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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62권
6. 변현성품 ⑥
4. 견도위(見道位): 성제(聖諦) 현관(現觀)
4.1. 16심(心) 현관
1) 고법지인(苦法智忍)의 제상(諸相)
편의에 따라 순해탈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1)
이제 바야흐로 [현]관(現觀)에 드는 순서가 바로 여기서 논의해야 할 문제이다. 앞에서 이미 온갖 가행도 중에서 세제일법(世第一法)이 그것의 가장 마지막 도임을 밝혔으므로, 이제 마땅히 이것(세제일법)으로부터 다시 어떠한 도가 생겨나게 되는지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제일법과 무간(無間)에
욕계 고제(苦諦)를 반연하여
무루의 법인(法忍)을 낳으며
법인 다음에 법지(法智)를 낳는다.
世第一無間 卽緣欲界苦
生無漏法忍 忍次生法智
다음으로 다른 계의 고제를 반연하여
유인(類忍)과 유지(類智)를 낳으며
다시 집ㆍ멸ㆍ도제를 반연하여
각기 네 가지를 낳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次緣餘界苦 生類忍類智
緣集滅道諦 各生四亦然
이와 같은 16찰나의 마음을
성제현관(聖諦現觀)이라 이름하는데
여기에는 모두 세 종류가 있으니
견(見)ㆍ연(緣)ㆍ사(事)의 차별이 그것이다.
如是十六心 名聖諦現觀
此總有三種 謂見緣事別
논하여 말하겠다.
세제일법의 선근으로부터 무간에 욕계의 고성제(苦聖諦)의 경계를 반연하여 무루에 포섭되는 법지인(法智忍)이 생겨나는 경우,2) 이러한 ‘인’을 일컬어 고법지인(苦法智忍)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이 바로 무루에 포섭되는 것임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이는] 세제일법으로부터 무간에 생겨난 것으로, 계경 중에서 “세제일법과 무간에 정성결정(正性決定) 혹은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들어간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 그 때(다시 말해 세제일법과 무간에) 이생(異生)의 경지를 초월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인’은 결정(決定)적인 이생(離生)의 일부분에 포섭되니, 결정코 무루인 것이다. [이같이] 세제일법으로부터 무간에 생겨나는 것을 ‘무루’라는 말로 설한 것은 세제일법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세간의 ‘인’[世忍, 즉 순결택분의 인법]에 따라 이를 무루의 ‘인’이라고 하였으며, 욕계의 고법(苦法, 즉 현행의 苦果)을 소연으로 삼았기에 ‘고법인(苦法忍)’이라고 이름하였다. 다시 말해 무시이래 유신견으로써 아(我)ㆍ아소(我所)라고 미혹하여 집착하였던 고법에 대해 지금 비로소 그것을 오로지 고법의 성질(즉 무상ㆍ고ㆍ공ㆍ무아)로 관찰하여 [그러한 관찰의] 인가(忍可)가 현전한 상태이므로 ‘고법인’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후 [찰나]인 고법지(苦法智)의 생(生)을 능히 인기할 뿐더러, 바로 그러한 지(智)가 생겨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을 대치하기 때문에 다시 ‘고법지인(苦法智忍)’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런데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이와 같이 해석하였다.
“이러한 ‘인’은 바로 무루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본송에서] ‘이것은 능히 법지(法智)를 낳는다’고 후 [찰나]의 등류[과](等流果, 즉 고법지)를 언급하여 [순결택분의 ‘인’과] 구별한 것으로, 바로 법지의 원인이기에 ‘법지인’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니, 이는 마치 [화과(花果)를 낳는 나무를] 화과수(花果樹)라고 하는 것과 같다.”3)
그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무루’라는 말없이] 오로지 ‘인’이라고만 말하면, 이것에 가행도의 ‘인’과 혼동되는 과실이 있을까 염려된다”는 것이지만, 여기(그의 말)에는 깊은 이취(理趣)가 없다. 즉 “그러한 법(法智)은 이러한 법(法忍)이 존재함으로 생겨난다”거나 “이러한 법은 필시 마땅히 그러한 법과 동류라고 해야 하니, 마치 화과수(花果樹)와 [화과가 동류인 것과] 같다”고 해서도 안 되니, 단대치(斷對治) 등의 인과(因果)는 그 류(類)가 다르기 [때문이다].4)
또한 [그의 말은] 지극히 상식적이지 않다. 즉 고법지(결과)로써 “이것(고법인, 원인)은 바로 무루성이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지 않은 것으로, 어떻게 ‘인(忍)’이 그것을 낳았는데 그것과 마찬가지로 무루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이것(苦法忍)은 가행도의 ‘인’과 혼동되는 과실이 없으니, “세제일법과 무간에 생겨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며, “이것은 능히 이생(異生)의 경지를 초월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으로, 유루의 ‘인’은 능히 이 같은 일들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5)
또한 “이러한 고법인은 고법지를 등류과로 삼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만약 “이러한 ‘인’은 바로 무루이기 때문에, 아울러 [고법지보다] 먼저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고 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이러한 ‘인’이 무루라는 이치를 아직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6)
이에 따라 앞의 해석이 선설(善說)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바로 이러한 [고법지인을] 입정성결정(入正性決定)이라 이름하며, 또한 역시 입정성이생(入正性離生)이라고도 이름하니, 이것은 바로 처음으로 정성이생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또한 역시 처음으로 정성결정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에서 설하기를, “‘정성(正性)’이란 이른바 열반이다”고 하였다. 혹은 ‘정성’이란 말은 온갖 성도(聖道)를 가리킨다. 즉 온갖 성도는 능히 결정적으로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혹은 진리[諦]의 상을 결정적으로 요별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정(決定)’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으며, 이러한 ‘결정’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입(入)’ 즉 ‘들어간다’는 말로 설하게 된 것이다.7)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한 때는] 무루혜에 근거하여 오로지 처음으로 진리를 관찰한 때인데, 어떠한 이유에서 ‘결정’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인가?
그 때 온갖 진리의 이치에 대해 훼손하기 어려운 결정적 통찰[決定見]을 처음으로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혹은 그때 그 밖의 다른 계위(수도위나 무학위)의 도(道)와는 동일하지 않은 결정적인 상[決定相]이 존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견도위 중에서는 찰나 찰나에 걸쳐 결정코 인(忍)과 지(智)의 행상을 사이사이에 섞어[間雜] 획득하지만,8) 그 밖의 다른 도에서는 그렇지 않다. 또한 견도위 중에서는 장애(즉 번뇌)와 대치도가 결정코 차별되니, 오로지 견소단[의 번뇌]만을 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도에서는 그렇지 않다. 즉 수도위 중에서는 혹 어떤 경우 견소단과 수소단의 번뇌를 모두 끊기도 하고, 혹은 오로지 수소단의 번뇌만을 끊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견도위 중에서는 해탈도 이후에 결정코 무간도가 일어나지만, 그 밖의 다른 [계위의] 도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또한 견도위 중에서는 결정코 무루[의 도만이 일어나며], 결정코 15찰나[念]이며, 결정코 동등한 법을 일으키지 않지만, 그 밖의 다른 도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견도에 대해서만] 유독 ‘결정[定]’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견도위 중에서 결정적으로 여덟 성자(4향 4과)의 동분(同分)을 처음으로 획득하기 때문에 오로지 견도에 대해서만 ‘결정(決定)’이라는 말을 설정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번뇌를 ‘생’이 이름하였으니,9) 계경에서 “무엇을 ‘생’의 자구(資具)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번뇌이다”고 설한 바와 같다.10) 즉 견도위에서 [‘생’의 자구가 되는 번뇌를] 처음으로 초월하기 때문에 ‘이생(離生)’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런데 어떤 이는 “‘생’이라는 말은 근기[根]가 아직 성숙하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러한 견도위에서 [근기가 성숙하지 않은 생을] 처음으로 초월하기 때문에 ‘이생(離生)’이라 이름하였다”고 설하였다.11)
그리고 이러한 ‘이생’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입(入)’ 즉 ‘들어간다’는 말로 설하게 된 것이다.
예컨대 본론(本論)에서는 “세제일법과 무간에 이생성(異生性)을 버린다”고 설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생성을 버리는 것은] 세제일법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고법지인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두 가지가 함께 [버리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로지 세제일법이라고 해야 한다. 만약 ‘이러한 [세제일법도] 바로 이생법(異生法)이기 때문에 마땅히 [이생성을] 버릴만한 힘이 없다’고 한다면,12)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세제일법과 이생성은] 자성이 서로 상위하기 때문으로, 그것(이생법인 세제일법)에 의해 그것(이생성)을 버린다고 함은 마치 원적의 어깨 위에 올라가 원적의 목숨을 해치는 것과 같다.”13)
[또 다른] 유여사는 [이같이] 설하였다.
“오로지 고법지인이라고 해야 한다. 즉 이러한 ‘인’이 생겨날 때 이생성을 버리며, 이러한 ‘인’이 멸하는 상태에서 열 가지 수면을 끊으니, 이는 마치 등불이 생겨날 때 능히 어두움의 장애를 제거하며, 등불이 멸하는 상태에 이르러 심지를 태우거나 기름을 소진하는 것과 같다.”14)
만약 “[그럴 경우] 두 가지의 공능(어두움을 제거하고 심지와 기름을 태우거나 소진하는 것)이 등불의 촉(觸)에 소속되므로 마땅히 하나의 법에 두 가지 공능을 지닌 비유를 인용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하나의 법에 생겨나는 상태[生位]와 소멸하는 상태[滅位]의 두 가지는 자성에 차이가 있듯이 두 상태의 공능 역시 마땅히 다르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치상으로도 마땅히 생겨날 때 갖는 자성이 소멸할 때의 자성과 같다고 인정해서는 안 되며, 역시 마땅히 소멸할 때 갖는 자성이 생겨날 때의 자성과 같다고 인정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공능은 실유의 자성[有性]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유의 자성을 떠나 그밖에 별도로 존재하는 공능 자체는 이루어질 수 없으니, [이에 대해서는] [삼]세를 설하는 중에 이미 분별하였다.15) 또한 하나의 법이 일 찰나 중에 다수의 공능을 갖는 경우를 볼 수 있으니, 예컨대 4정단(正斷)이 그러하다.16) 따라서 [유여사에 의해] 설정된 비유는 이치상 성립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즉 여기서 설정한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예컨대 등불은 총상(總相)에 근거한 것으로, 그 자체는 비록 단일할지라도 실체[實物]가 다르기 때문에 공능에도 차이가 있다.17) 이를테면 생겨날 때 공능을 일으키는 [실체도] 있으며, 소멸하는 상태에서 비로소 공능을 갖는 [실체도]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법[物]도 시간에 따라 차별되기 때문에 거기에 존재하는 공능 역시 마땅히 차별이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법지인이 생겨날 때 이생성을 버리는 공능을 가지며, 소멸할 때 열 가지 수면을 끊는 작용을 가지니, 여기에 무슨 과실이 있을 것인가?
만약 “미래[법]이 어찌 작용을 갖는다는 것인가?”라고 책망한다면,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해석하였다.
앞에서 어떻게 해석하였다는 것인가?
여기서는 공능을 일시 ‘작용’이라고 설한 것으로, 결정코 작용이 미래[법]과 과거[법]에 존재하는 일은 없으니, [이에 대해서는] [삼]세의 상을 분별하는 중에 이미 모두 사택(思擇)하였다.18)
[또 다른] 유여사는 [이같이] 설하였다.
“이 두 가지(세제일법과 고법지인)가 함께 버리는 것이니, 무간도와 해탈도의 경우와 같기 때문이다. 즉 세제일법은 무간도와 마찬가지로 이생성의 성취(成就)의 득(得)과 동시에 멸하기 때문이며, 고법지인은 해탈도와 마찬가지로 이생성의 불성취(不成就)의 ‘득’과 동시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2) 그 밖의 15심(心)
이러한 [고법지]인과 무간에 바로 [고법지인에 의해 관찰된] 욕계 고성제의 경계를 반연하여 법지가 생겨나는 경우, 이를 고법지(苦法智)라고 이름하니, 오로지 바로 이러한 고법(苦法)에 대한 결단(決斷)의 혜(慧)를 획득하였기 때문이다.19) 그리고 이러한 ‘지’ 역시 무루에 포섭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으로, 앞(고법지인)에서 언급한 ‘무루’라고 하는 말은 뒤(제16 道類智)에 이르기까지 두루 적용되기 때문이다.
욕계 고성제의 경계를 반연하여 고법지인과 고법지가 생겨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다시 [고]법지와 무간에 그 밖의 계(즉 색계와 무색계)의 고성제를 모두 반연[總緣]하여 유지인(類智忍)이 생겨나는 경우, 이를 고류지인(苦類智忍)이라 이름한다.
또한 이러한 [고류지]인과 무간에 이러한 경계(고류지인에 의해 관찰된 상2계의 고제)를 반연하여 유지(類智)가 생겨나는 경우, 이를 고류지(苦類智)라고 이름한다. 즉 최초로 제법의 참된 이치를 깨달아 알았기 때문에 ‘법지’라고 이름한 것이며, 이 다음의 경계(상 2계의 고제)에 대한 지(智)는 앞의 ‘지’와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유지’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으로, 뒤의 ‘지’는 앞의 ‘지’에 따라 그러한 경계(상2계의 苦法)의 뜻을 깨달아 알았기 때문이다. 혹은 앞의 ‘지’에 따라 생겨났기 때문에 뒤의 ‘지’는 앞의 ‘지’의 종류[類]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으로, 세간에서 자식은 바로 아버지의 종류[父類]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이는 바로 욕계 고제에 대한 결정적인 앎[決定覺]으로부터 생겨난, 그 밖의 계(색ㆍ무색계)의 고제에 대한 결정적인 앎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욕계와 그 밖의 계(상2계)의 고제를 반연하여 법지인(法智忍)과 유지인(類智忍), 법지(法智)와 유지(類智)의 네 가지가 생겨나듯이, 그 밖의 다른 세 가지 제(諦)를 반연하여 각기 네 가지가 생겨나는 것도 역시 그러한데, 이는 각각의 제를 반연하여 네 찰나의 마음[四心]이 존재한다는 뜻이다.20)
이를테면 앞의 고류지가 생겨난 후 그 다음으로 다시 욕계 집성제의 경계를 반연하여 법지인이 생겨나는 경우,21) 이를 집법지인(集法智忍)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이러한 ‘인’과 무간에 욕계 집성제를 반연하여 법지가 생겨나는 경우, 이를 집법지(集法智)라고 이름한다.
다음으로 그 밖의 계(상2계)의 집성제의 경계를 반연하여 유지인이 생겨나는 경우, 이를 집류지인(集類智忍)이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인’과 무간에 이러한 경계를 반연하여 유지가 생겨나는 경우, 이를 집류지(集類智)라고 이름한다.
다음으로 욕계 멸성제의 경계를 반연하여 법지인이 생겨나는 경우,22) 이를 멸법지인(滅法智忍)이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인’과 무간에 욕계 멸성제를 반연하여 법지가 생겨나는 경우, 이를 멸법지(滅法智)라고 이름한다.
다음으로 그 밖의 계(상2계)의 멸성제의 경계를 반연하여 유지인이 생겨나는 경우, 이를 멸류지인(滅類智忍)이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인’과 무간에 이러한 경계를 반연하여 유지가 생겨나는 경우, 이를 멸류지(滅類智)라고 이름한다.
다음으로 욕계 도성제의 경계를 반연하여 법지인이 생겨나는 경우,23) 이를 도법지인(道法智忍)이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인’과 무간에 욕계 도성제를 반연하여 법지가 생겨나는 경우, 이를 도법지(道法智)라고 이름한다.
다음으로 그 밖의 계(상2계)의 도성제의 경계를 반연하여 유지인이 생겨나는 경우, 이를 도류지인(集類智忍)이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인’과 무간에 이러한 경계를 반연하여 유지가 생겨나는 경우, 이를 도류지(道類智)라고 이름한다.
[세제일법 이후] 이와 같은 순서로 16찰나의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를 전체적으로 설하여 ‘성제현관(聖諦現觀)’이라고 이름하니, 이는 바로 3계의 4성제의 경계를 차례로 현전시켜 참답게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3계의 4성제의 경계에 대해 계속 돌아가며 분잡하고 요란하게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였으니, 어찌 능히 현관에 장애가 된다고 하지 않겠는가?24)
‘처음으로 업을 닦는 단계[初習業地, 즉 초입자의 단계]’에서 [이 같은] 온갖 진리의 경계에 대해 수없이 많이 계속 돌아가며 반복적으로 [관찰하여] 이미 완전히 익숙해졌기 때문에 [지금 이러한 견도위에서 능히 이와 같이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25) 또한 견도에서는 행(行)이 지극히 빠르기 때문에, 또한 아세야(阿世耶, 意樂)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또한 이것(견도)의 세력은 지극히 맹리(猛利)하기 때문에 [앞서 순결택분에서 3계의 4성제의 경계에 대해 작의하고 사유하였더라도] 필시 이것(현관)에 장애가 되는 일은 없다.
바로 이 같은 이치로 말미암아 견도위를 일컬어 ‘상을 갖는 않아[無相] 시설(施設)할 수 없는 계위’라고 설한 것이니, 이러한 계위 중에서 머무는 모습은 참으로 알기 어렵기 때문이며, 법(法)ㆍ유(類)의 인(忍)ㆍ지(智)로서 온갖 진리[諦]의 경계에 대한 행상의 차별은 참으로 시설하기 어렵기 때문이다.26)
(1) 상좌의 8심(心) 현관설(現觀說)
이에 대해 상좌(上座)는, 백천(百千)의 온갖 유가사(瑜伽師)들이 참된 현량(現量)의 증지(證智)에 근거하여 설한 것으로서 대왕의 길[大王路]처럼 전전(展轉)하며 전해 내려온 성제(聖諦) 현관(現觀)의 이치를 어기고서 자신의 정의(情意)에 따라 현관의 순서를 다르게 설정하였으니,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유가사는 4제의 경계에 대해 먼저 세속지[世智]로써 참답게 관찰한 다음에 [4제의] ‘인(忍)’을 이끌어내어 낳게 된다. 그리고 욕계의 혜[欲慧]로써 이러한 ‘인’을 관견(觀見)하여 증진(增進)시키게 되면, 직접적으로 능히 정성결정(正性決定)을 이끌어내어 낳는 [등]무간연이 되어 광명(光明)의 상(相)인 성도를 인기한다. 따라서 이러한 ‘인’이 현전하면, 뒤의 성도와 마찬가지로 4제의 경계를 인가(忍可)하여 간택(簡擇)하고 관찰(觀察)하기를 욕락(欲樂)하는데, 추탁(推度, 추리하여 헤아림)의 분명(分明)함은 마치 얇은 비단에 가려진 광명 중에서 [어떤 물체의] 형상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단계를 일컬어 ‘입(入)정성결정’이라 하며, 그 후 [증득하는] 4제에 대한 미묘한 결택인 동요(動搖)됨이 없는 지견(智見)을 일컬어 ‘예류[과](預流果)’라고 한다. 즉 부처님께서는 ‘열반을 일컬어 정성(正性)이라 한다’고 설하였으니, 이것(4제에 대한 미묘한 결택)은 능히 결정코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기에 ‘결정’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앞의 [‘인’을] ‘입정성결정’ 즉 ‘정성결정으로 들어가는 도’라고 이름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능히 [견도]위에 들어가는 도이기에 ‘제순인(諦順忍)’ 즉 ‘성제에 수순하는 인’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은 세제일법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같은 사실은 이를테면 부처님께서 5취온을 설하고 나서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법(5취온)에 대해 하열(下劣)한 혜(慧)로써 심찰(審察, 推尋伺察의 줄임말)하여 인가(忍可)한 이라면 수신행(隨信行)이라 이름하며, 만약 이러한 법에 대해 증상(增上)의 혜로써 심찰하여 인가한 이라면 수법행(隨法行)이라 이름한다.”27)
즉 [부처님께서는] ‘인(忍)’을 획득한 것에 근거하여 수신행과 수법행을 설정하였지 ‘지(智)’를 획득한 것에 근거하여 설정하였던 것이 아니다.
또한 세존께서는, 증정(證淨)을 성취하여 견제(見諦)가 원만한 정견자(正見者) 중에서 결정적으로 그러한 수신행과 수법행을 제외시켰기 때문이다.28) 즉 『집총가타(集總伽他)』 중에서 두 가지의 최승(最勝, 부처와 독각)과 두 가지의 [증]정(證淨, 佛증정과 僧증정)에 통달한 이 이외에 [별도로] 이러한 두 종류를 설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두 종류는 아직 성지(聖智,무루지)를 획득하지 못한 이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인’)은 다시 세제일법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성정(聖定, 무루정)에 의한 ‘인’과 앞의 것(세제일법)에는 차이가 있다. 즉 [성정이라 함은] 세간을 벗어난 것[出世]이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성(聖)’이라고 하였으며, 동요됨이 없기 때문에 이를 ‘정(定)’이라고 하였는데, [‘인’은] 성정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견제(見諦)라고 이름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인’)은 아직 성도를 획득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성도를 획득한 것이라면, [수신행이나 수법행이라고 말하지 않고] ‘예류[과]’로 바꾸어 말하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사리자(舍利子)에게 고하기를, “8지(支)의 성도를 설하여 ‘류(流)’ 즉 ‘흐름’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던 것이다.29)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그들(수신행과 수법행)을] 일컬어 성자라고 하는 것인가?
이러한 세제일법에 의해 성정(聖定)의 ‘인’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위에 머무는 것은 오랫동안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어떠한가?30)
성도를 인기하려는 세력이 강력하기 때문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위의] 연(緣)을 결여할 때 잠시 출[관](出觀)하여 다른 사업을 짓는 경우도 있지만, [사문]과(果)를 획득하지 못하였기에 중간에 목숨을 마칠 리는 없다.
이러한 성정(聖定)의 ‘인’에 무슨 장애가 [있기에 연을 결여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인가?
[이것이] 비록 현행할지라도 번뇌[惑]를 끊지 못하니, [성]지(聖智)가 아직 원만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결정적인 것(즉 決定慧)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성정의 ‘인’] 다음에 고법지(苦法智)를 일으키는데, 이를 일컬어 예류[과]의 첫 찰나의 마음[初心]이라고 하니, 이때 바로 3결(結)을 단박에 끊고 능히 영원히 그것의 구(舊) 수계(隨界)를 끊기 때문이다.31)그리고 이로부터 고류지(苦類智) 등을 인기하는 것이다.32)
그렇기 때문에 현관에는 결정코 여덟 찰나의 마음[八心]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2) 상좌의 현관설 비판
(2-1) 현관의 순서, 특히 고법지 예류과설 비판
여기서 그(상좌)의 종에서 [주장하는] 현관의 순서를 자세히 살펴보건대, 이는 성교(聖敎)에도 위배되고 정리(正理)에도 위배되며, 앞뒤의 말도 서로 모순된다.
무엇이 성교에 위배된다는 것인가?
예컨대 세존께서는 설하기를, “온갖 유정으로서 3결을 영원히 끊은 이를 ‘예류[과]’라고 이름하니, 그는 4성제에 대해 모두[具] 현관하였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 경에서는 두 가지의 결정적인 이치를 나타내고 있다. 첫째는 고법지를 획득한 이를 바로 예류[과]라고 이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으며, 둘째는 고법지를 [획득할] 때 단박에 3결을 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즉 이 경은 의미상 “4제를 두루 아는[遍知] 이를 예류[과]라고 이름한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예류[과]에 이르러야 비로소 능히 3결을 완전히 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33)
어떠한 근거에서 정리에 위배된다고 한 것인가?
바야흐로 그가 설한대로 고법지의 단계를 바로 예류[과]라고 이름한다면, 마땅히 [고법지]인에 머물 때를 예류향(預流向)이라고 이름해야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예류향을 예류[과]와 마찬가지로 유학(有學)이라 설하였다. 즉 계경에서 “온갖 유학의 [성]자에는 열여덟 종류가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으로,34) 요컨대 학법(學法, 마땅히 배워야 할 법)을 획득한 이를 ‘유학의 [성]자’라고 이름한 것이다. 따라서 성인(聖忍, 즉 무루의 인법)도 역시 ‘학법’이라 이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그는] “‘인’은 바로 학법이지만, 성도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말이 얼마나 크게 정리에 위배되는 것인가?
또한 다른 정리에도 위배된다. 이를테면 세존께서 말하기를, “이러한 수신행과 수법행의 [성]자는 정성결정에 들어 이생(異生)의 경지를 초월하였을지라도 아직 예류과를 획득한 것이 아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는데, 어떻게 그들이 이생의 경지를 초월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아직 성도를 성취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인가?
[세존께서는] 또한 설하기를, “여덟 종류의 보특가라가 존재하니, 예류향으로부터 아라한에 이르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여덟 성자는 마땅히 맞아들여야 하며, 마땅히 청(請)하여야 하며, 마땅히 합장하여 예경(禮敬)해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으니, [수신행과 수법행이] 성도를 성취한 일이 없다면 이러한 흐름[流]에 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수신행에 대해서는 그 밖의 다른 성자처럼 성도를 획득한 자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설하기를, “만약 5근을 가진 이로서 뛰어나게 맹리하고 지극히 원만한 자라면 구해탈(俱解脫)의 아라한이라 이름하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만약 5근을 가진 이로서 지극히 저열하고 둔한 자라면 수신행이라 이름하지만,35) 성도를 갖지 않은 것은 아니다”고 하였으니, 가히 이러한 설과 같아야 하는 것이다.36)
그의 설이 어떻게 앞뒤가 서로 모순된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도(道)는 정견(正見) 등을 가리키는 말로서,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말하자면 세간의 도와 출세간의 도가 바로 그것으로, 이러한 두 가지의 도를 떠나 그 밖의 세 번째의 도는 없다. 즉 [그는] 이미 성인(聖忍)이 출세간의 도라고 인정하였으니, 마땅히 법지(法智) 등과 마찬가지로 성도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만약 이것(聖忍)이 성도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역시 마땅히 출세간의 도라고 인정해서도 안 될 뿐더러 출세간의 도도 성도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하니, 어찌 그의 설이 앞뒤가 서로 모순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만약 고법지(苦法智)를 [획득할] 때 예류[과]의 [성]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선서(善逝)께서 설하신 바를 어떻게 회통할 수 있을 것인가? 즉 경에서 “세존께서는 사리자(舍利子)에게 고하기를, 8지(支)의 성도를 설하여 ‘류(流)’ 즉 ‘흐름’이라고 이름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37)(상좌의 반론)
나[의 말]에는 [계경에] 위배됨이 없음에도 어찌 번거롭게 [계경에] 회통시켜 해석하라는 것인가? 이를테면 나는 “처음으로 성도에 들어간 이(다시 말해 고법지를 획득한 이)를 바로 예류[과]라고 이름한다”고는 설하지 않았다. [나는] ‘예류[과]’라고 하는 말을 첫 번째 [사문]과[初果]를 획득한 것에 근거하여 설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경에서도 역시 “8지(支)의 성도를 획득한 이를 모두 예류[과]라고 이름한다”고는 설하지 않았으며, 다만 [8지의 성도를 설하여] ‘류(流)’라고 하였을 뿐인데, 무엇이 위배되기에 [회통시켜] 해석해 보아야 한다는 것인가?
이치상 [예류과는] 마땅히 8제(諦, 욕계와 상계의 4제)의 경계를 두루 예지(預知)하였다고 해야 하니, [경에서] 성도를 ‘류(流)’라고 한 것은 예류[과]를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에서 증정을 성취하여 견제(見諦)가 원만한 정견자 중에서 수신행과 수법행을 제외시킨 것에는 별도의 이유가 있다].38) 즉 경에서는 가가(家家)ㆍ7반(返)ㆍ일간(一間)ㆍ일래(一來)ㆍ욕(欲)아라한ㆍ5종의 불환(不還)의 열 종류의 성자를 나타내어 열거하고 나서 다시 이같이 설하였다.39) “온갖 유정으로서 불증정(佛證淨)을 성취한 자는 모두 다 ‘견제(見諦)가 원만한 정견자(正見者)’에 포섭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증정을 성취하여 견제가 원만한 정견자’ 중에서 앞의 다섯 성자는 이곳[此處, 욕계]에서 통달(通達)하고 저곳[彼處, 색ㆍ무색계]에서 구경(究竟, 즉 반열반)을 [증득하며], 뒤의 다섯 성자도 이곳에서 통달하고 저곳에서 구경을 [증득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40)
이 경 중에서 수신행과 수법행의 두 가지를 설하지 않은 데에는 별도의 이유가 있다. 이를테면 요컨대 4성제를 모두 완전[具足]하게 관찰하여야 비로소 ‘견제가 원만한 이’라거나, 아울러 ‘결여[缺減]됨이 없이 증정을 성취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저들 수신행과 수법행자는 [고법지인] 내지 도류지인을 증득할 때에도 여전히 ‘사견(邪見)을 성취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아직 ‘견제가 원만한 이’라거나, 아울러 ‘결여됨이 없이 증정을 성취한 자’라고 말할 수 없다.
나아가 3제(諦)에 대한 현관을 증득하였을 때조차 ‘이미 불(佛)ㆍ승(僧)의 증정을 성취한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41) 바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고법지를 증득할 때에도 ‘예류[과]를 획득한 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경에서는 “모든 예류[과의 성]자는 견제가 원만하고 증정을 모두 성취하였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인용한 이와 같은 계경은 자신의 종의를 스스로 해손(害損)시키는 것일 뿐, 다른 학설(유부 비비사사설)에는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42)
혹은 여기(앞서 상좌가 인용한 『집총가타』)서는 오로지 그러한 계위 중에서 말[語言]할 수 있고, 목숨을 마치는 것이 허용되는 성자에 대해서만 설한 것으로, 저들 수신행과 수법행자에게는 두 가지 사실이 모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치상 마땅히 “수신행과 수법행자는 증정(證淨)을 성취하지 못하였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예컨대 계경에서는 “어떤 이가 저 같은 네 종류의 증정에 대해 아무 것도 [획득한 것이] 없다고 한다면, 나는 그가 외도나 이생(異生)의 품류로서 사는 이라고 설하리라”고 말하였다. 즉 이들 두 행자가 유학이라고 인정하면서 이생이라고 설하는 것은 정리(正理)에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들이 열 종류의 성자 중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해서 증정 등을 [획득한 일이] 없다고 한다면, 크나큰 과실을 범하는 것이 된다. 이를테면 부처와 독각(獨覺) 역시 열 종류의 성자 중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어찌 “부처와 독각은 증정을 성취하여 견제가 원만한 정견자 밖에 존재하는 이들이다(다시 말해 견제가 원만한 정견자가 아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부처와 독각은 아라한 중에 포함된다”고 한다면, 『이최승경(二最勝經)』은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니, 이를테면 그 경에서는 “열 가지 성자가 존재하니, 4향(向) 4과(果)와 아울러 부처와 독각이 바로 그들이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이 경에서는] 오로지 부처와 독각만을 일컬어 ‘최승(最勝)’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비록 아라한과 역시 그들을 포섭할 수 있을지라도 다시금 별도로 설한 것은 ‘가장 수승한 이’이기 때문으로, 이 경(앞서 상좌가 인용한 『집총가타』)의 이치 역시 이와 같아서 두 가지(부처와 독각)는 아라한과 중에 포함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이 경 중에서 그러한 두 종류(수신행과 수법행)를 설하지 않았다고 해서 어찌 “[경에서]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정증 등을 [획득한 일이] 없다”고 하겠는가? 이치상 부처와 독각도 열 종류의 성자에 포함되지 않지만 증정 등을 성취하였다고 이미 인정하였으면서 수신행과 수법행의 경우는 어찌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또한 이 계경은 요의설(了義說)이 아니니, 이 경에서는 “열 종류의 성자는 다 정견(正見) 등의 8도지(道支)에다 다시 정지(正智)와 정해탈(正解脫)을 더한 열 가지의 성도지(聖道支)를 모두 성취하였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계경에서는 “모든 유학의 [성]자는 다만 앞의 8도지만을 성취할 수 있을 뿐이며, 열 가지를 모두 성취하는 것은 오로지 아라한뿐이다”고 설하고 있으니,43) 이 계경의 뜻에 대해 마땅히 다시 살펴 추구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결정코 요의설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또한 “예류[과] 등이 이곳에서 통달하고 당래 저곳에서 구경을 증득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그들은 현신(現身)에서 욕계를 완전히 떠났거나 당래에 완전히 떠날 자[全離欲]로서, 색ㆍ무색계에 태어나 바야흐로 반열반을 [증득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하는데, 그들이 예류ㆍ일래 등의 과위에 머무는 이라면, 열 가지 성자에 포섭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포섭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포섭된다고 한다면, 이 경에서 설한 바에 어긋나니, 이 경에서는 “예류과 등이 이곳에서 통달하고 저곳에서 구경을 [증득한다]”고 설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44) 만약 포섭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마땅히 그러한 종류의 [성자] 역시 증정 등을 성취하지 못한 자라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준하여 마땅히 책망해 보아야 할 것이니, 욕(欲)아라한은 [이곳에서 통달하고 저곳에서 구경을 증득하는] 유학위의 열 가지 [성자] 중에 포섭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포섭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열거된 바에 따라 그 밖의 과위(즉 무학위)에 포섭된다고 한다면, 수신행과 수법행도 역시 열 가지 [성자] 중에 포섭된다고 해야 한다. 이것이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욕아라한)은 어째서 그러한가? 또한 부처와 독각도 유학위에 포섭된다면, 어떠한 성자 중에 포섭되는지 마땅히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포섭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마땅히 증정(證淨) 등도 [획득한 일이] 없다고 해야 하기 때문에 이 경의 뜻에 대해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45)
이에 따라 결정코 [이 계경은] 요의설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즉 열 가지 성자 중에 포섭시켜 설하지 않았다고 해서 수신행과 수법행에게 증정 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 가지 성자 중에 포함시켜 설하지 않았다”는 사실로써 수신행과 수법행이 아직 성지(聖智, 무루지)를 획득하지 못하였음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수신행과 수법행자도 그 밖의 다른 과향(果向)과 마찬가지로 성도를 일으켰다고 해야 한다. 이는 이를테면 이미 예류과 등을 획득한 이가 그 후 일래과 등으로 나아갈 때, 아직 그러한 과위를 획득하지 못한 이를 일컬어 ‘그것(일래 등)의 과향’이라고 하는데, 그 중간(예류과와 일래과의 중간)에도 필시 성도가 현전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같은 사실에 준하여 볼 때, 수신행과 수법행자도 이미 예류과향이니, 결정코 성도를 일으켰음을 알아야 한다. 즉 [양자(일래향과 예류향)는] 성자의 과향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46) 이에 따라 계경에서는 “두 행자는 아직 예류과를 획득하지 못하였기에 중간에 목숨을 마치지 않는다”47)고 설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성도의 흐름[流]에는 모두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바로 과위(果位)에 [포섭되는 흐름]과, 과위에 포섭되지 않는 [흐름]이 바로 그것으로, 요컨대 과위에 [포섭되는] 흐름에 이른 이를 일컬어 ‘예류과’라고 한다.48) 이러한 두 행자는 비록 과위에 [포섭되지] 않는 [성도의] 흐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지라도 아직은 ‘과위에 [포섭되는 성도의] 흐름에 이른 자[預果流者]’라고 말하지 않는다.49) 그리고 이러한 행자가 만약 [예류]과를 획득하지 못하였다면, 그 중간에 목숨을 마치지 않는다.
즉 [계경에서] 이미 ‘[예류]과(果)’라는 말로써 [과위에 포섭되는 성도의 흐름을] 아직 획득하지 못한 계위임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이러한 두 행자는 [성도의] 흐름에 전혀 이르지 못한 이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수신행과 수법행자가 어떠한 성도의 흐름도 획득하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경에서는 마땅히 “아직 예류위(預流位)를 획득하지 못하였기에 중간에 목숨을 마치지 않는다”50)고 설하였어야 하는 것으로, 어찌 번거롭게 ‘과(果)’라는 말로써 획득하지 못한 바를 나타내었을 것인가?51)
또한 만약 수신행과 수법행자가 아직 성도를 획득하지 못하였다면, 마땅히 처음으로 견도위에 머물게 될 때를 예류[과]라고 이름해야 한다.52) 그러나 이치상 그 때는 이러한 [‘예류과’라는] 명칭으로 말할 수 없으니, [처음으로] 견도에 머무는 자의 ‘견(見)’은 청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견’이 청정하여야 비로소 예류[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경에서도 말하기를, “예류[과]의 ‘견’은 이미 청정하다. ‘견’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 성도를 닦는 것이니, 성도를 떠나 능히 ‘견’을 청정하게 하는 그 밖의 별도의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만약 수신행과 수법행자가 성도를 획득하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견도의 ‘견’이 청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예류[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상좌) 역시 “수신행과 수법행은 능히 ‘견’이 청정하게 된 이들이다”고 설하였으면서도 다시금 “그들은 아직 성도를 획득하지 못한 이들이다”고 주장하니, 결코 좋은 주장[善執]이 될 수 없다.
즉 그는, “부처님께서 설하기를 ‘만약 이러한 법(5취온)에 대해 하열(下劣)한 혜(慧)로써 심찰(審察)하여 인가(忍可)한 이라면 수신행이라 이름하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하였다. 따라서 인(忍)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견’이 청정하게 되는 것이지 성도에 의해 [청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지만, 이는 지교(至敎)에도 없는 [말일] 뿐더러 정리(正理)도 없는 [말이다].
성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忍)을 증득함으로써 [‘견’이 청정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다만 자신의 거짓된 정의[妄情]에 따른 것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말에 대해 수고스럽게 널리 부정할 것도 없으니, 경에서는 오로지 “성도가 능히 ‘견’을 청정하게 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2-2) 8심 현관설 비판
또한 그는 제시하기를, “현관에는 여덟 찰나의 마음[八心]만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럴 경우] 법지(法智)와 유지(類智)라는 두 찰나의 마음의 작용도 마땅히 차별이 없다고 해야 한다. 이를테면 법지품(法智品)에서 이미 능히 일체의 진리의 상[諦相]을 모두 관찰하였는데, 그 후 다시 유지품(類智品)의 도를 일으켜서 무엇할 것인가?
[이에 대해] 그는 이같이 말하였다.
“바야흐로 고법지는 내외(內外)를 반연하기 때문에 염주(念住)의 세력(勢力)에 의해 인기되어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가 생겨나 수축(隨逐)하면 그것(내외)에 대한 고제의 행상[苦相]을 알게 된다. 다음으로 고류지가 법지에 따라 생겨나면 제행에 대해 앞서 알게 된 행상과 유사한 고제의 행상을 [고법지에] 따라 능히 결정적으로 알게 된다. 그 밖의 법지와 유지의 경우도 이러한 예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지금 그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건대, 법지와 유지의 두 ‘지’의 세력이나 공용 상에 어떠한 차별도 없다. 이를테면 고법지로써 제행에 대해 이미 일체의 고제의 상을 능히 두루 알았는데, 제행 중에 다시 무엇이 별도로 존재하기에 다음으로 유지를 일으켜 [고법지에] 따라 결정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인가?
혹은 그는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고법지를 [획득할] 때 고제의 행상에 대해 무엇을 아직 알지 못하였기에 [고법지에] 따라 결정적으로 알기 위해 고류지가 생겨난다는 것인가? [이렇게 본다면] 그는 3계 [제]행의 고제의 행상을 인정하는 셈이다. 즉 별상과 총상의 사유(思惟, 즉 별상념주와 총상념주)로써 정성결정(正性決定)에 드는 일은 없지만, 그의 종(宗)에서는 “요컨대 총상으로써 3계의 고법(苦法)을 관찰하여 능히 현관에 들 수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법지는 이미 [3계 고법의] 총상을 안 것인데, 그 후 다시 유지가 생겨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또한 고법지는 염주에 따라 생겨난 것이며, 그것에 따라 3계의 고제의 행상을 두루 안 것을 유지라고 한다면, 법지라는 명칭을 상실해야 할 것이니, [법지를] 차별할만한 인연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치에 따라 그는 지극히 그릇된 법지와 유지의 차별상을 설정하여 종의로 삼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그가 제시하는 바는 모두 성교를 뛰어난 소의로 삼은 것이라면,53) 어떠한 지교(至敎)에 근거하여 결정코 “현관의 마음에는 오로지 여덟 가지만이 존재한다”고 알게 된 것인가? 만약 지교에서 설한 것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자신이 욕구하는 바에 따라 생각하여 추구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만약 자신의 생각과 부합하는] 약간의 성언(聖言)을 보고서 기뻐하고, 이에 따라 경솔하게 종취(宗趣)를 달리 설정한 것이라면, [다른 부파에 의해] 설정된 여러 가지 온갖 종도(宗途)도 모두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해야 하거늘, 어찌하여 오로지 여덟 [찰나의 현관]만을 주장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만약 [계경에서] “마땅히 일체의 법은 오로지 무아(無我)로 관찰해야 한다”고 설한 것을 보았다면, 마땅히 1심(心)의 현관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만약 다시 “온갖 의심의 그물[疑網]을 끊은 것은 고(苦)의 원인을 알았기 때문이다”고 설한 것을 보았다면, 마땅히 2심(心)의 현관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만약 “법은 원인으로부터 생겨나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한 것을 보았다면, 마땅히 3심(心)의 현관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만약 “참답게 고(苦)를 알아야 하고 내지는 도(道)를 알아야 한다”고 설한 것을 보았다면, 마땅히 4심(心)의 현관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만약 “참답게 집(集)ㆍ몰(沒)ㆍ애미(愛味)ㆍ과환(過患)ㆍ출리(出離)를 알아야 한다”고 설한 것을 보았다면, 마땅히 5심(心)의 현관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만약 “7처선(處善)을 닦아야 한다”고 설한 것을 보았다면, 마땅히 7심(心)의 현관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따위의 설은 그 수가 실로 많거늘, 어찌 [약간의 성]언에 따라 여러 가지 온갖 주장을 일으켜 성교를 어지럽히고 유정을 현혹(眩惑)시키려 드는 것인가? 따라서 유가사들이 참된 현량(現量)의 증지(證智)에 근거하여 설한 것으로서 대왕의 길처럼 전전(展轉)하며 전해 내려온 성제 현관의 이치가 비록 여러 부파에 의해 분석(分析)되어 이설을 성취하게 되었을지라도 마땅히 방편으로 거짓된 것을 가려내고 진실에 의지해야 하는 것으로,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종취를 설정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의 집이 이미 불타고 있는데, 여기다 다시 마른 풀을 가지고서 타오르는 불길을 북돋우는 것과 같다.
(2-3) 수신ㆍ수법행자의 출관설(出觀說) 비판
또한 그(상좌)는 “성인(聖忍)의 단계 중에서 [인위의] 연(緣)을 결여할 때 잠시 출[관](出觀)하여 다른 사업을 짓는 경우도 있다”고 설하였지만,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성인은] 모든 견도와 수도의 첫 [찰나] 마음의 가행으로서 일 [찰나]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러함을 알게 된 것인가?
[계경에서는] 더 이상 “또 다른 가행이 존재한다”고는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중간에 목숨을 마치는 일이 없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54) 만약 [다음과 같은 계경에 근거하여 수신행과 수법행은 출관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증인(證因)이 될 수 없다].55)
수신행과 수법행자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그들은 마땅히 그 밖의 다른 유학(有學)처럼 방일(不放)함이 없이 제근(諸根)을 수습해야 한다”고 설하였으니,56) 마땅히 출관하는 일이 있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필추들은 잘 들어라. 어떠한 색류(色類)에 대해 나는 ‘그들은 마땅히 방일하지 말아야 한다’고 설하는 것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다시 필추들이여, [그들은] 구해탈(俱解脫)도 아니며, 혜해탈(慧解脫)도 아니며, 신증(身證)도 아니며, 견지(見至)도 아니며, 신승해(信勝解)도 아니다.57) 마땅히 방일함이 없이 제근을 수습해야 하는 이는 예컨대 수신행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와 같은 색류에 대해 나는 ‘그들은 마땅히 방일하지 말아야 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를테면 저 구수(具壽)들은 마땅히 방일함이 없이 제근을 수습하여야 몸에 맞는 좋은 와구(臥具) 등에 대해서도 역시 염착(染著)하지 않게 되고, 선우(善友)와 가까이하여 그들을 섬기고 공양함으로써 누진(漏盡)을 획득하기 때문에 심해탈(心解脫)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마땅히 수법행자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설해보아야 한다.”
즉 두 행자(수신행과 수법행)는 완전히 출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니,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도리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 바타려(婆拕黎)에게 고하여 말한 것과 같다.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구해탈에 대해서는 관두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신승해에 대해서도 관두더라도 수법행이 나의 처소에 오면, 나는 그에게 [이같이] 고하리라. ‘잘 왔도다, 필추여. [그대는] 진흙 창에 처해 있으니, 내가 다리나 길이 될 수 있으리라. 나는 마땅히 그대를 지켜 이 같은 진흙 창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저 수법행은, 내가 장차 [그를] 지켜내려고 하는데 나를 버리고서 일어설 수 있을 것인가, 일어설 수 없을 것인가? 바로 그를 지킬 때 [내가] 동전(動轉)하겠는가, 하지 않겠는가? 그 후(그를 진흙 창에서 지켜낸 후) 피곤하다고 말하겠는가, 말하지 않겠는가?
바타려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58) 세존이시여.
수신행자에 대해 설하는 것도 역시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이로 볼 때] 두 행자는 올바로 선정 중에 머물지 않으니, 세존께서 타일러 경계하기도 하고, 아울러 신업을 일으키고 말[語言]을 발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천신(天神)이 옥게라(沃揭羅)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장자는 마땅히 알라. 이 분은 구해탈이고, 이 분은 혜해탈이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이 분은 수법행이고, 이 분은 수신행이며, 이 분은 아라한과이고, 이 분은 아라한향이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이 분은 예류과이고, 이 분은 예류향이니,59) 그대는 마땅히 공양하며 스스로 깊이 기뻐하며 행운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만약 어떤 한 예류향에게 공양하면……(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라고 하였다.60)
이상과 같은 경증에 따라 수신행과 수법행자는 [인위의] 연(緣)을 결여할 때 잠시 출[관]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인용한 [계경으로써는 수신행과 수법행자가 출관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으니, 그것(수신행과 수법행)을 [획득하기] 전의 상태를 [획득한] 후의 명칭으로 설정한 것이기 때문으로,61) 다른 경에서 “무명에 덮이고 애(愛)에 계박되어 어리석은 이도 지혜로운 자도 다 같이 이러한 몸을 초래한다”고 설한 것과 같다. 즉 지혜로운 자가 무명에 덮여 이러한 몸을 초래하게 된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그는] 먼저 몸을 초래한 후 지혜로운 자가 된 것으로, 이전에는 지혜로운 자가 아니었지만 뒤에 [획득한 지혜에 근거하여] ‘지혜로운 자’라는 명칭을 설정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 밖의 계경에서 “중반열반(中般涅槃) 따위도 역시 [그것을 획득하기] 전의 상태에 대해 뒤의 명칭을 설정한 것이니, 중유(中有) 등으로 존재할 때 아라한과를 획득하고서 마침내 최후에 이르러 바야흐로 반열반에 들기 때문이다”고 설한 바와 같다.62)
또한 그 밖의 계경에서 “욕(欲)아라한은 이곳(욕계)에서 통달(通達)한다”고 설한 바와 같으니,63) 아라한 등에 ‘통달’의 뜻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이전에 상태[先時]에 [근거하여] 설한 것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신행과 수법행자는 마땅히 방일함이 없이 제근을 수습해야 한다”거나 “진흙 창에 처해있다”고 설한 것은 모두 [그러한 계위를 획득하기] 전의 상태를 [획득한] 후의 상태의 명칭으로 설정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즉 당래 반드시 수신행 등을 성취하게 될 것이므로, 아직 그러한 상태를 성취하지 않은 이에 대해 미리 그러한 명칭으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경에서 [설한 수신행과 수법행에] 이러한 뜻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인가?
앞서 [그대가 인용한] 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으로, 이를테면 “저 구수들은 누진(漏盡)을 획득하기 때문에 심해탈(心解脫)을 성취하게 된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즉 수신행자와 수법행자에 대해 누진을 획득하여 심해탈을 성취한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뒤의 상태(누진과 심해탈)를 앞의 상태의 명칭으로 설정하였으니, 누진 즉 번뇌가 다할 때를 일찍이 수신행과 수법행자였던 앞의 상태로 돌이켜 설[追說]하게 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좌가 인용한 계경에서는 수신행과 수법행을 획득하기] 전의 상태에 [근거하여] “마땅히 방일함이 없이 제근을 수습해야 한다”거나 “진흙 창에 처해있다”고 설한 것이니, 그 후 당래 반드시 수신행과 수법행을 성취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 밖의 다른 경에서 [전후의 상태를] 서로 바꾸어 설[互說]한 것처럼 [수신행과 수법행을 획득하기] 전의 상태를 [획득한] 후의 상태의 명칭으로 설정하였으므로 여기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앞에서 설한 “[성인(聖忍)은] 모든 견도와 수도의 첫 [찰나의] 마음의 가행으로서 일 [찰나]이기 때문에 수신행과 수법행은 출관하는 일이 없다”는 이치는 능히 잘 이루어질 수 있으며, 따라서 그가 말한 “성인의 단계 중에서 [인위의] 연(緣)을 결여할 때 잠시 출[관]하여 다른 사업을 짓는 경우도 있다”는 주장은 다만 자신의 정의(情意)에 따른 것일 뿐이다.
(2-4) ‘고법지에 의해 3결의 수계가 끊어진다’는 주장 비판
또한 그는 “[성인(聖忍) 다음에] 일어나는 고법지(苦法智)의 세력이 능히 3결(結)의 수계(隨界)를 단박에 끊는데,64) 이때를 일컬어 예류[과]의 첫 찰나의 마음[初心]라고 한다”고 말하였지만, 이 역시 그렇지 않으니,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고법지가 단박에 3결의 구 수계를 끊는다’고 함은 생겨날 때 끊는다는 것인가, 소멸할 때 끊는다는 것인가?
만약 생겨날 때 끊는다고 한다면, 최후의 유학의 마음은 마땅히 무학이 되어야 할 것이니, 그것이 생겨나면 더 이상 번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소멸할 때 끊는다고 한다면, 고법지에 머물지라도 예류[과]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 때에도 3결의 수계가 전전(展轉)하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는 “3결이 끊어져야 비로소 예류[과]라고 이름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차라리 “고법지인(苦法智忍)이 3결의 수계를 끊고 고법지(苦法智)가 일어나면 예류[과]의 첫 찰나의 마음을 성취한다”고 설하여야 하는 것으로, 필시 마땅히 고법지가 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설한 성정(聖定)의 인위(忍位, 즉 수신행과 수법행)는 아직 결정적인 단계[決定, 즉 決定慧의 正性決定]가 아니다. 따라서 번뇌를 끊지 못하는 [고법]지라면, 역시 마땅히 아직 결정적인 단계를 증득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해야 하니, 고법지가 현전할 때라도 아직 의(疑)의 구(舊) 수계를 끊지 못하였기 때문이다.65) 만약 [고법지는] ‘의’의 수계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성인(聖忍)을 어떠한 이유에서 결정적인 단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인가?
또한 점현관(漸現觀, 즉 次第現觀)이 바로 상좌(上座)의 종의이다. [따라서] 고법지가 [현전할] 때 그 밖의 ‘의’(이를테면 집법지 등에 의해 끊어지는 ‘의’)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면, 마땅히 성인(聖忍)과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단계를 증득하지 못하였다고 해야 하며, [그럴 경우] 역시 마땅히 온갖 번뇌를 능히 끊지 못하였다고 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의 종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첫 번째 고지(즉 고법지)가 [현전할] 때 그것의 세력은 능히 3결의 수계를 단박에 끊으니, 그것(3결의 수계)과 성도는 극히 상위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최하품의 성도가 생겨날 때, 그 세력은 이미 상속(相續)을 능히 씻었으며, 그러한 3결의 수계로 하여금 단박에 끊어지게 하였다. 즉 상속 중에 무상ㆍ고ㆍ공ㆍ무아를 반연하는 견(見)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때에만 살가야견(薩迦耶見)과 계금취(戒禁取)와 의(疑)가 상속 전전할 수 있기 때문에, 고법지가 현전할 때 단박에 [그러한] 3결을 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 다음다음 단계에서 그 밖의 성제(聖諦)를 관찰하는 공능은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고 말 것이다.66)
그런데 그는 도리어 힐난[反詰]하여 말하였다. “어째서 이에 편승하여 ‘이러한 단계(고법지)에서 마땅히 아라한과를 획득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고 힐난하지 않는 것인가? 어찌 아직 끊지 못한 그 밖의 나머지 결(結)을 끊는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는 전혀 이치가 결여된 말이니, 집제 등에 미혹한 ‘의(疑)’를 고지(苦智)로써 능히 멸한다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집제 등에 미혹한 자는 고제를 관찰하는 것에 의해 그것에서 능히 해[탈]할 수 없으니, 고제의 행상[苦相]을 관찰할 때에는 아직 그것(집제)의 행상을 관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아직 그것에서 해탈하지 못하였을 뿐더러 그것에 미혹한 ‘의’를 소멸한 것도 아니니, 고지는 집제 등에 대한 ‘의’(의심)와 상위(相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집제 등에 미혹한 ‘의’도 고지로써 능히 끊을 수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고지 역시 [견고소단 이외의] 다른 견소단의 결(結)과도 상위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차별할만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67) [이는 바로] 비상(非常, 무상) 등의 견(見, 즉 苦智)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때에는 상속 중에 온갖 견소단이 모두 전전한다는 뜻이기 때문에,68) 고지가 생겨나면 마땅히 [견소단은] 모두 다 단박에 끊어진다고 해야 하거늘 어찌 오로지 3결만이 끊어진다는 것인가?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그의 말은 이치에 맞는 논거[應理因]가 아닌 것이다.
도리어 힐난[反詰]한 그의 말도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아직 아라한과를 획득하는 [단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혹 그때 견도소단으로서 존재하는 모든 결(結)이 다 단진(斷盡)된다고 하더라도 역시 또한 아직은 아라한과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으로, 일체의 진리[諦, 즉 4제]를 모두 능히 관찰한 자라도 수소단의 결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는] 마땅히 고법지로는 3결의 수계를 능히 단박에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혹 [고법지로써 3결의 수계를 단박에 끊을 수 있다고 한다면] 다시금 마땅히 고법지가 [현전할] 때 일체의 견소단의 결(結)을 단박에 끊을 수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와 같다고 한다면, 그 다음다음 단계에서 그 밖의 성제(聖諦)를 관찰하는 공능은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고 말 것이며, 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점현관(漸現觀)을 인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상좌(上座)가 설정한 종의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류[과]는 어떠한 진리[諦]도 관찰하지 못한 듯하니, 저 상좌는 스스로 이같이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최하품의 성도가 생겨날 때, 그 세력은 이미 상속(相續)을 능히 씻었으며, 그러한 3결의 수계로 하여금 단박에 끊어지게 하였다.”
성도가 생겨나는 상태[生位, 즉 生相位]는 필시 미래이다. 그렇지만 그가 종의로 삼는 바는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성도가 아직 존재하지 않음에도 “능히 상속을 씻고, 그러한 3결의 수계로 하여금 단박에 끊어지게 하였다”면, 어찌 그가 “아직 진리를 관찰하지 않은 단계[未見諦位]에서도 3결의 수계가 소의신 중에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럴 경우 진리를 전혀 관찰하지 않더라도 예류과를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의 뜻이 “성도가 생겨날 때에는 상속 중에 여전히 수계(隨界)가 존재한다”는 것이라면, 어떻게 “성도가 생겨날 때, 그 세력은 이미 상속을 능히 씻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3결의 수계가 여전히 그의 소의신 중에 존재함에도 ‘이미 상속을 능히 씻었다’고 말하였으니, 이와 같은 의취(意趣)는 참으로 알기 어렵다.69)
만약 다시 [그의] 뜻이 “성도가 지금 바로 생겨나면[正生] 3결의 수계는 그때 바로 멸[正滅]한다”는 것이라면, 역시 마땅히 “성도가 생겨날 때, 그 세력은 이미 상속을 능히 씻었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대저 ‘지금 바로 멸한다’고 함은 필시 현재를 말한 것으로서, [상좌가 말한] ‘성도가 생겨날 때’에는 수계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설령 “수계가 멸할 때 능히 후 [찰나]의 수계를 견인하는 원인이 되지 않으니, 바로 이러한 뜻에 근거하여 ‘이미 [상속을] 씻었다’고 말한 것이다”고 하더라도 역시 ‘이미 [상속을] 씻었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다만 “지금 바로[正] [상속을] 씻는다”고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앞에서 설한 “그럴 경우 진리를 전혀 관찰하지 않더라도 예류과를 성취해야 한다”는 허물은 끝내 면하기 어려우니, 그러한 [예류과는] 한 가지 진리(즉 고제)에 대해서도 견(見)이 원만하지 않기 때문이다.70) 한 가지ㆍ두 가지ㆍ세 가지 진리에 대한 ‘견’이 아직 원만하지 않을 때라면, 여전히 진리를 관찰[見諦]하지 못한 ‘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4]제를 모두 관찰하였을 때 비로소 예류과라고 말할 수 있으니, 경에서 “예류과는 진리를 관찰한 것이 원만하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하물며 한 가지 진리(고제)에 대해서도 아직 ‘견’이 원만하지 않거늘, [어찌] 예류과를 획득한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성도가 [지금 바로 존재하는] 현재(現在)를 ‘생겨나는 [상태]’라고 말하였으며, 그때 이미 상속을 능히 씻었다”고 한다면, 그럴 경우 구(舊) 수계는 바로 인(忍)에 의해 끊어졌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그때 지(智, 고법지)가 일어나더라도 그 같은 [구 수계] 자체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신의 종의에 [앞뒤가] 서로 모순되는 허물이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인(忍)은 성도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미] 인정하였거늘, 어떻게 능히 3결의 수계를 끊을 수 있을 것인가? 또한 현재세(現在世)를 일컬어 ‘이미 생겨난 상태[已生]’라고 하였으면서 ‘생겨날 때(즉 生相位)’를 [현재라고] 하는 것은 정리(正理)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좌(上座)가 설정한 종의는 이치상 마땅히 점현관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혹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점현관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정코 마땅히 도제(道諦)를 관찰할 때 비로소 능히 3결을 남김없이 영원히 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바로 우리의 대법종(對法宗)에 부합하고 수순하는 것으로, [상좌] 스스로 “[유부와는] 종취를 달리 설정하였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비달마순정리론 제63권
6. 변현성품 ⑦
(3) 돈현관론(頓現觀論) 비판
(3-1) 총설: 세 종류의 현관과 돈현관론
이와 같이 “오로지 여덟 찰나의 마음[八心]을 성제현관이라 주장한다”는 상좌(上座)의 종의에 대해 이미 논파하였다.
그런데 다른 부파에서는 이에 대해 이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모든 성제(聖諦)를 오로지 단박[頓]에 현관한다.”1)
그들의 말은 전체적인 [현관의] 이치[總理]에서 볼 때 혹 어긋남이 없을 수도 있으니, 성제의 현관에는 모두 세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2)
그러한 세 종류는 무엇인가?
이를테면 견현관(見現觀)과 연현관(緣現觀)과 사현관(事現觀)이 바로 그것이다. 즉 오로지 무루의 혜로써 온갖 진리[諦]의 경계에 대해 참답게 깨달아 아는 것[覺了]을 ‘견현관’이라고 이름하니, 이는 바로 ‘견’이 분명하게 현전함으로 말미암아 참답게 4제의 경계를 관찰한다는 뜻이다. 또한 이러한 무루의 혜와 아울러 그 밖의 다른 상응법이 [온갖 진리의 경계를] 동일한 소연으로 삼는 것을 ‘연현관’이라고 이름하니, 이는 바로 ‘견’ 등의 심ㆍ심소법이 다 같이 소연으로서 4제의 경계를 능히 취한다는 뜻이다.3)
그리고 온갖 능연(能緣, 무루혜와 그 상응법)과 아울러 그 밖의 구유(俱有)하는 법이 동일한 사업(事業)을 행하는 것을 ‘사현관’이라고 이름하니, 이는 바로 ‘견’ 등의 심ㆍ심소법과 아울러 그 밖의 이와 구유하는 계(戒)나 생상(生相) 등이 온갖 진리의 경계에 대해 동일하게 작용한다는 뜻이다.4) 즉 계와 생상 등도 바로 현관의 원인으로, 현관하는 중에 그것들도 작용[事用]을 갖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서도 역시 ‘현관’이라는 명칭을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불상응법은 오로지 한가지로만 현관하고, ‘혜’를 제외한 그 밖의 심ㆍ심소법은 두 가지로 현관하지만, 오로지 무루혜만은 세 가지 현관을 모두 갖추고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런데 [성제현관에 대해] 돈현관(頓現觀) 즉 ‘단박에 현관한다’고 말하는 모든 설은, 이를테면 하나의 진리[諦]에 대한 현관을 획득할 때 그 밖의 다른 진리에 대해서도 역시 현관을 획득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앞서 ‘단박에 현관한다’고 설한 종(宗)에서는5) [세 종류의 현관 중] 어떠한 현관에 근거하여 설한 것인지 따져 보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사현관에 근거하여 말하였다면, 마땅히 칭찬하여 선설(善說)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고제에 대한 현관을 획득할 때 고제에 대해서는 세 가지 현관이 모두 [일어나지만], 그 밖의 [3]제에 대해서는 오로지 사현관만이 [일어날] 뿐이기 때문이다. 즉 처음으로 고성제를 관찰[觀見]할 때, [견고소단의] 번뇌를 다하였기 때문에 ‘집을 끊었다[斷集]’고 말할 수 있으며, 택멸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멸을 증득하였다[證滅]’고 말할 수 있으며, 대치도를 일으켰기 때문에 ‘도를 닦았다[修道]’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이처럼] 고제를 관찰하는 단계[見苦位]에서도 집(集) 등의 세 가지를 끊고 증득하고 닦는 사현관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현관에 근거하여 ‘단박에 현관한다’고 말하여도 과실이 없는 것이다.6)
그러나 만약 견현관에 근거하여 말하였다면, 마땅히 폐(廢)하여 [선설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이러한 [4성제의] 현관은 필시 점진적인 것으로, 온갖 진리의 상(즉 4제 16행상)에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며, 이치상 일 [찰나]에 다수의 [진리의] 행상을 관찰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며, 세존께서도 “그것의 자상(自相)에 따라 각각의 진리[諦]를 각기 별도로 관찰해야 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정견(正見)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성[도]로서 출세(出世)의 무루(無漏)ㆍ무취(無取)의 [법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모든 성(聖) 제자들은 고(苦)의 행상으로써 고제를 사유(思惟)하고, 집(集)의 행상으로써 집제를 사유하며, 멸(滅)의 행상으로써 멸제를 사유하고, 도(道)의 행상으로써 도제를 사유해야 한다.”
[여기서 ‘사유’란] 무루의 작의와 상응하는 택법(즉 무루慧)을 말하는 것으로, 이치상 일 [찰나]에 하나 이상의 [진리의] 행상을 관찰하는 일은 없다.7) 따라서 행상을 달리하는 진리[別相諦]는 반드시 그 자상에 따라 [순차적으로 관찰해야 하는 것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동시에 관찰할 도리는 없다. 이에 따라 결정코 마땅히 점현관(漸現觀)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무아’의 한 행상으로써 4제를 단박에 관찰해야 한다”고 말한다면,8) 이치상 필시 그렇지 않으니, 이를 무루혜라고 말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무루혜가 온갖 진리[諦]에 대해 각각 별도로 관찰하는 것을 바야흐로 ‘견제(見諦)’라고 이름하는 것으로,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앞서 인용한 계경에서는] 마땅히 “비아(非我, 즉 무아)의 행상으로써 고제 등을 사유해야 한다”고 설하였어야 하며, 마땅히 “고(苦) 등의 행상으로써 고제 등을 사유해야 한다”고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9)
또한 [그럴 경우] 그는 마땅히 ‘비아의 현관’으로써도 3제(고제를 제외한 집ㆍ멸ㆍ도제)에 미혹한 어떠한 번뇌[惑]도 능히 대치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렇지만 집제 등을 비방하는 번뇌는 비아의 현관으로 능히 대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두 행상(무아와 견집소단)은 어떤 경우에도 상위(相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무아에 의한 4제의 돈현관을] 진실의 현관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진리에 미혹한 번뇌[迷諦惑, 즉 迷理惑]에 별도의 네 가지 갈래가 있듯이, 현관에도 역시 그것과 마찬가지로 차별이 있다고 해야 한다. 오로지 고제의 경계[苦境]에 미혹하여 아집(자아에 대한 집착)이 생겨난 경우에만, 오로지 이 같은 [아집의] 생이 비아의 행상임을 깨달음으로써 능히 대치할 수 있는 것으로, 단박에 [4제의 경계를] 모두 반연[總緣]하는 [비아의 행상을 깨달아 일체의 견혹(見惑)을 능히 대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단박에 제법(諸法, 즉 4제)을 모두 반연하여 비아(非我)라고 한다면, 어떻게 [4]제에 대해 각기 개별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인가? 애(愛)는 진실로 유(有)의 원인이고, 멸(滅)은 진실로 적정(寂靜)한 것이며, 도(道)는 진실로 [세간에서] 벗어나는 길[出離]이니, 만약 이와 같은 등등의 행상을 알지 못하였다면 이를 어찌 견제(見諦)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멸제와 도제를 예컨대 고제의 행상(무상ㆍ고ㆍ공ㆍ무아)으로 관찰하였다면, 이는 마땅히 참다운 ‘지’ 즉 여실지(如實智)가 아니라 사지(邪智)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만 고제를 반연하여 비아라고 하는 경우에만 현관이라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일체[법]을 [단박에] 반연하여 [비아라고 하는] 것은 [현관이] 아니다.10)
또한 만약 고제를 관찰할 때, 도제 등에 미혹한 번뇌 따위도 끊는다고 한다면, 수소단의 번뇌는 어찌 능히 끊지 못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수소단의 번뇌도 능히 끊는다고 한다면), 고제에 대한 현관을 획득할 때 ‘해야 할 일체의 모든 일을 이미 마쳤다[所作已辦]’고 해야 한다.11) 그러나 이는 이미 인정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이치상 옳지 않은 것이다.
만약 “능히 대치하는 도를 자주 닦아야 비로소 수소단의 번뇌를 점진적으로 끊을 수 있다”고 한다면, 대치도는 ‘단박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주 닦아야 하는 것[數修]’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역시 마땅히 “요컨대 도제 등을 요해(了解)하는 견(見)에 의해 비로소 능히 도제 등에 미혹한 번뇌를 영원히 끊을 수 있다”고 해야 한다. 고제를 요해할 때 도제 등을 요해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거늘, 어찌 [그것으로] 능히 도제 등에 미혹한 번뇌를 끊을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부처님께서 “4제의 모든 행상[總相]을 단박에 관찰하여서는 진실의 현관을 성취할 수 없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은] 힐난을 시설하였다.
“[4]제는 마땅히 [5]온과 마찬가지로 일시에 모두 관찰[總觀]하여야 진실의 현관을 성취할 수 있는 것으로,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법상(法相)은 무변(無邊)이어서 현관은 마땅히 구경(究竟)에 이르는 때가 없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힐난의] 공력은 부질없는 것이니, 『선수경(善授經)』에서 “부처님께서 장자(長者)에게 고하기를, ‘4성제는 단박에 현관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점진적으로 현관해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성제에 대해 아직 현관하지 못하였으면서 능히 집성제를 현관하는 경우는 없으며, 할 수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아가 멸성제에 대해 아직 현관하지 못하였으면서 능히 도성제를 현관하는 경우는 없으며, 할 수도 없다”고 설한 바와 같다.12)
이와 마찬가지로 경희(慶喜)와 어떤 필추에 대해 설한 두 경의 뜻도 다 이와 동일한데, 두 경 각각에서는 [여기서와는] 다른 비유가 [설해지고] 있을 뿐이다.13)
만약 “우리들은 이러한 경들을 외우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치상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점현관(漸現觀)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앞서 인용한 경처럼 돈현관(頓現觀)을 [분명하게 나타내어 설하고 있는] 경을 찾아볼 수 없기[不可得] 때문이다. 만약 그대들이 이러한 경들을 외우지 않는다면, 더 이상 점진적으로가 아니라 반드시 단박에 현관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내어 설하고 있는 별도의 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바로 그대들이 외워 지식의 결정적 근거[定量]로 삼을만한 것이기에 이러한 경들을 비난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어찌 분명하게 현관을 설한 [성]교가 없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그대들은 마땅히 이러한 경들을 외워야 한다. 이러한 경들은 그 밖의 여러 성교와 법성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비난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그대들도] 함께 외우는 『전법륜경(轉法輪經)』에서도 현관하는 중에 4제를 별도로 관찰한다고 설하고 있으니, 예컨대 그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것은 고성제로서,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법이니, 마땅히 참답게 사유해야 할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것은 도성제로서,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법이니, 마땅히 참답게 사유해야 할 것이다.”14)
그리고 [이를] 처음으로 업을 닦는 단계[初習業地, 즉 초입자의 단계]라고는 생각[判]할 수 없으니, 이와 무간에 등각(等覺)을 증득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며,15) 더 이상 별도의 현관위에 대해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를 처음으로 업을 닦는 단계라고 생각한다면, 어디서 ‘진실의 현관에 드는 때’에 대해 설하였는지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다.16) 이미 더 이상 [별도의 현관에 대한] 문구가 없으니, 이것(『전법륜경』에서 설한 현관)이 바로 [진실의] 현관이다.
따라서 점현관은 성교에도, 정리에도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3-2) 돈현관론의 교증과 이증
또한 마땅히 저들 돈현관의 종의에 대해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니, 돈현관은 어떠한 성교와 정리에 근거하여 주장하게 된 것인가?
먼저 그것의 교증(敎證)은 무엇인가?
예컨대 계경에서 “모든 성(聖) 제자들은 [성]제 현관에 들었기 때문에 구시(俱時)에 3결을 끊었다”고 설하였으니, 여기서 ‘점차(漸次)’라는 말을 설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4제를 관찰하는 것은 혜근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즉 여기서는 이미 총체적으로 ‘4제를 관찰한다’는 말을 설하였으니, [이것으로써] 단박에 현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비상(非常)의 상(想)을 닦아 온갖 욕탐 [등의 결(結)]을 끊는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는데, 점현관의 경우 오로지 ‘비상의 상’만으로써 능히 일체의 욕탐 등의 결을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계경에서는 “만약 일체의 의(疑)를 끊었다면, [그것은] ‘살(薩) 인고(因苦)’를 알았기 때문이다”고 설하였는데, 여기서 ‘살’은 ‘아울러[幷]’의 뜻이다. 즉 이 경의 뜻은 말하자면 “유취(有取)의 고(苦)를 두루 알았고, 아울러 고집(苦集)을 두루 알았다”는 것으로, 돈현관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는 “만약 고제에 대해 의심[疑]이 없다면, 집ㆍ멸ㆍ도제에 대해서도 역시 의심이 없을 수 있다”고 설하였다. 이미 [4제에 대한] 의심을 단박에 버린다고 하였으니, 점현관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말하자면 [우리가 세우는] 교증이다.
그것의 이증(理證)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고제를 관찰할 때 [견고]소단의 집(集)을 끊었다면, [그것은 집제를] 관찰하였기 때문에 끊어졌다고 해야 할 것인가, 관찰하지 않았음에도 [끊어졌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집제를] 관찰하여 [끊어졌다면], 어떻게 고제와 집제가 동시에 현관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관찰하지 않았음에도 [끊어졌다면], “고제를 관찰할 때 마땅히 ‘집’을 끊었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경에서 “성혜로써 관찰할 때 끊어진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다섯 종류의 색깔로 이루어진 옷을 단박(동시)에 취하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다섯 색깔의 옷’을 단박에 보는 자는 옷에 나타난 다섯 종류의 현색을 모두 [단박에] 취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한 종류의 행상으로써도 고제 등의 개별적인 진리를 모두 단박에 관찰한다는 이치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해[日]와 배와 등불의 체성이 비록 단일할지라도 능히 여러 공능을 단박에 일으키듯이, 성혜(聖慧)도 역시 그러하여 그 체성은 비록 단일하지만 네 가지 사업(事業, 즉 견고소단 내지 견도소단의 번뇌를 끊는 것)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다. 즉 해가 뜰 때에도 동일한 찰나에 추위[冷]를 물리치고 어두움을 몰아내며, 따뜻함을 낳고 빛을 발한다. 배도 동일한 찰나에 이곳을 떠나고 저곳으로 나아가며, 무거운 짐을 싣고 물결을 가른다. 등불 역시 [빛을] 발하는 때와 동일한 시간에 어두움을 깨트리며, 기름을 소진시키며, 심지를 태우는 것이다.
또한 견고소단의 번뇌를 끊을 때, 만약 바로 초과(初果, 예류과)를 획득한다면 마땅히 단박에 4제를 [현]관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초]과를 획득하지 못한다면, 일체의 견소단의 번뇌를 끊을 때에도 역시 획득하지 못한다고 해야 하니, [양자를] 차별할만한 인연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4]제를 점진적으로 현관한다고 주장하는 자도 필시 결정코 고제 등에 대해 일시에 알고[知] 끊고[斷] 작증[證]하고 닦는 것[修]을 일시에 단박에 갖추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며, 역시 또한 필시 마땅히 단박에 모두 통달(通達)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니, [계경에서] “고제에 대해 통달 변지(遍知)해야 하며, 나아가 도제에 대해 통달 수습(修習)해야 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 따라서 견현관(見現觀)에 근거하더라도 돈현관의 이치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3-3) 돈현관론의 교증 비판
이상과 같은 말은 모두 증인(證因)이 될 수 없다.
먼저 그는 성교에서 설한 ‘구시(俱時)’라는 말을 인용하였지만, 이는 증인이 될 수 없으니, 다른 뜻을 갖기 때문이다. 즉 무간(無間)에 대해서도 ‘구(俱)’라는 말을 설하는 경우를 볼 수 있으니, 이를테면 “만타다(曼馱多)가 구시에 추락하였다”고 하는 것과 같다.17) 즉 이는 [성제현관이] 일 찰나의 마음이기 [때문에 “구시에 3결을 끊었다”고] 설한 것이 아니라 다만 현관에 [들었기] 때문에 “구시에 3결을 끊었다”고 설한 것일 뿐이다. 이를테면 4제를 점진적으로 현관하였기 때문에 그때 바로 능히 3결을 영원히 끊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교증에] 따라 돈현관은 이루어질 수 없다.
혹은 ‘구시’라는 말은 구유(俱有)의 뜻을 나타내니, 이는 마치 세간에서 “한 마리의 어미 나귀와 그의 열 마리의 새끼가 구시(俱時)에 존재하여 짐을 실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 이(인용한 계경)는 바로 3결을 영원히 끊는 것과 성제의 현관이 구시에 존재한다[俱時有]는 뜻을 나타낸 것으로, 오로지 고제에 대해서만 현관을 획득하였을 경우에는 능히 일시(一時)에 3결을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것이다.
세간에서도 역시 ‘구시’라는 말을 설하였다고 하여 오로지 ‘일 찰나(즉 동시)’의 뜻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 경우를 볼 수 있으니, 예컨대 “발을 움직이는 것과 구시에 재물을 획득한다”18)고 말하거나 또는 “성(城)에 들어가는 것과 구시에 부귀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19)(이상 첫 번째 교증 비판)
[그는] ‘혜근(慧根)’을 인용하여 교증으로 삼았지만, 이 역시 이루어질 수 없으니, 신근(信根)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혜근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4증정(證淨)에 있어서 신근은, 부처를 반연하는 신근이 바로 승가 등을 반연하는 신근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라고 설한 바와 같으며, 또한 계경에서 “4념주(念住)에 있어서 염근(念根)은, 신(身)을 반연하는 염근이 바로 수(受) 등을 반연하는 염근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라고 설한 바와 같다.
혜근도 역시 그러하여 고제를 반연하는 혜근이 바로 집제 등을 반연하는 [혜근은] 아니다.20) 즉 이 말의 뜻은 각각의 제(諦)에 대해 하나의 혜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것으로는 능히 돈현관을 입증할 수 없는 것이다.(이상 두 번째 교증 비판)
‘비상(非常)의 상(想)’이라는 교증 역시 이루어질 수 없으니, 이치상 이것으로는 다른 제(諦)를 능히 현관할 수 없기 때문이며,21) 비상의 상은 오로지 고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을 뿐 4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고제를 관찰하여 비상의 상을 닦는 그 때를 ‘4제를 관찰하는 때’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고제가 바로 4제이며, 4제가 바로 고제라고 해야 할 것이며, 그와 같다고 한다면 참으로 애호할 수 없는 허물을 성취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제(諦, 즉 고제)를 반연하여 비상의 상을 닦을지라도 결정코 4제를 현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경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건대, [경에서는] “유학의 [성]자는 비상(非常)의 상(想)을 닦아 온갖 욕탐을 끊으며, 아울러 능히 순상분결(順上分結)을 제거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는 말하자면 수도위에서 고제를 반연하는 도를 일으켜 수소단으로서 3계계(界繫)인 탐(貪)ㆍ도거ㆍ만(慢)ㆍ무명을 끊는다는 사실을 설한 것으로, 견도에 대해 설한 것이 아닌데,22) 어떻게 이를 인용하여 돈현관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이상 세 번째 교증 비판)
‘살(薩) 인고(因苦)’라는 교증도 역시 이루어질 수 없으니, 지금 바로 보건대 차제(次第) 중에서도 역시 ‘살’을 말하기 때문으로, ‘살자제바달다(薩子提婆達多)’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23)
그렇지만 여기(앞서 돈현관론자가 인용한 계경)서의 ‘살’이라는 말은 역시 또한 ‘존재[有]’의 뜻을 나타낸다. 즉 여기서는 바로 “‘원인을 갖는 고[有因苦]’를 알았기 [때문이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고(苦)를 아는 단계[知苦位]에서 바로 고의 원인[苦因]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24) 혹은 또한 [고제와 집제(苦因)는] 서로 상위할 뿐더러 행상도 다르기 때문에, 고제의 행상으로써 바로 집제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혹은 또한 서로 상위하기 때문에 원인을 갖는 고성제를 아는 단계에서 바로 집제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薩 因苦’ 즉 ‘원인을 갖는 고제’)의 뜻은 ‘고’로서 원인을 갖지 않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니, 이치상 필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경에서는 “[만약 일체의 의(疑)를 끊었다면, 그것은] 원인을 갖는 ‘고’를 알았기 [때문이다]”고 설하였던 것이니, 일찍이 세존께서는 다른 어떤 경에서도 [이러한 ‘살(薩) 인고(因苦)를 알았다’는 말에 대해] “집제를 알았다”는 말로 설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이 경 중에서는 “[아울러] 원인(즉 集)을 알았기 [때문이다]”고 설한 것이 아니라 다만 “[원인을 갖는] 고(苦)를 알았기 [때문이다]”고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만약 “아울러[幷] 인고(因苦)를 알았기 [때문이다]”고 설한 것을 보고서 바로 “고제와 집제는 일시에 현관한다”고 말한 것이라면, 여기(앞서 돈현관론자가 인용한 계경)서는 “아울러 멸제와 도제를 알았기 [때문이다]”는 말은 설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현관은 단박에 성취되지 않는다는 이치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치상 [일체의] 의(疑)를 단박에 끊을 수는 없기 때문에 [‘살(薩) 인고(因苦)’를 설한 경은 돈현관의 교증이 될 수 없다]. 즉 “원인을 갖는 ‘고’를 관찰할 때라도 멸제와 도제에 미혹한 ‘의’도 역시 모두 다 단박에 끊어진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에서는 어째서 일체의 ‘의(疑)’를 끊었다고 설한 것인가?
지금 이 경에서 ‘일체’라고 말한 것은 오로지 “이러한 소단(所斷)의 온갖 의심을 관찰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낼 뿐이다.25) 이를테면 이 계경에서는 전제(前際)와 후제(後際)에 존재하는 연기에 대해 설한 것으로, 유정은 그것에 대한 인과에 어리석기 때문에 “나의 과거는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曾有]일까?”라고 하는 등의 다수의 의혹(疑惑)을 낳기에 이 계경에서는 이와 같이 “‘살(薩) 인고(因苦)’를 알아 일체의 의(疑)를 끊었다”고 설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이같이 ‘일체의 의(疑)를 끊었다’고 제멋대로 설[縱說]한 [경설에] 편승하여 “[일체의 ‘의’는] 오로지 단박에 끊어진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인가?26)
이에 따라 혹 [‘일체의 의’라는 말은] ‘인근(隣近)하는 것’이라는 뜻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만약 어느 때 ‘원인을 갖는 고제[有因苦]’를 알았다면, 이와 지극히 인근하는 [찰나에] 일체의 ‘의’를 끊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으로, 이는 바로 ‘일체의 의’가 당래 필시 끊어진다는 뜻이니, [계경에서] “그대들에게 만약 분발심(憤發心)이 없다면, 구경의 열반을 증득하게 될 것이다”고 말한 바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경은 첫 번째 현관(고법지인)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를 인용하여 “[현관은] 오로지 단박에 이루어지는 것[頓]이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漸]이 아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다.(이상 네 번째 교증 비판)
이에 따라 “만약 고제에 대해 의심[疑]이 없다면, 집ㆍ멸ㆍ도제에 대해서도 역시 의심이 없을 수 있다”는 교증에 대해서도 이미 해석한 셈이니, 때가 되면 결정코 마땅히 끊게 될 것이기 때문에, [끊기 전까지는] 출관(出觀)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역시 [“집ㆍ멸ㆍ도제에 대한 의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고제를 관찰할 때 일체의 의심이 끊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혹은 [사문]과(예류과)에 이를 것에 근거하여 은밀히 이 같은 말을 설한 것이니, [사문]과에 이를 때 [견고소단의 ‘의’와] 아울러 [더 이상 어떠한 제(諦)에 대한] 의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 경문을] 이같이 외우고 있다. ‘만약 도제에 대해 의심이 없다면, 고ㆍ집ㆍ멸제에 대해서도 역시 의심이 없을 수 있다.’ 따라서 [돈현관론은] 이미 그 같은 성교와 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돈현관론자의 반론)
그러나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다. 바야흐로 고제를 관찰할 때 [견고]소단의 집(集)도 끊을 수 있다. 즉 무상 등 네 종류의 행상(즉 무상ㆍ고ㆍ공ㆍ무아) 중 어느 하나가 현전함에 따라 그것(집)도 관찰하였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으로, 고제와 집제의 두 법[物]은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며, 고지(苦智)와 집지(集智)는 행상에 근거한 차별이지 소연에 근거한 차별이 아니기 때문이다.27)
견고소단의 집은 이와 같이 [고제를 관찰할 때] 끊어질 수 있지만, 견집소단의 집이 끊어지는 것은 그렇지 않으니(다시 말해 고제를 관찰할 때 끊어지지 않으니), 인(因) 등 네 종류의 행상(즉 因ㆍ集ㆍ生ㆍ緣)으로써 집제를 알지 못하고서는 능히 끊을 수 없기 때문이며, [계경에서] “집제에 대해 통달(通達)하여 영원히 끊어야 하며, 나아가 도제에 대해 통달하여 수습해야 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경에서는 다만 마땅히 “집을 영원히 끊어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만 설하였어야 한다.28)(이상 다섯 번째 교증 비판)
이 같은 사실에 [따라] ‘현관은 단박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은 바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3-4) 돈현관론의 이증 비판
그렇지만 요컨대 견도위에서 바야흐로 [견고소단의] 집(集)을 능히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도위 중에서 멸ㆍ도제를 반연하는 지(智)가 없다면, 수소단(修所斷)의 집도 능히 영원히 끊을 수 없다. 즉 경에서 “성혜로써 관찰할 때 [견고소단의 집이] 끊어진다”고 설한 것은, [성혜로써] 관찰할 때 견소단의 법이 아니라 예컨대 [수도위에서] 증득되고 수습되어야 할 법을 능히 끊는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29) [그것(견고소단의 ‘집’)은] 요컨대 견도에 의해 증득되고 수습되어야 할 법이 아니다. 수도위에서 고ㆍ집지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증득되고 수습되어야 할 법도 없을 것이며, [그것의] 끊어짐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고제를 관찰할 때 견고소단의 ‘집’이 끊어지는 것은] 요컨대 견도에 의한 것이 아니다.(이상 첫 번째 이증 비판)
“다섯 종류의 색깔로 이루어진 옷을 단박(동시)에 취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도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일 찰나에 다섯 가지의 색깔을 분명하게 취한다는 사실은 인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안식(眼識)이 다섯 색깔로 이루어진 옷을 총체적으로 취할 때에는 푸르고 노란 등의 색깔의 차이를 능히 요별할 수 없으며, 오로지 현색(顯色)의 행상이 일어났다는 사실만을 능히 총체적으로 조작[總作]할 수 있을 뿐이지만--[이러한 다섯 색을] 순서대로 요별하는 것은 그 후의 의식(意識)이다--, 행상이 빠르게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증상만(增上慢)이 “일시에 다섯 가지 색깔을 단박에 취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필시 어떠한 경우에도 [이와 같은 일은] 없다.
현관이 일어날 때에도 고제 등의 차이를 분명하게 요별할 수 없으며, 오로지 4제에 대해 행상이 일어났다는 사실만을 총체적으로 [조작할 수 있을] 뿐으로, 마치 [다섯 색깔을] 총체적으로 반연하여 분명하게 요별하지 못하는 안식의 경우와 같다. 따라서 이를 인용하여 돈현관의 비유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저들이] 비록 “총체적인 상[總相]을 반연하는 지(智)가 존재하며, [그것은] 개별적인 상[別相]을 지닌 다수의 경계대상을 단박에 반연하여 일어난다”는 사실 역시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다수의 경계대상의 개별적인 상을 [단박에] 요별할 수는 없기 때문에, [다섯 종류의 색깔로 이루어진 옷은] 진실의 현관에 대한 비유가 될 수 없는 것이다.(이상 두 번째 이증 비판)
“해[日]와 배와 등불의 경우와 같다”고 말한 것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하나의 실체[一體]가 다수의 업을 행한다는 이 같은 비유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해라고 하는 전체[總日] 가운데 따뜻함[煖觸]은 추위[冷]를 물리치고, 빛[光色]은 어두움을 몰아내는 것으로, 따뜻함과 빛은 자류(自類, 자기존재)이기 때문에 후 찰나의 그것은 전 찰나의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지 하나의 [실체(즉 해)]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하나의 실체가 네 가지 사업을 짓는 일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는 능히 돈현관의 비유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해가 처음 떠올랐을 때에는 모든 추위와 어두움을 두루 물리치고 몰아내는 공능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돈현관의 비유가 되지 않는다.
등불이 비유가 될 수 없는 것도 이로 유추하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기름을 소진하고 심지를 태우는 것은 별도의 작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을] 떠나 [저곳으로] 나아가는 배의 [공능] 역시 어떠한 차별도 없으며, 무거운 짐을 싣고 물결을 가르는 것도 각기 전체로서의 배[全分]가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돈현관에 비유될만한 공능을 갖지 않는 것이다.
비록 다수의 공능이 다 같이 하나의 실체에 근거하여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현관의 경우 그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없으니, 네 가지(즉 4제)의 행상이 서로 다를 뿐더러 상위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러한 세 비유(즉 해와 등불과 배)의 실체도 모두 한 가지가 아닌데, 어떻게 이를 인용하여 [4제] 돈현관을 논증할 수 있을 것인가?(이상 세 번째 이증 비판)
‘[초]과(初果)의 획득’을 인용한 이증 역시 그렇지 않으니, 상계의 혹[上惑]을 끊고서 응과(應果, 아라한과)를 성취하는 경우와 같기 때문이다. 예컨대 상계(색ㆍ무색계)의 일체의 번뇌를 점진적으로 끊고서 아라한과를 성취하듯이--여기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다--,30) 이와 마찬가지로 일체의 견소단의 혹을 점진적으로 끊고서 예류과를 성취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초과는] 유학위로서는 동일하지만,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예류과 등은 유학위로서는 비록 동일할지라도 거기에 차별이 없는 것이 아니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제8류(類, 예류향)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
또한 수도위의 경우에 대해서도 역시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니, ‘하하품의 도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를 끊을 때, 만약 바로 일래과를 획득한다면 마땅히 단박에 6품(상상품 내지 중하품)을 끊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만, 만약 그 같은 사실을 인정할 경우 수소단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하하품의 번뇌를 끊을 때에도] 일래과를 획득하지 못한다면, 그 후에도 역시 획득하지 못한다고 해야 하니, [양자를] 차별할만한 인연이 없기 때문이다. 그 밖의 계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그가 말한 것에는 능히 [돈현관을] 증명할만한 공용이 없는 것이다.(이상 네 번째 이증 비판)
“고제에 대해 통달해야 한다”는 등의 [경]설은 우리의 종의에도 어긋나지 않으니, 별도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고제 내지 도제에 대해 통달해야 한다”는 말은, 견도 이전의 4선근의 단계에서 4성제에 대해 흔락(欣樂)하며 개별적으로 관찰하고, 이로부터 능히 견도위에 들어 순서대로 4제에 대해 바로 능히 변지하고 내지는 수습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러한 [경설의] 뜻은 점차(漸次)적으로 현관한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인데, 이와 같은 [경]설이 어찌 우리의 종의에 어긋날 것인가?
즉 ‘통달(通達)’이라는 말은 바로 견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4제의 자취[跡]에 대해 관찰하기를 욕락(欲樂)하는 자는 필시 마땅히 먼저 통달을 추구하려는 마음[求通達心]을 일으켜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현관]위 중에서 ‘통달해야 한다’고 설한 것이다.
혹은 ‘통달하게 되는 것’이 바로 견도이니, 진리의 이치[諦理]에 이르게 되면 견도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로지 견제(見諦) 즉 진리만을 관찰하면 바로 그 같은 통달[事일]이 성취된 것이라고 여길까 염려하여 진리를 관찰할 때 별도로 지어야 할 일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다시 ‘변지해야 한다’는 등의 말을 설하게 된 것이다.
혹은 이 경에서는 마땅히 “고제 등에 대한 통달에 의해 변지(遍知)하고, 나아가 수습(修習)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라고 해야 하니, 지어야 할 일(즉 변지ㆍ영단ㆍ작증ㆍ수습)은 ‘혜’(즉 통달)에 의해 성취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하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거듭 설[重說]해서는 안 될 것이니, 통달과 변지는 의미상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용된 성교는 다만 그러한 문구만으로도 능히 점현관의 뜻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니, “고제에 대해 통달 변지(遍知)해야 하며, 나아가 도제에 대해 통달 수습(修習)해야 한다”고 설한 것은 분명히 점현관의 뜻을 나타내어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마땅히 별도로 설해서는 안 될 것이다.31)
그러나 이미 각각의 제(諦)에 대해 별도로 ‘통달해야 한다’는 말을 설하였기 때문에, 4성제라는 경계대상의 행상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오로지 일법의 혜(慧)가 일 찰나 중에 4[제]의 개별적인 행상을 결정적으로 요별할 수 없기 때문에, [4]제의 개별적인 행상을 자세히 깨달아 알 때 비로소 능히 개별적인 행상에 미혹한 [각각의] 번뇌를 끊을 수 있기 때문에, 현관은 단박에 이루어지는 것[頓]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漸]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여기서 그가 인용한 계경을 자세히 검토해 보건대, 네 가지 [진리]를 관찰한 세력으로 말미암아 네 가지의 사현관(事現觀)을 성취한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지 한 가지 [진리]를 관찰함으로써 네 가지의 사현관을 성취한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 그러니 마땅히 이를 인용하여 돈현관을 논증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이상 다섯 번째 이증 비판)
3) 16심(心)의 소의지(所依地)
현관에 16찰나의 마음[十六心]이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16찰나의 마음은 어떠한 지(地)에 근거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것들은 모두 세제일법과
동일한 지에 의지하고 있다.
皆與世第一 同依於一地
논하여 말하겠다.
세제일법의 소의가 되는 온갖 지(地)가 바로 이러한 16찰나의 마음이 근거하는 곳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그것(세제일법)이 6지에 근거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한 바와 같으니, 4정려와 미지정과 중간정이 바로 그것이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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