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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을 넘어서서 Against All Odds
짐 스타이어 지음 | 김원주 옮김 | 신국판 228면 | 5,500원
도전과 모험, 굽히지 않는 믿음과 끈기의 이야기!!
이 책은 견디기 힘든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한 YWAM 전(前) 총재 짐 스타이어 부부의 이야기다. 그들이 도착한 선교지, 아름답고 신비로운 브라질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련과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롭고 충만한 사랑을 믿으며 모든 고난을 딛고 일어나 그 땅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다.
이 책을 통해 당신은 아마존 깊숙한 곳에서 죽어가는 인디언 부족으로부터 브라질의 도시를 헤베는 버려진 거리의 아이들까지,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자비롭고 충만한 사랑이 그를 믿고 따르는 평범하지만 용기 있는 사람들의 손길과 가슴을 통해 놀랍게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저자 소개
YWAM 브라질 선교사였으며 전(前) YWAM 대표(Chairman).
아버지의 외도와 부모님의 이혼, 첫 번째 결혼의 실패, 신체적 장애 등 그의 삶은 불우한 환경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YWAM을 통해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고 계속해서 부르심을 좇아 YWAM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아내인 팸과 예수전도단의 브라질 베이스를 개척하여 발전시켰고 남미지역에서 선교사들을 일으켜 훈련시키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고된 삶의 질곡을 건너온 사람답게 그의 메시지에는 질그릇 같은 우리를 아픔과 고통 속에서 연단하고 부르심의 자리까지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감동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짐은 현재 브라질의 벨로 호리존테에서 아내와 다섯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소개의 말
아프리카로 향하는 17명의 젊은이들이 리오 공항에 모였다. 잘 훈련된 팀이 아닌데다가 다가올 모험에 대한 흥분에 들뜬 그들의 모습은 마치 코미디의 한 장면 같았다. 물론 어렵고 힘든 선교 현장에 파견된 선교 팀치고는 침착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매우 용기 있는 팀이었다. 그들은 나와 아내가 바로 그들의 나이 때 시작했던 멋진 모험을 생각나게 했다.
우리의 모험도 바로 이 공항에서 시작되었다. 포르투갈 말도 모르고, 편도 비행기 표에 비자도 없이 3달러와 60달러짜리 수표만 갖고, 결혼한 지 11달 밖에 안 된 나와 아내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늘 알 수 없는 불안과 의문에 시달렸던 내가 지금 떠나는 이 친구들처럼 믿음의 확신을 갖기까지는 수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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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도 문제로 아버지와 헤어진 어머니는 교사가 되기 위해 주립 대학에 입학했다. 그 시절 우리는 간이 트레일러를 빌려 생활했다. 조부모님과 함께 살게 된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내반족이었던 발이 기형으로 자라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다. 수술 후 6주 동안 휠체어를 타고 지내야만 했고, 다리는 고무처럼 무감각했으며, 걷는 법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비대해진 몸과 장애가 있는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고, 놀리는 친구들과 자주 주먹다짐을 하곤 했었다.
우리 가족은 치코 주립 대학 옆에 있는 교회에 다녔다. 하지만 교회 생활이 내 텅 빈 가슴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 주일에 우연히 강단에 서서 발표를 할 기회가 있었다. 다행히 별 실수 없이 잘 마칠 수 있었다. 그 때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으며 내가 언젠가 목사가 될지도 모르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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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 학위를 받은 어머니가 교사가 되실 즈음, 나는 댄이라는 친구를 만났다. 오순절 교회에 다니던 댄은 어느 날 나를 야외집회에 초대했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와 달리 커다란 창고에 모여 큰 소리로 노래하고 통성으로 기도하는 모습이 낯설고 어색했지만, 이들이 사랑으로 충만해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계속 집회에 참석하던 나는, 하나님과 할 이야기가 있으면 누구든지 앞으로 나오라는 목사님의 외침을 들었다. 별 생각 없이 댄을 따라 제단 뒤쪽의 방으로 들어간 나는 소리치며 기도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있었다. “저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저들이 서로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든 저에게도 그걸 주십시오.” 나는 덜덜 떨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뭔지 모를 강력한 힘이 느껴졌고 인생에 새로운 의미가 더해진 느낌이 들었다. 주님이 내 안에 오셨다.
졸업을 앞두고 선교사로 부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진 나는, 등록금이 비싸긴 했지만 주 정부의 보조로 원하는 성경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에서 YWAM 활동을 하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 선교 현장에 대한 많은 이야기도 듣고, 로렌 커닝햄이 설교하는 가정 집회에도 참석했다. YWAM에서 일하면 어떨까 생각도 했지만, 나는 이미 멕시코 선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함께 선교사 훈련을 받고 있던 디앤과 사귀기 시작한 나는, 학기말 직후인 6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멕시코로 훈련을 떠났다가 돌아와 보니, 디앤은 유부남인 직장 상사와 만나고 있었다. 둘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했지만, 결국 우리의 짧고 파란만장했던 결혼 생활은 끝이 났다. 나는 실패한 것이다.
간신히 학교를 마치고 직장을 얻었지만, 믿음을 저버렸고 인생의 목표도 없었다. 그렇지만 결코 예수님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결국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기도를 했고, 다시 작지만 기쁨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남 캘리포니아 YWAM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3주 만에 직장과 차를 정리하고 DTS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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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8월, 나는 DTS를 받기 위해 LA 교외의 선랜드(Sunland)에 도착했다. 건물 두 채가 먼지 나는 주차장 곁에 서 있었다. DTS는 모든 수업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나는 아무도 쓰지 않는 대형 붙박이장을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로 꾸미고, 시간만 나면 강의 테입과 성경을 들고 그곳에 들어갔다. 조이 도우슨의 ‘영적인 깨어짐(Spiritual brokenness)’ 강의를 듣던 나는, 내가 아직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 기억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이 영적 수술의 시간을 거치면서 드디어 나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새 애인을 용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석 달 후, 아버지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하와이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2개월 동안 전도를 하며 오아후 섬 전역을 다녔다. 카일루아의 한 교회에서 성경학교를 열던 중 팸 메데이로스라는 자매를 만났다. 팸은 선교지로 떠나기 위해 간호사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녀의 견고함과 차분함이 좋았다. 전도 여행 후에도 우리는 1년 간 편지를 주고받았다. DTS 이후에도 나는 단기전도 팀으로 러시아와 멕시코에 선교 여행을 다녔고,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더 많이 배우게 되었다.
기도하면서 나는 팸과 결혼하는 것과 남아메리카 지역에서 사역하는 것에 대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팸에 대한 마음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 몰라 두려웠고, 사역에 대한 것은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난 더 어려운 일을 하고 싶었다.
일단 하와이로 가서 팸을 만나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자비량 사역자인 내 주머니에는 단돈 10달러도 없었다. 그때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두 주간 일을 도와 줄 YWAMer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친구를 통해 임시 직장을 얻고, 두주 후에 나는 호놀룰루를 향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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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들이 있었다. 팸에게 청혼을 하고, 팸의 부모님을 만나고, 그분들에게 남아메리카 선교에 대한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우린 결혼식을 올렸다. 팸이 간호사 학위를 받은 후 우리는 YWAM에서 더 훈련받기 위해 하와이 빅 아일랜드로 갔고, 거기서 남아메리카 YWAM 리더인 웨지와 셜리 알만을 만났다. YWAM의 남아메리카 사역은 이제 막 시작하려는 단계에 있었다. 알만 부부는 지원자들과 함께 거의 모든 지역을 돌아보았고, 곧 보고타에서 지속적인 사역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여러 가지 사인들을 통해 우리는 브라질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믿음을 갖게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곳에 갈 것인가? 이미 교육비 때문에 천 달러의 빚을 졌지만, 우리에겐 정기 후원자도 기부금도 없었다. 스위스의 YWAM 리더인 루디 랙이 브라질로 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렀다. 그의 도움을 약속 받은 우리는 브라질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브라질은 남미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에콰도로와 칠레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들과 국경이 맞닿아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민족들이 어울려 살고 있으며, 세계 최대의 카톨릭 국가이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전통 종교인 마쿰바를 함께 믿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과연 우리가 그렇게 커다란 나라에서 사역할 수 있을까?
우리는 수업료로 학교에 진 빚을 다 갚기 전에는 브라질로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의 학비는 이미 입금이 된 상태였다. 너무 간단하게 첫 번째 문제가 사라졌다.
하지만 어머니와 지내기 위해 떠날 항공료가 225달러 부족했다. 우연히 크리스마스 전 주일에 근처 교회에서 설교 할 기회가 생겼다. 목사님은 우리에게 매달 50달러씩 후원해 주기로 약속하셨고, 특별 사례금 25달러도 주셨다. 오히려 200달러가 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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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를 어머니와 보낸 뒤, 우리는 선랜드로 돌아왔다. 루디 랙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약 270마일쯤 떨어진 벨로 호리존테에 위치한 베다니 선교회 주소를 보내주었다. 선교회에서는 하숙집과 어학 선생님을 준비해 주었는데, 필요한 비용에서 70달러가 모자랐다.
브라질로 가는 길에 콜롬비아에 있는 웨지와 셜리 알만 부부를 방문하기로 했다. 기도하던 중에 아버지가 생각나 전화를 걸었고, 함께 만나 서로 끌어안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브라질은 고사하고 보고타로 갈 항공료도 없는 우리를 보고, 브라질 선교에 확신을 갖지 못하셨다.
그러나 다음 날 기적이 일어났다. 3년 치 세금 정산금과, 친구로부터 수표가 왔고, 아버지와 아주머니가 100달러를 주셨다. 이제 부족한 금액은 20달러.
수요일 밤, 나는 아버지의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23달러의 헌금이 들어왔다. 아버지는 이제껏 이 교회에서 이런 일이 없었다며 이 헌금을 기적으로 여기셨다. 결국 우리는 아버지의 배웅을 받으며 브라질로 떠날 수 있었다.
보고타 공항에서 웨지와 셜리를 만났다. 그들이 운영하는 단기 훈련학교에 머무르면서 콜롬비아의 전통 음식을 먹었다. 솔직히 음식에 적응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을 사귀는 게 더 쉬울 것 같았다. 브라질로 떠나기 전날, 웨지와 셜리는 우리가 지금 떠나는 것이 옳은지를 놓고 함께 기도해 주었다. 웨지는 여호수아 10장 22절 말씀을 받았다. ‘굴 어귀를 열고 그 굴에서 그 다섯 왕을 그에게로 끌어내니라.’ 셜리는 그 다섯 왕이 우리에게 필요한 500달러이고, 굴은 학생들이라고 말하였다. 이건 전혀 난데없는 성경 해석이 아닌가!
웨지가 다시 한 번 헌금을 제안하자, 아르헨티나에서 온 학생이 자기의 비행기 표를 우리에게 주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에서 산 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만 교환과 환불이 가능했다. 우리의 부르심을 확신한 웨지와 셜리는 나머지 금액을 지불해 주었다. 적게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후하게 베풀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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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하기까지 하나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었다. 통관원은 여권을 대충 훑어보고 도장을 찍었다. 베다니 선교회의 데이비드 에비가 리오의 친구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비행기 삯이 해결되어 미리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전화를 걸었지만 수화기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흘러나왔다. 전화도 제대로 할 수 없으면서 어떻게 이곳에서 살아갈 것인가?
다행히 통신 사무소 직원이 맞는 번호를 찾아 다시 전화를 걸어주었다. 우리는 마중 나올 사람을 기다리기 위해 터미널로 자리를 옮겼다. 드디어 브라질에 온 것이다.
베다니 선교회는 벤다 노바라는 지역에 있었는데, 우리는 이곳에서 며칠간 묵을 계획이었다. 그곳에서 소개 받은 선교사들 중에 조지와 돌리 포스터가 있었다. 조지의 소개로 페니엘이라는 교회에서 주일 설교를 하게 되었고, 교회에 가기위해 시내로 나오던 길에 벨로 호리존테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현대적인 건물들과 넒은 길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에 가득 찬 4, 500명의 젊은이들은 기타 연주와 브라질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고, 브라질에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조지가 인도한 작은 식당에서 나는 ‘메니노스 데 루아’라고 불리우는 거리의 아이들을 보게 되었다. 대부분 가난한 편부모 가정 출신인 이들은 대여섯 살 때 거리로 나와 평생을 거리에서 구걸하고 훔치고 돈을 위해 몸을 팔며 살아간다. 브라질에는 약 3백만 명이나 되고 거의 모두가 약물중독이거나 본드를 흡입 하는 경우가 많아, 절반 정도가 어른이 되기도 전에 죽는다고 한다. 이런 아이들이 3백만이나 된다고? 정말 아무도 도울 수 없는 것일까?
며칠 후 어학 선생을 만났다. 처음 들었던 교습비는 한 달에 50달러였는데, 우리 부부가 하루 4시간씩 일주일에 닷새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200달러가 필요했다. 우린 하루에 두 시간만큼만 수업료를 내고, 한 시간은 무료로 릴리안의 여동생 비비안과 공부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래도 수업료는 우리 월수입의 4배나 되는 금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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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브라질 가정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하숙집 안주인은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그녀가 예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처음 전해들은 것과 달리, 하숙비가 한 사람당 70달러이고, 우리는 부부이므로 140달러를 내야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비용을 내고 우리가 살게 될 방은 너무 작고 침침한 분위기였다.
아내는 울음을 터뜨렸고, 고장난 세면대 때문에 물벼락까지 맞은 나는 너무나 낙담되어 소명 자체에 대해서도 절망하고 있었다. 조용히 밖으로 나와 허물어져 가는 계단에 걸터앉자, 너무 많은 고생을 한 아내가 생각나면서 불평이 터져나왔다.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조용히 들려왔다.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했느냐? 내가 인도했으니, 내가 돌보지 않겠느냐? 네가 통제할 능력을 잃은 지금부터 내가 너를 통제할 것이다. 나를 믿고 네 일을 계속해라.’ 방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웃는 얼굴로 노래하며 부산하게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며칠 만에 방은 쾌적한 곳으로 바뀌었고, 포르투갈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집주인과도 친해질 수 있었다.
로렌 커닝햄이 상파울루 선교 회의에서 설교하기 위해 브라질에 온다는 얘길 들었다. 그를 만나면 브라질 사람들에게 YWAM을 소개할 방법을 의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에겐 당장 상파울루까지 갈 돈과 회의 참가비가 없었다. 회의가 시작되기 며칠 전 한 뉴질랜드 선교사의 집에 저녁 초대를 받았다. ㄱ자 모양으로 된 그의 이층집을 보면서, 나는 우리는 언제쯤 이런 집에서 지낼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는 최근에 차를 팔아서 얻은 수입의 십일조를 헌금해 준 덕분에, 우리는 상파울루의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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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로렌 커닝햄이 건강 문제로 브라질에 오지 못했다. 재정을 아끼기 위해 곧바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이끄신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조금 더 머물기로 했다.
우연히 노령의 선교사 한 분에게 우리가 브라질에 온 목적 - 세계 선교를 위해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 - 을 나눴다. 그런데 그는 대뜸, 월급을 얼마나 줄 것인지 물었다.
그래서 우리는 동역자를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 선교사는 브라질 사람들은 돈을 줘야만 일할 것이고, 비도덕적인 일을 막기 위해 남녀의 구별을 둬야 하며, 그래야만 브라질 교회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충고해 주었다. 다른 선교사들도 이와 같은 의견을 주었다.
회의를 마치고 베다니로 돌아온 내게, 로렌 커닝햄이 하기로 한 전도 집회의 설교를 맡아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통역자마저도 설교자로서 나를 신뢰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설교했다. 감사하게도 참석한 600명 중 200명이 선교 사역에 동참하라는 나의 도전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주님이 행하신 일이었다.
뒤를 이어 간 베다니의 성경학교에서 한 주간 동안 설교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학교 책임자를 만났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고, 곧 좋은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그 역시 우리의 비전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다. 팸과 내가 하려는 일이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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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의 교회에서 후원금을 여러 번 인상해 주었지만 여전히 재정은 부족했다. 집주인도 하숙비를 100달러로 깎아주었고, 헌금을 해 주는 브라질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한 달 생활에 300달러가 필요한 우리는, 하숙비를 내는 날이 올 때마다 동전 몇 닢밖에 없는 호주머니 사정을 보곤 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기분으로 사서함을 살펴보았다. 사서함 가득 들어있는 봉투 가운데 100달러짜리 수표가 있었다. 하숙비를 내는 데 딱 필요한 액수였다. 우연히 주운 100달러를 나에게 보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하와이 친구의 편지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돕는 기회도 주셨다. 아르헨티나에서 네 명의 YWAM 간사들이 방문했다. 그 중 둘은 브라질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웨지와 셜리의 훈련학교를 마치고 전도 과제를 받아 아마존으로 가고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숙비 100달러를 그들에게 헌금하기 원하셨다.
떠나는 날, 우리는 구운 과자를 담은 상자에 돈을 넣어 그들에게 주었다. 그런데 며칠 후, 지역 교회의 청년 단체로부터 헌금이 들어왔다. 놀라지 말라. 그 금액은 바로 100달러였다. 기적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업이 없는 토요일 우리는 시내에서 오랜만의 데이트를 즐겼다. 식사를 할 돈은 없어서 콜라나 한 잔씩 마시기로 했는데, 우연히 테오필로라는 청년을 만나게 되었다. 영어를 공부 중이라는 그는 점심을 대접할테니 영어 공부를 도와달라고 했다. 고급 아랍 식당에서 포식을 한 후 우리는 함께 미국 영화를 보러 갔다. 그리고 테오필로는 우리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테오필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친구’였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 준 선물이었다.
브라질에서 YWAM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훈련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로렌 대신 내가 설교했을 때 많은 사람이 반응하긴 했지만, 아직까지 YWAM에 들어오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만난 사람이 마르셀로였다. 히피 소굴에서 쫓겨난 사람 같은 첫인상을 주었던 그는, 뉴욕에서 강도의 칼을 맞고 수술을 받던 중 죽었다 깨어난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다. 그 후 브라질 교회에서 마약 중독자들을 돕던 마르셀로는 우리의 첫 동역자가 되었다. 사서함을 가득 메운 500통 이상의 편지와 함께 마르셀로는 사역을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신호였다.
1975년 12월,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시즌에 우리는 첫 프로그램을 시작하기로 했다. 한 달간의 훈련을 통해 우리는 하와이에서 배운 가장 기본적인 훈련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 학생들을 소그룹으로 나누어 브라질의 여러 곳으로 전도여행을 보낼 계획이었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43도까지 올라가는 좁은 방 안에서 4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함께 지내기란 참 힘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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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을 앞두고 감기에 걸린 나는 꼼짝을 할 수 없었다. 학생들의 첫인상도 탐탁하지 않았다. 오기로 했던 35명 중 22명만 참석했고 모두 한심한 사람들뿐이었다. 초반부의 강의는 루디 랙과 웨지와 셜리가 맡아주었고, 소그룹 시간에는 회개와 열방을 위해 기도했다. 그 와중에서도 마르셀로는 확실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1월 말, 세 그룹으로 구성된 학생들이 두 달간의 선교여행을 떠났다. 마르셀로의 그룹은 미신 숭배가 번성하고 있는 디아만티라는 도시에 있었다. 마르셀로의 팀이 기도하자 여러 가지 기현상들이 멈췄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팀을 찾아와 예수님에 대해 물었다. 다른 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팸이 병에 걸린 데다 며칠 후에 방을 비워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다행히 친구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장소를 하나 소개해 주었지만, 집세가 한 달에 450달러나 되었다. 우리의 총 수입보다 많은 금액이었지만, 새로 위탁한 간사들을 위해서는 그 집이 꼭 필요했다. 믿음으로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우리는 당장 들어갔다.
12명의 새로운 식구들이 생겼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기도하며 거리에 나가 복음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묵상하고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점심 식사 후에는 시내로 나가 저녁때까지 복음을 전했다. 또 거리에서 사람들을 데려와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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팸은 계속 건강이 좋지 않아서 사역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아내는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있다며 돌아가기를 거절했다. 하나님은 베다니에서 만난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이웃인 돌리를 통해 말씀으로 확증해주셨다. 우리가 많은 고난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시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돌리가 한 말보다 그녀의 사랑에 더욱 감격하였다. 우리는 선교사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고, 팸도 차츰 나아졌다. 그리고 팸이 임신을 하였다!
마르셀로는 늘 복음을 전할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곤 했다. 그는 인근 도시에서 해마다 열리는 겨울 축제를 전도의 기회로 삼기 원했다. 전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예술 행사에 참여하지만, 사실은 거의가 마약을 즐기기 위해 오곤 했다. 우리는 당장 이 행사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과거 노예들에 의해 건축된 이 지역은 현재 4만 4천 명이 살고 있지만 작은 침례교회 하나와 거의 사용하지 않는 감리교회 건물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이 도시에서의 사역이 중요한 계기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마르셀로 취직을 해서 나를 돕겠다며 갑자기 짐을 싼 것이다. 타고난 지도자였던 그의 부재는 사역에 큰 타격이었다. 하지만 나흘 후 마르셀로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우연히 참석한 집회에서 ‘하나님은 선교 사업으로 당신을 부른 것이 아니라 선교사로 불렀다’는 메시지를 듣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겨울 축제 사역을 위해 조직된 공동체는 정말 잡다한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전체의 3분의 1이 노숙자 출신이었고, 영적으로 견고한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축제 참석자들과 우리 중에 누가 진짜 문제를 가진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즐기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기에 그들과 대화를 시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의도를 알았을 때 그들은 조롱을 퍼붓기 시작했다. 실패감에 빠진 우리는 지하실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했다. 멍하니 앉아있던 사람들이 찬양하기 시작했고 모두가 눈물 흘리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생생한 주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임하자, 삭막해 보이던 지하실이 아름답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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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도 달라진 태도로 무장한 우리는 다시 거리로 나섰다. 수많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더 있다고 느꼈다. 우리는 1년동안 이 지역의 모든 가정을 방문하기로 했다. 브라질에 두 번째 YWAM 지부가 탄생한 것이다.
비록 돈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 했지만,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신생 지부의 리더는 부족한 재정뿐만 아니라 빠듯한 스케줄로 고민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 철저히 위탁된 사람들이었다. 누가 브라질 청년들이 선교사가 될 수 없다고 말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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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아이를 가졌지만 계속해서 위험한 순간들이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고, 상황에 대한 나의 분노를 경배로 바꾸셨다. 하지만 나는 아내와 사역 사이에서 계속해서 갈등하고 있었다.
선교와 훈련만을 집중적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사역을 시작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순간이 신생 지부에 찾아왔다. 그러나 이들은 얼마 전까지 자신의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하던 팀이 아닌가! 하지만 그들은 그럼에도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는 것 역시 우리의 의무였다. 돌봐야 할 아이들의 수가 금세 늘어갔지만, 그로 인해 단원들이 굶주리는 일은 없었다.
두 번째 여름 훈련이 시작되었다. 학생 중에 말수가 적고, 운동선수처럼 보이는 파울로 세르지오가 있었다. 그는 마르셀로의 친구였다. 담배 냄새까지 물씬 풍기는 그가 과연 선교사 훈련을 받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진지하게 훈련에 임했고 모든 나쁜 습관들을 버렸다.
1977년 2월 3일 아내가 딸을 낳았다. 이 아이는 살아 있는 기적이었다. 신생 지부는 11명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집주인이 집을 비워달라고 요청했다. 40명의 간사들조차 교대로 거주해야 하는 상황에 뉴질랜드 선교사가 살았던 건물이 비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금 무리하면 백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로렌 커닝햄의 브라질 방문을 맞아 7대 도시에서 세미나를 개최할 계획을 세웠다. 순회강연의 결과 120명의 브라질 사람들이 월드컵 선교를 위해 모였다. 한 브라질 젊은이는 월드컵이 끝나자 바로 일본 YWAM에서 일하기 위해 떠났다. 언젠가는 수백 명의 브라질 사람들을 세계로 보내게 될 것이다. 그 외에도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는 브라질 사람들이 있어서, 늘어난 인원을 좀더 오랜 기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했다.
뉴질랜드 선교사의 집이 다시 생각났다. 하나님은 신명기 7장 22절 말씀을 통해 땅을 조금씩 나누어서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집주인을 만나 임대를 상의했고, 의외로 집주인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1978년 7월 12일 새 집으로 이사해서 8월에 5개월 간의 훈련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처음 뉴질랜드 선교사의 초대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 가졌던 막연한 바람이 3년이 지난 오늘, 이뤄진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그렇게 새로운 지부가 성공적으로 출범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지부를 일으키기 위해 우리는 브라질 최남단 포르토 알레그레에 팀을 파견하였다. 루이와 마리 랙도 그들과 함께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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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는 왔지만 경제적인 형편은 여전히 어려웠다. 절약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집세를 내야할 때가 되었지만 필요한 돈의 절반밖에 준비하지 못했다. 2주의 기한을 얻었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이틀 후면 600달러를 내야하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내일 아침까지 먹을 수 있는 식량뿐이었다. 우리는 11명의 아이들을 포함해서 총 100명이나 됐다.
두 번째 임신한 아내가 지난번과 같은 증상을 보였다. 아내와 병원을 다녀 온 후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마르셀로를 마났다. 집주인이 집을 새로 수리하고 팔기로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새로 집을 칠하는 비용까지 우리가 부담해야하는 데 3천 달러가 넘는 금액이었다.
막막했다. 성경을 들고 계단 아래 창고로 내려갔다. “하나님, 정말 너무합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만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12장 5절을 말씀하셨다.
다음 날 우리는 함께 모여 기도했다. 시내에 있는 친구들과 의논하라는 응답을 받았다. 브라질에서 점심은 가장 중요한 식사다. 하지만 우리에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30분 뒤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래리 다비가 트럭에 식료품을 가득 실고 나타난 것이다. 자신의 학교 식료품을 사다가 우리 것까지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멋진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결국 친구들의 도움으로 이번 달 집세는 해결할 수 있었지만, 2주 후 다시 1,200달러를 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게다가 집을 새로 칠할 재료비까지.
우리는 한 달 내내 옥수수죽으로 연명하며 냉장고까지 팔아 비용을 마련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집주인은 집을 칠한 뒤 한 달간의 집세까지 요구했다. 쌍둥이를 출산한 마르셀로의 형편도 점점 더 나빠졌다.
그런 중에도 우리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영혼 축제에 전도 팀을 파견하기로 했다. 매년 새해 전야가 되면 백만 명의 심령주의자들이 바다의 여신을 예배하기 위해 해변에 모여들었다. 이것은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빙의 현상이 나타나는 악마 숭배 행사였다. 리오의 기독교 단체에서는 아예 이 시기에 바닷가에 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우리는 가장 경험이 많고 성숙한 15사람을 골라보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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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악마의 축제가 하나님의 축제로 바뀌도록 기도했다. 그 와중에도 생존을 위한 투쟁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1979년 3월 3일, 건강한 아들 조나단 제임스가 태어났다.
타 선교회의 대표가 이 건물을 팔 계획인데, 제일 먼저 살 기회를 주겠다고 연락해 왔다. 만일 집을 사지 않을 경우에는 4개월 후에 집을 비워 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특별 금식 기도를 시작했다. 한 사람이 토지를 사는 대목이 기록된 예레미야 23장 말씀을 받았다. 또 다른 사람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묻을 땅을 사는 창세기 20장 말씀을 받았다. 몇 주일 전 교회에서 만난 한 성도를 통해 우리가 집을 짓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해 들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마르셀로만은 땅에 들어가지 않는 성경 구절을 받았다. 마르셀로가 다른 부르심을 따라 우리를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사는 것에 대한 인도하심은 명확했다. 이제 닥칠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강한 지도자가 필요했다. 마르셀로와 함께 부동산 일을 하는 데시오 카마르조를 찾아갔다. 크리스천인 그에게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얘기했다. 그는 시내에서 꽤 떨어져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 언덕 꼭대기쯤에 도착해서 길이 없는 무성한 잡초 사이를 들어갔다. 그곳은 전기도, 수도도, 교통편도 없는 외진 곳이었다. 데시오는 우리가 이 지역을 살 생각이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다음 날 우리는 다시 그곳을 찾았다. 그곳은 집을 짓기 어려운 지역인데다가 우리 중엔 집을 지어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제 17주 밖에 안 남았다. 하지만 나는 ‘바로 여기’란 생각이 들었다. 땅값은 2만 5천 달러였고, 데시오와 그 형제들의 공동 소유지였다.
우리는 일년간 땅을 그냥 사용하고 일년 후부터 매달 조금씩 갚기로 하고 계약했다. 4월 초 즉시 일을 시작했다. 데시오와 여동생은 자기들이 받을 몫을 헌금해 주었다. 집세를 운영비로 쓰고 있던 선교회에서는 우리를 위해 집세를 연장해 주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문을 열어 주셨다. 이제 강인함과 믿음, 그리고 기술로 무장하고 들어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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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계획을 시작하였다. 96명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그 중에는 이제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된 그라사와 정열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된 하이메 아라우호도 있었다. 우리는 두 명을 빼고는 모두 브라질 사람들이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오후 6까지 일하고, 밤에 강의를 계속한다면 이사하기 전까지 우리가 살 장소를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의가 끝나면 전도여행 대신 집 짓는 일을 할 것이다.
우리는 24시간 철야 기도를 계속하기로 했다. 8명이 조를 짜서 우물을 파고 풀을 베어 터의 윤곽을 잡는 작업을 담당했다. 일주일이 우물 파는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직접 구운 벽돌과 진흙으로 만든 방에서 매일 두 사람씩 자면서 연장과 건축 자재들을 지켰다. 모두 열심히 일했다. 일을 끝내고 피곤한 몸으로 저녁 강의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강의 시간에 조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데시오가 일의 진행을 보러 왔다. 불도저를 쓸 돈이 없어 손으로 일하는 모습은 마치 출애굽기의 히브리 노예들 같았다. 밤에는 한 사람이 한 시간씩, 낮에는 일하는 동안에 30분씩 돌아가며 24시간 철야 기도를 계속했다. 하루 하루가 투쟁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굶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기적 가운데 살고 있었다.
하지만 장기간의 고된 노동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웃음은 사라지고 지루한 침묵이 계속되었고, 나도 발의 통증으로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었다. 4주가 지나자 기초공사를 시작할 만큼 땅이 정리되었다. 강의 스케줄 때문에 여행을 다녀와 보니, 기초 공사를 해야할 면적을 말해 주지 않은 탓에 엄청나게 크게 땅을 파놓았다. 다른 구역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이사 시기는 두 달도 안 남았는데 아무것도 진전되지 않았다. 우리는 작은 독신자 기숙사를 짓기로 했다. 가족들은 각자 자기가 살 집을 지어야 했다. 도구를 쓸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여기저기 물어가며 했다.
한편 마르셀로는 우리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마르셀로가 받은 성경 구절은 이별을 준비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그는 우리와 함께 일한 첫 브라질 사람이었다. 그가 떠나는 것은 마치 브라질 YWAM의 기초가 흔들리는 것과 같았다. 이사 날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은 물밀 듯이 빠져나갔다. 저마다 영적인 이유를 내세웠다. 설상가상으로 발의 고통은 점점 심해졌다. 제르손이 다가와 나를 격려해 주었다. 그의 약속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우리는 계속할 것이다. 7월 12일 공사를 끝낼 수 없을 것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7월 첫 두 주일 동안 교회들에서 설교하게 되어 있어서 일은 더 복잡했다. 7월은 가장 추운 달이었고, 기온이 떨어지기 전에 지붕을 올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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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회 설교를 하는 동안 자주 전화로 작업 경과를 알아보았다. 감사하게도 제 날짜에 이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팸의 말을 들었다.
지난 석 달 사이 우리는 32명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해 낸 것이다. 이곳은 이제 브라질 선교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집을 짓는 동안 사역은 많이 위축되었다. 교회 집회가 끝난 후 만난 한 기술자는 우리에게 전기선을 끌어 올 돈도 헌금해 주었다.
과로가 겹친 탓인지 나와 아내 둘 다 간염에 걸리고 말았다. 아내의 상태가 악화되었지만 페니실린 덕분에 열이 내렸고, 위기가 지나갔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신생 지부들 안에서 일하고 계셨다. 어느 날 정글 속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이젠 그들을 위해 뭔가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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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에서 열리는 심령 축제에 팀을 이끌고 다녀온 제르손이 아마존 선교를 위해 벨렘으로 가겠다고 했다. 벨렘은 아마존 강 델타 지역에 위치한 도시였고, 우리는 드디어 정글 속의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
이사 온 지도 벌써 10달이 지났다. 몸에 이상이 느껴졌고, 몸의 오른쪽에 감각이 없어졌다. 이런 증상은 내가 아는 한 뇌졸중 초기 증상이었다. 의사는 약을 주면서 푹 쉬고 여행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다음 2주일 간 세 번이나 알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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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열방대학에서 훈련받고 있는 브라질 소녀가 태국 국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하도록 내게 1,000달러를 헌금해 주었다. 돈을 사용할 곳이 너무도 많았기에 나는 태국까지 가는 것이 옳은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가나안 정탐꾼 중의 갈렙과 여호수아를 보여주셨다. 하지만 지금 떠나기엔 준비할 시간이 절대로 부족했다. 비행기 표조차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서류와 비행기 표가 금세 준비되었다. 여행사 직원들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30분이 지나 공항에 도착했지만 비행기는 연착되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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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이 소개시켜 준 자동차 수리공으로부터 200달러를 헌금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2,000달러가 모자랐다. 그때 로렌의 사무실로부터 회의에 참석한 유럽의 지도자들이 비행기 표를 살 돈을 빌려주겠다는 전화가 왔다. 대신 돌아가는 길에 유럽에 들려 설교하기로 했다.
이 회의는 YWAM에 있어 역사적인 지도자 회의가 되었다. YWAM은 구제사역을 본격적으로 출범시키는 데 동의했다. 우리가 이미 시작한 고아들을 돌보는 사역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귀국하는 길에 독일, 그리스, 네덜란드와 영국에 들러서 설교를 했다. 떠난 지 30일 만에 여행비를 다 지불하고도 변압기를 살 수 있는 돈을 갖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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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에시르가 교회 계단에서 버려진 여자아기를 발견했다. 태어난 지 5개월 정도밖에 안돼 보이는 아기는 극심한 영양 결핍과 피부병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우리의 돌봄으로 아이는 점점 회복되었고, 우리는 부모를 설득하여 아이를 입양했다.
벨렘에 있는 제르손과 단원들은 아마존의 일부인 구아마 강 위에 나무로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바쁜 하루를 끝내고 제르손과 길가 찻집에 앉았다. 제르손은 아마존 인디언들을 위한 사역을 시작하기위해 몇 사람을 위클리프 어학원에 보내고 싶어 했다. 복음을 접하지 못한 인디언 부족이 최소 150개가 있었다. 제르손은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벨렘에 제자 훈련 과정을 설치하고, 언어와 정글 생존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울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팀에게는 경제적인 지원이 거의 없었다.
제르손의 학생들 중 어학원의 반 수석을 차지할 만큼 뛰어난 학생들이 있었지만, 인디언 부족에게 파견할 재정이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해답은 한 달 후에 극적으로 찾아왔다. 파울로 로베르토라는 아마존 인디언들 속에서 일한 적이 있었던 목사가 카데테라는 사테레 부족의 인디언 추장이 보낸 편지를 보여 주었다. 편지에는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아이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쳐 줄 사람을 보내달라고 적혀있었다.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애걸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침 제르손에게는 준비된 두 사람이 있었다. 파울로 목사의 교회는 그들에게 8천 달러를 헌금해 주었고, 그 돈으로 인디언 지역으로 들어갈 보트를 구입했다.
드디어 땅값을 지불 할 때가 왔다. 데시오의 형제들은 계약금 최소 7천 5백 달러를 한 두 달 안에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우리가 받는 후원금은 매달 하와이 교회에서 보내주는 400달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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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금으로 요구받은 7천 5백 달러는 브라질 노동자 12명이 일 년 간 일 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우리는 금식하며 예배했고, 우리끼리 헌금해서 200달러를 모았다. 리우데자네이루의 목사님들도 600달러를 헌금해 주었고, 미국의 친구도 2,000달러를 보내주었다. 브라질의 YWAM 가족들도 여기저기서 헌금을 보내주었다. 그 덕분에 약속했던 날보다 일찍 계약금을 지불할 수 있었다. 물론 다달이 600달러씩 월부금을 내야 하긴 하지만….
리오의 심령 축제에서 우리는 거대한 방송 장치를 빌려 무대를 마련했고, 우리의 예배와 예수님을 전하는 소리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소규모 기도팀들은 해변을 다니며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밤에는 성경과 심령학에 대한 팜플렛 12만장을 나누어 주었다.
나는 제르손과 함께 정글에 들어간 간사들을 방문했다. 마르시아와 엘시는 마을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사테레어 예배도 인도했다. 그리고 부근에 흩어져 있는 사테레 족들과 접촉하고 있었다. 이들은 인디언들과 함께 먹고, 함께 굶으며 그들과 똑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마르시아는 얼마 전 인디언 소녀와 함께 다른 사테레 족 마을인 코루아투바를 다녀왔다. 선교사에게 끓는 기름을 부어 죽인 일이 있었다는 이 마을 사람들은 차가웠고, 두 사람을 정글 속에 버려진 오두막에 있게 했다. 그 오두막은 죽은 아기들을 묻는 곳으로 거기 살면 죽거나 미쳐 버린다는 곳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사람들은 이들이 악마보다 영적으로 더 힘이 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간사들 중 몇 명이 브라질의 각지로 지부 개척을 위해 떠났는데, 이들은 모두 브라질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꿈이 실현되고 있었다. 다섯 곳에 지부를 두고, 수백 명의 젊은 선교사들을 배출했으며, 간사도 250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벨로 호리존테에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좀처럼 진행되지 않는 건축 때문에 사람들이 지쳐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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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가 베다니의 친구들로부터 모은 1,500달러를 들고 돌아왔다. 다시 시작이다. 존 도우슨이 연례 간사 총회를 위해 브라질로 왔다. 그는 미국 교회들이 우리를 후원해 줄 거라는 예언을 했다. 몇 주일 후 캘리포니아 월넛의 러스 도티 목사로부터 연락이 왔고, 6개월 후 24명의 지원자와 일만 달러가 도착했다. 단 두 주만에 회의장 겸 식당과 2층 기숙사가 완성되었다. 이들은 내년에 다시 와서 다른 건물을 지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일을 통해 우리는 언제나 씨름하며 살아야 하지만 최악의 순간에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심령 축제 전도 팀은 해마다 급성장했다. 이 사역은 새해 전야에 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함으로서 절정에 이르렀다. 축제를 중계하는 TV 아나운서는 올해 새해 전야의 해안은 그리스도인들의 차지가 되었다고 말했다.
새로운 지부들이 계속 세워졌지만 아직 해외 선교는 무리인 것 같았다. 물론 외국으로 나간 사람도 몇 있었지만 극히 적었다. 게다가 우리 선교사들 대부분은 포르투갈 어밖에 할 수 없었다. 몇 사람이 영어 공부를 시작했고, 주요 멤버들을 대상으로 특별 지도자 훈련 학교도 열었다. 로렌 커닝햄이 이 학교에서 강연하기도 했다.
이제 세계에서 YWAM이 없는 나라는 두 곳뿐이었다. 태평양의 피카이른 섬과 포르투갈 어를 쓰는 작인 나라 사웅 토메 에 프린시페가 그곳이다. 며칠 후 갓 결혼한 롭슨 소아레스가 찾아왔다. 그는 사웅 토메 에 프린시페에 갈 선교 팀을 모집할 계획이었다. 이곳은 공산주의 국가였고, 아주 가난한 나라였다. 그러나 그는 확신에 차 있었다.
롭슨은 현장답사 팀을 구성하여 그곳에 다녀오기 원했고, 우리는 그 문제로 11월에 간사 총회를 소집하였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롭슨의 팀을 브라질 YWAM에서 해외로 파송하는 첫 번째 팀으로 임명했다. 세계에서 가장 궁핍한 곳으로 파견되지만, 그들에게는 기쁨과 열정이 충만했다. 보이지 않는 적의 요새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책을 끝내면서
3개월 후 나도 사웅 토메 에 프린시페로 갔다. 그곳에서 롭슨과 그의 팀뿐만 아니라 새로 위탁한 아프리카 인들도 만났다. 그리스도인의 수는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롭슨은 여섯 개이 소그룹을 시작했고, 200명 정도가 정기적으로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다. 수요일 저녁 네 명의 아프리카 젊은이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복음에 대해 알고자 했다.
이들은 마타오와 아프리카의 니니아-비사우로 갈 팀을 구성했다. 또한 인도네시아와 알바니아, 앙골라와 모잠비크로 갈 팀들도 있었다. 이들은 다른 브라질 인들이 이전에 불가능하게 여겼던 꿈을 실현하는 데 모범이 되어주었다.
사웅 토메에 콜레라가 퍼졌다. 첫 번째 희생자는 사역 초기에 회심했던 귀한 일꾼 반데이라였다. 다음 날 교사 자격시험을 보게 되었다며 흥분해서 찾아왔던 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천여 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는데, 이것은 독립 이래 사웅 토메 에 에서 가장 큰 집회였다고 한다. 전염병은 더 심하게 퍼져나갔고 간사들은 하루 평균 3차례나 장례식에 참석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14달 만에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하였다. 이것은 15년 전 우리가 견뎌야 했던 것보다 훨씬 큰 어려움이었다. 하지만 롭슨과 그의 팀은 최고의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의 대가 지불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나라의 경제는 선교사들을 지지할 수 없으며, 사웅 토메 에의 사람들은 선교사 감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어려움과 고난은 하나님의 꿈을 이뤄가는 과정의 일부이자 특권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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