼매”에 대한 구별을 좀 더 폭넓게 아셨더라면, 법문할 때의 표현이 더 명확했을 텐데, 그런 것들이 너무 아쉽다.
그리고 표현해낸다고 하는 것은 그냥 공짜로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아는 것만큼 더 많은 표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과 같은 위대한 설법자가 되려면 표현하는 방법을 깊이깊이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 한 “예”로 서양의 수행자들의 표현력은 동양수행자들 보다 더 뛰어나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마음의 밑바닥” 또는 “소소영영”이나 “고요적적”이라는
표현은 삼매 속으로 들어갔을 때 나타나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지, 그냥 알음알이로 따져서 아는 그런 낮은 수준이 아니다.
또 “보고 듣는 이 자리”라고 하니까 초급자는 이것을 쉽게 여기고 “아! 내 본성 자리를 말하는 것이구나” 하고 쉽게 이해하려고 한다면 큰 착각이다. 이런 것을 알음알이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소소영영, 고요적적 상태에 들어가려면 그냥 들어갈 수 없고, 내 마음을 전부 놓아버리고 모두 집착을 포기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삼매로서 아주 깊은 경지를 말한다.
(그러나 수많은 초급자들은 이런 깊은 수행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머리로 이해하면 그것이 “이해로 깨닫는” 것인 해오(解悟)로써 공부가 끝난 것 아닌가! 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큰스님들이 똑 부러지게 가닥을 잡아주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성철큰스님이 “해오”는 절대 안 된다. 반드시 “돈오돈수”라야 된다고 하신 것도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핵심]
그러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뤄보자.
먼저 자신에게 물어보자.
과연 러시안룰렛(권총게임)을 내가 직접 당할 때 내 마음이 여여한가(편안한가)?
또 사형 집행과 같은, 엄청난 공포 속에 앉아 있어도 그것들이 모두 그림자나 허상처럼 보여, 전혀 신경 쓸 것 없는 것들이라고 여겨지는가?
만약 그렇게 여겨진다면, 그 러시안룰렛은, 나에겐 실재하는 것이 아닌 장난감 같은 헛것에 불과한 것이다.
왜 헛것인지 하나하나 정밀히 분석해 보자.
만약 그것이 진짜였다면 내 마음에 강력한 힘으로 각인되어 도저히 잊지 못할 것이고 또 지워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이 허상이고 장난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내 마음에 강하게 각인되지 못하기 때문에, 내 머리 안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 화면을 머리에서 지우고 싶으면 그것은 쉽게 지워질 것이다. 왜냐? 기억에 남아있을 힘도 없는 허구이니까 그렇다.
하나의 예를 들면,
파리 하나가 윙 날아서 천장에 앉았다면 그것이 내 기억에 강하게 각인이 될까? 절대 기억에 남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랑 큰 연관이 없기 때문에 파리가 날아가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자! 그럼,
이 같은 “사항 설정”이 정확히 이해됐다면,
이 문제를 가지고 지금 시험해 보자.
내가 직접 러시안룰렛을 하는 당사자라고 생각하고, 그 영상이 쉽게 지워지는지 시험해 보자!
(수련한다고 생각하고 진지하게 해 보자)
사형을 당할 때와 같은 처절한 상항이 현재 펼쳐졌다.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종말이 오는 것 같은 상항 속에 처해있다.
자! 이 현상이 내게 어떤 자극을 주는지 살펴보라.
만약 어떤 자극도 주지 못하고 조금도 심각하지 않다면,
이 러시안룰렛게임은 나에겐 진짜가 아니라 허상인 장난에 불과하다.
만약 허상이라면
그 영상은 없는 것과 같으므로 내가 그것을 마음에서 지우려고 하면 너무나 쉽게 지워질 것이다.
이렇게 쉽게 지워져 텅 비어진다면,
그것은 축복 받을 일이다.
나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수행자이다. 별 힘들이지 않고도 대단한 진전을 봤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대단한 경지로서 색계 제1선정이라고 하고, 또 이것을 깨달음에 들어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일반 초급자는 이런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지면 그 영상을 절대 내 머리에서 쉽게 지울 수가 없다.
너무나 크게 각인되기 때문에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이렇게 난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수행에 들어가자마자 그 영상이 쉽게 지워진다면, 이것은 타고난 수행자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점차 더욱 숙달되어, 언제 어느 때나 마음만 먹으면 잘 지워지면, 그 경지는 색계 제4선정에 도달한 것으로, 이것을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영상이 전혀 안 지워지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고 알음알이에 불과하다는 (너무나 뚜렷한) 증거가 된다.
이것은 러시안룰렛게임이 나에겐 장난이나 허상이 아니고 실재라는 뜻이다.
엄청난 충격으로 내 머리에 강하게 각인 됐다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해,
내 마음속에 강하게 각인된 실재적인 사실이며,
죽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는 괴물인 것이다.
보통 수행자들은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정확히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영상을 지우는 일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 영상이 얼마나 지워지지 않는질 모르는 것이다.
완전히 찰거머리처럼 나의 집착을 따라 붙어있다.
이것을 떼어낸다는 것은 목숨의 죽음과 맞바꾸는 것들이다.
나의 죽음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해심밀경에선 영상을 지우는 것을 수행의 핵심으로 여겼던 것이다.
(해심밀경은 유식론의 근본 원전이다)
그래서 큰스님께서도 이것을 표현할 때 “마음의 밑바닥에서 보라”고 하셨고 절대 중간이나 껍대기에서 보면 안 된다고 했던 것이다.
(큰스님은 경전을 많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의 표현방법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밑바닥”이라는 말씀의 심오한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큰스님께선 영상을 지운다는 표현은 비록 안 했지만, 일체의 생각을 다 놓아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 해야 된다고 하셨고, 그것에 직접 도달하기 위해선 내 영혼을 다 바쳐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마음의 밑바닥”, “소소영영”, “고요적적”, 이라는 용어는 삼매에 들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용어들이다. 즉 공무변처에 들어야 알 수 있는 용어다.
이것은 일체를 놓았을 때, 모든 의지를 포기했을 때, 비로소 일어나는 삼매들이다.
그러므로 일상적인 생각으론 절대 알 수 없는 삼매들이다.
그런데도 아쉬운 점은 석가모니께서도 말씀하셨고, 금강경에서도, 반야심경에서도, 모두 말씀하신 “진공묘유”를 큰스님은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아쉬운 점이다.
그렇지만 경전을 배우지 못한 선사(禪師)의 입장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만도 하다.
[2].
찬 것을 보고 찬 줄 알고, 더운 것을 보고 더운 줄 아는 것이 진리라고 했는데, 누군들 이렇게 못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
답;
예를 들어, 러시안룰렛게임을 할 때 공포와 두려움 없이, 현실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권총이 내 옆머리에 대고 지금 방아쇠를 당겨 머리를 파괴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어떠한 공포나 두려움이 없이
마치 남의 집 불구경하듯,
어떤 감정도 개입시키지 않고, 객관적으로 한 폭의 그림을 보듯이, 사실 그대로 바라만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애들 소꿉놀이하듯 장난으로 머리에 장난감 총을 들고 빵하고 방아쇠를 당기듯 바라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울 때 덥다고 하고 추울 때 춥다는 말의 의미다. 단순히 덥다 춥다 그 외는 상상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손이 시리다고 했을 때 손 시린 것 외는 상상하지 말라는 뜻이다.
예로 들어, 뜨거운 용광로 안에 들어가더라도(소신공양을 할 때) 더 이상 죽음과 공포를 상상하지 말고 단지 뜨거움만 느껴라 는 뜻이다.
그래서 이 속에는 죽음의 공포가 없다. 그냥 뜨거움이라는 감각만 느낄 뿐이다.
그러나 중생은 이렇게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상상으로 죽음을 미리 불러와서 공포와 두려움으로 몸은 굳어지고, 눈은 죽음의 그림자로 혼미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건을 사실 그대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상상을 동원해 존재하지도 않는 지옥을 불러와서 자기의 마음을 덧씌우는 짓이다.
그래서 이런 어리석음 때문에, 추우면 그냥 춥다고 하지 못하고, 더우면 덥다 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사실 그대로 보라”는 뜻인데 초보자는 이것을 아주 쉽게 일상적인 용어로 해석하려고 하는 실수를 범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절대 쉬운 용어가 아니다.
위의 예를 다시 보자,
펄펄 끓는 뜨거운 용광로에 들어가라 하면(소신공양을 할 때) 들어가기도 전에 상상으로 공포와 두려움을 만들어가지고 벌벌 떤다.
사실적인 것 외에 자기의 감정을 개입시켜 두렵고 무서워 하기 때문이다. 그냥 뜨거운 것을 “뜨겁구나” 하고 바라만 보라는 것인데,
절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반드시 자기의 감정을 개입시켜서 뜨거움을 무섭고 두려운 뜨거움으로 변화시켜서 바라본다.
그래서 이렇게 보지 말고 그냥 뜨거운 것은 뜨겁구나 하고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쉬운일이 아니다.
만약 이렇게 단순히 뜨거움을 그냥 뜨겁구나 하고 보려고 하면 자기의 목숨을 죽여놓고 보지 않으면 절대 볼 수 없다.
이러니 이 용어가 얼마나 어려운 용어인지 감을 잘 못 잡을 것이다.
자기의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본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난해한 것이다.
3.
바람소리 물소리 모두가 법문이라고 했는데,
중생은 듣기 싫은 소리는 싫다고 하고, 듣기 좋은 소리는 좋다고 한다. 그렇다면 부처는 어떻게 들을까?
답;
미운소리 고운소리를 들을 때 껍데기에서 듣지 말고 깊은 곳에서 들어라는 뜻이다.
껍데기에서 들으면 나의 입장에서 좋고 싫은 것을 둘로 나누지만, 깊은 곳에서 들으면, 즉 나의 잣대를 모두 버리고 내 마음이 완전히 죽었을 때 들으면, 그곳에는 좋고 싫은 것이 없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얻을 것인지 실험해 보자.
예로 들어,
내 자식을 죽인 원수를 보라.
죽여서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은 그 원수가, 아무 의미 없는 헛것으로 보이는가?
다시 말해, 그 원수를 마음에서 지우고 싶으면 언제든지 쉽게 지워지는 허상으로 보이는가?
이렇게 허상으로 보인다면, 그 땐, 좋고 싫음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부처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고 싫은 것이 없는 자리가 나의 본래 자리고,
모든 이분법이 해체되어 나와 너, 좋고 싫음, 삶과 죽음이 없는 자리가 본래 자리다.
그 자리를 보려고 하면 나와 너라는 양변법이 깨져야 하므로,
즉 주관과 객관세계로 둘로 나누지지 않는 세계를 자신이 체험했는가를 보면 된다.
과연 나는 그런 세계를 눈앞에 펼칠 수 있는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