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은 세계기록으로 금메달을, 남승룡은 동메달을 땄다. 두 사람은 양정고 동갑이었다. 늘 기록은 남승룡이 앞섰는데 올림픽 경기는 손기정이 앞섰다. 두 사람은 양정고 교사인 김교신에게서 조선의 영성을 깊이 배웠다.
일장기를 지운 것은 조선중앙일보였다. 조계사 건너편 종로농협지점이 있다. 이 건물은 여운형이 사장이었던 조선중앙일보사옥이었다. 독립운동가로 사회주의를 결 있게 걸은 조동호(1892~1954)가 구입해서 여운형이 운영을 하였다. 조선의 언론으로 힘 있게 서게 하기 위해서 온 몸을 다한 조동호의 헌신을 오늘 기억한다.
조동호가 1922년 독립신문에 쓴 글은 묵직하고 큰 울림으로 읽힌다. 독실한 기독교이었던 그는 당시 성경체를 인용하여 독립신문 서체로 사용하였다.
"대장부 난세를 만나 국사에 몸을 바치면 마땅히 어깨에 총을 메고 손에는 칼을 잡아 원수를 없애고 동포를 건져내는 것이 영웅의 본분이요 남자의 태도다. 어찌 구구히 붓대를 희롱하여 글을 장식하고 어린 사람의 모습을 보이겠는가. 자고로 글 잘하는 영웅이 없고 말 잘하는 호걸이 없는 법이다."
조동호는 1907년경 무렵에 국립측량학교에 다닐 때 같은 건물에 있던 국립우편학교 출신인 여운형을 만나 여운형과 평생동지가 된다. 3.1 만세혁명의 기획팀은 신한청년당인데 조동호는 이 모든 조직을 만들었다. 신한청년당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만들고 이후 3.1혁명이 일어났다. 조동호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윌슨대통령에게 제출하기 위한 조선독립청원서를 여운형 등과 함께 영문으로 작성했다.
1925년 6월 조선공산당 대표로 소련의 모스크바에 건너가 코민테른 위원들과 만나고 코민테른의 정식 승인을 받았고 그는 계속 투옥된다. 1931년 4년간 서대문형무소 만기 출옥 후 논산 갑부인 윤희중과 지인들에게서 자본을 모아서 신문사 창설자금을 마련하고 중외일보를 인수해 이름을 조선중앙일보로 변경을 하고 여운형을 사장으로 영입을 하고 자신은 주필을 맡는다.
동아일보도 일장기를 지우고 이렇게 하려고 하자 언론 사주들이 반대하자 이길용 체육기자는
"이미 지방의 신문이나 여러 곳에서 조선인들은 일장기를 말소하고 있다, 이 엄숙한 충격에 우리는 동조해야 한다. 내가 책임을 진다" 이렇게 말하고 일장기 말소를 한다. 이길용 기자는 결국 이 일로 체포되어 그는 피나는 고문도 받고 투옥되고 1945년까지 기자직을 갖지 못하다.
조동호는 여운형이 암살되자 낙향을 한다. 평생 동지에 대한 외로운 선택이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나이다. 1914년 여운형과 조동호가 중국으로 망명하며 독립운동을 다짐하며 평생 동지애를 나눌 때 나눈 말이다. “바다에 맹서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산에 맹서하니 초목이 알도다”
이 두 사람의 해방일지가 한반도 땅을 적셔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