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가 놀던 (이화원 별장)
2018년 9월 추석나들이
청나라 왕실의 위용을 느껴볼 수 있는 관광명소
서태후의 여름별장인 이화원(颐和园)에 인공호수 (곤명호)넓이가 66만평으로 ..
베이징에서 서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교외에 위치한 이 곳은 황실을 그대로 이용한 정원에
인공호수와 건축물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 중국 조경 예술의 걸작품으로 칭송받고 있다.
1750년 청나라 황제가 만들었지만,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 없어진 것을 1886년 재건해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여기서 파낸 흙으로 쌓은 금수산, 집무실과 침소 등을 합쳐 여의도의 10배 정도 크기라고 한다
어떻게 궁궐에서 이곳까지 행군을 했냐는 질문에. 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 물속으로 오가는 비밀통로가 있었다"고
우리로는 이해하기 불가능한 일이다.
서태후가 놀던곳에서 우리일행도 배를 타고 한바퀴 돌아오니 황후가 된 느낌을 받고...
.위의 길은 오직 황후 서태후만 걸었던 길이라고 한다..
우리는 2018년 9월 만리장성을 답사하고 청나라 황후 서태후가 거처한 놀이터로 발길을 옮겼다
그녀의 출신배경이나 황궁에 들어오는 과정은 측천무후의 것과 비슷하다.
1835년생인 서태후는 만족(滿族)출신으로 그녀의 성은 엽혁나랍(葉赫那拉)이며 어릴 적에는 난아(蘭兒)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녀의 아버지 혜정(惠征)은 감찰 업무를 수행하던 하급 관리로 여러 지방을 전전하면서 근무하던 사람이었다.
난아가 태어난 시기는 유럽 열강들의 중국 침탈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그녀가 다섯 살 때인 1839년 제1차 아편 전쟁이나고
남경조약을 체결하면서 중국의 굴욕적인 근대사가 시작되었다.
난아는 열여섯 살 때 하위계급의 궁녀인 수녀(秀女)로 선발되어 황궁에 들어가 이때부터 자희(慈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의 황제는 함풍제(咸豊帝)였는데, 나이는 자희보다 네 살이 많았으며 이제 막 제위를 이어받은 상태였다.
그는 그리 뛰어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무능하지도 않은 평범한 황제였다. 또한부지런하고 대단히 선량한 사람이었던 반면에 겁이 많고 나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서태후
만약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선량한 사람이었던 함풍제는 백성들을 위하는 좋은 군주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격변의 시기를 맞이해 빅토리아 여왕의 대영제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열강들과 맞서기에 적합한 통치자는 아니었다.
자희는 원래 처세에 능한 사람이라 수녀로 출발해서 의빈(懿嬪)에 이르기까지 고속으 승진했으나 오랫동안 황제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
나 우연한 기회에 함풍제의 눈에 들어 입궁한지4년 만에 처음 황제의 성은을 입은 자희는 대단히 큰 행운을 잡았다. 스물한 살에 아들 재순(載淳)을 낳은 것
재순은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자희는 의비(懿妃)를 거쳐 의귀비(懿貴妃)가 되었다. 내명부에서 황후 바로 다음 서열로 올라선 것이다.자희 개인에게는 행복한 시절이었겠지만 300년 전에 만족의 영웅 누루하치가 세운 청 왕조는 이 시기급속한몰락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자희가 입궁했던 시기는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이라는 농민반란이 일어나 전국의 절반 이상이 태평군에 의해 점령되어 있는 상태였다.
한때 무적을 자랑하던 청 왕조의 팔기군(八旗軍)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으며, 증국번(曾國藩)과 이홍장(李鴻章)두 한인 출신 지방총독들이 지휘한 군대만이 가까스로 이들을 상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3.이 와중에 영국 상선 애로우 호 사건을 빌미로 제2차 아편 전쟁이 터졌다. 빅토리아 여왕의 영국과 나폴레옹3세의 프랑스는 노골적으로 중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한 것이다.
그들요구는 자국 공사의 북경 주둔, 교역항개항, 선교활동 보장과 같이 다분히 제국주의적인 것들이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의 연합함대가 천진거쳐 북경까지 위협하자 근대식 군대에 대항할 능력이 없는 함풍제는 굴욕적인 천진 조약을 맺어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이어 희와 재순 모자만을 데리고 열하(熱河)로 도피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혁흔은 영국, 프랑스와 협상을 벌였으며, 그 결과가 북경 조약이었다.
천진 조약이 유효함을 인정하고 천진 항을 개방하며 막대한 전쟁배상금까지 물어야 하는 조건이었다.
보고 있는구룡 반도까지 영국에게 할양해야 했다 (인터넷 내용임)
중국 3대악녀 1.여태후 2.측천무후3. 서태후등 엽기적인 색녀는 남자를 벌레죽이듯했다??
서태후(西太后)1835년 ~ 1908년 11월15일
청나라 황후는 48년간이나 통치를 했다.
세 살짜리 푸이를 선택했을 때 서태후는 곧 병을 털고 일어나 수렴청정을 이어갈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령은 이질을 이기지 못했고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은 다음날인 1908년 11월 15일 그토록 핍박했던 조카를 따라 생을 마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서태후의 유언은"다시는 나처럼 여인이 정사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고 했다고한다
이화원 호수에서 배를 타고 노닐던 서 황후의 모습 (나무위키에서...
첫댓글 사치의 황후 "금박이 옷이 3천 상자가 있었다"는 해설자 말씀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