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미예수님
1997년 금융대란직전에 대기업에서 거의 쫓겨났다
우리들이 다 아는 내용이지만 금융대란을 가장 큰기업이 사라졌는데 대우였다
저는 퇴직금을 받은것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사실 사업자금이라기 보다는 생활비로 대부분 사용되었다
그때 한창 학교에 다녔던 아들이 있었다
공부는 그리 잘하는 편도 아니고 열성적인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아들에게 아빠 노릇을 하지못해서
지금 30대후반인데도 제역할도 못하고 집에쳐박혀있는 것이 못내 가슴아프다
제가 나오면서 소득이 없자 아내는 옷장사를 시작한다
동서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도움으로 집가까이에 있는 이랜드에서 옷을 파는일이었다
이로 인해서 안산으로 이사오게되었다
안산에 오기전에는 아내는 아침에 일어나서 안산으로 출퇴근하였다
시흥역앞에서 아파트에 살고있었는데
너무 많은 빚으로 감담하지 못하고 이를 처분하고 안산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인 원곡동으로 이사온것이다
그때 마침 원곡동 벽산아파트가 막 입주하고 있었던 때였다
이사올때에도 그날이 장날인지라 어수선했다
저는 먼저 가까운곳에 성당이 있는지알아보았다
성당에서는 새로운 아파트단지가 생기면 그곳에 집중적으로 안내를 하였다
그 덕분인지 주임신부님으로부터 관심을 받아서 레지오와 구역모임을 시작한다
아파트단지에서 가까운역까지는 1~20분거리면 걸어갈수가 있었다
처음 이사갈때에는 저는 실직상태였다
단지 아내가 안산시청근처에 있는 이랜드에 다니기에 이곳을 정한것이다
그래도그때에는 아내는 대우에서 산 자동차를몰고 다녔었다
이사온지 10개월이 지나서 사촌동생의 도움으로
안산시청소속인 차량등록소에 다닐수가 있었다.
집에서 1~20분걸리는 아주 가까운거리였다
그곳에서 아주 어렵게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운이 좋아서 교우를 만나서 시청교우모임에 참석하게 됨으로서
여러 교우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에게는 이런일이 정신적으로 많은 안정감을 주었다
불과 정년을 2년남기고 저는 구청에 있는 녹지과로 발령을 받았다
처음해보는 공원에서의 청소와 각가지일들은 저를 아주 힘들게 했다
그러나그곳에서 만난 교우들로 인하여 차츰 적응해 나갔다
언젠가는 일하는 공원에서 가까운곳의 성당에 평일미사를 갔다
비자루를 든채 성당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미사중이시든 신부님으로부터 간단함 말도 듣기도 하였다
그시간만은 나에게 힘이 되었던 것이다
보통 시청에는 100여명이 넘는 교우가 있었지만
참석하는 이는 그리많지않았다
그래서인지 통상 정식직원이 아닌 저와 같은 계약직이 이 모임에 참석하는 에는
없었는데 다들 도와주셔서 자주 참석하였다
사실 가난과 어려움을 처음에는 잘 실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세집을 구하지 못해서 전전하다가 드디어연립을 구하게 된다
그러나 그집은 무당이 살았던 집이었다
아내모르게 이사가기전에 미리 그곳에 가서흔적을 지웠다
그런 어려움속에서 더 많은 본당교우와 친분을 가질수가 있었다
서울에 있을떄부터 저는 성령기도회를 다녔다
서울에서는 매주 철야기도가 있었다 어려움을 겪고나서 열심히 다녔던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 안산에 왔을때에는 원곡동에는 성령기도회가 없어서
매주 주말이면 서울로 갔던것이다
그이후 생겨서 열심히 다녔더니만 저를 아껴주시는 누님들이 계셨다
한날 그누님들이 좋은 단체가 있으니같이 해보자고 하셔서
성서형제회에 들어온것이다.
그때에는 남성팀이 없었고 여성팀에서 청일점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만난 사람이 연희마리아였다
그이후 남성팀이 발족하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저는 처음부터 관심이 많았던 것이 과거 이런 유사한 모임을 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참석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홀로 시외버스를 타고 전주로 가는 일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