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현대 서정의 메시아Messiah
서태수
1. 현대시조의 존재 이유는 대중의 운율적 향수 자극
우리는 현대를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600년 이상 묵은, 혹은 낡은 시조를 쓴다. 현대에 이 오랜 양식이 왜 필요한가. ‘고유한 전통’이라는 대답은 문학사적 관점일 뿐 정답은 아니다.
시조의 필요성에 대한 찬반의 견해는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 각자 나름대로의 논리적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선택의 문제에서 우리는 전자를 택했을 뿐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시조의 소명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고 주장하는 대안代案은 자유시다. 자유란 리듬의 배격이다. 리듬은 시간적 동일성의 반복이다. 자유시에서 근거로 삼는내재율內在律은 심각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작가든 독자든 자유시의 창작과 감상에서는 운율이 주요 관심사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시의 중요한 한 요소인 형식, 즉 운율적 요소는 설 자리를 잃게 되었고, 운율을 잃어버린 메마른 시 ‘자유시’가 현대시를 대표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무릇 모든 생명체는 리듬을 타고 살아가며 우주 자연도 리듬으로 순환한다. 그런데 현대는 리듬 상실의 시대이다. 속도를 추구하는 현대는 리듬을 배격하기 때문이다. 고전적 이동법인 발걸음, 말[馬], 자전거, 증기기차, 배[船] 등은 2박자, 3박자, 4박자의 리듬을 지녔지만 이제는 이들 리듬을 구경하기 힘들다. 율격적 보법步法을 잃어버린 현대의 이동 도구들, 자동차나 비행기나 쾌속정이나 KTX에는 리듬이 없다. 여기에 자유시가 영합한 것이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하여 현대인은 체감적 율동감을 상실해 버렸다. 식재료도 계절을 초월했다. 현대인의 삶의 양식도 리듬을 잃게 되어 생활만 삭막한 것이 아니라 문학마저 메마른 시대를 살고 있다.
김준오는 그의『시론』에서 ‘현대시가 리듬을 외면한다는 것은 감수성의 분리가 아니라 정서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했다. 현대 직전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은 리듬이 지배했다. 조선시대도 문학은 리듬에 지배당했다. 한문 문장과 한시는 물론이려니와 한글 문학인 판소리 사설, 가사, 수필, 소설 등도 문장은 율감律感 속에 운용되었다. 조선 문학계를 지배했던 이 리듬 현상이 이른바 ‘개화기’ 이후의 반작용으로 현대에는 철저히 배척 받고 있다. 지금도 좋은 산문散文은 리듬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알면서도 그렇다. 우여곡절 끝에 시조가 살아남았다.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 이 리듬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양식이 외롭고 고고한 현대시조의 위상이다.
현대시조가 삭막한 현대 서정의 메시아Messiah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형정신에 입각해서 창출된 시조가 지닌 현대적 의의는, 자유시가 잃어버린 정형적 서정을 시조적 리듬을 통해 보완하여 대중의 운율적 향수를 자극해야 한다는 점이다. 전통 때문이 아니다. 사라진 고유문화는 많다. 세계 유일의, 민족 고유의 전통이라고 해서 우리가 현대시조를 창작하는 것은 아니다. 시조시인의 주업主業이 전통문화 전수는 아니기 때문이다. 문인은 문학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현대인에게 잃어버린 리듬감을 회복시켜 조화로운 생명성 운용의 활력을 심어주는 것이 정형률을 지닌 시조 양식의 소명이고 현대시조의 존재 이유다.
2. 시조문학의 정체성은 정형정신定形精神
시조의 특장特長은 특정한 율격律格의 미학美學을 절대적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 내면에는 섬세한 변주變奏의 율감律感을 맛보게 하는 데 있다. 이러한 정형이비정형整形而非定型의 미감이 속박 속의 자유정신自由精神이며 이 묘미가 시조의 오랜 생명력 지탱의 근간이다. 따라서 시조의 정체성은 정형정신定形精神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시의 형식은 운율이며 시의 내용은 정서와 사상이다. 즉, 시의 3요소는 운율과 정서와 사상으로, 시의 탄생은 언어미감言語美感의 기교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의 주된 관심사는 ‘무엇을’ 전달하는가보다 ‘어떻게’ 전달하는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하다. 실제로 시인의 창작 과정도 ‘무엇을’보다 ‘어떻게’에 고심을 거듭하며, 독자의 정서적 감동 여부도 이 방법론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그러면 시 특히 시조에서 ‘어떻게’ 전달하는 것이 좋은가를 다시 확인해 보자.
첫째, 시적 대상을 시인의 안목으로 재해석한다. 이를 ‘세계의 자아화自我化’라 한다. 둘째, 자아화한 세계를 정서화한다. 이 정서화는 표현의 묘미를 구사하는 감각적 요소가 된다. 셋째, 내용을 특정한 운율적 형식 속에 수용한다. 이때 율격의 맹목적 수용이 아니라 내용에 적합한 율격의 완급緩急을 조절한다. 그 조절이 정형이비정형整形而非定型의 미학이다.
시조는 정형시다. 그런데 왜 엄격한 정형定型이 아닌 정형이비정형整形而非定型인가?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 전기는 모든 가치관이 획일화된 정형定型 구조의 시대였다. 따라서 행수, 음수율, 음위율, 음성률 등으로 규제된 엄격한 정형성의 한시漢詩가 조선의 대표적 문학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한국어는 첨가어로서 음수율을 정형으로 지정하기에 매우 유리한 언어조직이다. 그런데 시대적 요청에 따른 시조 역시 엄격한 정형구조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음수율의 변주變奏를 허용했다. 이것이 조선 선비들의 미학적 여유였다. 3장 6구 12음보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섬세한 변주를 허용하고도 즐겼다. 속박 속의 자유정신이다. 민속학을 살펴보면 계급의 엄정한 성리학 시대에 살면서도 이러한 속박 속의 자유정신을 구가한 문화는 왕권, 반상班常, 남녀의 구별 없이 당대의 사회 곳곳에서 허용되었다. 서구 사학자들이 경악하는 단일 왕조 500년 유지 비결의 한 요소이기도 하다.
시조작품을 읽다 보면 미묘한 율감律感의 파격적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이 점이 자유시와 현격하게 다른 시조의 변별적 매력이다. 이 섬세한 변주 속에 시조 율격미의 정치精緻한 묘미가 담겨 있다. 정형整形의 율격 속에서 자유롭게 변주되는 이 정치한 율격 운용의 묘미가 바로 시조의 정체성이요, 이 묘미를 한마디로 말하면 곧 ‘정형정신’이다. 정형정신은 정형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정형으로부터의 탈출을 도모한다. 이 변증법적 모순이 정형이비정형整形而非定型으로서의 시조의 매력이다. 이 매력이 확산되어 엇시조, 사설시조를 창출한 것이다.
문학에서 형식이란 문학 작품에 나타나는 개별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단일한 작품으로 조직하는 원리다. 과거에는 형식을 외피外皮로 정의하였으나 현대에 와서는 원리적 정의를 수용한다. 즉 형식은 그 속에 내용 또는 주제를 담는 고정된 용기容器가 아니라, 작품을 구성하는 형성形成의 원리라고 보는 것이 현대 비평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그런데 시조시인이나 시조 이론가는 대부분 시조의 형식을 용기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현대비평의 개념에서는 시조의 형식도 이와 같은 형성의 원리가 적용되는 구조로 보아야 한다. 시조 형식은 붕어빵 기계틀이 아니고, 시조시인은 붕어빵 장수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황진이 시조에서 종장을 ‘어른님 오신날 밤은 굽이굽이 펴리라’의 3-5-4-3 구조로 하면 용기로 담은 것이고, ‘어른님 오신날 밤이여란 굽이굽이 펴리라’의 3-7-4-3 구조는 형성원리로 창작한 것이다. 전자는 잣수율에 기계적으로 맞추었고 후자는 밤의 길이와 음절수가 호응되도록 했기 때문이다. 초장 ‘동짓달 기나긴 밤’의 3-5도 마찬가지다.
시조가 지닌 정치한 묘미를 간과함으로써 창작에서 시조의 현대적 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시조 비평에서도 그 매력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형식 논쟁을 파격破格 논쟁으로만 치부하고 거기에 매몰되는 어리석음을 반세기 동안 반복하고 있어 시조 양식이 지닌 ‘현대적 매력’을 발현시키지 못하고 있다.
시조의 매력과 끈질긴 생명력은 시조의 정형정신, 곧 속박 속의 자유정신에 있다. 시조 형식 ‘3장 6구 12음보’는 다양한 변주가 가능한 시조 양식이 지닌 원형적 구조이다. 이 원형原型은 시조의 내포를 강화하는 최고의 미학구조이다. 반면에 음수율 변주나 변격시조는 인간의 복잡한 서정을 다양하게 담으면서 시조문학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는, 시조 양식의 축복이다.
3. 시조시인의 소명은 시조의 정치한 묘미 구현
시조시인들은 시조를 창작할 때 음수율 운용에서 어떤 인식을 갖고 임할까. 시의 기본 형식을 전범典範으로 삼아 어휘를 다듬어 차곡차곡 3-4-3-4로 주워 담을까. 아니면 시의 내용에 따라 의도적으로 음수율을 변주할까.
시조가 지닌 정형 양식은 양면의 칼날이다. 정형률은 문학예술의 측면에서 볼 때 시조시인에게는 축복이 되기도 하고 재앙이 되기도 한다. 축복이 되는 이유는 형식만 맞추어도 ‘시조’가 되는 편의성이다. 재앙의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형식의 고정성과 창의성의 충돌이다. 이는 문학예술의 본질과 연관된 문제로서 모방과 창조의 상충에서 기인한다. 창작이 생명인 문학에서 시조는 일단 형식면의 창작 기회는 박탈된다. 자칫 율격 창작의 신선미를 발현하기가 쉽지 않아 쉽게 식상함에 빠져든다는 점이다. 시조시인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나마 형식 운용의 미를 창안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둘째, 전통성과 현대성의 충돌이다. 이는 곧 낡음과 새로움의 문제이다. 전통성에 매몰되어 형식의 고정성을 집착하면 매너리즘에 빠질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형식적 매너리즘으로 인하여 내용의 진부함에 빠져들기도 쉽다.
시조를 짓거나 읽을 때 시조 형식이 답답하다는 사람과 호흡에 잘 맞는다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자유 서정에 익숙한 사람이고 후자는 시조 율격에 탐닉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두 경우 모두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시조 율격의 제약성에 대한 오해이다. 시조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지극히 제한된 시형을 정체성으로 하는 그런 단조로운 문학 양식이 아니다.
앞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조에 깃든 시정신은 잣수율이든 음보율이든 자유자재로운 신축성을 지녀, 시조는 그 창작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겸비하고 있는 시형이다. 정형시인 시조에 깃든 이런 열린 시정신을 시대에 맞게 활용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시조시인의 민족문화적 소명이다. 시조시인도 독자와 마찬가지로 공동사회 속에서 같은 고뇌와 인식을 지닌 동시대인이므로 현대적 자유시의 흐름을 외면할 수는 없다. 시조도 사회 문화적 소산이기 때문에 과거의 문화유산인 시조가 현대의 문화 창조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에 따라 그 존립 자체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시조시인은 현대가 지향하는 자유 서정과, 잃어버린 율격 서정을 조화시키는 창작이 필요한 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조 작법에서 시조의 내용에 맞춰 음수율, 또는 음보율이 지니고 있는 정치한 율격미를 정교하게 활용하는 기교를 구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시조 율격의 내밀한 묘미를 살리는 길이다. 그러면 창작도 재미있고 독자도 지루하지 않게 된다. 방법론에서 소음절, 대음절의 운용 기법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으나 일반적으로 의미와의 연장선상에서 조화를 이루게 함이 원칙이다. 상승과 하강, 결핍과 잉여, 가벼움과 무거움, 긴장과 이완 등에 호응하는 다양한 잣수율의 변주가 가능할 것이다. 기본 시형을 지키는 범위의 변주는 정격이 될 것이고 그 변주가 커질수록 변격으로 확장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시조시인의 소명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성취되어야 한다. 하나는 시조가 지닌 정형성을 기반으로 하는 원형 계승이고, 또 하나는 시조가 지니고 있는 정형 정신의 계승이다. 전자는 시조가 지닌 정형적 형식의 바탕 위에 현대적 서정을 접목시키는 단아한 멋의 창조를, 후자는 속박 속의 자유정신에 입각하여 이를 현대적으로 변용시키려는 다채로운 시도이다. 이런 시조 작품은 정형이면서도 자유 서정의 리듬을 견지하게 된다. 시조 양식이 지닌 이 정치精緻한 생명성이 수백 년을 지속해 온 시조의 매력이다.
(2018. 《부산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