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와 키와니스 공원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바다, 태평양의 북부 어디쯤에 나무들이 하늘보다 높아서 사람들이나 동물들이나 나무 거인들의 세상에 불시착한 난쟁이가 되어버리는 도시, 시애틀이 있었어. 시애틀의 항구를 떠나 긴 여행과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배의 머리와 꼬리는 파도와 함께 너울거리고, 돛대는 나무들만큼이나 하늘로 높이 올라가고 있었어.
바다는 강물이 되어 시애틀 너머로 이어지다가 다시 바다만큼 큰 호수가 되는데, 호수의 건너편에는 작은 공원들이 많은 도시, 커클랜드가 있었어. 이제 작은 공원들 중에 특히 더 작아서 다들 지나쳐버리는 숨겨진 공원, 키와니스 공원에 들어가고 있어. 키와니스 공원이 끝나는 곳에 외나무 다리처럼 길게 뻗은 나무 기둥에서 그대로 물 속으로 쭉 내려가다가 더 내려갈 수 없게 되면, 반짝거리는 거울 하나를 볼 수 있어. 그리고 누군가 혹시라도 거울을 살짝 밀어본다면, 거울이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간다는 걸 알 수 있어.
아홀로틀
그 안으로 쑥 들어가면, 작은 다리를 가진 거대한 올챙이처럼 보이는 분홍색 멕시코 도롱뇽, 아홀로틀이 보여. 아홀로틀의 왼쪽 머리에는 푸른 옥구슬이 달린 국화 모양의 짙은 보라색 매듭, 청록색 나비 장식, 형광빛이 감도는 연녹색 복주머니가 달려 있고, 오른쪽 머리에는 아름답게 펼쳐진 들꽃 무늬의 부채가 달려 있어. 뿌! 하고 아홀로틀이 갑자기 얼굴을 내밀며 놀래킬 땐, 왼쪽 머리의 나비의 날개와 오른쪽 머리의 부채가 파르르 떨리곤 해.
멀버니와 씨터틀
아홀로틀의 뒤로 아홀로틀의 가족, 멀버니와 씨터틀이 보여. 멀버니는 머리 꼭대기부터 배꼽까지는 토끼의 모습이고, 배꼽부터는 금붕어의 눈부신 다홍색 지느러미와 하늘거리는 꼬리를 갖고 있어. 씨터틀은 자작나무 빛깔의 몸통 위에 초콜릿 같은 육각무늬가 고루 펼쳐져 있는, 바다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바다 거북이야. 하지만 바다 대신 여기 호수에서 멀버니와 아홀로틀과 함께 살고 있어.
멀버니와 씨터틀이 가족이 되기로 결정하면서 멀버니는 물고기의 꼬리를 얻게 되었고, 씨터틀은 태어날 때부터 살아온 바다를 떠나 새로운 곳, 호수에 살게 된 거지. 그리고 새 보금자리로 찾은 이 집에서 고요하게 잠자고 있었던 아기 아홀로틀을 발견하게 된 거야.
아홀로틀 가족의 집
대문을 들어서면 세 개의 아치가 보이고, 아치에는 키가 큰 미역들이 춤을 추고 있어서 꼭 바닥에서 아치 천정까지 문발을 거꾸로 늘어뜨려 놓은 것 같아. 미역을 헤치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 이곳 저곳에 작은 쿠션, 큰 쿠션, 작은 방석, 큰 방석, 앉은뱅이 의자, 높은 의자, 낮은 의자, 벤치가 있어서 집 안 어디에서든 앉을 자리를 찾을 수 있어. 멀버니는 언제든지 다리와 꼬리를 쉴 자리가 있다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쿠션들, 방석들, 의자들, 벤치 어디에 앉아도 큰 대문을 통해 호수를 훤히 볼 수 있어.
좀 더 안 쪽으로 들어가면 귀퉁이마다 소파, 벤치, 스툴, 안락의자들이 제각각 놓여진 (역시 앉을 자리가 식탁의 크기에 비해서 유독 많은) 큰 식탁이 보이고, 식탁을 지나서 하얀색 타일, 노란색 캐비닛과 구릿빛 청동 손잡이가 대조를 이루는 주방에 들어가면, 항상 정향, 육두구, 팔각의 알싸한 향이 감돌고 있어.
유리문
아홀로틀의 집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유리로 만들어져서 반짝거리는 예쁜 문이 하나 있어. 하지만 유리문 너머는 굉장히 어두워서 아무것도 없는 것 처럼 보여.
멀버니와 씨터틀은 아홀로틀에게 늘 말했어. ‘9살 생일이 되면 이 문을 열어볼 수 있어’
아홀로틀 가족의 하루
대문 밖으로 시원시원한 아침 햇살이 녹아든 물결이 넘실대는 걸 보며, 멀버니는 곱게 빻아진 홍차 가루와 크림, 바닐라를 충분히 넣은 밀크티를 끓이고, 아홀로틀은 촘촘히 꼬아진 새끼줄에 먹음직스럽게 매달려 있는 곶감을 따서 큼직한 소쿠리에 담아. (그럼 버드나무 가지처럼 찰랑거리던 곶감과 고추의 새끼줄들은 모두 엉겨버렸지) 그 사이에 씨터틀은 시원한 즙을 가득 머금은 배를 깎고 있어. 아홀로틀은 스툴을, 멀버니는 벤치를, 씨터틀은 소파를 차지하고 모두 식탁에 둘러 앉아 밀크티를 마시며 곶감과 배를 먹어.
아침 식사가 끝나면 아홀로틀 가족은 모두 호수로 나가서 수영을 해. 아홀로틀은 하늘과 물이 만나는 부분에 코 끝을 대는 걸 좋아해. 그러면 친구 캐롤라이나 나무오리가 금세 알고 나타나서 아홀로틀의 코 끝을 콕콕 찍었어. 그리고 둘은 키득키득 웃었어. 집에 돌아오면 다 같이 보리차를 마셔. 아홀로틀은 수영을 하고 와서 마시는 시원한 보리차의 맛을 아주 좋아해.
점심에는 멀버니가 어릴 때 숲 속에서 즐겨 먹었던 진한 치즈 소스를 듬뿍 끼얹은 느타리 버섯 마카로니를 만들었고, 아홀로틀과 씨터틀은 깜짝 놀랄만큼 맛있어서 접시까지 먹어버릴 뻔 했어.
요즈음 오후에는 다 같이 모여서 새로운 숫자를 만드는 중이야. 아홀로틀은 상징을 몇 개나 만들지, 7개만 만들면 그만 할 수 있는 건지, 200개 쯤이나 만들어야 하면 어떡할 지 걱정하는 중이고, 씨터틀은 얼마나 자주 새로운 상징이 나타나는 게 좋을지 생각하는 중이고, 멀버니는 ‘아무것도 없음’에 대한 상징을 만들지 말지 고민하는 중이야. 아홀로틀의 왼쪽 머리에 달린 복주머니가 잔뜩 납작해지고 쪼그라들었는데 그건 아홀로틀이 심술이 났다는 뜻이야.
아홀로틀: 이런 건 정말 왜 하는 거예요. 따분하고 힘들고.
씨터틀: 왜냐하면 숫자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신비롭기 때문이야. 우리가 직접 숫자를 만들면 우리도 아주 조금은 신비로운 걸 만들 수 있게 되는 거야.
아홀로틀: 글쎄요, 전 그냥 안 신비롭고 싶어요.
멀버니: 오늘은 이쯤 하고 내일 캐롤라이나 나무오리네 가족에게 놀러갔을 때 다 같이 더 고민해보자.
저녁에는 대문 앞 아치에서 자라는 미역을 따서 진하고 따뜻한 미역국을 끓여 먹었어.
아홀로틀의 밤
짙은 보랏빛과 잿빛이 부드럽게 뒤엉킨 밤하늘에서 달빛이 구름 사이를 약올리듯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에 맞춰, 아홀로틀은 집 안이 조금 밝아지면 마음을 풀었다가 금방 칠흙같이 어두워지면 다시 무서워하기를 그네 타듯 반복하고 있어.
아홀로틀: 저 너무 무서운데 여기 와서 같이 자도 돼요?
멀버니: 그러렴. 얼른 이불 속에 들어와. 무서운 꿈을 꿨나 보구나.
아홀로틀: 무서운 꿈은 정말로 무서운 게 아니에요. 정말로 무서운 건 잠이 안 오는 거예요. 언제쯤 밝아지나 계속 기다리는 중인데, 제가 잠에 빠지지 못 했기 때문에 아침이 오지 않고 이대로 밤이 쭉 이어질 것 같은 게 가장 무서운 거예요.
씨터틀: 그랬던 것이구나. 이제 다 같이 있으니까 마음 놓고 푹 자. 그리고 우리 아침이 되자마자 유리문을 열어보는 게 어떨까? 9살 생일까지 기다리지 않고 말이야.
멀버니: 좋은 생각인 것 같아.
아홀로틀: 정말이에요? 정말? 으아, 정말 신난다!
멀버니: 유리문 생각하면서 이제 푹 자렴.
문을 열다
아홀로틀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잠에서 깨서 곤히 자고 있는 멀버니와 씨터틀을 재촉했어. ‘우리 얼른 일어나서 유리문 열어봐야죠!’
멀버니: 응 그래야지. 먼저 밀크티 좀 마시고.
멀버니와 씨터틀은 밀크티를, 아홀로틀은 보리차를 들고 모두 잠옷 차림으로 유리문 앞에 갔어. 씨터틀이 두 앞발로 유리문의 오른쪽을 힘껏 밀었어. 그러자 아홀로틀의 집 대문처럼 유리문이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았어. 그리고 아홀로틀과 멀버니, 씨터틀은 거대한 거울 앞에 서있게 되었어.
멀버니: 짜잔, 이 유리문 안에 숨겨져 있던 건 바로 거울이란다.
아홀로틀: 에이! 이게 뭐야, 그냥 거울이 끝이었어요? 그런데 왜 9살이 될 때까지 기다릴 뻔 했던 거예요!
씨터틀: 그러지 말고 한 번 더 봐봐. 지금 거울에 보이는 건 바로 거울세상이야. 저기 어젯밤에 무서워했던 아홀로틀의 얼굴이 보이니? 어젯밤에 무서워했던 건 사실 우리 집 아홀로틀이 아니라 여기 거울세상 안의 아홀로틀인 거야.
멀버니: 이제 무서워 하고 있는 거울세상의 아홀로틀에게 한 번 웃어주지 않겠니?
아홀로틀이 ‘뭐야, 말도 안 돼요’ 하며 멋쩍게 웃으니, 거울세상 속 아홀로틀의 얼굴에도 작은 미소가 피었어.
씨터틀: 지금부터는 거울세상 속 아홀로틀을 꼭 기억하는 거야. 우리 아홀로틀을 대신해서 무서워 하고 슬퍼하고 화내고 있을 거울세상의 아홀로틀을 기억해줘. 그리고 만날 때 마다 반가워 해주고 웃어주면 돼.
파도와 춤
멀버니, 아홀로틀, 씨터틀은 거울 앞에 나란히 섰어. 그리고 거울에 손을 맞대어 거울세상 속 멀버니, 아홀로틀, 씨터틀과 손을 잡고 파도의 리듬에 맞춰 경쾌한 탭댄스를 추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