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수염고래를 보는 것은 차가운 햇빛에 타는 일이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흐리고 때때로 흰수염고래
현택훈
구름이 내려앉은 바다에 흰수염고래가 헤엄을 친다 젖은 꿈을 꾸는 안개비는 옛날이야기의 산에서 내려왔을까 사람들은 안개로 만든 배를 타고 수평선을 넘을 것 같다 바다거북 등을 타고 꽃들이 가득한 섬에 다녀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안개는 무엇이든 다 만들 수 있다고 장담을 하던 작은외삼촌을 닮았는데 알몸으로 바다에서 첨벙거리던 날까지 갈 수 있나요 바다는 구곡간장을 품고 있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둥근 지붕이 되는 이야기가 젖은 빨래 같다 오늘 날씨는 흐려서 명징하다 흐린 날엔 흐린 얼굴로 살아야 하는 생태계가 있으므로 흰수염고래가 헤엄을 친다 안개비에만 속수무책인 건 아니기에 축축한 날들의 일기예보를 짜서 내일 햇빛에 말린다
****************************************************************
파란색이 먼저 보이거나 흰 수염이 먼저 보이기도 한다.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지만 보려고도 하지 않으면 안 보이는 것을 보이는 척해야 하는 곤혹에 걸려들게 된다. 영어로 Blue Whale, 우리말로는 흰수염고래 또는 흰긴수염고래.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이라 해서 ‘대왕고래’라고도 불리는 흰수염고래는 시인이 될 수도 있고 독자가 될 수도 있지만 모든 독자에게 해당되진 않는 구구절절한 상상력과 예상치 않은 반전과 각본을 무색하게 하는 애드리브(ad lib)를 갖춘 이가 흰수염고래다.
‘사람들은 안개로 만든 배를 타고 수평선을 넘을 것 같다’에서 ‘안개’도 ‘수평선’도 다가가면 갈수록 더 멀어지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이는 시계 제로(詩界 Zero)의 관할구역에 들어와 상상력과 반전의 물고 물리는 시가전(詩家戰)을 방불케 하는 시의 성향을 지닌 시인의 색깔이 묻어 나왔기 때문이다. 덧붙이면 ‘바다거북 등을 타고 꽃들이 가득한 섬에 다녀온 사람’은 한껏 부푼 풍선 같은 시인의 상상과 반전에서 나온 표현이며 ‘안개는 무엇이든 다 만들 수 있다’는 애드리브의 제3인칭 ‘작은외삼촌’을 변증법의 수렁에 빠뜨리지 않아도 필자 역시 ‘알몸으로 바다에서 첨벙거리던 날까지’ 가고 싶게 한다.
독자가 모두 시인이 될 순 없듯이 시인도 모두 독자가 될 순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필자 역시 흰수염고래가 될 수 있는 전제조건에 미달하면 독자가 될 수 없다는 두려움이 ‘둥근 지붕이 되는 이야기가 젖은 빨래 같다’와 ‘흐려서 명징하다 흐린 날엔 흐린 얼굴로 살아야 하는 생태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일까? 자문하게 된다. 결국 가장 덩치 큰 흰수염고래도 애드리브로 꼬리지느러미를 꼭 드러내지 않으며 무리를 이루지 않고 극소수로 다닌다. 그래서일까 ‘속수무책’의 날들이 젖은 꿈을 앗아가도 ‘내일 햇빛에 말리는’ 눈을 가진 독자도 시인도 드러나지 않고 많이 보이진 않는다.
흰수염고래를 보는 것은 차가운 햇빛에 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