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들고 싶은 것」
어느 날, <어린이와 문학> 10기 편집 주간을 맡아보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고, 생계형 글쓰기를 하는 작가라서 먹고 사는 일이 더 급했습니다. 또한 편집부를 이끄는 책임을 맡고 싶지 않았어요. 그건 너무 큰일이니까요.
전화를 받았을 즈음에는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내가 과연 작가일까 하는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대던 때였어요. 개인적인 일들도 겹쳐서 저를 짓눌렀지요. 이 바닥을 힘껏 차고 나올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그래서 여행을 떠나려고 짐을 싸던 중이었어요. 여행 내내 답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습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런 책임을 해낼 수 있을까 하고요.
그때, <어린이와 문학>을 처음 만들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막 동화를 쓰기 시작할 무렵, 잡지를 만들자는 모임에 초대되었습니다. 이름을 무엇으로 정할 것인지, 누가 첫 책임을 맡을 것인지로 긴 토론이 이어졌어요. 밤늦게까지 이어진 토론으로 첫 편집주간이 정해졌고, 그 자리에서 얼떨결에 편집부에 합류했습니다.
“편집부에서 일하는 게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동화를 어떻게 쓰는지 몰라 답답하던 제게 그 말은 한 줄기 빛 같았어요. 어쩌면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편집부 일을 하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답니다.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적당히 넘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또 봐도 글자는 나를 속일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달았지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만남이 지금까지 제가 글을 쓰게 한 원동력으로 남았어요.
그 불씨를 다시 살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편집부를 꾸렸습니다. 10기 편집부와 함께 봄호를 만들면서 실수도 하고, 당황한 일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들어보자는 의지로 해볼까 합니다.
모두모아 182호인 봄호에는 ‘사회적 참사’를 집중해서 다루었습니다. 처음 이 주제를 기획할 당시에는 4·3, 4·16, 5·18 등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회적 참사가 일어난 계절이 봄이었기 때문이었어요.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아프고 시린 역사를 잡지에서 짚고 싶었거든요. 원고 청탁을 하던 때, 이태원 10·29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아까운 생명이 또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사회적 참사가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안전하지 않다는 증거이며, 이를 계속 알려내는 일 또한 작가가 할 일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이번 호는 조금 무겁습니다. 이런 무거운 이야기를 쓸 때 다른 작가들은 어떻게 한계를 극복했는지, 어디에 중점을 두는지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반복되는 참사에서 울고 주저앉기만 하지 말자는 의도를 담았음을 밝힙니다.
“작가의 서랍”에서는 장경선, 최유정 작가와 함께 했습니다. 역사 동화를 주로 쓴 두 작가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 벌어진 제노사이드도 작품으로 다루었습니다. 두 작가가 단단하게 다져온 길을 느끼며, 다음 작품을 기대하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하나의 사건처럼 읽히는 참사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녹아 있으니, 더 많은 작품들이 나와야 한다는 두 분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가는 두 작가를 응원합니다.
“시선”에서는 심진규의 「내가 바라는 평화」에 눈길을 둡니다. 작가는 4·3항쟁을 다룬 『섬, 1948』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유가족을 만나고,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현장을 답사하면서 꾹꾹 눌러쓴 마음이 읽혔습니다.
“동시”는 12명의 동시인들이 발표한 24편의 동시를 실었습니다. 짧은 글에 시·공간을 녹여내는 시인들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새와 고양이에 눈을 맞추고, 익숙한 단어와 낯선 단어를 함께 배치한 작품도 있어요. 할미꽃에 그리움을, 갈매기와 새우게 웃음을 담아낸 동시는 미소를 짓게 했지요. 자존심 강한 장미와 단추를 들여다본 눈길에는 공감했고, 시인이 짓는 이름으로 개와 감자가 동일성을 이루며, 시어를 따라 먼 데 여행을 떠나기도 했어요. 가족이 서로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어린이가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지 듣다가 히죽 웃었어요. 아침에 일어나기 싫은 마음을 중력에 빗대고, 이루고 싶은 바를 적당히 눙치는 고수도 만났습니다. 쇠파리가 살아남는 법, 물수제비하는 돌이 새 같다는 상상력도 엿보았습니다.
“동화”는 두 편을 실었습니다.
백승남의 「연과 버들」은 ‘연이와 버들 도령’ 혹은 ‘연이 낭자와 버들 도령’ 이야기를 다시 쓴 것입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를 SF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익숙한 이야기를 낯선 형식으로 비틀었고, 그럼에도 설득력 있는 글로 풀어낸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황종금의 「탈출」에서는 엠사오 별에서 온 ‘루니’ 로봇이 등장합니다. 장난감 로봇으로 보이지만 실은 물음표별에서 온 외계인이에요. 루니는 준이와 친구인데, 알콜 중독자이면서 주폭인 준이 아빠에게서 준이를 대피시키곤 했지요. 루니와 준이가 쌓는 우정이 흥미로웠습니다.
“청소년 소설”도 두 편을 실었습니다.
심은경이 쓴 「어느 찬란한 날」에도 알콜 중독자이면서 주폭인 아빠가 등장합니다. ‘나’는 아빠를 피해 엄마에게 갔다가 또 다른 위험에 처합니다. 부모에게 기대지 못하는 청소년이 어떤 위기에 놓이는지를 드러내는 단편입니다.
현요아가 쓴 「스토끼」는 가족을 잃은 나, 동윤이가 살아갈 이유를 화분 스투키로 얻습니다. 동윤이는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을 스토끼라는 애칭으로 부르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돌아볼 수 있더군요.
“평론”에서 정소금은 「로봇이 거짓말을 하는 까닭」을 「거짓말 로봇」과 『로봇의 별』을 견주어 읽었습니다. 로봇은 학습된 대로 행동한다고 하는데, 거짓말을 한다고? 어떻게? 이런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기획”은 ‘사회적 참사’를 작품으로 다룬 작가들 혹은 그 작품을 읽은 분들이 들려준 이야기로 엮었습니다.
김홍모의 「만화 『홀- 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에서는 세월호 생존자가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과정을 짚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생존자와 마주한 작가는 눈앞에서 무너지는 삶을 목격합니다. 참사 직전으로 자꾸 되돌아가는 생존자를, 그때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생존자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회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렇게 무너진 삶을 일으켜 세우는 힘은 바로 시민들이며, 어린이라고요.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백은하는 『엄마의 빈자리』를 쓸 당시에 대해 털어놓았습니다. 씨랜드 화재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글에서 누군가의 가족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화재 현장에서 아이들을 구하다 죽은 엄마는 의인으로 불리지만, 정작 기철이는 엄마를 잃었습니다. 참사에서 희생되거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누군가의 가족임을 함께 고민할 수 있습니다.
양인자는 「나는 계속 광주」에서 광주항쟁을 작가로 바라보고, 이야기로 풀어내는 과정을 서술했습니다. 『오월의 어린 시민군』으로 5·18 광주항쟁을 쓰면서 힘들었던 과정과 자신이 겪은 일을 같이 듣는 귀한 원고였습니다.
이번 호부터 “어린이와 함께”라는 꼭지가 생겼습니다. 봄호에는 어린이들과 담당 편집부원이 봄호 주제인 ‘사회적 참사’로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재난, 세월호, 후쿠시마 원자력 사고, 이태원 참사 등 사회적 참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물었습니다. 그 대답을 통해 어린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엿보았습니다. 이는 참사를 지켜본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삐뚤빼뚤”에는 여전히 어린이 글이 실립니다. 자신이 읽은 동화를 바꿔쓴 글과 어린이 시들이 실렸습니다. 재밌고 흥미로운 글, 고맙습니다.
“이야기는 어디에서 오는가”는 새로운 꼭지입니다. 작가들은 작품의 씨앗을 어디에서 얻는지, 혹은 어떤 계기로 이야기를 쓰게 되었는지 들어볼 수 있지요. 서정홍의 「시는 어디에서 오는가」에서 땀흘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참되게 바뀐다는 것을 가르쳐 준 스승을 언급하며, 여전히 땀흘려 일하는 작가가 쓴 시를 함께 실었습니다.
“목소리”에 실린 글에서는 사서가 도서관에서 겪은 사건과 해결 방안이 나옵니다. 별의별 일들이 다 벌어지는 곳에서 고군분투하는 사서님들, 응원합니다!
“서평”에는 『오월의 달리기』를 김지희가 평했습니다. 5·18 광주항쟁을 다룬 동화로 출간한지 몇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입니다. 그 이후에 5·18을 다룬 동화들이 더 나왔습니다. 그래도 매 순간 새롭게 읽히는 걸 보면 여전히 우리에겐 많은 5·18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문은아는 『거짓말의 색깔』을 내밀었습니다. 거짓말이 보인다면, 거짓말을 볼 수 없다면, 거짓말을 이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방지운은 『내 이름은 쿠쿠』를 추천했습니다. 반려 동물과 관계를 맺은 사람을 돌아보는 글로, 독서 모임에서 이 책으로 나눈 이야기를 함께 들려주었습니다.
“그림책의 그림을 읽다”는 연재를 계속합니다. 이번에는 윤지 작가가 쓰고 그린 『식빵 유령』을 살폈는데요, 다정한 유령인 식빵 유령이 안녕을 묻고 일상을 살아갈 힘을 준대요. 당장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특집”으로 「다새쓰를 말하다 2 참관기」가 실립니다. 소파 방정환 문학을 다시 새롭게 쓰는 <방정환 문학상>과 다시 새롭게 쓰는 외국 작품들을 분석했습니다. 토론회 자료가 방대해 전문을 다 싣지 못하고 대신 참관기로 대체합니다.
<어린이와 문학>에서는 한 해 동안 실린 작품들을 심사하는, <어린이와 문학상>이 있습니다. 봄호에는 심사평이 실립니다. 또한, <어린이와 문학 평론상>도 원고와 함께 심사평, 수상소삼이 실립니다. 수상 작가들께 축하 인사를 보내며, 앞으로 어린이 청소년 문학을 위해 좋은 글을 써주시길 바랍니다.
아직 10기는 실수가 많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그럴 때마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가장 오래 이야기한 부분은 투고 작품입니다.
<어린이와 문학>에서 작품을 투고하는 사람들은 다양하지만, 특히 어린이 청소년 문학 작가가 되고 싶은 분들이 많이 합니다. 그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 뭘까 고민하였고, 월간 <어린이와 문학>이었을 때처럼 투고 작품에 대한 평을 실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편집부원들 가운데 작품을 투고했다가 짧은 평을 들었던 경험이 좋았다는 분들이 있었고요. <어린이와 문학>에서 투고 작품이 등단으로 인정되는 횟수는 여러 번이었다가 점점 줄어들었고, 요즘에는 한 번 실리는 것으로 등단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심사평도 싣지 않지요. 투고 작품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이 심사평이 절실한 게 아닐까 해서 부활을 검토했습니다.
그러나 편집부에서 의견을 다시 나눈 결과, 초대 작품과 투고 작품을 구별하지 않고 싣는 이유를 돌아보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린이와 문학>에 작품을 싣는 것으로 이미 작가로 인정하기로 한 결정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예비 작가님, <어린이와 문학>에 작품을 투고해주세요.
봄호 원고들은 다소 무겁지만, 무거운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놓으려는 작가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랍니다. 또 다른 이야기를 쓰려는 여러분께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김하은 (본지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