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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도시 원문보기 글쓴이: 데미
뾰루지를 위하여
역사에는 잘못이 없다
12월
서해에서
백야
겨울 우듬지
흔적
적멸(寂滅)
저문 길
강
그대 있어야 할 자리에·1
그대 있어야 할 자리에 2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선인장
술과의 화해
절벽은 절박하다
고요
나무와 새
고독의 기원
마음의 서랍
겨울의 빛
저 별빛
검은 밤의 독서
개미
행복
허구한 날 지나간 날
음악-정대에게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있다
나도 왕년에는
감옥
멜로드라마
들판
신발의 꿈
9월도 저녁이면
길
비단길.1
비단길.3
환승역
봄비
그늘
벌목
서해에서
별
저 별빛
슬픈 일만 나에게
땅끝에 서다
세월의 강물
바닥
빈들
사진
작가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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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루지를 위하여
곪아터져야 된다고 했다 그는 술을 마시며
전쟁과 학살과 제 3세계의 정치와
식민의 죽은 식탁을 두드리며
70년대의 어둠과 80년대의 울분을
싸잡아 씹어발겼다 진통제로도 항생제로도
막무가내인 뾰루지를 위하여
그는 거듭 술을 마시며
아예 곪아터져야 아무는 상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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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는 잘못이 없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전도된 역사를 다시 세우겠다고
뒤바뀐 역사를 제자리로 돌리겠다고
떼쓰지 마, 제발 설치지 마
역사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오래오래 고개 흔드는 코스모스와
빛나면서 시들어가는 철길
텅 빈 역사에는 잘못이 없다
그냥 속수무책으로 지나쳐가는
저 열차가 야속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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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강연호
그해 12월 너로 인한 그리움 쪽에서 눈 내렸다
마른 삭정이 긁어 모아 군불 지피며
잊으리라 매운 다짐도 함께 쓸어 넣었지만
불티 무시로 설마 설마 소리치며 튀어올랐다
동구 향한 봉창으로 유난히 風雪 심한 듯
소식 갑갑한 시선 흐려지기 몇 번
너에게 가는 길 진작 끊어지고 말았는데
애꿎은 아궁지만 들쑤시며 인편 기다렸다
내 저어한 젊은 날의 사랑
눈 내리면 어둠도 서두르고 추억도 마찬가지
멀리 지친 산빛깔에 겨워 자불음 청하는
불빛 자락 흔들리며 술기운 오르던 허구한 날
잊어라 잊어라 이 숙맥아, 쥐어박듯이
그해 12월 너로 인한 그리움 쪽에서 눈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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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에서
그대 마음이 묵정밭 같아서
우리 함께 서해 바다를 보러 가자 했었지
삼각파도나 모래톱이나 칼날진 해풍쯤에
그대 마음의 뻗센 잡초 베어질 리 만무했지만
어쩌면 서해 일몰 속에 활활 타올라
화전이라도 다시 일굴 줄 알았지
우리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며 부산떨었는데
갯벌 기어가듯 느리고 더딘 행려
내 급한 생각만이 솟구치는 물결을 타고
지도책에서 배운 산동반도까지 헤엄쳐갔을 뿐
정작 그대는 서해로 질러가는 길을 피해
왜 자꾸 멀리멀리 돌아서 가자 했을까
서해, 죽은 바다와 황사바람 속에서
바닷새 몇 마리 사람 기척에 질려 있었지
기억해? 붉은 노을이 그대 뺨에 젖어내리는 동안
가슴엔 듯 둔탁하게 자갈 굴러가던 것을
그대를 넘어 바다로 가는 길은 멀고 멀어서
내 지친 목측 서둘러 침몰시키던 것을
그대 기억해? 오랜 세월 지나
일구어낼 마음밭 없어 황량해질 때마다
나 또한 그대 더딘 발걸음을 곰곰 헤아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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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누구나 그렇듯이
더러 잠들고 싶지 않은 밤은 있다
하얗게 지새운다는 말뜻 그대로
창틀에 턱을 괸 채 골똘해지고 싶은 밤은 있다
멀리 나간 마음은 퉁퉁 불어터져
어둠 속에 익사하는데 우수수
별들은 쏟아져 손톱 밑에서 으깨지는데
미처 걷지 못한 밤빨래는
언제나 죽음처럼 펄럭이는데
진저리치는 전신주의 늑골마다
바람은 사무치게 훑어가는데
누구나 그렇듯이
비듬처럼 쏟아지는 잠꼬대를 또박또박
받아적고 싶은 밤은 있다
한번 잠들면 다시는 깨어나고 싶지 않는
그런 밤은 있다
시: 강연호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중에서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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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우듬지
―교무수첩·3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텅 빈 교정을 바라보며
창틀에 턱을 괸 미루나무 넋놓고 있었다
바람이 툭 치고 달아나며 깔깔거리면
용케 두어 장 남은 잎새들 슬쩍 눈꽃을 턴 뒤
내내 심심할 모양이라고 투덜거렸다
평행봉은 혼자서도 팔 벌려 균형 잡으려 열심이고
불시착한 비행기 자국마냥 운동장을 가로질러
쪽길 만드는 수위아저씨의 비질 소리만
구령에 맞춰 씩씩한 겨울 방학
나는 교무실 석탄난로 옆에서 쓸쓸한 당직을 쬐며
개학날의 출석부를 미리 점검하고
아이들에게 그림 엽서 하나씩 부쳐주었다
얘들아, 겨울 우듬지 꼿꼿하게 버티어 선 계절을
조선장독 속의 김장김치처럼 잘 익어 돌아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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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새가 날아가자 나뭇가지 부러졌네
바람 한 점 없었는데
한참 뒤에 문득 생각난 듯이 부러졌네
모든 게 흔적이네
무수한 나무들 중에 그 나무를
무수한 나뭇가지들 중에 그 가지를
선택하고 선택받은 운명의 흔적이네
새가 앉았다 날아간 자리
새는 날아가도 흔적은 남네
그 여운 고스란히 견뎌내려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용쓰다가, 용쓰……다가
나뭇가지 기어이 부러졌네
흔적의 무게 견디지 못했네
흔적은 결코 지워지지 않네
날이 갈수록 흔적은 무게를 더하네
아무도 흔적을 지탱하진 못하네
이 정도 흔적의 무게쯤
너끈히 견딜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시절
내게도 있었네, 아니 정말 있었나?
잘 모르겠네 기억나지 않네
그것 역시 흔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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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寂滅)
지친 불빛이 저녁을 끌고 온다
찬물에 말아 넘긴 끼니처럼
채 읽지 못한 생각들은 허기지다
그대 이 다음에는 가볍게 만나야지
한때는 수천 번이었을 다짐이 문득 헐거워질 때
홀로 켜지는 불빛, 어떤 그리움도
시선이 닿는 곳까지만 눈부시게 그리운 법이다
그러므로 제 몫의 세월을 건너가는
느려 터진 발걸음을 재촉하지 말자
저 불빛에 붐비는 하루살이들의 생애가
새삼스럽게 하루뿐이라 할지라도
이 밤을 건너가면 다시
그대 눈밑의 그늘이 바로 벼랑이라 하더라도
간절함을 포기하면 세상은 조용해진다
달리 말하자면 이제는 노래나 시 같은 것
그 동안 베껴 썼던 모든 문자들에게
나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
혹은 그대의 텅 빈 부재를 채우던
비애마저 사치스러워 더불어 버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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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길
사람 기척에 놀라 그만 막다르게 입 다문 길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게 삼가 열며 걸었습니다
謫所 따로 없어 세상의 집들 웅크린 채 잠들고
불 꺼진 창에서 풀풀 새어나온 어둠이
길을 끌어가는 포플라 행렬 흔들어 어지럽혔습니다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생각은 숨가쁘게 달려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까지 데불고 오곤 하였습니다
혼자서는 작정한 만큼 가지 못할 산책이었을까요
귀찮아도 같이 걷자며 어깨를 치는 시름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지난 시절은 힘겨웠으니
그리 알고 지내라고 이만 줄인다고
밑도 끝도 없는 엽서 한 장 우체통에 넣을 때
가슴 한 쪽이 먼저 둔탁한 소리로 떨어져내렸습니다
바라보면 저기 돌아가 지친 몸 뉘어야 할 거처가
자꾸만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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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저 강물
내가 반쯤은 건넜다고 생각했지요
저 강물
그대도 반쯤 건넜다고 생각했지요
그대가 반 내가 반 건너면
우리 강물 한 가운데서 만나
더 큰 강물되어 흐를 수도 있었으련만
돌아보면 저 강물
우리 다만 자리 바꾸었을 뿐
이쪽과 저쪽 엇갈린 채 저 강물
까마득히 손짓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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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있어야 할 자리에·1
오늘 저는 한 여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대 그리워
밤길 헤매일 때 한 여자가 제 팔을 낚아채고 어디론가
끌고 갔습니다 저는 무서워서 아무 말 못하고 끌려갔
지요 도무지 낯설고 불빛 이상한 방에서 오늘 저는 한
여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두려워서 마구
떨었습니다 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인지 그 여자는 아
무렇게나 껌 짝짝 씹으며, 운다아고 옛사라아앙이 흥흥
콧노래도 흥얼거리며, 불 끄까? 반말도 하며 자꾸 웃었
습니다 오늘 저는 그 여자에게 온전히 저를 허락했습니
다 그대 저를 불륜이라고 욕하시렵니까 할 수 없지요
그대 있어야 할 자리에 그대 없으면 나약한 저는 언제나
불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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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있어야 할 자리에 2
집 밖에 행상트럭이 와서 낮잠을 깨웠습니다 알타리 무
우가 왔습니다 얼갈이 배추가 왔습니다 마늘 상추 쑥갓
이왔습니다 감자 양파 부추가 왔습니다 시금치 오이 깻
잎도 왔습니다 세상의 모든 기다림이 왔습니다 신이난
확성기 소리가 얼핏 낮잠을 깨웠습니다 그대도 그렇게
잠 깨우듯 오실 건가요 지금 어디쯤 오고 계시는 중인
가요 언제라도 그대 오시기는 오실 건가요 그립고 슬픈
생각에 다시 잠들지 못했습니다 돌아누우면 왼쪽 눈에
서 흐른 눈물이 콧등을 타고 넘어 오른족 눈에서 흐른
눈물과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눈물과 눈물이 만나듯 그
대 만나고 싶었습니다 집 밖에 행상트럭이 와서 낮잠을
깨우고 눈물을 깨우고 세상의 모든 기다림을 깨웠습니다
강연호, 비단길, 세계사, 1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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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엄마를 기다리다 허기마저 지친 오후
방죽 너머 긴 머리채를 푸는 산그늘이 서러워질 때
언젠가 무작정 상경하고 싶었지만 갈 곳 몰라
이름 모를 역광장에 입간판처럼 서 있을 때
어느새 조약돌만큼 자란 목젖이 싫어
겨울 다가도록 목도리를 풀지 않고 상심할 때
쉽게 다치는 내성의 한 시절을 조용히 흔들며
가만가만 가지마다 둥지를 트는 속삭임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내가 실연의 강가에서 하염없이 출렁거리는
작은 배 한 척으로 남아 쓸쓸해질 때
세상의 모든 그리운 것들은 도무지
누군가 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는 줄 모른다며
알면서도 모른 척 무시한다며 야속해질 때
그래, 비밀 같은 바람소리였네 숨 죽여 들을수록
낮아져 하마 끊길 듯 이어지는 다독거림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허나 운명은 언제나 텅 빈 복도를 울리며
뚜벅뚜벅 걸어와 벌컥 문을 열어젖히는 법이네
다짜고짜 따귀를 후려치고 멱살 낚아채
눈 가리고 어디론가 무작정 끌고 가는 것이네
내 어느날 문득 더 자랄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묵념처럼 세상은 함부로 권태로워지고
더 이상 간직할 슬픔 하나 없이 늙어가는 동안
옛날에 나무에 스치며 나를 키우던 바람소리
다시는 듣지 못했네 들을 수 없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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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
선인장에 물을 주었다
일 주일에 한 번, 딱 한 숟가락씩만 주랬는데
어쩌나 보려고 흠뻑 주었다
녀석은 불타는 갈증의 혓바닥을 어떻게 식힐까
혹시 저렇게 가시로 내뱉는 건 아닐까
궁금증을 변명 삼았지만
가학에 재미를 붙이는 동물은 확실히 인간 뿐이다
선인장은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썩어갔다
누렇게 담뱃진에 물든 내 손가락 같았다
선인장을 향한 이 맹목적인 증오는 물론 헛것이다.
내 속의 갈증 내 몸의 가시
그게 두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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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의 화해
나는 요즘 고요하고 섬세하게 외롭다
나는 한때
어떤 적의가 나를 키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더 크기 위해 부지런히
싸울 상대를 만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 그때는 애인조차 원수 삼았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솔직히 말해서 먹고 살만해지니까
원수 삼던 세상의 졸렬한 인간들이 우스워지고
더러 측은해지기도 하면서
나는 화해했다
너그러이 용서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더 크고 싶었으므로
대신 술이라도 원수 삼기로 했었다
요컨대 애들은 싸워야 큰다니까
내가 이를 갈면서
원수의 술을 마시고 씹고 토해내는 동안
세상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었고
책들은 늘어나거나 불태워졌으며
머리는 텅 비고 시는 시시해지고
어느 볼장 다 본,
고요하고 섬세한 새벽
나는 결국 술과도 화해해야 했다
이제는 더 크고 싶지 않은 나를
나는 똑똑히 보았다
나는 득도한 것일까
화해, 나는 용서의 다른 표현이라고 강변하지만
비겁한 타협이라고 굴복이라고
개량주의라고 몰아 붙여도 할 수 없다
확실히 나는 극우도 극좌도 아닌 것이다
적이 없는 생애는 쓸쓸히 시들어간다
고요하고 섬세하게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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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은 절박하다
여기서 길을 버리면 어떡하냐는
내 건짜증만으로도
절벽은 무너질 기세로 콜록거렸다
침묵이란 사실 이런 거 아니냐는 듯
울컥 명치 끝에 걸린 멀미 넘어오지 않고
바람은 마음 속에서만 소용돌이쳤다
저기 위태로운 칡덩굴 하나
목숨 건 곡예 부려 바위를 쪼개는데
아, 진짜 침묵은 말 없어도 바위를 쪼갠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얼마나 많은 날들 더 지나야
내 들끓는 욕망은 투신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말 없는 사내 될 거라며
두 주먹 불끈 쥐어보지만
늘 그렇듯이
세월은 지나간 세월만 세월이고
너무 지루하고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고
늘 그렇듯이
지금쯤은 침묵해야 한다고 다짐할 때마다
절벽 앞에 선 기분이고
절벽은 그래서 언제나 절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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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알전구의 필라멘트가
탁 끊어질 때의 잔광, 기억하는지
오늘 하늘의 별들은 잔광으로만 남는다
모두 우물을 안고 잠들었나보다
그래서 더 깊어 보인다
깊은 우물은 함부로 철벅이지 않는다
잔광의 고요가 깊을 때
우리 옷깃만 스쳤다고는 말하지 말자
시: 강연호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중에서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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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새
허름한 뒷골목에 나무 한 그루
기다리며 서 있었습니다 더 자라지는 않구요
거리를 떠돌던 많은 새들이
다녀갔습니다 아예 둥지를 틀지는 않구요
어느 날이라고 다를까요 나무는 언제나
머리 곱게 빗고 두 팔 흔들어
자주 지치는 도시의 새들을
불러들였습니다 놀다 가세요 쉬어 가세요
목이 쉬도록 불러들였습니다
오래 머물지는 않으면서 많은 새들이
놀다 가거나 쉬어 갔지만
그리고 그때마다 나무는 놀거나 쉬지도
못하고 늘 바빴지만
허름한 뒷골목에 나무 한 그루
말라 죽어 있었습니다 세월은 순간이니까요
무심한 새들은 또 어디쯤에서
놀거나 쉬고 싶었습니다 다시 날아가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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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기원
지금 그의 어깨는 고요하지만
그가 잠들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를 둘러싼 입자들의 미세한 파동은
어딘지 경건한 데가 있다
귀 기울이면 낮게 살얼음이 잡힌다
허나 위로 받고 싶지 않아서 그는 돌아눕는다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만나는 법
눈물밖에는 없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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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서랍
이제는 완전히 지워버렸다고 자신했던
아픈 기억들 바늘처럼 찔러올 때
무수히 찔리면서 바늘 귀에 매인 실오라기 따라가면
보인다 입술 다문 마음의 서랍
허나 지금까지 엎지르고 퍼담은 세월 적지 않아서
손잡이는 귀가 빠지고 깊게 패인 흠집마다 어둠
고여 있을 뿐 쉽게 열리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빽빽한 더가 쌓여 있는 걸까
마음의 서랍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힘에 겨워
나는 어쩔 줄을 모른다 거기 뒤죽박죽의 또 한 세상
열면 잊혀진 시절 고스란히 살고 있는지
가늠하는 동안 어디에선가 계속 전화벨이 울려
아무도 수신하지 않는 그리움을 전송하는 소리 절박하다
나야, 외출했나 보구나, 그냥
걸어봤어, 사는 게 도무지 강을 건너는 기분이야,
하염없이 되돌아오는 신호음에 대고 혼자 중얼거리듯
우두커니 서서 나는 마냥 낯설기만 한
마음의 서랍 끝내 열어보지 못한다
아무래도 외부인 출입금지의 팻말 걸린 문 앞에
서성대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니 그보다는
대낮에도 붉은 등 켜고 앉아 화투패 돌리며
쉬어가라고 가끔 고개돌려 유혹하는 여자들의 거리에
와 있는 것만 같아 안절부절이다 순정만화처럼
고만고만한 일에 울고 웃던 날들은 이미 강 건너
어디 먼 대양에라도 떠다니는지
오늘 풍랑 심하게 일어 마음의 서랍 기우뚱거리면
멀미 어지러워 나도 쓸쓸해진다 언젠가
뭘 그렇게 감춘 것 많냐고 속 시원히 털어놓으라고
나조차 열어보지 못한 마음의 서랍
우격다짐으로 열어본 사람들 기겁하여 도망치며 혀차던
마음의 서랍은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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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빛
우듬지에 겨울 햇살이 이명처럼 매달려 있다
초록이 없으므로 더이상 햇살은 빛나지 않는다
나무는 제 발치께를 우두커니 내려다본다
발로 쓸어모으는 기억은 누구에게나 허전한 법이다
한때 웅숭깊었던 그늘의 넓이를 가늠하며
나무는 체온계를 문 아이처럼 생각에 잠긴다
텅 빈 고요가 압박붕대에 묶인 허리춤을 더듬는다
동그랗게 말린 이파리 몇 장이 마저 떨어져
이미 탕진한 삶을 둔탁하게 덧칠한다
저 잎들이 움켜쥔 허공조차 내 몫이 아니었구나
바람도 없는데 나무는 진저리 친다
나뭇잎 대신 이명의 햇살이 떨어져내린다
그늘이 있던 자리를 비춘다 배추 속같이 환하다
나무를 지탱하는 힘은 이제 고요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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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별빛
그리움도 버릇이다 치통처럼 깨어나는 밤
욱신거리는 한밤중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
필경 지친다 더 이상 감추어 둔 패가 없어
자리 털고 일어선 노름꾼처럼
막막히 오줌을 누면 내 삶도 이렇게 방뇨되어
어디론가 흘러갈 만큼만 흐를 것이다
흐르다 말라붙을 것이다 덕지덕지 얼룩진
세월이라기에 옷섶 채 여미기도 전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 필경 구겨버릴 테지만
지금은 삼류 주간지에서도 쓰지 않는 말
넘지 못할 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너에게
가고 싶다 빨래집게로 꾹꾹 눌러놓은
어둠의 둘레 어디쯤 너는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마음은 늘 송사리떼처럼 몰려다니다가
문득 일행을 놓치고 하염없이 두리번거리는 것
저 별빛 새벽까지 욱신거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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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밤의 독서
그는 두꺼운 책을 읽는다
검은 밤 흰 종이
검은 글자 흰 여백
두꺼운 책은 간단히 정의된다
그는 두꺼운 책을 읽지만
소리내어 읽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두꺼운 책 속에는
두꺼운 책을 소리내어 읽는 것은
두꺼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두꺼운 책은 앙다문 입술 같다
앙다문 입술에서 소리는 나올 수 없다
나올 수 없으므로 그가 책 속으로 들어간다
쿵, 두꺼운 책의 표지가 닫힌다
이제 그는 보이지 않는다
검은 밤 흰 종이
검은 글자 흰 여백
두꺼운 책은 앙다문 입술답게 조용하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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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절구통만한 먹이를 문 개미 한 마리
발 밑으로 위태롭게 지나간다 저 미물
잠시 충동적인 살의가 내 발꿈치에 머문다
하지만 일용할 양식 외에는 눈길 주지 않는
저 삶의 절실한 몰두
절구통이 내 눈에는 좀쌀 한 톨이듯
한 뼘의 거리가 그에게는 이미 천산북로이므로
그는 지금 없는 길을 새로 내는게 아니다
누가 과연 미물인가 물음도 없이
그저 타박타박 화엄 세상을 건너갈 뿐이다
몸 자체가 경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노상 엎드려 기어다니겠는가
직립한다고 으스대는 인간만 빼고
곤충들 짐승들 물고기들
모두 오체투지의 생애를 살다 가는 것이다
그 경배를 짓밟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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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이제는 행복해졌느냐는 안부가 그에게 온다
혓바늘이라도 일 것 같은 저녁의 비애 속으로
뚝뚝 떨어지는 질문의 풍경
행복? 그가 낮게 되뇌여보는 입술의 움직임을
귀청이 따라가다 포기한다
별들이 빛나 보이는 건 멀리 있기 때문일까
멀리서는 그 역시 빛나 보일까
생각은 삼십 촉 알전구보다 길게 그늘을 드리우고
한때는 그에게도 서늘한 추억이었을
연애나 정열 같은 것들이
읽다 놓친 신문의 부고란같이 싸늘하다
기를 쓰고 행복해주고 싶었고
어쩔 수 없이 행복해져야 했지만
그는 안부가 숨겨놓은 행간이 문득 궁금해진다
세월은 늘 너그럽지 않았다고
자책인지 불화인지 뚜렷하지 않은 날숨이 터진다
행복이라는 낱말 근처에는
그의 눈시울이 적시는 무엇인가가 어려 있다
그는 이제 주간지의 현란한 고백처럼 텅 빈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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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한 날 지나간 날
1
아무도 오지 않는다 허구한 날 내 마음의 공터에는
혼자 놀다 심심해진 햇살 곰곰한 생각에 지쳐 그늘 키우고
기다리는 일 많으면 사람 버리기 십상이라며
귓바퀴에 잠시 머물던 바람결 총총히 사라진다
저 햇살 저 바람도 저녁이면 돌아갈 집이 있는가
고개 갸우뚱하면 침착하게 낙법을 연습하던 나뭇잎 몇 장
내일 또 오마는 약속처럼 어깨에 얹힌다 삶이란
이런 거다 건너편 아파트 베란다에 널렸다 걷히면서
다시 더러워질 결심을 바투여미는 흰 빨래의 반짝임 같은
세월아, 갈기갈기 찢기고 늘어진
하품에 지쳐 나는 너에게 줄 그리움이 없는데
너는 손 벌리고 자꾸만 손 벌리고
2
사진틀 속에 흑백으로 갇힌 날들이 파닥거린다
더러 지나간 날들이 예쁘게 이마 짚어주지만
아무리 기억의 초인종을 신나게 눌러도
그때, 그 들길, 첫 입맞춤
풀잎 풀잎 풀잎, 서걱서걱 서투르다며 흉보던 날들은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살지 않는다
텅 빈 우편함에는 수취인 불명의 먼지 쌓여갈 뿐
내 한 번도 같이 놀자고 한 적 없는
세월아, 내가 언제 숨바꼭질하자 했니?
그것도 모자라서 세월아
왜 나만 술래 되어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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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정대에게
그때 음악과 시가 있는한
영원한 청춘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우리가 쏘다녔던
골목과 천변은 빛났던가
아니 한장의 나뭇잎조차 빛나지 않았다
우리가 빛이었으므로
가슴 근처에 잡히는 멍울은
울음이 아니라 음악이라고 생각했었다
하기는 울음이 곧 음악 아닌 적 있었던가
다만 슬프지도 격렬하지도 않을 뿐이야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시를 썼고
그래서 한 번도 청춘인 적 없었다
진작부터 붉은 노을이었다
지나가는 말로 묻는 안부처럼
무심한 듯 갑자기 가슴을 치는 것
음악이란 그런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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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있다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
저 물 위의 파문, 언제가 그대의 뒷모습처럼
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
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
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
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
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
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
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
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모은다는 것을
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
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순간이듯
물 위에 떠서 머뭇 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요는
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은 비명을 숨기고 있다
그러므로 글썽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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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왕년에는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식당엔 사내들 몇이서 밥 대신 소주 들이켜며
저마다의 왕년을 안주 삼고 있었습니다
나도 왕년에는 소주에 밥 말아먹던 시절 있었나요
사내들의 뒷덜미를 움켜진 그림자 흔들리고
불빛에 배인 눈시울은 붉다 못해 황량했습니다
쓰디쓴 왕년을 입 안에 털어넣으며
사내들은 헐거운 삶을 더욱 풀어놓았구요
내 늦은 저녁도 소주처럼 쓰고 차가웠습니다
쓰디쓴 밥알들을 입 안에 털어넣고
왕년인 듯 오래오래 씹고 또 씹었습니다
덧난 눈시울 쉽게 아물지 않았습니다
시집 ;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문학동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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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그는 오늘도 아내를 가두고 집을 나선다
문단속 잘 해, 아내는 건성 듣는다
갇힌 줄도 모르고 노상 즐겁다
라랄랄라 그릇을 씻고 청소를 하고
걸레를 빨며 정오의 희망곡을 들으며
하루가 지나간다 나이 들수록 해가 짧아지네
아내는 제법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상추를 씻고 된장을 풀고 쌀을 안치는데
고장난 가로등이나 공원 근처
그는 집으로 가는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맨다
그는 혼자 술을 마신다
그는 오늘도 집 밖의 세상에 갇혀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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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드라마
멜로드라마는 눈물을 쥐어짠다
멜로드라마는 손수건을 적신다
비웃지 마라
멜로드라마가 슬프다면
그건 우리 삶이 슬프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가 통속적이라면
그건 우리 삶이 통속적이기 때문이다
보라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만이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울고 있지 않느냐
적어도 그들만큼은 겪어봐야 안다
삶을 연습하고 싶다면
우리는 멜로드라마에 기댈 수밖에 없다
거룩한 멜로드라마
위대한 멜로드라마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있다 / 문학동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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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
들판은 잠들지 못한다
먼 도시의 살림이 토하는
불빛 같은 졸음 몰려올 때마다
흔들어 깨우는 풀잎들의 칭얼거림
들판은 잠들지 못한다
깨어있으라 깨어있으라
쉴 새 없이 따귀 후려치는
바람의 억센 손바닥
그러나 얼얼한 뺨
부어터진 얼굴의 아픔보다
그 손바닥마다 박힌 못자국들 안쓰러워
들판은 영영 잠들지 못한다
시집 ; 비단길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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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의 꿈
쓰레기통 옆에 누군가 벗어놓은 신발이 있다
벗어놓은 게 아니라 버려진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한 짝쯤 뒤집힐 수도 있었을 텐데
좌우가 바뀌거나 이쪽저쪽 외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얌전히도 줄을 맞추고 있다
가지런한 침묵이야말로 침묵의 깊이라고
가지런한 슬픔이야말로 슬픔의 극점이라고
신발은 말하지 않는다
그 역시 부르트도록 끌고 온 길이 있었을 것이다
걷거나 발을 구르면서
혹은 빈 깡통이나 돌멩이를 일없이 걷어차면서
끈을 당겨 조인 결의가 있었을 것이다
낡고 해어져 저렇게 버려지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내팽개치고 싶은 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누군가 그를 완전히 벗어 던졌지만
신발은 가지런히 제 몸을 추슬러 버티고 있다
누가 알 것인가, 신발이 언제나
맨발을 꿈꾸었다는 것을
아 맨발, 이라는 말의 순결을 꿈꾸었다는 것을
그러나 신발은 맨발이 아니다
저 짓밟히고 버려진 신발의 슬픔은 여기서 발원한다
신발의 벌린 입에 고인 침묵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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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도 저녁이면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
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
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치던 아이들
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
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
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
빈집의 돌담은 제풀에 귀가 빠지고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
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
애매한 그리움이란
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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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임의의 한 점에서 다른 점에 이르는
점들의 집합을 선이라 한다
최단거리일 때 직선이라 부른다
수학적 정의는 화두나 잠언과 닮아 있다
때로 법열을 느끼게도 한다
길이란 것도 말하자면
임의의 한 점에서 다른 점에 이르는 점들의 집합이다
최단거리일 때 지름길이라 할 것이다
임의의 한 점에서 다른 점에 이르는 동안
점들은 언제나 고통으로 갈리고
점들은 마냥 슬픔으로 꺾여 있다
수학적으로 볼 때 나는 지금
임의의 한 점 위에서 다른 점을 찾지 못해
우두커니 서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처음의 제 몸을
가르고 꺾을 때마다 망설였을 점들의 고뇌와 번민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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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길.1
내 밀려서라도 가야 한다면
이름만이로라도 아름다워야지 비단길
허나 지나는 마음 쓸쓸하여 영 자갈밭일 때
저기 길을 끌어가는 덤불숲 사이로
언뜻 몸 감추는 세월의 뒷모습 보인다
저렇게 언제나 몇 걸음 앞서 장난치며
어디 헛디더봐 유혹하는
허방이여, 온다던 사람 끝내 오지 않아서
기어이 찾아나선 마음 성급하다 발 거는 걸까
잠시 허리 굽혀 신발끈이나 고쳐 매면
흐린 물둠벙에 고인 행색
더는 고쳐 맬 수 없는 생애가 엎드려 있다
앞서거나 뒤쳐지는 게 운명이라서
대상의 행렬은 뽀얀 먼지 속에서 유유한데
비단길, 미끄러운 아름답게 나를 넘어뜨릴 때
어디 經을 외며 지나는 수도승이라도 있어
저런 조심해야지, 일으켜주며 세상 응진
온전히 털어내는 법 가르쳐줄까
물음표처럼 휘어진 등뼈 곧추세울수록
먹장구름은 다시 우르르 몰려와 기우뚱거린다
지나가는 저 빗발 긋는 동안이라도
내 멈춰서지 못하는 건 영영 모래기둥으로 변할
몇천 년의 전설 두렵기 때문이 아니다
밀려서라도 가야 할 인연의 사슬
질기니 이름만이라도 아름다워야지 비단길
얽힌 마음 다잡고 걷다 보면
길 잘못 들었다며 앞을 가로막는 이정표조차
그렇게 정답고 눈물나는 것을
시집 ; 잘못든길이 지도를 만든다 / 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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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길 3
멀리 가다 보면 길도 저를 포기하던가
아무렇게나 헝클어지고 드러눕는 길을
달래는 마음이 또한 기댈 곳 없어 비틀거릴 때
지도책에 힘겹게 매달려 있던 낯선 지명들도
철 지난 이파리마냥 우수수 떨어져내린다
國道 여기서 미련없이 끊겨 버스 지나가면
흙먼지 뽀얀 기다림이 자갈마저 튕겨 날리지만
아무도 내리지 않는다,하기는 정류장이랬자
표지판 하나 없는 비포장도로에
누구라도 멈춰 서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삶의 뒷덜미를 낚아채며 날은 저물고
오늘 안으로 약속해 놓은 목적지도 없는데
막차 끊어지기 전에 타기는 타야 할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조급함이 물결 친다, 너 역시 가야 할
어떤 定處를 미리 새겨두었다는 걸까
보퉁이 짊어진 어둠이 먼저 다복솔로 기어
어디론가 부지런히 퍼져간다
네가 자는 잠이 언제나 새우잠이듯
네가 기다린 건 오랜 습관일 뿐
무엇을 기다렸는지조차 모를 세월 흐르도록
아무도 돌아오지 않아서 이제 너도 가야 한다
기억한다면, 철든 짐승처럼 터벅터벅 걸어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길을 너는 돌아와야 한다
시집 ; 비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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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역
지하철 환승역, 갈아타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기차든 비행기든 직장이든 혹은 여자든
갈아타는 것만큼 가슴 뛰는 일은 없다
환승역에는 어디나 미로가 있고 종말론이 있고 복권이 있다
삶은 문득 놓친 실끝 같은 거니까
삶은 언제나 끝장내고 싶은 거니까
삶은 늘 가려운 거니까
환승역에는 어디나 미로가 있고 종말론이 있고 복권이 있어서
사람들은 더러 이쪽 저쪽 헤매기도 하고
열차에 받혀 공중들리기도 하고
열심히 긁어대기도 한다
사람들은 날마다 환승역에 복작복작 모여들지만
갈아탄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대시학 / 2002년 6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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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비
오늘은 종일 추억을 관람하였다 오래된 흑백 무성영화
의 자막처럼 나른한 비가 내려 지난 겨울의 마른 버짐으로
남은 잔설을 녹이고 있었다 멀리 칡뿌리캐러 산을 오르는
아이들의 날?이,종이우산이 바람에 뒤집히면 거기
유년의 나도 섞여 있었다 미나리가 툭툭 살얼음 털고 일어서는
산비탈을 따라 높거나 낮은 봉분들의 생애가 미끄러지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게 역력했다 가는 비에 취한 아이들은 후미진
동굴도 그냥 지나쳐가고 가물가물 죽은 사람들이 한번더 죽는
봄비가 내려 오늘은 종일 추억을 관람하였다
시집 ; 잘못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 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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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
뙤약볕 아래 대운동장이 칭얼거리고 있었다
너무 더우면 저도 못 견디나부다 언제쯤 운동장은
제 홀로 그늘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철이 들까
그때까지 한가운데 서서 내가 그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럼 내 그늘은 ?
내 그늘은 지금 不在中이야
시집 ; 잘못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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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목
나무들 울면서 숲을 떠났다
둥지는 구겨지고 새들은 몸져누웠다
철거된 살림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음산한 안개가 천천히 수의를 들고 다가왔다
즉음은 도처에서 도끼날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리운 독재 그리운 페퍼포그 그리운 함성
오오 그리운 혁명 다 지난 뒤
나무들 울면서 돌아왔다
모두 빈손이었다
이제, 숲에는 벌목당한 청춘들이
너나할것없이 심심해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기억을 뜯어먹으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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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에서
그대 마음이 묵정밭 같아서
우리 함께 서해 바다를 보러 가자 했었지
삼각파도나 모래톱이나 칼날진 해풍쯤에
그대 마음의 뻗센 잡초 베어질 리 만무했지만
어쩌면 서해 일몰 속에 활활 타올라
화전이라도 다시 일굴 줄 알았지
우리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며 부산떨었는데
갯벌 기어가듯 느리고 더딘 행려
내 급한 생각만이 솟구치는 물결을 타고
지도책에서 배운 산동반도까지 헤엄쳐갔을 뿐
정작 그대는 서해로 질러가는 길을 피해
왜 자꾸 멀리멀리 돌아서 가자 했을까
서해, 죽은 바다와 황사바람 속에서
바닷새 몇 마리 사람 기척에 질려 있었지
기억해? 붉은 노을이 그대 뺨에 젖어내리는 동안
가슴엔 듯 둔탁하게 자갈 굴러가던 것을
그대를 넘어 바다로 가는 길은 멀고 멀어서
내 지친 목측 서둘러 침몰시키던 것을
그대 기억해? 오랜 세월 지나
일구어낼 마음밭 없어 황량해질 때마다
나 또한 그대 더딘 발걸음을 곰곰 헤아리듯이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 문학세계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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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1
오늘 하늘에는 소금쟁이들 가득했습니다
파문에 파문을 불러 꼼지락거리고 있었습니다
밤새워 걸어야 할 약속처럼
파문에서 파문으로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소금쟁이들이 젖지 않듯
파문은 물에 젖지 않습니다
오늘 소금쟁이들 가득한 하늘은 고요했지만
그대는 텀벙텀벙 물에 젖어
내내 격렬했습니다
2
별들이 불러일으키는 고요와 격렬 속에서 그대는 잠들지
못합니다 고요는 하늘의 몫이고 격렬은 다시 잠들지 못하는
그대의 몫입니다 그대 아우성칠 때마다 별들은 자리 바꿔 앉
으며 그대 어깨를 다독거려줍니다 그대가 파문이듯 하늘에
도 파문은 일고 있지만 입술 깨물며 그대의 성화 견뎌내는
저 별들은 얼마나 완강한 고요입니까 젖지 않는 파문의 고요
를 배우기까지 그대는 내내 젖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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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별빛
그리움도 버릇이다 치통처럼 깨어나는 밤
욱신거리는 한밤중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
필경 지친다 더 이상 감추어둔 패가 없어
자리 털고 일어선 노름꾼처럼
막막히 오줌을 누면 내 삶도 이렇게 방뇨되어
어디론가 흘러갈 만큼만 흐를 것이다
흐르다 말라붙을 것이다 덕지덕지 얼룩진
세월이라기에 옷섶 채 여미기 전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 필경 구겨버릴 테지만
지금은 삼류 주간지에서도 쓰지 않는 말
넘지 못할 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너에게
가고 싶다 빨래집게로 꾹꾹 눌러놓은
어둠의 둘레 어디쯤 너는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마음은 늘 송사리떼처럼 몰려다니다가
문득 일행을 놓치고 하염없이 두리번거리는 것
저 별빛 새벽까지 욱신거릴 것이다
시집 ; 잘못된 길이 지도를 만든다 / 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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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일만 나에게
사랑은 언제나 조금씩 늦게 온다 박정만 시인이 간
뒤 나는 종로서적에서 처음으로 그의 시집을 만났다 그
는 우주로 떠났다는데 그의 시집은 이제야 내 책꽂이에
꽂히고, 안타까웠지만 언제나 사랑은 조금씩 늦게 온다
생전에 슬픈 일만 있어 달라고 생떼를 썼다는 그였지만
죽음 앞에서는 정작 슬프지 않았으리?라! 오히려 남은
사람들이 슬퍼 그의 시집을 읽으면 누구든지 더 이상
우주가 어둡지 않다는 걸 알 것이다 그가 그토록 아껴
닦았다는 램프를 켜 들고 저기 우주의 한가운데 길 밝
혀 서 있을 것이므로
시집 ; 비단길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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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에 서다
아무나 땅끝에 설 수 있는 게 아니다 광주 나주 영암
해남 지나면 거짓말처럼 쉽게 땅끝에 설 수 있다고 믿
지 말 일이다 어째서 영암도 채 못 지나 월출산이 앞을
가로막는지, 그만 여기쯤에서 돌아가라며 두 눈 부릅뜨
는지, 금세 바위라도 굴려버릴 듯 완강하게 거부하는지
한 번씩은 가늠해볼 일이다 그 가늠자의 끄트머리에 바
다 한 장 펼쳐져 있어 땅끝을 과연 땅끝이게 하고 결국
더 이상 갈 곳 없는 사람들을 세상 속으로 돌아오게야
하겠지만, 광주 나주 영암 해남 지난다고 누구나 땅끝
에 설 수 있는 게 아니다 길은 길답게 헝클어져 지도책
조차 어지러운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토말리, 마른
입술 축여 나직이 되뇌어보기만 해도 설레발을 치는
곳, 유배된 者만이 유배된 者만이...
비단길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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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강물
내 지도 위의 눈물선을 따라 강은 흘렀네
푸른 실핏줄 촘촘하게 얽힌 저 강물
건너편엔 연좌하고 나를 불러 손짓하는 풀꽃들
죄다 아름답지만 저 강도 어제 건넌 그 강 같아서
산을 넘어뜨리는 힘으로 나 고개 떨구어야 했네
세상은 넓고 넓어서 내 부르는 노래는
메아리를 이루어 화답하지 못했네 지나간 달력에
또렷이 새긴 동그라미 두어 개는 무슨 날짜를
기억하려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네
오 날짜의 파문 물결의 파문을 일으키며 세월은 가고
세월은 가서 세월은 가나 세월은 가도 세월은 가지만
때로 삶은 시시했고 그래서 나는 시를 썼고 때로
시도 시시했지만 시시한 시를 쓰다가 밤을 새운 새벽이면
아무에게나 전화하고 싶었고 아무에게도
전화하지 않았네 전화번호부책만큼 두꺼운 추억은
그 새벽 어디에도 깨어 있지 않았네
추억은 말하자면 무수히 몸에 달라붙은
도깨비풀 같은 것이었는데 추억은 말하자면
은행에서 잠자는 몇백 원쯤 남은 휴면계좌 같은 것이었는데
밤기차가 천천히 기적을 끌고 가서
떼어내고 떼어내도 남는 이명처럼 나 너덜거렸네
오오 이 악물어 견디면 실핏줄 촘촘한 저 강물
죄다 터져 넘치겠네 내 지도 위를 범람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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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그는 지금 여기가 바닥이라고 생각한다
더는 밀려 내려갈 곳이 없으므로
이제 박차고 일어설 일만 남은 것 같다
한밤중에 깨어나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면
들끓는 세상이 잠시 식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갈증은 그런 게 아니다
바닥의 바닥까지 내려가
여기가 바로 밑바닥이구나 싶을 때
바닥은 다시 천길 만길의 굴욕을 들이민다는 것을
굴욕은 굴욕답게 캄캄하게 더듬어 온다는 것을
그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 저어보지만
스스로를 달래기가 그렇게 쉬운 게 정말 아니다
그는 바닥의 실체에 대해
오래 전부터 골똘히 생각해온 듯하다
그렇다고 문제의 본질에 가까워진 것은 아니지만
바닥이란 무엇인가
규정하자면
털썩 주저앉기 좋은 곳이다
물론 그게 편안해지면
진짜 바닥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시와반시 / 200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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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들
아무도 찾아오지않고 누구도 그립지 않은 날
혼자 쌀을 안치고 국덮히는 저녁이면
인간의 끼니가 얼마나 눈물겨운지 알게 됩니다
멀리 서툰 뜀박질을 연습하던 바람다발
귀기울이면 어느새 봉창 틈새로 기어들어와
밥물 끓어 넘치듯 안타까운 생각들을 툭툭 끊어놓고
책상 위 쓰다만 편지를 먼저 읽고 갑니다
서둘러 저녁상 물려보아도 매양 채우지 못하는
끝인사 두어줄 남은 글귀가 영 신통치 않은 채
이미 입동 지난 가을 저녁의 이내 자욱이 깔려
엉긴 실꾸리 풀듯 등불 풀어야 합니다
그래요. 이런 날에는 외투 걸치고 골목길 빠져 나와
마을 앞자락 넓게 펼쳐진 빈들에 나가지 않으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그립지 않은 날
웅크린 집들의 추위처럼 흔들리는 제 가슴 속
아 이곳이 어딥니까, 바로 빈들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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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언제였을까 공원에서 한 컷
나뭇잎이 나뭇잎끼리 모여 뒹굴 듯
그늘은 그늘끼리 모여 뒹구는 속에서
누군가 찍어 놓은 사진 한 장
내 옆에서 웃고 있거나 눈을 감거나
콧등을 찡그린 사람들이 영 낯설다
언제 누가 불러 이 공원에 가서
오후의 한때를 렌즈 속에 붙잡아 놓았을까
햇살은 그늘 틈새로 튀밥처럼 흩어지고
저마다 고만고만하게 행복한 표정들
하지만 기억은 빛이 들어간 필름처럼 막막하다
기억도 기억끼리만 모여 뒹구는지
도무지 나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나는 사진 속의 나와 겨우 눈 맞춘다
끼어들지 마,사진 속의 나는
나를 힐끗 노려본 뒤 다시 표정을 잡는다
이 낡은 사진의 얼룩은 세월의 더께가 아니다
그들만의 오후를 침해받고 싶지 않다는
완강한 거부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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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약력
1962년 대전에서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1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비단길}(1994)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1995) 등
1995년 제1회 현대시동인상 수상.
현재 원광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로 재직중.
제1회 현대시동인상 수상자 강연호(39)씨의 세 번째 시집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가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나왔다.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저 물 위의 파문, 언젠가 그대의 뒷모습처럼/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첫 5행)
존재는 흔적을 남기고. 경험은 기억을 남긴다. 모든 절실한 것들은 사라져도 끝내 사라지지 않고. 흔적과 기억 속에서 '죽음 이후의 생'을 산다. 아니 차라리 죽음으로서의 삶을 산다. '그대의 부재가 내 존재를 증명하''다시 적소에서'는 것이다.
강연호씨의 시적 자아는 뒷모습을 보이고 사라진 '그대'의 흔적을 좇는다. '적멸' '길' '다시 적소에서'와 같은 시를 참조해 보면, 그는 '그대'를 잃어버린 뒤 그 흔적과 기억의 자장 안에서 하루하루를 영위한다.
그가 보기에는 '모든 게 흔적'이고. '흔적은 결코 지워지지 않으며' '날이 갈수록 흔적은 무게를 더하''흔적'는 것 같다. 그런 삶이 반드시 고통인 것만도 아니다. 실연과 이별의 달콤한 슬픔이 강연호씨의 시에 감미로운 우수의 분위기를 부여한다.
강연호 시의 미학은 상실과 슬픔을 회피하거나 그에 맞서려 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화해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나 어느 날 강물 위 무수한 파문을 따라가다/무심코 중얼거림에 걸려 넘어졌지만/가슴 밑바닥 돌쩌귀처럼 박힌 상처는/꿈쩍도 않고 고요했네 이상하게/하나도 아프지 않았네”'상처'
엄연히 상처가 있는데도 아프지 않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굳은살이 박이듯 그것이 자기 삶의 일부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이제 시인은 상처와 슬픔을 모든 존재의 당연한 몫으로 파악한다.
'물 위에 떠서 머뭇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요는/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은 비명을 숨기고 있다/그러므로 글썽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마지막 4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