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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는 고희를 맞았다. 요즈음은 고령화 사회라는 말을 하듯이 일흔이 나이 많은 축에 들어가지도 않지만, 옛날에는 ‘인생 칠십이 드문 일’이라 하였다. 두보(杜甫)의 〈곡강(曲江)〉이란 시에 나오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시구에서 고희(古稀)라는 말이 나왔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의 평균수명이 늘어나 옛날보다 장수를 누리는 시대가 되어 오래 사는 사람도 많아지고 백세시대라는 말까지 나왔지만, 옛날에는 쉰 살을 못 넘기고 생애를 마친 역사적 인물들이 꽤 많았다. 물론 그보다 더 일찍 죽은, 젊어서 요절한 인물들도 많았다. 불로장수를 원했다는 진시황, 조선조의 대학자 이율곡, 《홍길동전》을 쓴 허균 같은 이는 모두 49세에 죽었다. 그런가 하면 20대나 30대 초반에 죽은 천재 시인이나 학자도 더러 있었다. 중국의 왕필(王弼)과 우리나라 조선조의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 근세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김소월 같은 이가 그러했다. 인간의 오복(五福) 가운데 수(壽)가 먼저다.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 이어 있지만, 복을 누리는 첫째 조건을 명(命)이 길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오래 산다고 인생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법구경》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오래 사는 것이 다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살아온 과거의 세월이 한 해 두 해 쌓여 나이가 올라가면 무언가 아련해지고 허전해지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헛나이를 먹었다는 서글픈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누구나 나이가 많아져 늙음에 이르면 인생무상이 저절로 느껴진다고 한다. 이른바 황혼무상이다. 내 경우에도 남은 생애가 의식되면서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죽음의 종착역을 향해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음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숫타니파타》에는 이런 독백의 말도 나온다.
무상을 느끼는 것은 괴로움을 인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상한 것이 결국 괴로움[苦]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사성제 법문에서 생 · 노 · 병 · 사를 다 같이 괴로움으로 설파하였듯이, 괴로움에서 시작하여 괴로움으로 끝나는 생애를 두고 말한다면 늙는다는 것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말하자면 태어남과 죽음의 의미를 똑같이 볼 수 있듯이 늙음의 의미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다만 인생이란 것이 끝도 없이 나고 죽는 생사(生死)의 바다에서 항해하는 것이라면, 바다 위를 가고 있는 배 안에서 할 일은 그때그때 때를 따라 다를 것 같다. 내게 돌아오는 문제도 ‘이제 늘그막에서 무엇을 할 것이냐?’이다. ‘잠 오면 잠자고 배고프면 밥 먹는다.’는 출세간적인 말보다는 속제(俗諦)를 가지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우선은 나이와 관계없이 내 나름의 세상을 보는 안목을 좀 더 넓혀야겠다. 불교의 교리적인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의사가 환자를 검진하는 의술의 방편 같은 것으로 세상의 문제를 알아내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관심을 가지고 잘 해결되도록 기도하고 싶다. 오늘의 현실과 미래를 직시하면서 좀 더 뛰어난 통찰력을 얻고 싶은 것도 지금의 내 소원이다.
이러한 사회적 차원의 문제가 있다 할 때 이 문제를 뚜렷하게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하더라도 관심 밖의 일로 치부해 방기해 버리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양극화 현상만 더욱 심화되어 갈 것이다. 사회는 어느 때나 그 구성원들의 관심도에 따라서 다수의 인구층이 형성된다. 때에 따라 발생하는 사회문제에 해결을 위한 선의를 가지고 임하는 인구가 많으면 그만큼 해결의 기미가 쉽게 나올 수 있다. 불교는 삶의 질(質)을 높일 것을 요구한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세속적인 것보다 차원 높게 설정하여 그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수행자 상이 대승불교의 보살이다. 보살이란 심량(心量) 많은 사람, 다시 말하면 마음 써 주는 데가 많은 사람이다. 알고 보면 특수한 신분의 높은 격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보통 사람일 뿐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승가에 몸담은 지도 반세기가 가까워져 오지만 별로 잘 살아왔다고 할 것이 없는 것 같다. 엄벙덤벙 세월만 보내다 지는 해를 바라보는 꼴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어떤 때는 내가 사는 이 세상이 걱정될 때도 있다. 우리 사회와 내가 소속해 있는 승가가 걱정될 때도 있다. 오늘날은 과거의 어떤 시대보다도 인류의 행복과 안녕이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소란한 폭력의 소리가 들리고, 가지가지 평화를 파괴하는 소용돌이가 일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생활의 기본원칙이 망가지고 엄청난 곤경을 자초하는 결과가 되어 많은 사람이 저마다 사회를 불안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작금의 나라 안에 나타난 제반 문제들도 그렇다고 생각된다. 북한의 핵실험과 사드 배치 문제, 경주에서 일어난 지진과 울산 태화강의 홍수 등도 불안을 일으키는 문제들이 아닐 수 없다.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매우 불안하고 긴장되게 하는 때가 하루에도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현대인은 이러한 긴장 속에서 삶의 여유를 가지고 자기의 인생을 음미할 정신적 공간을 상실해 버렸는지 모른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기주의의 장벽만 높아지고 인간 상호의 우애 증진이 잘되지를 않으니 모든 것이 비극적으로 될까 걱정만 높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의 긴장을 풀어주고 생존경쟁의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불보살의 가피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나는 불법을 만난 인연으로 많은 은혜를 입고 살아왔음에 감사하는 마음도 있다. 인연의 빚을 지고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은혜 아닌 것이 없지만 네 가지 은혜가 다시금 생각난다. 승려인 나로서는 삼보가 포함된 부처님 은혜가 있고, 은사의 은혜가 있고, 속가 부모의 은혜도 있다. 물론 시주의 은혜도 있다. 또 개인적으로 특정인에 진 은혜도 많이 있다. 모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은혜들이 고향을 생각하는 향수에 젖은 것과 같은 마음이 되어 생각날 때가 있다. 이런 은혜를 느끼면서 남은 생애에서 다음 생에 이르기까지 좋은 발원을 하고 싶다. 은혜에 보답하고 나도 남에게 은혜를 베풀게 되기를 바라는 발원이다. 이러한 발원으로 내 인생의 아름다운 회향을 꿈꾸고 싶다. 불교의 기도의식에 쓰이는 경전인 《천수경》에는 불교의 신앙 정서가 네 가지로 요약되어 있다. 귀의하고, 찬탄하고, 참회하고, 발원하는 것이다. 나의 회향 속에 이러한 불교의 정서가 녹아 있게 하고 싶다. 그리하여 잘못된 과거를 참회하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 발원하고 싶다. 그리고 나와 인연 닿는 모든 사람에게 마음의 땅에 복전을 만들게 하고 싶다. 마음속에는 세 개의 밭이 있다. 그것은 은전(恩田)과 경전(敬田)과 비전(悲田)이다. 은혜를 나누고, 서로 공경하고, 남의 딱한 처지를 도와주는 자비의 실천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비록 그릇된 업을 많이 지은 것이 있었더라도 이것을 참회하고 나중에 죽을 때가 와서도 부처님의 자비심을 갖고 내 원을 발하면서 죽고 싶다. 어떻게 아름다운 회향을 잘해 볼까? “사사불공 처처불상(事事佛供 處處佛像)”이란 말이 생각난다. 일마다 불공을 드리듯 하면 곳곳에 부처님이 나타나 있다는 말이다. ■ 지안 / 통도사 반야암 회주. 1970년 고려대 법대를 중퇴하고 출가.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강주, 마산포교당 정법사 주지, 통도사 승가대학 강주, 조계종 고시위원, 조계종 교육원 역경위원장 등 역임. 주요 저서로 《대승기신론 신강》 《금강경 이야기》 《산승이 마음으로 전하는 안부》 등 다수가 있다. 현재 조계종 고시위원장(승가고시 전담기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