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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86
창세기 31:17-30
라반의 추격(1)
“17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들에게 태우고 18 그 모은 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새”(17-18절). “밧단아람”의 히브리어 ‘팟단’은 ‘뻗다’라는 어근을 가진 단어로 ‘고원’이라는 뜻이고, ‘아람’ 역시 ‘높아지다’라는 말의 ‘아르몬’에서 유래한 단어로 ‘고원’이라는 뜻이다. 즉 “밧단아람”은 ‘뻗어나가는 높은 고원’이라는 뜻을 지닌다.
야곱이 언약의 아들로서 하란 땅에 와서 아내와 자녀들, 많은 소유물을 얻어 ‘출하란’을 하게 된 것은 궁극적인 언약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가 없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죄악 된 세상에서 불러내시는 구원의 은혜를 나타낸다면 “자식, 아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된 것에 대한 생명의 풍성함을 보여주는 것들이고, “가축, 모든 소유물”은 전리품과 같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이끌고”라는 말의 히브리어 ‘나하그’는 단순한 표현으로 볼 수 없다. ‘나하그’는 ‘인도하다, 몰다, 안내하다’라는 뜻으로 동물이나 사람을 강제로 몰거나 인도하여 의도된 목적지로 질서 있게 가게 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 보내실(나하그) 그 여러 민족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신 4:27)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통해 여러 민족 중에 흩으실 것을 “쫓아 보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강제로 이끌어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대로 야곱을 강제로 이끌어 가신다는 의미의 표현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라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이미 주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대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은 믿음의 주체가 결코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믿음은 선물이다(엡 2:8).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인은 자신이 믿음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믿음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교회에 봉사하며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믿음의 성장은 복음 안에 없다. 26절에서 라반은 야곱이 이끌고 간 것으로 말한 것처럼 죄인의 눈에는 사람이 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19 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20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19-20절). 고대 근동 사회에서 양털을 깎는 일은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푸는 큰 행사였다. 더구나 라반은 야곱과 “사흘 길을 뜨게”(30:36) 한 상태였기에 야곱이 도망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없었다. 문자적으로 보면 서로의 행동을 알 수 없는 상태였지만 중요한 것은 야곱이 라반의 잔치, 즉 세상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고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대로 하란을 떠나야 하는 존재였다. 이때 라헬은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람 사람 라반”이라는 표현이다. 이제까지 라반을 아람 사람이라고 충분히 밝혔다(25:20, 28:5). 그리고 계속 “라반”으로만 표현하였는데 여기서 유독 “아람 사람 라반”(히, ‘아람미’)이라고 한 것은 ‘고원’이라는 뜻을 가진 곳에 사는 ‘라반’을 강조함으로 진리가 없는 마른 땅의 하란에서 율법적으로는 높은 자기 의를 나타내는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다.
“말하지 아니하고”라는 표현의 히브리어 ‘나가드’는 ‘정면에 두다, 반대편에 담대하게 서다, 입증하다’라는 뜻이다. “가만히”라는 말의 ‘레브’는 ‘마음, 중심’이라는 뜻이다. 19절에서 라헬이 드라빔을 “도둑질하고”라는 표현과 20절에서 야곱이 “떠났더라”라는 말을 같은 단어 ‘가나브’로 썼다. 직역하면 ‘야곱은 도둑질하였다. 아람 사람 라반의 마음을 정면에 두고 지나갔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정리하자면 라반은 율법적인 행위로 자기 의가 높은 자였기에 야곱이 전하는 진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므로 라반의 마음을 반대편에 두고 도망한 것을 가지고 라헬이 드라빔을 도둑질한 것처럼 야곱이 도둑질하였다고 말씀한다.
라헬이 드라빔을 도둑질하게 된 것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려고 하는지 잘 드러난다. 왜냐하면 드라빔이란 자그마한 여성상의 우상인데 집안의 상속권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이 도둑질이다. 이런 점에서 야곱의 입장에서 하란을 떠나는 것도 도둑질이라고 한 것은 자기 계획과 술수에 의해 라반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격하여 온 라반에게 “내가 생각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31절)라고 말한 것이다.
“21 그가 그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22 삼 일 만에 야곱이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23 라반이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이르렀더니”(21-23절). 야곱은 자기 생각으로 하란을 떠나지만 하나님은 자기 언약대로 야곱을 이끌고 계셨다. 그것을 보여주는 표현이 “강을 건너”, “길르앗 산”, “삼 일”이다. “강을 건너”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고 “산”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삼 일”은 ‘애굽 땅 – 광야 – 가나안 땅’이라는 사흘길 (출 3:18, 5:3, 8:27)은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인간적인 술수로 하란을 떠나고자 하는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능력 안에 있는 구원의 길로 이끌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아직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야곱은 얍복 강에 가서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라반은 “칠 일 길을 쫓아가”(히, ‘라다프’) 야곱을 만난다. “칠 일”은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일하심을 나타낸다. 라반이 야곱을 더 이상 추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라다프’가 아닌 ‘하나님의 라다프’여야 한다.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24절). “밤”이란 언약을 알지 못하는 라반의 상태를 말씀한다. 언약을 알지 못하는 라반에게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24절)라고 계시를 주신다. 29절에서도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29절)라고 라반의 말을 또 기록하여 두 번이나 반복한 것은 하나님의 확실한 계시가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선악 체계’ 속에 있는 인간은 죄인이다. 죄인이기 때문에 선악을 판단하는데 선악의 기준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을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복음으로 말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라반에게 긍휼을 베푸심으로 야곱을 선하게 대하도록 만드신다.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5-18)
“라반이 야곱을 뒤쫓아 이르렀으니 야곱이 그 산에 장막을 친지라 라반이 그 형제와 더불어 길르앗 산에 장막을 치고”(25절).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긍휼을 베푸시니 라반은 인간의 선악의 기준으로 말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고 야곱과 함께 그 산에 장막을 치게 된다. “라반이 그 형제와 더불어” 장막을 쳤다는 것은 야곱과 함께 하나님의 언약을 누리는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라반은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7일 길을 야곱을 쫓았다가 이제 “그 형제와 더불어” 장막을 치게 되었다. 야곱이 하란 땅에서 계속 진리를 나타내는 존재로 있었으나 라반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시니 야곱이 언약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30절)라고 말함으로 “아버지의 집”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야곱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버지의 집이 되는 것이다. 벧엘에서 언약을 주신 그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 되는 것이 언약의 완성이다.
1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
다윗의 이 노래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입장에서 한 고백이다. 그렇다면 “형제”는 혈육의 관계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언약으로 오실 분 안에서 “연합하여 동거함”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산 시온에서 주어지는 복이 영생이라면 그 형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란 하나님 앞에 죄악의 드러난 상태를 의미한다. 죄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형제” 역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하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참고 고전 8:11-12, 히 2:11). 그러므로 라반이 그 형제와 함께 야곱이 있는 길르앗 산에 장막을 쳤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와 언약의 아들과 함께 거하는 상태가 되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의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그러나 라반은 여전히 인간적인 시각에 사로잡힌 죄인으로서 혈육의 관계를 말함으로 겉 사람의 모습이 드러난다. “26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속이고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27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으며 28 내가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으니 네 행위가 참으로 어리석도다”(26-28절).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믿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1-6)
그래서 라반은 여전히 자기 신에 집착하여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29-30절)라고 말한다(2024090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