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사상이 교회에 미친영향
그간 새 정신, 즉 '계몽사상'이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계몽주의는 영국으로부터 프랑스를 거쳐 독일에 보급되었다. 독일에서는 특히 철학가들인 라이프니츠1646~1716), 토마시우스(1655~1728), 볼프(1679~1754) 등이 그것을 수용하였다. 계몽주의는 이성의 이름으로 정신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낡은 전통과 근본적으로 절교하였다. 1천년 이래의 세계상이 붕괴되었다.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1784년 자주적 인간의 해방과, 인간은 "다른 지배를 받지 않고 자신의 오성을 조종할 수 있다."는 성년 인간의 이성을 이 새 운동의 목표로 정하였다.
실제로 오늘날의 인류는 계몽사상에 힘입은 바가 아주 많다. 계몽주의는 전진적 인간정신의 발전단계로써 근대사에서 무시될 수 없다.그것은 전 유럽의 사상을 북남미까지 포괄한 마지막 거대한 정신운동이었으며, 낡은 사고와 생활양식에서 중세기적 속박을 국복함으로써 처음으로 근대적 발전을 가능케 하였다. 비단 마녀와 이단자의 재판, 재판에서의 고문, 공생활에서 신앙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종교적 차별 등의 폐지만이 아니라 또한 전반적인 인간권리의 쟁취는 이 시기의 업적이다. 그것은 1776년의 미국의 독립선언과 1789년 8월 27일 프랑스 국민의회의 유명한 인권선언에서 처음으로 국법으로 고정되었다. 과연 학문과 근세문화 전체의 자유로운 발전은 계몽사상에 크게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의 유리주의 (唯理主義)는 물론 계시에 예속된 그리스도교 특히, 가톨릭교회를 위해 교회사상 가장 크고 가장 위험한 위기가 되었다. 프랑스인 보댕(1596)과 영국인 체르베리(1648)에 의해 전개된, 이른바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선천적인 것이고, 따라서 특별한 계시는 모두 소용이 없을 뿐더러 해로운 것이라는 '자연종교'의 체계는 존로크(1704) 등에 의해 '이신론理神論'의 철학으로 완성되어 그리스도교에 대항하였다.
Tip:유리주의 (唯理主義) ― 보편타당한 진리의 인식은 경험에서 독립된 이성적인 인식이라고 하는 주장. 따라서 선험적이고 자명한 기본원리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된 것만을 확실한 인식이라 생각한다. 많은 유리주의자들은 수학을 확실한 인식의 모델로 삼았으며 생득관념(生得觀念)을 인정한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의 철학이 유리주의적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 이러한 유리주의는 인간이 이성은 자기충족적이어서 특별한 신의 계시 없이도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알 필요가 있는 지식을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신의 계시는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최고의 존재'에 대한 지식, 영생의 희망, 상선벌악에 대한 신앙, 이것들만이 마땅히 참된 종교의 본질적 핵심이 되어야 했다. 틴달은 그리스도교도 이 핵심으로 축소되어야 한다고 말하였고(1730), 샤프츠베리경(1713)은 종교의 본질을 다만 고귀한 인간성의 조화적인 발전에서 인정하였다. 여기서 미구에 룻소(1778)의 이른바 올바르고 참된 종교는 모든 선과 미에 대한 사랑에서 성립된다는 이론이 나왔다.
그리스도도, 계시도, 구속도 없는 그리스도교! 그것은 순 인도주의적 교화의 요인으로서의 종교이거나 아니면 종교 대용물로서의 교화 수단이었다. 유리적唯理的인 이신론理神論은 지식계급데 널리 침투하였다. 그것은 1717년 런던에서 조합으로 조직된 프리메이슨에 의해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인, 예술가, 학자들의 인생관으로서 19세기와 20세기에서까지 큰 효력을 발휘하였다.
비록 그것이 앵글로 색슨 나라들에게 있어서는 투쟁적 지니지 않았을지라도,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반교회적이 되었다. 디드로, 달랑베르 등등은 미구에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신성한 모든 것을 마구 풍자하고 조롱하였고, 볼테르(1778)는 교회에 단말마적 싸움을 선포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이와같은 사주에 대해 피비린내나는 여흥극을 연출하였다.
급진적인 계몽주의적 추세가 교회 내에서 용납될 수 없었을지라도, 그러나 거기엔 교회생활을 낡은 신심양식과 무의미하여진 전통으로부터 순화하려는 정당한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는 있었다. 결국 교회가 아직도 신빙할만한 것으로 주위세계에서 인정되려면 그의 관습상의 폐해와 그 낙후된 생활양식에 대한 비판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점을 깨달은 신앙이 두터운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지연된 교회개혁을 계몽사상에서 착수할 계획을 세웠다. 여황제 마리아 데레사와 그의 아들 요셉 2세의 개혁은 선의에서였다. 이 개혁이 교육, 교회조직과 행정, 설교, 전례, 관습 등의 영역에서 실시된 것은 오늘날 다시 우리의 칭찬을 받을만 하다.
18세기 후반기의 거의 모든 독일 교구들은 그와같은 '계몽주의적' 고위 성직자들에 의해 점유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나무랄 데 없고, 유식하고 신앙깊은 교구장들이었다. 대수도원과 수도원들도 자주 이 정신을 나타냈다. 영주 수도원장, 상트블라지언의 게르베르트와 콘스탄쯔 교구의 총대리, 베썬베르크의 이냐시오는 교회생활을 쇄신하는 데 공적이 컸다. 불행히도 다른 많은 가톨릭 계몽주의자들의 무분별하고 과격한 비판성은 전 운동을 불신하게 만들었고, 교회에 손해를 끼쳤다. 그러나 그들은 국외자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