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면서 빛나는 사람들
곽효환
작열하는 햇볕과 찌는 듯 한 무더위가 깊어
꽃들도 풀들도 지쳐 고개를 떨구는
기울고 시들해지는 저무는 시간 비로소
단단한 중심이 되어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더 화려하게 피는 능소화 같은
더 그윽하고 강인하게 피는 무궁화 같은
여름 내내 피고 또 피는 백일홍 같은 사람들
1.
책과 거문고, 꽃과 그림 그리고
술과 도연명을 사랑하여
맑은 시냇가에 집을 지은 유학자의 후손*은
기울어가는 나라를 살리고자 하였다
의병운동에 뛰어들었고
학교를 세워 구국 계몽운동에 헌신했으나
끝내 나라가 망하자
지천명이 훌쩍 넘은 나이에
가산을 정리하고 솔가해 두만강을 건넜다
무관학교를 세워 강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힘으로 맞서 나라를 찾고자
죽는 날까지 온몸을 던졌다
같은 길을 걸은 아내와 두 아우
외아들, 손자, 조카들, 당숙, 처남, 매제…
그들이 살았던 99칸 종가 고택은
일제가 놓은 중앙선 철도로 훼손되어
때론 흉터로 때론 훈장으로 남아 있다
2.
11세 때 처음 첼로의 매력에 빠진 소년**은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에 빠져
10년여를 매달린 끝에 전곡 연주를 해냈다
조국에 독재정권에 들어서자
피레네산맥의 작은 마을에 은거했고
죽을 때까지 망명객으로 떠돌았다 하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95세가 넘어서도
매일 아침 6시간씩의 연습만은 빠뜨리지 않았다
연습할 때마다 실력이 좋아지는 걸 느낀다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첼로 거장은
날마다 더 좋은 연주로 세상을 더 깊이 사랑했다
3.
실패한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인권과 도덕을 내세운 이상주의자였으나
우방엔 엄격했고 독재자에겐 무력했다
불황과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내내 고전하다
재선에 실패한 몇 안 되는 현직 대통령이 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줄곧 1961년에 지은
방 두 칸짜리 땅콩농장 주택에 살았다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한 해비타트 활동과
저개발국 인권개선과 질병 퇴치에 힘을 기울였고
토요일 오후면 아내 손을 잡고 이웃집에 가서
종이 접시에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거짓 없이 소박한 일상을 지킨 그는
퇴임 후 가장 성공한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
4.
평범한 은행원이고 주부였다
중년에 불치병으로 남편을 보낸 후
학교 보안관으로, 호스피스 병동 자원봉사자로
몸을 낮추고 묵묵히 살았다
고희를 한해 앞두고
회복 불가 뇌종양 판정을 받은
그녀의 마지막 유산은
시각장애인 두 명에게 빛을 선물하는 것이었다
꽃이 필 때도 예쁘지만 질 때도 예뻐서
동백꽃을 사랑한 그녀는
담백해서 순연한 영원한 동백꽃 할머니가 되었다
남은 자녀와 이웃들도 동백꽃처럼 살기로 했다
*이상룡(李相龍, 1858~1932)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976~1973) 스페인 첼리스트
***지미 카터(Jimmy Carter, 1924~). 미국 39대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