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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최준식
고진실, 강남세움복지관
복지관에서 ‘2030 청년 아카데미’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비슷한 20-30대 청년 6명이 모여 오전 9시 반부터 3시 반까지 일과를 보냅니다. 나이 말고 비슷한 점이라고는 찾기 힘들 만큼 저마다의 개성이 특별하고 매력인 분들입니다. 또래의 청년들 마찬가지로 활력이 넘칩니다.
지역사회에서 더불어 살기 위해 다양한 경험을 쌓고 개인의 역량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운영하는 사업입니다. 하지만 기호나 취미, 사는 곳, 연령 등 여러 기준으로 만나는 다른 모임과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비슷한 취향을 찾아 함께 하기도 하고,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후의 진로나 직업을 걱정합니다.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고,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웁니다. 눈앞에 놓인 난관에 수없이 부딪치며 사정없이 흔들리지만, 관계 안에서 조금씩 성장 성숙합니다.
다른 점이라면 참여하는 분들 모두 발달장애가 있습니다. 일상 가운데 어떤 상황은 혼자 해내기가 어려워 주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정도는 모두 다르지만 당사자를 잘 알고 적절한 지원을 한다면, 한 사람 몫은 거뜬히 해내기도 합니다.
준식 님도 아카데미에 참여합니다. 올해 서른다섯, 6명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아 가끔 형이나 오빠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제 막 스무살을 넘긴 소정 님이 “준식이”라고 불러도 그저 머리를 긁적이며 한번 웃고 마는 싫은 소리 잘 못하는 분입니다.
준식 님은 지난해 독립했습니다. 바로 앞 동에 할머니와 어머니가 삽니다. 아직 혼자 식사를 챙기는 건 서툴러 밥은 어머니 집에서 먹고 잠은 자기 집에서 잡니다. 아버지도 계시는데 병환으로 오랫동안 병원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준식 님이 먼저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없어 소식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최근에야 어머님께 준식 님 아버지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때때로 여동생이나 엄마, 할머니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아버지 이야기는 한 번도 없던 준식 님이 얼마 전에는 먼저 아버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일 아빠 병원 가는데.”
“아버지 병원이요? 오랜만에 가는 거예요?”
“네. 오랜만에 가는 거예요.”
“얼마나 오랜만에 가는 거예요? 언제 마지막으로 갔어요?”
“기억 안 나요.”
“오랜만에 가는 거면 아버지 많이 보고 싶겠네요?”
“네.”
같은 대화가 한동안 반복되었습니다. 준식 님께 물었습니다.
“준식 님, 지난주에도 아버지 병원 갔었나요? 아버지 건강은 어떠세요? 많이 나으셨어요? 아직 많이 아프세요?”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병원 가는 횟수가 느는 것 같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기관 차원에서 공식적인 조문은 없었지만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큰일을 겪은 준식 님 마음이 어떨까 싶어 다녀와야 마음 편할 것 같았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중에도 준식 님은 복지관에 나오지 않았을 뿐 평소와 같았습니다. 새벽 1시, 3시, 아침 6시 대중없이 문자를 보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그날도 복지관에 전화해서 직원들 안부만 묻고 끊었습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밝은 목소리가 이날 만큼은 이질적이었습니다.
‘준식 님 마음은 진짜 괜찮은 건가? 슬픈 일이 아닌 걸까? 슬픈 일이 아니라면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나 다를까요. 다른 부서 팀장님이 준식 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마 저랑 같은 기분에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기라고 추측합니다.
“준식 님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소식 들었어요. 근데 준식 님은 지금 상황을 인지하고 못하고 계신 것 같아요. 전혀 슬픈 것 같지 않더라고요.”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 순간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 있고, 그에 따른 행동이 예측됩니다. 준식 님의 목소리, 말투, 행동 모두 그 예측되는 범위를 벗어나 있었으니 조금은 당황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복지관에 전화해서 한참을 직원 안부만 묻는 준식 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평소보다 힘주어 말했습니다.
“준식 님, 아버지 장례는 잘 치르고 있어요? 마음은 괜찮아요? 어머니가 많이 슬프실 거예요. 준식 님이 옆에서 위로해주세요. 힘드실 테니 일도 도와드리고요.”
지금 그때 상황을 떠올려보면 다그치듯 이야기한 것 같아 미안합니다. 그럴 일이 아닌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 기분에 치우쳐서 당사자를 대했습니다. 경솔했습니다.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
살면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 그 표현 방식이 모두 같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어떤 사람이든 마찬가지일 텐데 준식 님만큼은 그런 시각으로 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 안에 있던 ‘장애’라는 고정관념이 작용했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비장애인이었다면 속으로 의아했을지 모르지만 그런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겼을 겁니다. 조바심내거나 내 감정에 앞서 괜한 소리 하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준식 님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슬픔’ 외에도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을 수 있습니다.
슬픔 표현에 가장 강력한 것이 울음이라고 모두 눈물로 호소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긴 침묵으로, 깊은 고뇌로, 극복하기 위해 애써 짓는 웃음과 평소와 다른 발랄함으로 표현합니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그 모습으로도 상대의 감정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 살았던 할아버지의 죽음은 가족 모두에게 깊은 슬픔이었습니다. 그때를 떠올려보면, 할아버지와 함께한 추억이 유독 많은 나임에도 어쩐지 장례식장에서 눈물이 나지 않았습니다. 실감하지 못했던 겁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0년이 다 되었지만 지금도 가끔 잠들기 전 생각납니다. ‘그때 더 잘해드렸으면 어땠을까, 왜 그렇게 철없는 손녀였을까.’ 여전히 아쉽습니다. 슬픔이 남아있습니다.
준식 님도 이런 시선으로 봤다면 알아차렸을지 모릅니다. 복잡하고 미묘한 마음을 헤아려 정성으로 마음 다독였을 겁니다.
나는 상주입니다
퇴근 후 개인적으로 위로를 전하고 싶다는 직원과 둘이 조문 다녀왔습니다. 장례식장 앞에서 어머님을 만났습니다.
“어머, 선생님! 어떻게 여기까지..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갑작스럽게 소식을 들어서요. 많이 힘드시죠? 기운 내세요.”
“아휴, 아닙니다. 선생님.”
“준식 님도 지금 안에 계시나요?”
“네 선생님, 준식이가요. 지금 상주 노릇을 잘하고 있어요.”
“아! 맞아요. 준식 님이 장남이셔서..제가 그 생각은 미처 못했네요. 와..아들 역할을 제대로 하고 계신가봐요.”
입구에 들어서자 준식 님이 인사합니다.
“아! 선생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은 저희 할머니세요.”
어떻게 설명해야 그때 기분을 전달할 수 있을까요. 상주로서 가족들 맨 앞에 서서 든든하게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복지관에서는 볼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모습입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라 그저 놀라웠습니다. 정확하게 무엇이 고마운지 모르겠으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대단해 보였습니다. 눈물로 빨갛게 눈이 부은 어머니 앞에 야무진 모습으로 서 있던 준식 님은 늘 우리가 ‘이상’이라고 여겼던 어른의 모습에 가까웠습니다.
여동생이 낯선 손님을 보고 준식 님에게 물었습니다.
“오빠, 누구셔?”
“복지관 선생님이야.”
“준식아, 선생님들 자리 안내해드려야지. 준식이가 선생님들 잘 모셔.”
친척 어른으로 보이는 분이 준식 님에게 안내를 부탁합니다.
“선생님, 이쪽으로 오세요.”
준식 님, 어머님과 마주 앉았습니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도 그렇고 어떻게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첫 말문을 열기 전에 머릿속으로 여러 번 생각합니다.
“선생님, 준식이가 상주 노릇을 아주 잘 하고 있어요. 친척들이 오랜만에 준식이를 보고 모두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감사해요.”
“아닙니다. 어머님, 준식 님이 이렇게 잘하시는 거 보니까 저희도 마음이 놓여요. 어려운 일이잖아요.”
“준식 님, 힘들죠? 조금 더 힘내셔야 해요.”
제대로 본 준식 님 눈가도 촉촉했습니다. 더 말 붙이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눈동자가 일렁이는 듯했습니다. 그 모습에 말을 멈췄습니다. 충혈된 눈을 보아 밤새 제대로 잠 못 이루고 보냈을 겁니다.
장례식장에서 몇 마디를 더 나누고 나왔습니다. 어머님이 바깥까지 배웅하셨습니다.
“선생님, 저 사실은 준식이 진짜 걱정했거든요. 애가 상주 노릇은 할는지도 모르겠고, 사실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것도 모르는 줄 알았어요. 근데 다 알더라고요. 울지도 않길래 모르는가보다 싶었어요. 근데 오늘 입관식 때 정말 많이 울더라고요. 상주 역할도 작은 아빠가 옆에서 하나하나 천천히 알려주니까 그대로 잘 따라 해요. 정말 의젓해요.”
“어머님, 그럼요. 당연하죠. 준식 님이 절대 모를 리가 없어요. 저는 오히려 슬픔을 애써 참는 것처럼 보이던걸요.”
이렇게 대답하고 돌아서서 나오는 길에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아직도 멀었구나.’
저도 사실 어머님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상주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슬픔을 얼마큼 느끼고 있을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습니다.
알면서도 가끔 의식하지 못합니다. 장애를 속성으로 사람을 보고 맙니다. 지적장애는 학습과 인지, 적응행동이 어려워 일상생활에 제약이 있고, 자폐성 장애는 타인의 마음에 공감하는 능력이 낮고 상호작용이 어렵다는 특성을 꼽습니다. 이렇게 설명되는 것들은 당사자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잘 지원하기 위한 정보입니다. 사회사업가라면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전제하고 보니 준식 님의 어른다움, 여느 가정의 듬직한 아들로 보지 못했습니다. 참고할 사항일 뿐 전부가 아닙니다. ‘프레임’에 갇힐 것을 경계합니다.
장례를 마치고 준식 님이 복지관에 다시 나오셨습니다. 이전과 똑같은 모습인데 제 눈에는 어쩐지 다르게 보였습니다.
사회사업적 의미(경험으로 성장하는 사람)
할아버지 장례식을 치르던 날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습니다. 학교를 결석하고 장례식장에 있는데 밤 10시가 넘어 친구들이 조문왔습니다. 야간 자율학습 마치고 왔으니 교복도 그대로였습니다. 고마웠습니다. 부모님, 친척 어른들도 와줘서 고맙다고, 대견하다고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진실이 친구들인가 보네.” 주위가 집중되었습니다. 이 일이 이상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아마 자랑스러움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힘들 때 날 위로해주는 친구들이 있어! 나 학교생활 이렇게 잘하고 있어!”
다시 한다면 2030 아카데미에 참여하는 분들과 함께 조문 가겠습니다. 준식 님에게 좋은 친구와 동료가 있음을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가족들도 분명 준식 님을 다르게 보실거라고 생각합니다. 장례식장에 계셨던 많은 조문객이 당사자를 새롭게 볼 겁니다.
23년 5월, 최근에도 병원 장례식장에 승강기가 없어 아버지 장례를 다른 지역 병원에서 치렀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이 일로 그 병원은 승강기를 설치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당사자가 특별한 자원이 아닌 평범한 자원을 이용하는 것이 지역사회 변화도 함께 만듭니다.
장애 패러다임 변화에 따라 장애인복지관의 서비스 모델도 함께 변화해왔습니다. 사람 중심, 지역사회 중심 실천을 지향하면서 프로그램이 아닌 당사자의 삶에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지원하는 방식을 강조합니다.
복지관에서 조문하는 법, 유가족을 위로하는 법을 아무리 배워도 장례식장 한 번 가본 것만 못할 겁니다. 삶에 필요한 지혜를 복지관에서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경험으로 성장 성숙합니다. 다양한 상황을 마주하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나’라는 정체성을 만듭니다. 경험으로 어른이 됩니다.
아프고 쓴 경험도 지나고 보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역사입니다. 당사자의 일상에서 자기 일로서 경험했을 때 자기 삶이 됩니다.
보태는 이야기
남양주에서 일했을 당시 중장년 모임을 진행했습니다. 참여하셨던 분 중 한 분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게 되어 모임에서 함께 조문 갔었습니다. 쓸쓸하게 느껴졌던 빈소도 건장한 어른 여럿이 들어가니 금세 채워졌습니다. 우리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서로의 존재감이 느껴졌습니다.
“저기, 복지사님 조의금을 얼마 하면 되나요?”
질문하셨던 분은 40대 남성으로 모임 안에서는 가장 젊은 분이었습니다. 각자 서로의 상황을 아셔서 조의금에 대해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전하고 싶은데 금액 정하기가 어려우셨던 것 같습니다.
딱히 정해진 것이 없으니 사정에 따라 마음 편히 하셔도 된다 말씀드렸던 것 같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은 아니었는지 더 고민하셨습니다.
조문을 마치고 나오는데 말씀하십니다. 오늘 장례식장에 처음 와봤다고, 처음 온 장례식장이니 적은 금액이라도 전하고 싶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마음 편한 대로 하면 된다지만 경험이 없어 남들보다 한참 적거나 과할까 싶어 망설이셨던 겁니다. 삶의 노하우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관계가 있어야 경험도 다양하고 풍성해집니다. 관계가 일상에 생기를 돌게 합니다. 숨 쉬고 활동할 수 있는 생명력이 됩니다.
이제 와 당시 아저씨 처지가 되어 생각해봅니다. 장례식장에 처음 와봤다고 고백 아닌 고백을 했을 때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부디 서글픈 마음, 삶의 회한은 아니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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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지만 이런 것들을 전제하고 보니 준식 님의 어른다움, 여느 가정의 듬직한 아들로 보지 못했습니다. 참고할 사항일 뿐 전부가 아닙니다. ‘프레임’에 갇힐 것을 경계합니다.’
올해 장애를 알아가자는 마음으로 여러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조금씩 읽고, 들으며 느낀 점은 장애를 가진 사람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람’이라는 점이었어요.
고진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 되새깁니다. 저의 올해의 공부도 프레임에 갇히는 일이 아니기를 늘 경계해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고민할 것도 혼란할 것도 없는 당연한 일인데
이상하게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한편 고민하며 일할 수 있으니
다행이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를 알고 세상을
배우는 것 같아 즐겁기도 합니다.
함께 공감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김민선 선생님, 응원합니다~!