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샛별
시무언은 네 가지 중요한 갈등의 요소들을 모두 겪었으며 그것들을 다 이겨냈다. 그러나 시무언이 이 다섯 번째 갈등을 이겨냈느냐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새로운 운동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게 말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총을 내리고 성령과 확실히 교통하며, 하나님의 심오한 일에 대한 감동적인 말을 듣는 이 모든 행위는 한 때 시무언의 장점인 동시에 약점으로 작용했다. 특히 사랑에 대한 증언이 있을 때면 시무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눈시울이 적셔지곤 했다. 시무언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모든 의심을 버렸다. 그는 이러한 일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사탄이 의도했던 대로 시무언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성실함, 정직함, 그리고 기적적인 능력이 있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복음적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하며 신자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어주는 경우도 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이런 것들이 신실한 신자들에 의해 지지된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계획에 차질을 빚으려는 사탄의 계획일 수도 있다. 우리는 사탄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흉내를 내는 것에 대한 그리스도의 경고를 잊곤 한다(마태복음 24: 24).
우리는 사탄의 흉내를 "그 열매에 의해"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탄의 열매는 십 년이나 한 세대가 지나서야 그 정체를 드러내곤 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열매가 진정한 곡식의 알곡인지 또는 가짜인지 식별하지도 않는다. 기독교인들이 잘못된 길로 어떻게 안내될 수 있는가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사탄의 역사를 구별하는 몇 가지 특징을 같이 살펴보자.
1. 사탄은 예술가들이 묘사하는 것처럼 뿔과 발굽이 달린 무시무시한 괴물이 아니라 매력적인 가짜 신이다(고후 4:4). 그는 미와 사랑과 종교를 우리들 앞에 제시할 수도 있다. 그는 그리스도만 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그리스도의 재림(coronation)을 지연시키는 것뿐이다.
2. 속임수는 사탄의 방식이다. 속임수가 지능적일수록 사탄은 더 좋아한다.
3. 따라서 사탄이 내세우는 정의의 사도들은 기적을 일으킨다. 그는 그럴싸한 일을 많이 하기도 한다.
4.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시험하기 위해 사탄의 일이 진실과 유사하도록 허락하신다(신명기 13:3). 그러나 하나님은 확실한 지침을 마련해 놓으셨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현상이 진실한 것인가의 여부는 교리에 의해 판단된다. 즉 진정한 역사는 이성에 호소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이 운동은 신비주의적이었으며, 이상의 기준으로 판단할 때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들은 만물이 있기 이전부터 존재하여,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다시 오시는 초월적인 주님보다는,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열정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이들이 일반적인 가르침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인 교리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교리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항상 심각한 문제를 암시한다. 따라서 이런 기준에 따르면 이 운동은 부족한 면이 없지 않다. 이번 경우에는 또 다른 보다 실용적인 시험이 적용될 수 있다. 이 집단은 예언자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신명기 18:20-32에 제시된 시험기준을 적용해 볼 수 있다.
예언 가운데 한 부분이라도 사실로 판명되지 않을 때, 그 예언자의 말은 허구에 불과하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런 경우는 논란의 여지가 없이 사형이 선고되었다. 한국의 이 운동은 많은 예언이 사실로 들러났다고 주장했지만 적어도 어떤 예언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그 집단은 시무언에게 위대한 인물이 될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으나 신생아는 여자아이였고 출생 후 얼마 안 되어서 죽었다.
하나님의 분명한 시험기준에 의하면 이 운동은 부족한 점이 많았다. 성서에 의한 시험 외에도 다음과 같은 주된 특징들, 즉 세 개의 심리학적 특징과 네 개의 물리적 특징들을 가진 다른 운동들과 한국의 이 운동을 비교해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1. 반주지주의(Anti-intellectualism). 시무언이 계시를 전달하는 한 여성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를 물어보자 이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나의 지적능력을 무시하고 감정에 따라 말을 합니다." 한 세기 전에 어빙(Irving) 운동에 참여한 한 사람의 고백이 이 여인의 발언과 일치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인간의 이해능력을 비난하며 평가절하 하는 것이다. ...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항상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도록 요구하신다."
2. 사소한 일에 대한 집착(Triviality). 몬타니스트(Montanists), 케미사드(Camisards), 어빙주의자(Irvigites), 오순절주의자(Pentecostalists)들이 주로 그러하며,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이와 유사한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초자연주의는 대개 진부하며 우발적이다. 그들은 특별한 증언을 통해 선다싱(Sundar Singh)이 "하늘로 승천"했으며, 몽고에 선다싱의 가짜 화신이 나타날 것이며, 예수의 진정한 생일은 1월 3일이며 그의 부활일은 4월 14일이라고 증언했다. 한 여성은 그녀의 신적인 능력을 뜨거운 난로에 손을 집어넣는데도 부상을 입지 않는 것으로 증명하려 했다. 이 무엇보다도 가장 근본적인 은혜와 구속에 대한 교리에 대해서도 그 시대의 다른 사람들보다 전반적으로 무식했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내용물에 비해 포장만 요란했다. 만약 영광의 그리스도가 선택된 예언자의 입을 통해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말로 말씀하신다면, 이런 식의 계시보다는 보다 심오한 내용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한다. 주님의 말씀은 성서에 기록된 모든 말과 일치하면서도 동시에 그것보다 심오할 것이며 온 우주에 적용될 수 있는 광범위한 내용을 다룰 것이다. 그리고 또한 역으로 이 시대의 특수한 상황과 긴박한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의 말씀을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너무나 심오해서 초자연적인 현상과 함께 할지라도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3. 분리(Divisiveness). 이 집단의 사람들이 분파주의에서 유래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행위로 인해 분리가 부득이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순교자로 여겼으며, 유대인과 로마인에 맞선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 집단과 동일시했다. 절실한 신자들이 그들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것을 헤롯이나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그들은 말했다. 이와 비슷하게 이전의 어빙주의자는 "계시를 받아들이느냐와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분리하려는 경향"을 언급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경향은 매우 예외적이며, 바벨론 이름 하에 정통주의자들이 견지하고 있는 좋은 전통까지도 던져 버리게 하였다."
4. 육체적 현상(Physical Phenomena).
(a) 시무언이 주최했던 마지막 부흥회들에서 두드러진 것은 몸이 비정상적으로 떨리는 현상이 잦았다는 것이다. 스와미 비시타(Swami Vishita)가 그의 저서 진정한 영매술(Genuine Mediumship)의 237쪽에 쓴 다음과 같은 내용은 한국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그것과 유사하다: "영적인 능력이 내릴 때 매우 특징적인 떨림이 나타난다. 갑자기 손이나 팔에 경련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온 몸으로 확산되기도 한다."
(b) 한국의 종교현상에서 나타나는 신내림(무아지경의 상태)도 항상 일 분이나 이 분 동안 가끔씩 숨을 급하게 들이마신 후에 발생한다. 이와 비슷하게 한국의 무당들도 혼령이 자신의 몸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작은 휘파람 소리로 나타냈다. 그리고 앞에 언급한 저서 "진정한 영매술"에서도 한 영혼이 몸으로 들어오면 빠르고 불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린다고 말한다.
(c)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무의식 상태에서 증언하였다. 이것 또한 "진정한 영매술"의 236쪽에 나온 내용과 일치한다. "무아지경(황홀경) 상태에서 말을 하는 영매가 되면 마치 기절을 하는 것과 유사한 느낌을 얻을 수도 있으며 이러한 느낌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계속 될 수 있다."
(d)무아지경에 빠지게 되면 그 후의 현상은 "진정한 영매술"의 239쪽의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신은 영매의 성대를 부분적으로나 완벽하게 조절한다. 그리고 신은 청중에게 마치 그가 본인의 성대를 이용하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한국 무당의 경우도 이와 같다. 마귀를 숭배하는 것과 많은 유사성을 가지는 이런 특징들은 지나쳐 버릴 수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나는 이 현상을 하나님의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며, 시무언은 이 운동을 지지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여긴다. 하지만 나는 이것으로 누구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며 단지 시무언의 결정에 대한 나의 개인적 견해를 말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시무언은 이 운동에서 은혜의 요소들을 느꼈다. 그러나 비록 작게 보일지라도 중요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 사항들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 시무언의 건강은 매우 악화된 상태였으며 이번 사탄이 준 시험이 너무나 교묘했기 때문에 시무언이 그 유혹에 넘어 간 것도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이다. 그리고 동료들에게서 외면을 당한 시무언에게 있어 이 새로운 집단의 열정적인 지지는 거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생의 마지막에 접어든 시무언에게 이 집단 외에 친구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되었나?
그러니 이제 시무언의 과오를 덮어주자. 연약한 몸에 상처받은 가슴을 안고 그의 새로운 친구들의 품으로 들어간 시무언은 마치 내려지는 닻과 같았다. 그는 겨울바람처럼 세차게 몰아치는 모든 비난과 갈등을 뒤에 두고 따뜻함과 환대와 연대감 그리고 기도가 있는 곳에 닻을 내렸다. 이 집단은 모든 것을 서로 공유했다. 그들은 서로 친밀한 가족적 분위기에서 서로 형제와 자매였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웃고 일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 부흥회를 여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성찬식도 그 성스러움을 간직하면서도 가족의 식사와 유사했다.
방방곡곡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소박한 환대를 나누려고 이 집단을 찾아왔다. 그들은 그들 주변의 활기 없는 상황에 실증이 나 있었다. 이처럼 나약해진 시무언에게 이런 마지막 위로를 그 누가 비난하겠는가? 그것은 장례를 위해 향을 쏟아 붓는 것이었다. 비록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형성된 집단을 통해서라도 주님의 종의 마지막 날들을 편안하게 보내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 의한 것일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시무언이 이러한 위로를 그의 옛 일터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예수교회의 선도감이 되자 시무언의 건강은 더욱더 하향선을 그리게 되었고 그는 설교를 그만 두어야 했다. 그런 몸으로, 그 진실한 기독교인에게 더 이상의 새벽은 없었다. 이제는 그의 샛별이 떠오르는 시간이 되었다.
한국 나이로 서른 셋밖에 되지 않았지만 시무언은 이미 노인이된 시몬(베드로)이었다. 아마도 그의 일이 끝났기에 그가 원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나보다. 하지만 1933년 5월 1일 시무언은 그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의 불굴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보여줬다: "나의 마음은 평온하고 잠도 잘 자고 매일 같이 누워서 휴식을 취하네. 한 인생에 이렇게 좋은 기회가 몇 번이나 있겠는가. 주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소중히 하시고 나에게 음식을 주시네. 그러니 나를 다시 내 보낼 날이 올 거라 난 확신하네. 나는 그 날을 기다리며 힘을 모으고 있네. 그 날이 오면 나는 힘찬 소리를 지르며 나아갈 것이네.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여기서 그냥 말라죽지는 않을 거니까." 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