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집백연경 제9권
9. 성문품(聲聞品)
88) 계빈녕[罽賓寧] 왕의 인연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시었다.
당시 남방에 금지국(金地國)의 계빈녕왕(罽賓寧王)이 부인과 함께 오락을 계속하다가, 열 달 만에 아들을 낳으니, 아이의 뼈마디가 굵고 큰 힘이 있었는가 하면, 그가 출생하던 날 1만 8천에 달하는 대신의 아들이 역시 함께 출생함과 동시에 그들도 다 큰 힘이 있었다.
그 뒤 왕자가 점점 장대하여 죽은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같은 날 출생한 대신의 아들 1만 8천 명을 불러 그들에게 다 대신의 지위를 주어 같이 국사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어느 때 계빈녕왕이 그 여러 신하들과 함께 사냥을 나아가 유희하던 끝에 신하들에게 물었다.
“지금 이 세간에 나처럼 큰 힘을 가진 이가 또 어디 있느냐?”
그러자 왕의 시종 가운데 어떤 상객(商客) 한 사람이 이 말을 듣고 곧 대답하였다.
“듣건대 도하(都下)에 어떤 국왕이 있으니 그가 바로 바사닉왕(波斯匿王)인데, 그 국왕이 지닌 큰 힘이 지금 대왕보다도 백천만 배나 더 뛰어날 것이라 합니다.”
이때 계빈녕왕이 상객의 말을 듣고는, 곧 진심이 성해져 바사닉왕에게 사신을 보내 통고하였다.
‘앞으로 7일 이내에 그대가 시종들을 거느리고 나의 국토에 와서 배알하고 문안 인사를 드려야 하오.
그렇지 않을 경우엔 내가 직접 가서 그대의 오족(五族)을 남김없이 베어버리고 말겠소.’
이때 바사닉왕은 사신의 말을 듣고 매우 당황하고 두려워할 뿐, 아무런 계책이 없어서 곧 부처님께 나아가 아뢰었다.
“저 계빈녕왕이 사신을 보내 저를 협박하되,
‘앞으로 7일 이내에 시종들을 거느리고 와서 왕에게 배알하고 문안 인사를 드려야 하지, 그렇지 않을 경우엔 죽이고 말겠노라’ 하니,
세존이시여, 이 사정을 어떻게 하면 좋으리까?”
이때 부처님께서 바사닉왕에게 말씀하셨다.
“왕은 조금도 겁내지 말고 다만 그 사신에게,
‘잘못 왔습니다. 나는 소왕(小王)이고 진짜 대왕은 가까운 기환정사에 계시니, 그대가 이제 거기에 가서 그대의 왕명을 전달하시오’라고 말해 보내십시오.”
이때에 바사닉왕은 부처님이 지시한 그대로 사신에게 전달하고, 한편 부처님께선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몸으로 화작(化作)하여, 대목건련(大目揵連)으로 하여금 전병신(典兵臣:군사를 맡은 대신)을 삼아 군중을 거느리고 온 기원을 둘러싸게 하였다.
사방 주변엔 일곱 겹의 구덩이를 만들고 7보(寶)의 나무를 마주 줄지어 두는 동시에 그 구덩이 속마다 갖가지 한량없는 연꽃을 심어 찬란한 광명을 온 성내에 비추게 하고는 대왕의 위의를 갖춰 전상(殿上)에 앉아 계시니 그 모습이 존엄하되 두려웠다.
이때 바로 저 사신이 와서 이 왕을 보고 놀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생각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부질없이 화(禍)를 불러 일으켰구나. 그렇지만 할 수 없다’ 하고서 곧 왕의 친서를 받들어 올렸다.
이때 변화한 왕이 그 친서를 받아 다리 밑으로 떨어뜨리고 사신에게 타이르셨다.
“나는 4역(域)을 다 통치하는 대왕이다. 너는 이제 돌아가서 내 명령을 이렇게 전달하라.
‘나의 이 친서를 받는 그날부터 빨리 와서 문안을 드릴지니,
누워서 나의 음성을 들으면 곧 일어나 앉아야 하고,
앉아서 나의 음성을 들으면 곧 일어서야 하고,
일어서서 나의 음성을 들으면 곧 길을 건너야 되리라.
그래서 7일 이내에 시종들을 거느리고 나에게 와서 배알해야지,
만약 이 명령을 어길 때엔 그 죄를 용서하지 않겠노라’고.”
이에 사신이 본국으로 돌아가 위의 사실을 갖추어 저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이 말을 듣고 자신의 허물을 매우 꾸짖고는 곧 3만 6천 신하를 불러 모아 수레를 장엄하고 대왕에게 배알하러 오면서도 한편 의심이 들어서 바로 접견하지 않고 먼저 한 사신을 보내 대왕에 아뢰었다.
“제가 영도하는 3만 6천 소왕(小王)을 다 인솔하기가 곤란하오니 그 반수만을 거느리고 와도 좋습니까?”
이때 화왕은 사신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반수만이라도 빨리 거느리고 오라.”
이때에 계빈녕왕은 대왕의 허락을 얻어 그 반수를 남긴 채 1만 8천 소왕들을 거느리고 빨리 와서 대왕에게 배알을 드린 다음 곧 생각하기를,
‘대왕의 용모가 비록 뛰어나기는 했으나 힘은 나보다 못하리라’ 하였다.
이때 화왕이 계빈녕왕이 생각하는 뜻을 짐작하고 곧 전장신(典藏臣)으로 하여금 선조 때부터 전해 온 큰 활[弓]을 가져오게 해서 저 왕에게 주어 한번 시험삼아 활을 당겨 보게 했으나 왕이 활을 이겨내지 못하므로,
화왕이 도로 활을 잡고서 한 손가락으로 활 줄을 튀겨 온 삼천대천세계를 다 진동하게 했다.
다음엔 또 화왕이 화살을 쏘되 화살을 다섯 화살로 만드는 동시에 그 화살 끝마다 연꽃 한 송이씩이 있고, 연꽃 한 송이마다 화불(化佛)이 계셔서 큰 광명을 놓아 온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시니, 다섯 갈래 중생이 다 은혜를 입고 모든 하늘과 사람들이 도과(道果)를 얻었다.
지옥엔 이글거리는 불이 사라지고 아귀들은 만족한 음식을 받고 축생들은 무거운 짐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탐욕ㆍ진심ㆍ우치와 번뇌에 허덕이는 자들도 모두 이 광명을 만나 스스로 조복되어 불법에 신심과 공경심을 내게 했다.
마침내 계빈녕왕이 이러한 신통 변화를 보고 화왕을 향해 온몸을 땅에 엎드려 예배함과 함께 마음이 곧 조복되었다.
그때 화왕도 저 왕이 이미 조복됨을 알고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대중에 둘러싸인 채 1만 8천 소왕들에게 갖가지 법을 설하자 마음이 열리고 뜻을 이해하게 되어 제각기 도의 자취[道跡]를 얻는 동시에, 수다원과를 얻고 곧 부처님 앞에서 출가하기를 원하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잘 왔도다, 비구들이여.”
그러자 수염과 머리털이 저절로 떨어지고 법복이 몸에 입혀져 곧 사문의 모습을 이루었으며, 부지런히 닦고 익혀 오래지 않아 아라한과를 얻고 3명(明)ㆍ6통(通)ㆍ8해탈(解脫)을 구족하여 온 천상과 세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때에 아난이 부처님께 나아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 계빈녕왕을 비롯한 비구들은 전생에 무슨 복을 심었기에 다 호족(豪族)에 태어나 큰 힘을 지니게 되었고, 또 무슨 인연으로 부처님을 만나서 각각 도과(道果)를 얻었나이까?”
이때 세존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자세히 들어라. 내가 이제 너희들을 위해 분별 해설하리라.
과거세 비바시(毘婆尸)부처님께서 이 바라날국에 출현하시어 여러 비구들을 거느리고 보전국(寶殿國)에 도착하셨는데, 그때 반두발제(槃頭末帝)란 국왕이 부처님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에 기뻐하여, 1만 8천 신하들과 함께 성문에 나와 맞이하며 엎드려 예배한 다음 무릎을 꿇고 앉아 부처님들을 비롯한 여러 비구들에게 이렇게 청하였다.
‘원컨대 자비하신 마음으로 석 달 동안 저희들의 네 가지 공양을 받아 주옵소서.’
이때 부처님과 스님들이 왕의 공양을 받고, 부처님께서 곧 갖가지 묘법을 설해 주시자 왕과 그 신하들은 각각 환희심을 내어서 다음과 같이 원을 세웠다.
‘원컨대 이 공양의 선근 공덕으로 말미암아 저희들로 하여금 미래세에 태어나는 곳마다 모두들 같은 날 함께 출생케 하여 주소서.’
이렇게 발원하고서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는데, 과연 그들은 이 공덕으로 인하여 한량없는 세간에 걸쳐 나쁜 갈래에 떨어지지 않고 항상 같은 날 천상과 인간으로 태어나 하늘의 온갖 쾌락을 받아 왔으며 이제 또 나를 만나 출가 득도하게 된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알아 두라. 그 당시의 반두말제왕은 바로 지금의 계빈녕 비구이고 그 당시의 뭇 신하들은 바로 지금의 1만 8천 비구들이었느니라.”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다 환희심을 내어서 받들어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