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송문집책판및금라전언록책판 (澗松文集冊板및金羅傳言錄冊板) |
❏소 재 지: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송정리 ❏문화재지정: 간송문집책판및금라전언록책판 (澗松文集冊板및金羅傳言錄冊板)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80호(1979.12.29지정) ❏배향인물: 조임도(趙任道) ❏창건연도: 1721년(경종 1) |
송정서원은 군의 동쪽 10리 지점인 산인면 송정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1721년(경종 1)에 조임도(趙任道)를 제향하기 위하여 도내의 사림들이 상소하여 윤허를 얻어 건립된 서원이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고, 그 자리에 유허비가 건립되었다.
1)주벽-조임도(趙任道, 1585~1664)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덕용(德勇), 호는 간송당(澗松堂). 식(埴)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로, 병절교위(秉節校尉) 상린(祥麟)의 딸이다. 김중청(金中淸)·고응척(高應陟)·장현광(張顯光) 등을 사사하였다.
1604년(선조 37) 향시에 합격하였고, 그 이듬해인 21세 때 ≪관규쇄록 管窺鎖錄≫을 저술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거상대절 居喪大節> 10조(條)를 써서 자손들이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으며, 또 아버지의 언행록인 ≪추모록 追慕錄≫을 지었다.
1614년에는 동당시(東堂試)에, 그 이듬해 향해(鄕解)에 합격하였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향인(鄕人)이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으나 신병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1634년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고, 1638년 ≪취정록 就正錄≫을 쓰고 그 이듬해 ≪금라전신록 金羅傳信錄≫을 편찬하였다.
1644년 ≪대소헌유사 大笑軒遺事≫를 찬하였으며, 1647년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임명되어 창녕까지 가다가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 뒤 공조좌랑으로 임명되었으나, 노병으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사헌부지평에 증직되고, 함안의 송정서원 (松亭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간송집≫ 7권 4책이 있다.
1)간송문집책판및금라전언록책판 (澗松文集冊板및金羅傳言錄冊板)
-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80호(1979.12.29지정)
이 책판은 조선 인조 때의 학자인 간송당 조임도(澗松堂 趙任道)의 문집인 간송문집과 금라전언록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조임도는 효심이 극진하여 백효(伯孝)라고 불렀다. 인조반정 직후 공조좌랑을 역임하였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학업에 열중하였다.
간송집은 영조 20년(1744)에 간행한 것이고, 금라전언록은 함안의 역사와 고려말 충신 이방실 장군을 비롯한 함안 출신자들의 업적을 기록한 것으로 순조 13년(1813)에 간행되었다. 책판의 크기는 가로 44.5㎝, 세로 21.5㎝이며, 총 190매가 합강정(合江亭)에 보관되어 있다.
2)간송집(澗松集)
조임도의 시문집이다. 7권 4책(본집 5권, 별집 2권)으로 목판본이다. 영조 20년(1744) 이광정(李光庭)의 편집을 거쳐 그의 현손 조홍엽(趙弘燁)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광정의 서문과 세계도·연보가 있다.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용화산 북쪽으로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1Km정도 낙동강의 강줄기를 따라 산길로 내려가면 경치 좋은 절벽 위에 합강정(合江亭)이 있다.
남강이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으로, 강좌(江左)와 강우(江右)지역의 경계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지금 인적이 거의 끊겨 폐허가 되다시피 한 정자지만, 절경을 자랑하는 곳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인 1633년. 함안 선비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라는 분이 세웠다.
간송은 퇴계학파(退溪學派)에 속하는 학자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 선비이다. 퇴계학파 선비들은 성리학에 많은 관심을 두고 저술도 남겼지만, 간송은 성리학에 대한 저술보다도 배운 학문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평생 고민한 선비이다. 남명의 학문정신과 비슷한 경향이다.
“대저 학문하는 길은 반드시 분발하고 단단히 뜻을 세워, 마음을 비우고 뜻을 겸손하게 하여 가르침을 받들어야 한다. 괴로움을 참고 견디며 공(功)을 쌓아야 하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가 힘써 행하여 도에 이르러야 하고, 느긋하게 푹 젖어들어 덕을 길러야 한다”
간송은 용감하게 앞으로 나가 힘써 행하여 도에 이르는 것이 학문하는 길이라고 했다. 바로 남명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간송은 50세 때 남명을 모신 김해 신산서원(新山書院) 원장을 맡아 학덕을 기리는 일에 앞장섰다.
간송은 퇴계학파를 계승한 학자들로부터 학문을 익힌 선비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남명 정신을 이어가고자 노력하기도 한 것이다. 자신이 은거했던 합강정이 강우와 강좌지역 경계에 위치한 만큼 강좌의 퇴계학맥과 강우의 남명학맥을 아우른 선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585년(선조 18년) 함안군 검암리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가야읍 검암리이다. 5대조 어계 조려는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지조가 빼어났다. 어계가 함안 원북에 정착한 뒤로 그 자손들이 함안에 많이 살게 되었다.
간송은 8세 때 임진왜란을 당해 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나 합천, 경북 청송, 영주, 봉화, 의성 등지로 옮겨 살았다. 이때 간송은 퇴계 학맥을 이은 여러 선비들로부터 공부를 배웠으며, 17세 때 경북 인동에서 역시 퇴계의 제자인 여헌 장현광을 만나 스승으로 삼았다.
19세 때 비로소 고향인 검암에 돌아와 곤지재(困知齋)를 짓고 시냇가에 두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서 ‘간송’이라고 호를 붙였다. 그리고 시한 수를 지어 좌우명으로 삼고자 했다.
“시냇가의 소나무를 사랑하니 날씨가 추워도 그 모습 변치 않기 때문이라네(爲愛澗邊松 天寒不改容)” 소나무의 절개를 본받아 올곧은 선비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23세 때 함안 용화산 아래 배 위에서 퇴계와 남명의 제자인 한강 정구를 뵈었다.
이때 한강은 성주로부터 배를 타고 동래 온천으로 가는 도중이었는데,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지점인 이곳에 머물면서 인근의 선비들을 만난 것이다. 간송의 스승인 여헌 장현광, 망우당 곽재우 등 여러 선비들이 함께 있었는데, 간송이 예를 올린 것이다.
이해 노파 이흘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노파 이흘은 삼가 선비로 남명 선생의 학문을 독실히 계승한 사람이다.
이보다 앞서 간송은 20세 때 향시에 합격을 하고 과거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32세 때 과거를 포기하고 독서에 전념하게 된다. 이후 당시 경상좌우도 선비들과 두루 교유하며 퇴계와남명의 학문을 익힌다. 49세 때 합강정을 짓고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게 살고자 했던 것이다.
간송은 자기 자신을 “재주는 성기어 짧고 천성은 고집스러우며 어리석네. 세상에 나가서는 엎어지고 산에 있으면서 수양하네. 자연 속에서 금하는 것 없으니 물고기와 새들과 사귄다네. 내 좋아하는 것을 따라서 한평생을 마치고자 한다네”라고 하며 자연 속에서 살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 이듬해 조정에서 간송의 명성을 듣고 공릉참봉(恭陵參奉)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어 조정에서는 공조좌랑 등의 벼슬로 불렀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자연을 벗삼아 향리에서 학문에 정진하던 간송은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조정에서는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쌀과 베를 내려 애도를 표했다.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인 1666년 사림들의 건의로 조정에서 사헌부 지평의 벼슬을 추증했으며, 1721년에는 함안 안인리에 송정서원(松亭書院)을 건립하여 간송을 모셨다.
간송은 남명을 좋아했다. “남명집”을 읽고는 “남명이 한 일없다고 말하지 말라 백세의 맑은 바람 우리나라에 떨쳤네(莫道南冥無事業 淸風百世振東韓)”라고 하기도 했다.
기자는 안인리에 있는 송정서원을 찾았다. 서원은 없어지고 그 터에 퇴색한 비석만이 서 있었다.
조정에서 불러도 벼슬에 나가지 않은 징사(徵士) 간송 조임도의 유적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합강정도 찾는 사람이 없고, 송정서원 유허비도 찾는 사람이 없어 세월 속에 사라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었다.
기사) 경남일보 제공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 경남의 서원, 선인, 2008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