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국을 응시하는 세 가지 시선
- 학교 폭력과 청소년 소설
김성진
1. 다가오는 파국 앞에서
학교 폭력의 심각성과 원인 및 대책에 대해 더 이상 논의한다는 것이 식상하게 들릴 정도로 학교 폭력은 ‘학교 문화’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과도한 경쟁 완화, 학생들의 인권에 대한 존중, 개성과 창의성을 살리는 교육 등으로 제시되는 ‘해결책’은 한가하게 들릴 정도이다. 일선 학교의 목소리를 담은 책에서 ‘교육 불가능성’을 인정할 것을 주장한 이유도 그저 충격 효과를 노린 수사학의 산물로 보이지 않는다. 원론적 해결책으로는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는 사태의 복잡성과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서사의 비틂에서 파괴’에 이르는 방식으로 학교 폭력이라는 소재에 접근하는 청소년 소설이 늘어나는 이유 역시 점차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과 관련이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볼 우아한 거짓말, 나 b 책, 괴담은 정신적 괴롭힘에서 신체적 폭력에 이르는 다양한 방식의 학교 폭력을 전통적 서사 구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 작품은 이야기의 힘을 통해 인물의 고통에 공감하고 나름의 해결책을 함께 모색하려는 노력을 일견 포기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안정된 플롯을 바탕으로 갈등의 해소로 귀결되는 익숙한 서사의 관습으로 과연 현재의 난국을 온전히 형상화할 수 있는지를 되물어야 하는 시점이다. 그런 이유로 이 세 작품이 제시한 각기 다른 방식의 이야기 구성은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다. 특히 ‘힐링’을 내세운 훈훈한 이야기들이 넘쳐나며 현실은 삭막하지만 결국은 우리가 견뎌낼 수 있다는 통념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아래에서는 유무형의 폭력이 넘쳐나는 현실을 형상화하는 세 작품의 독특한 구성 방식을 살펴보면서 이러한 시도가 과연 고통에 대한 공감의 시도로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 진실에 대한 탐문과 화자의 역할
김려령의 우아한 거짓말은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라는 당혹스러운 문장으로 시작된다. 아침까지 엄마에게 MP-3를 사달라고 조르던 ‘천지’라는 중학생이 갑작스럽게 자살한 이유를 찾기 위한 언니 만지의 탐문 과정이 서사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던 천지의 과거 속내가 조금씩 제시된다. 그와 동시에 친한 친구처럼 보이던 화연과의 관계가 집요한 정신적 폭력으로 맺어진 악연의 연속이었음이 드러난다.
이 작품은 가장 중요한 구성의 방법으로 ‘비밀의 드러남’이라는 플롯을 활용하였다. 주인공 천지가 어떤 이유로 자살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언니가 추적해 가는 과정이 이 소설의 근간을 이룬다. 또한 천지가 남긴 ‘다섯 개의 봉인’이라 불리는 ‘실타래’ 속에 남긴 쪽지가 하나하나 드러나는 과정 역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를 통해 주된 가해자 화연은 물론이고 천지에게 화연의 잔꾀를 경고해 주었던 친구 미라 그리고 심지어 가족까지도 이 사태에 책임이 있음이 알려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작중 인물이나 작품 바깥에서 사건 전체를 조망하는 단일 화자의 눈으로 사건을 바라보거나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고 잦은 시점 교체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부분적으로는 다중 시점의 방식이 활용하기도 한다. 사건에 대한 입체적 시야를 확보하면서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를 독자가 되물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이야말로 다중 시점의 장점이다. 이를 통해 그저 ‘나쁜 아이’로 그려질 가능성이 높았던 가해자 ‘화연’의 내면이 조명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화연 역시 바쁜 부모로부터 금전적 지원은 받았으나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해 삐뚤어진 아이로서, 천지의 자살 이후 화연 역시 다른 아이들로부터 서서히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가해자로 지목되는 화연의 심리 전달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특정 개인에게 비극의 책임을 전가하는 길을 피하고 탐문의 서사와 다중 시점을 활용하여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지 않으면 나 자신이 희생양이 될지 모르는 비대칭적인 교실 폭력의 모습을 파고들고자 했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이런 열린 방식의 서사 구성과 더불어 화자가 이야기 구석구석을 완전히 통제하려는 듯한 모습이 종종 나타난다.
화연은 천지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 아이들이 보였던 비웃음이, 꼭 천지에게만 지은 게 아니었다는 걸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보기에 아슬아슬한 키 큰 피에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돌아다니는 놀이동산의 키 큰 피에로. 그동안 천지는 긴 바지 속 버팀목처럼 화연을 지탱해주었다. 그러나 이제 천지는 없다. 버팀목이 사라져 바닥으로 뚝 떨어진 화연은 본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한 키 큰 피에로가 아니었다. 동시에 아이들의 아슬한 호응과 박수도 사리지고 만 것이다.(85쪽)
이 예처럼 화자는 사건의 전후 맥락을 포함한 모든 것을 설명하곤 한다. 이는 완득이 이래 작가의 개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특유의 ‘화법’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작가의 개성 차원을 넘어서는 것으로 보인다. 화자는 이야기의 전달자를 넘어서 ‘삶의 진실’을 알고 있는 멘토로 자리 잡으려는 듯한 욕망을 내비친다. 물론 화자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행위는 자신에게 ‘말하려는 바’가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처럼 친절하게 모든 것을 해설하기 위해서는 세상 만사에 대해 일관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영혼의 동일성’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시대 어떤 작가가 그런 삶의 방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도인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복잡다단한 현실 속에서 내적으로 찢기고 분열된 정체성으로 인해 시달리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 영혼의 동일성이 붕괴되었다면 화자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화자가 ‘멘토의 역할’을 넘본다면 그것은 독자가 ‘청소년’이라는 인식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했다고 밖에 판단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장면에서 이야기는 공허해진다. 그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화자는 등장 인물의 목소리를 빌어 은밀한 복화술을 펼치기도 한다. 아래는 지하철에서 화연을 우연히 만난 할머니가 화연을 꾸짖는 장면이다.
“남 내려 보는 버릇은 어디서 배웠는고?”
화연은 꼬고 앉은 다리를 툭툭 흔들었다. 리듬이라도 타는 것처럼.
“조런 것들이 잔재주로 사람 낚고, 멀쩡한 사람 뱅신 만들지. 임자 만나봐라, 소금 뒤집어쓴 지렁이 신세지. 나는 인자 내려야 쓰겄네.”(175쪽)
화자는 작품의 결말부에서 갈등의 원인을 제거하고 등장 인물 모두가 짊어진 ‘죄’를 사함으로써 독자를 ‘위안’으로 이끈다. 모두를 용서하는 천지의 실타래가 제시된다거나 가해자 화연을 보호하고자 하는 만지의 필사적인 노력이 강조되는 것이 그 예이다. 과연 가해자-피해자 구도는 사라지고 독자는 안도하며 책을 덮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 두 사람은 자신의 고민을 가진 ‘분열되었으나 살아 있는’ 주체가 아니라, 어른과 독자가 기대하는 종결에 도달하기 위한 ‘응시의 대상’으로 변화한다. 자살 직전의 천지가 다른 친구를 걱정하며 모두를 ‘용서’하는 쪽지를 실타래에 집어넣는 이유는 화자의 전횡에 의해서만 설명할 수 있다. 이로써 파국은 매끄러운 서사로 조직되어 종결된다. 추리의 서사나 다중 시점을 활용해 도달하고자 하는 진실의 입체성은 사라진다. 기법은 종결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부수적 장식품이 되어버린 셈이다.
‘진실의 종합’에 대한 권리를 독자에게 넘기고 각자의 내면을 제시하는 일에 화자의 역할을 국한시켰다면 미성숙한 서사가 되는 것일까? 자살한 천지의 아픔과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화연의 아픔에 공감해야 한다는 작가의 책임감이 오히려 독자의 진정한 공감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시대에 전지적 혜안을 지닌 주석자나 멘토로서의 화자의 역할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청소년 소설이라고 해도 당연히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차라리 공유할 경험의 붕괴를 인정하는 가운데 회의적이고 ‘약한’ 화자의 진술이 ‘거리’를 가능하게 하는 ‘공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3. 반복되는 폭력과 서사의 파열
김사과의 나 b 책은 바닷가 소도시에 살고 있는 중학생 ‘나’(이름은 ‘랑’으로 제시된다)가 ‘워싱턴 모자’로 불리는 학생과 그의 친구들에게 얻어맞거나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른 주요 인물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친구 b와 정체를 알 수 없이 그저 ‘책’이라 불리는 남자가 있다. ‘책’은 말 그대로 ‘책’으로도 읽힐 수 있게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형상으로 나타난다. ‘나’의 친구 b 역시 갖은 폭행의 대상이 되는데 이 작품 전체에 걸쳐 나와 b가 당하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력이 반복되고 있다.
학교의 선생님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담임 선생님이 나를 미워했다. 내가 모든 것을 열심히 했다가 안 했다가 그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해 봄부터는 남자애들도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건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날 미워하는 선생님들은 그걸 모르는 척했다. 어느 날 나는 운동장 한가운데에 엎어졌다. 어떤 남자애가 나를 주먹으로 때렸기 때문이다.(25쪽)
이 폭력은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일상처럼 제시된다. ‘겁이 나는 것도, 머리카락에서 점심때 먹은 것의 냄새가 나는 것도. 이게 언제까지 계속되는 거지? 난 언제까지 이렇게 나쁘게 똑같은 날을 겪어야 하는 거지? 어쩌면 영원히.’ 식의 진술이 이런 느낌을 강화시킨다. 친구 b의 삶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난과 폭력이라는 소재는 진부한 느낌이 들 정도로 청소년 소설에서 흔하다. 그러나 소재가 다루어지는 방식, 전달되는 방식에 따라 완전히 다른 형상물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상황과 목소리는 절박하나 자신의 상황을 바라보는 화자의 어조는 메마르고 문체 역시 그에 맞추어 건조하다. 아래의 예처럼 이 대비는 이 작품의 독특한 색채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나는 이제 정말로 아무랑도 안 논다. 그리고 내가 아무랑도 놀지 않는다는 것은, 다들 시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시시하다. 그러니까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 시시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 봤자 더 시시해질 뿐이다. 아무랑도 놀 필요가 없다.(92쪽)
학교에 가면 남자애들이 이유도 없이 막 때려요. 그런데 왜 돌아가야 해요? 엄마는 내가 숙제를 하는지 안 하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왜 돌아가야 해요? 나는 안경처럼 공부를 잘해서 성공할 생각 없어요. 그런데 왜 돌아가야 해요? 나는 친구가 b밖에 없는데 b는 여기에 나랑 같이 있어요. 그런데 왜 돌아가야 해요?(140쪽)
이야기의 진행 방식 역시 파편화된 에피소드의 집합이다. 유사한 사건이 병렬되고 ‘책’이라는 남자와의 만남 역시 특별한 서사적 계기 없이 불쑥 제시된다. 고통 받는 주인공들은 치유될 수 없는 내적 분열 속에서 살아가며, 탈출구처럼 제시된 책과의 만남도 환상 속의 일로 그려져 별다른 희망을 주지 못한다. 그 결과 서사 내적으로는 어떤 해결의 가망도 찾기 어렵다. 다시 말해 플롯의 진행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방식은 완전히 거부되는 것이다. ‘나’의 시선과 어조 역시 자신의 고통이 펼쳐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는 관찰자의 그것이다. 이를 ‘절대적 고통이 반복되는 현재로서의 서사 구성’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한국문학의 과도한 휴머니즘이 싫다’는 발언을 남긴 작가에게 어울리는 구성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학교라는 기계 장치가 매끄럽게 굴러가도록 하기 위한 윤활유 정도로 개인을 취급하는 상황을 형상화하는 일을 작가가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온전한 정서와 감정을 지닌 개인이 운명에 맞설 수 있다든가, 그 개인의 내면을 통해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전제한다면, 그 내용이 무엇이건 이야기는 출발점부터 자기 기만에 빠지게 된다. 작가는 이를 피하기 위해 ‘형상의 붕괴’ 즉 플롯을 파괴한 파편으로서의 서사를 택했다. 폭력이 폭력에 맞서기 위한 미적 형상화의 수단이 된 셈이다. 이처럼 과격하게 플롯을 파괴하는 행위는 서사에 종말을 고하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아도르노의 말처럼 오늘날의 예술이 묵시록에 가까워지는 방식은 한편으로는 예술 자체의 파국을 뜻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세계가 처한 파국적 상황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 b 책은 고통의 기념비처럼 남아 독자가 등장 인물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가지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이 작품이 충격적인 이유는 소재의 파격성이나 묘사의 노골성 때문이 아니다. 각종 폭력에 시달리는 주인공에 대해 아무런 분노도 동정도 느끼지 못하는 듯이 담담하게 서술하는 화자의 태도가 독자를 심란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쇼크’의 체험이 이 작품의 존재 이유가 된다고 해도 지나친 평가는 아닐 것이다. 특히 공허한 훈계를 피하고 상황을 돌아보게 했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형상의 파열에 의존하는 충격 효과는 그것이 탄생한 맥락을 벗어나면 다시금 ‘생생함’의 함정 즉 평온한 일상을 보완하는 ‘기대된 폭력 효과’로 타락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그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4. 괴담의 기능 전환
방미진의 괴담은 학교에 떠돌고 있는 ‘기이하고 무서운’ 이야기를 소재로 모두가 모두에게 제거하고 싶은 ‘적’이 될 정도로 황폐해진 학교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프리마돈나 자리를 놓고 다투는 연두와 지연, 남학생 하나를 두고 서로의 존재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보영과 미래, 서로를 미워하는 두 형제 연두와 연지까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 관계는 하나같이 일그러져 있다. 음악 교사마저 어두운 커튼 뒤에 숨어서 자신의 불우한 처지와 대비되는 아이들을 지극히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지금의 학교는 전적으로 외적인 규율에 의해 학생들을 통제하지 않는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규율을 내면화한 ‘성과 주체’가 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내면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생활을 조직하고 타인과 경쟁에 나선다. 1990년대의 영화 여고괴담이 ‘미친개’로 표상되는 억압적 규율에 희생당하는 ‘복종적 주체’의 복수와 신원(伸寃)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작품은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강박적 주체’에 주목하고 있다.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집단의 기억 속에서 누적되어 전해지는 이야기를 새롭게 변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연이 아이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동안, 학교에는 때 아닌 괴담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 연못 위에서 일등과 이등이 사진을 찍으면 이등이 사라진다.(36쪽)
이 괴담은 작품 속에서 ‘연못에서 형제가 사진을 찍으면 두 번째 아이가 사라진다.’ 혹은 ‘연못 위에서 첫 번째 아이와 두 번째 아이가 사진이 찍히면 두 번째 아이가 사라진다.’ 등으로 다양하게 변형된다. 그 세부 내용은 다르지만 모두 반드시 첫째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증을 담고 있다. 이 작품에 언급된 괴담 이외에도 학교에는 물건이나 사람과 관련된 ‘으스스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언제 시작되었는지, 누가 지어냈는지 알 수 없는 다양한 ‘학교 괴담’은 그저 허무맹랑하고 황당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일제 시대 이래 학교는 학생에게 다양한 종류의 폭력을 가해온 공포의 공간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복수에서 신원을 오가며 다양하게 변주되는 ‘괴담’에는 이처럼 공유하는 경험에 바탕을 둔 서사적 진실이 담겨져 있다. 소설 괴담이 공포에 대한 묘사를 중심으로 한 쇼크 체험의 전달에 빠지지 않고도 이 상황을 찬찬히 돌아보게 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경험의 누적을 바탕으로 한 구전 이야기’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괴담의 단순한 계승에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오래된 괴담은 새로운 기법의 맥락에 배치되어 현대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그것은 종결 없이 다시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은 구성의 방법이다. 이 작품은 끝없이 이어지는 미로가 다시 펼쳐질 것 같은 분위기로 마감되고 있다. 종결은 있되 종결이 없는 서사의 구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음 예에 주목하자. 경쟁하는 두 사람을 찍는 사진사가 있고 그 사진을 찍는 순간 두 번째는 사라진다. 경쟁을 심판하는 심판자를 포함하면 삼각 구도가 형성되는 셈이다. 그러나 한 명이 사라져도 새로운 삼각 구도가 형성된다. 작품 후반부에는 사진을 찍는 이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피사체가 되어 둘째인가 아닌가의 판정을 받게 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사진을 찍고 있는 이의 뒤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또 다른 인물이 겹쳐지는 모습은 둘째를 판정하는 구도가 끝없이 반복될 것임을 시각적인 구도로 보여주고 있다.
남은 우리 역시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지금 남아 있는 건 그저 먹잇감을 끌어오는 미끼로서의 역할이 남아 있어서일 뿐.(238쪽)
뫼비우스의 띠처럼 지면의 이야기는 종결되지만 지면 밖에서는 이 이야기가 다시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오래된 학교 괴담은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분투하는 주체로 가득 찬 세상에서 ‘심판의 시간’은 끊임없이 다시 밀려온다는 깨달음을 전달하는 이야기로 다시 태어난다. 일찍이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의 진화가 새로운 주제나 새로운 방법을 느닷없이 고안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에서 새로운 기능을 발견하는 식으로 진행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진부한 기법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고 새롭고, 자동화되지 않은 맥락 내에서 반복됨으로써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성과는 바로 형식주의자들이 강조한 ‘기능 전환’에서 비롯된다. 작품 내적으로는 어떤 화해나 구원도 제시되지 않고 결말이 유예되는 서사의 방식을 취하나 이 작품이 환기하는 ‘공포의 경험’은 그 어느 작품보다도 압도적이다. 화자의 권능에 기대 무리한 화해를 추구하거나 쇼크 체험의 파편화된 전달에 그치지 않고 상황을 찬찬히 둘러보는 ‘거리’를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4. 공포에게도 나름의 역할이
임박한 파국의 시대에도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는 경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이 말이 작위적인 종결을 통해 모든 갈등을 해소하려는 ‘과잉 서사화’의 유혹으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청소년의 삶을 취재하고 그들의 생생한 언어를 도입하고 다양한 기법을 도입하더라도 서사 내적으로 가능한 ‘최종 해결책’의 제시에 매달린다면, 충격적인 묘사와 어설픈 교훈을 버무려 만든 키치를 벗어나기 어렵다. 너의 아픔을 다 이해한다거나 최선을 다하면 누구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힐링’의 이야기는 어쩌면 선의에서 출발했을 수도 있지만 어떤 충격도 흡수하는 동정과 위안의 서사로 귀결된다. 차라리 형상의 파열을 택하거나 전해지는 이야기 전통의 기능 전환을 꾀하는 길이 서사를 통한 공감의 진지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그 길은 추리 구조에서부터 시점의 변환과 조절, 플롯을 파괴한 파편화로서의 서사 구성, 전승되는 이야기를 새롭게 변용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얼마든지 다양하다. 이 외에 또 새로운 방식이 왜 불가능하겠는가?
이 작품들이 결국 공포의 전달에 그치지 않느냐는 볼멘 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과 타자 사이에 어떤 공통의 운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에서 나온 공포는 역설적으로 공감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사실 타자와 자신을 갈라놓은 어떤 장벽을 전제로 한 시혜적 감정은 굳이 ‘공통의 운명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 여기에 구조와 현실에 대한 이야기도 가능하다. 물결처럼 퍼져가는 동정과 연민을 통해 함께 고통을 견딜 수 있다면 그러한 고통을 가져온 현실 역시 견딜만한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반면 공포는 파국을 견딜 수 없으니 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인식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공포의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김성진
청소년 문학평론가, 대구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현대 소설 교육과 아동 청소년 문학을 연구하
며 예비 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아동 청소년 문학의 정전과 권정생의 한국 전쟁 3부작」 「청소년
문학의 새로운 물결은 시작되었는가?」 등의 글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