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어떤 진술
신성한 매실 758
얼른 그에게 물었다.
“네? 여교사요? 그리고 아이들이라뇨?”
최림은 인쇄물 의뢰자가 여자인 점에 의아했다.
하지만 잘만 수사하면 뭔가 나올 것 같았다.
“에이! 요 앞에 A 유치원 있잖습니까? 그 예쁘장한 여교사 말입니다. ”
최림은 선뜻 범인과 유치원 여교사가 매칭되지 않았다.
“그날 바로 인쇄해갔습니까?”
“물론입니다. 내용도 간단하고 쉬운 작업이라 즉석에서 처리했었죠.”
사장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혹시 그 여교사라는 분 이름은 아십니까?”
최림은 제발 사장이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대답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건 그의 희망 사항이었다.
“글쎄요. 이름까지는 잘 모릅니다. 그냥 민 선생이라고 동료들이 부르더군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A 유치원은 어디?”
“저기 편의점 보이시죠? 그 뒤편에 있습니다.”
최림은 사장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유치원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과연 편의점 뒤에 화사한 노랑 바탕의 유치원이 있었다.
원장은 불쑥 찾아온 경찰이 그리 달갑지 않은 듯했다.
그냥 용건만 간단히 말해라고 팔짱을 끼었다.
그래서인지 최림의 말을 들은 원장은 고민 없이 대답했다.
“민 선생? 그 여자는 작년 연말에 퇴사했습니다만. 왜요?”
원장은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아, 올해 초에 유치원 측에서 인쇄소에 이런 걸 의뢰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원지 둔치에서 수거한 인쇄물을 보였다.
“이건 어제 산음 원지 둔치 방화 살인 사건 때 범인이 뿌린 거잖아요.”
“네, 맞습니다.”
“우리 유치원에서 이딴 걸 의뢰한 적은 없어요.”
“없다고요?”
“네, 그런데 이것과 민 선생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죠?”
원장의 말에 최림은 민 선생의 인적 사항을 알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원장은 단칼에 거절했다.
알고 싶으면, 영장이나 공문으로 신청하라는 원장의 입장이었다.
최림은 더 이상의 입씨름이 싫어 경찰서에서 팩스로 공문을 보내기로 하였다.
유치원에서 사무실에 들어가니 권 팀장이 반색했다.
‘뭐지? 어젯밤에는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더니?’
최림은 팀장의 반응에 겁부터 났다.
“최 형사! 고마워.”
“뭘요?”
“에이, 네가 만든 보고서 있잖아. 오늘 아침에 서장에게 크게 칭찬받았어.”
“칭찬받았다고요?”
“그래, 그렇게 수사를 진행하라네. 서장님이 무엇보다 범인이 종말론을 신봉하는 사이비 신도인 점과 그들이 지리산 일대에 숨어 있다는 보고에 박수를 보냈어.”
“그렇군요.”
“그래, 네가 요청한 대로 사흘 후에 경남지방경찰청에서 지원 병력이 온다니까 본격적으로 수색하자고.”
최림은 팀장의 반응에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권 팀장은 최림이 인쇄소에 간 결과를 물었다.
“인쇄물은 인근 유치원 교사였던 어떤 여자가 맡겼습니다. ”
“뭐야? 전직 유치원 교사가?”
“네. 저도 그녀의 신상을 파악해봐야 범인과의 유착관계를 알 것 같습니다.”
최림의 말에 권 팀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자가 끼어들었다? 그래, 얼른 공문을 보내서 그 여자에 관하여 알아봐.”
팀장의 이해에 최림은 훨씬 심적으로 안정되었다.
“다른 팀원은 어찌 되었습니까?”
“응. 중간에 전화로 보고받았는데, 뭐, 별것이 없어.”
그날 오후 현장에서 돌아온 팀원들의 보고는 팀장의 말처럼 별것이 없었다.
최림은 유치원에 팩스를 보내고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는 그동안 확보한 CCTV 자료를 토대로 범인들이 도주한 경로를 추정했다.
그리고 사흘 뒤 지원 병력과 함께 어떻게 수색할 것인지 초점을 맞추었다.
사흘 뒤였다.
경남지방경찰청에서 병력이 온다는 연락이 왔다.
최림이 그들이 도착할 시간에 맞추어 정문 앞 복도를 지날 때였다.
“어머!”
최림은 묘령의 여인과 부딪쳤다.
급히 나가려다 보니 그만 여자를 보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 충격으로 여자의 핸드백이 바닥에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앞을 못 봤습니다.”
최림은 당황하여 바닥의 핸드백을 급하게 들었는데 그만 거꾸로 든 모양이었다.
갑자기 핸드백 속에서 책 한 권이 떨어져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 꺼풀이 신문지로 싸여 있었다.
마침 첫 장이 펼쳐져 무심하게 봤는데, 책 제목이 눈에 익었다.
‘666의 비밀’
‘뭐지? 내가 이걸 어디서 봤지?’
그럴 찰나에 여자가 책과 핸드백을 재빠르게 낚아챘다.
그제야 최림은 자신이 또 실수한 것을 알아챘다.
“죄송합니다.”
겨우 눈을 들어 여자를 본 최림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여자는 그가 최근에 본 여자 중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요염했다.
최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시골에 이런 미인이 있었나?’
여자에게는 짙은 향수 냄새도 함께 풍기고 있었다.
최림은 정신이 몽롱했다.
그건 이 사건 때문에 사흘 동안 집에도 못 가고 잠도 제대로 못 잔 탓도 있었다.
“됐어요. 서장실에 가려면 어디로 가죠?”
“네?”
“서장님 면담요.”
최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저리로 가십시오. 그렇죠. 본관 3층입니다.”
여자는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만 까딱하고 발길을 돌렸다.
최림은 그녀가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몽롱함도 잠시, 권 팀장의 호통이 뒤에서 들렸다.
“뭐해! 지금 버스가 왔잖아. 빨리 가봐.”
“앗, 알겠습니다.”
버스에는 의무경찰 30명이 타고 있었다.
최림은 그들은 별관 의무경찰 숙소에 삼삼오오 방을 배정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드디어 권 팀장이 내일 아침부터 있을 지리산 일대 수색 작전을 지시했다.
그런데 그때 기다리던 팩스가 도착했다.
그 유치원에서 온 거였다.
팩스에는 그 여교사의 인적 사항이 대충 적혀있었다.
「이름 : 민채원, 나이 : 28세, 학력 : 배화여대 영문과 3년 중퇴, 주소 : 서울시 서대문구 ○○동 234번지 ○○아파트 나동 201호」
나태주는 권 팀장의 열띤 지시에 상관없이 팩스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쉽게도 팩스에는 그녀의 전화번호가 없었다.
‘배화여대 출신이라? 그런 그녀가 서울이 아닌 지방의 소도시까지 왜 왔을까?’
그때였다.
“이봐! 최 형사. 뭘 보는 거야? 내일 출동 안 할 거야?”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최림에게 쏠렸다.
최림은 어떻게 할까, 하다 솔직하게 대답했다.
“팀장님! 그 유치원에서 팩스가 도착했습니다.”
“뭐? 거기 가야 해? 주소지가 어딘데?”
“서울입니다.
최림의 말에 팀장은 끙, 하고 신음했다.
“좋아. 다녀와. 그렇다면 최림 구역을 김유리가 맡아.”
“감사합니다.”
“뭘, 다녀와서 유리와 인수인계하면 되지.”
팀장의 배려에 최림은 오랜만에 빨리 집으로 가서 쉬었다.
다음 날 새벽 최림은 서울로 향하였다.
첫 시외버스를 이용했으므로 서울은 아직 아침이었다.
출근 시간은 지났지만, 지하철은 여전히 혼잡했고 사람들로 붐볐다.
몇 번이나 갈아타 도착한 민채원의 주소가 있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잠시 후, 초인종 소리를 듣고 나온 이는 30대 초반의 여자였다.
최림은 신분증을 보여주고 민채원 씨를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그리곤 경계하는 여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여자는 최림을 거실로 안내하였다.
“채원이는 제 동생입니다. 하지만 현재 이곳에 살진 않아요.”
“여기에 없단 말 입니까?”
“네, 집을 나간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
여자는 묻지도 않았는데 순순히 나왔다.
표정을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제 동생이 그 사건에 연루된 게 맞나요?”
여자는 얼마 전 사건을 잘 알고 있었다.
하긴 전국적이고 엽기적인 희대의 사건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아직 단정할 순 없습니다. 그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왔습니다.”
최림은 여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여자는 한눈에도 동생을 무척 아끼는 것 같았다.
여자는 최림에게 잠시 앉아 있으라고 하더니 커피를 내어왔다.
모카 향이 물씬 나는 커피였다.
이런 경우,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한 분위기란 것은 최림은 알고 있었다.
“혼자 사시나 봐요?”
최림의 질문에 여자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 침묵이 무엇을 말하는지 최림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여자는 무엇인가 결심한 듯 툭, 하고 내뱉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채원이 방을 둘러보십시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저도 연락이 끊어진 지 너무 오래되어, 그 애를 찾고 싶거든요.”
“아! 네, 감사합니다.”
언니로서 동생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최림은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민채원의 방으로 들어갔다.
민채원의 방은 단출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방에는 침대 하나와 책상 그리고 간이옷장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무리 집을 떠났다고 하나 여자 사는 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