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3일 연중 제22주일>
여정에서 만나는 고난과 죽음
왜! 고난과 죽음이 필요했을까? 예수님을 꼭 붙들고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라고 말한 베드로가 고맙다. 고난과 죽음은 불가피할 경우가 아니면 누구든 피하려고 하는 것인데 나라도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외쳤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마태 16:23)라는 매정한 말씀을 하신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 16:24) 하시며, 이것이 하느님의 일이요 하느님의 뜻이란다.
성경에서 고난과 죽음은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계에서의 의미와 다르다. 보통 우리는 고난보다는 안전한 길을 택하고 죽음을 피하여 더욱 생존에 유리한 선택을 하려고 한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의 고난과 죽음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런 까닭에 베드로가 그런 행동을 하였고 그것은 우리 모두의 이해 방식이었다. 성경에서 고난과 죽음은 하느님의 뜻 또는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것으로 ‘계시’된다. 아브라함과 모세가 그랬고 이스라엘의 판관들과 많은 예언자의 삶이 그랬다.
오늘 제1독서에서 낭독된 예언자 예레미야 이야기가 바로 그렇다.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 (예레 20:7b)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20:8b) 예언자로 불린 예레미야가 겪는 고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하느님의 예언자가 겪는 고난과 외로움이 그대로 보이는 듯하다. 왜일까? 왜 세상은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 예언자의 고난과 죽음은 마치 예고된 일처럼 보인다. 아니 성경은 세상에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고난과 죽음의 길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 역시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로마 12:1)라며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라고 권고한다. 그러면서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로마 12:2)하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마냥 즐겁고 안락한 것이 아니다. 신앙이 하나의 결단이요, 선택인 것처럼 하느님의 자녀 됨은 고난의 길이요, 현세에서는 자신을 죽여야 하는 길임을 말해준다.
여기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앞에서 예고하신 고난과 죽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였다.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은 고난과 죽음을 겪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십자가’라는 표현을 하셨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고난과 죽음은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이 겪게 될 일인지도 모른다. 그 고난과 죽음이 어떤 것일지 그것은 그 길을 가는 자만이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 신비를 관통하여 살아내신 것처럼 그것은 그 십자가를 진 자의 몫이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 상관없지만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신다.
십자가는 ‘속세를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현세에 동화’되지 않는 것이다. 현세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무엇이 선한 것인지 구별하며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완전한 것인지를 찾는 것에서 십자가의 길은 시작되는 걸까?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에게 동화되지 않으면 왕따당하기 십상이고 함께 거들어주지 않으면 때로는 ‘놀림감이 되고 조롱만 받는 일’이 다반사인데 그렇게 ‘치욕과 비웃음거리 되는’ 것 또한 십자가의 길인가 보다. 이렇게 놓고 보니 ‘십자가를 진다.’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보다 하고 도망치고 싶어진다.
행복하고 편안하게 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남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일을 하는 것은 고되고 힘들어도 즐거운 일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것들은 ‘십자가’가 될 수 없다는 것, 아무리 좋은 하느님의 선하심도 세상에서는 거부당하고 외면당했으니 ‘십자가’란, 적어도 ‘자각’과 ‘깨달음’이 아니고선 질 수 없는 과업이 아닐까? 왜냐하면 ‘자각’이나 ‘깨달음’이야말로 내적 힘의 원천으로 확신과 신념으로 이끌어주는 것인데 그런 통찰 없이 어찌 고난의 십자가를 질 수 있을까? 취약한 상태의 내담자가 아무런 변화가 없는 자기 환경을 새롭게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자각’과 ‘깨달음’의 위력을 경험하곤 한다. 이전에는 위축되고 무엇도 할 수 없었던 사람이 새롭게 자기 일상을 구성하고 만들어가는 모습에서 통찰의 힘을 본다. 어쩌면 ‘자기 십자가를 진다.’라는 것은 그에 필요한 ‘자각’과 ‘깨달음’을 얻었음을 의미하고 그 힘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피할 수 없는 고난과 죽음까지도 견디어내는 것이 아닐까?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친다. ‘그분을 기억하지도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20:9) 한번 이루어진 ‘자각’과 ‘깨달음’은 뼛속에 가두어도 심장 속에서 타오르듯 예레미야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힘은 예레미야의 힘이 아니었고 그의 순종은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도구일 뿐이었다. 예레미야의 삶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20) 이것이 바로 ‘거룩한 산 제물’이었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참으로 모질고 질긴 목숨을 이어가려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어떻게든 자기의 삶을 살아내려 구차한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위대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자식들을 위해서 ‘자존심’을 내버린 부모가 어디 한둘인가? 팔다리를 제대로 쓰지도 못하면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혀를 돌려가며 무슨 말이든 한마디 해보려는 사람들 속에서 고난받는 하느님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보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그들의 삶 속에서 ‘십자가’를 발견하는 것은 지나친 생각일까? 그들이 신앙인이든 아니든 ‘누구든지’(마태 16:24, 참고) 상관없지 않은가? 그뿐만이랴! 공동체와 시민사회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 정의와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 젊은이들, 그들이 신앙인이든 아니든 ‘누구든지’.
심리치료 중, 통찰의 어느 한 과정을 이루어갈 즈음에 커다란 진통이 온다. 보통 ‘신체화 증상’이라고 하는데, 심할 때는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한다. 병원에서는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진통이 보통이 아니다. 신체적 고통은 사람을 혼절시킬 만큼 지독하고, 심리적 허무와 허망은 마치 죽음의 늪에 빠진 것 같다고 말한다. 어쩌면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일에 동참한다는 것은 내적으로는 ‘자기완성’의 길이요, 외적으로는 하늘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우리가 행하는 치유과정은 그 자체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행위가 되지 않을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부러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갈 필요는 없겠지만 신앙인으로서 주어지는 고난과 죽음의 길은 우리에겐 선물이요, 축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고 편안함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자기-SELF’를 찾는 수고스러운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십자가’는 ‘누구든’ 자기답게 살아가기 위하여 펼쳐가는 여정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고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고난과 죽음은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목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오늘 복음에서 보여준 베드로의 몰이해는 훗날 베드로의 죽음을 통해 ‘자기 십자가’를 진 참된 제자의 모습으로 거듭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